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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이 필 무렵, 제주의 빛나는 초여름은 시작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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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수국이 필 무렵, 제주의 빛나는 초여름은 시작되지

[2023년 6월 제주 수국 특선 <웃바메기오름, 묘산봉, 세화바당과 별방진, 혼인지 수국, 귀빈사, 것구리오름, 민오름(오라동), 항파두리둘레길(안오름)>]

이승태 교장선생님은 얘기합니다.

탐스럽고 복스러운 꽃. 모양이 하도 크고 색이 화려해서 어디서 봐도 꽃인 줄 알겠습니다. 색은 또 어찌 그리 곱고 다채로운지, 딱히 어떻다고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답습니다. 제주 수국입니다.

동백, 유채를 시작으로 벚꽃, 갯무가 피고 지던 제주의 봄날은 5월 말, 한라산 선작지왓의 철쭉과 함께 끝이 납니다. 동시에 긴긴 여름이 시작되죠. 푸르고 설렘 가득한 제주의 여름을 열어젖히는 꽃이 수국입니다. 세상 그 어디보다 맑고, 밤하늘 은하수만큼 반짝이며, 첫사랑처럼 무작정 예쁘고 풋풋한 제주의 여름을 알리는 전령사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꽃이 또 있을까요! 제주의 여름은 제주 사람들이 ‘도채비꽃’이라 부르는 수국과 함께 시작됩니다.

제주 수국 명소인 혼인지와 함께 수국 피는 초여름에 걷기 좋은 오름을 찾아 6월 오름학교를 엽니다.

▲수국이 필 때, 제주의 빛나는 초여름은 시작된다. 수국 명소 혼인지의 수국Ⓒ이승태

오름학교(교장 이승태. 여행작가·제주오름 전문가) 제25강은 2023년 6월 16(금)-17(토)일, 1박2일로 제주 수국 특선 <웃바메기오름, 묘산봉, 세화바당과 별방진, 혼인지 수국, 귀빈사, 것구리오름, 민오름(오라동), 항파두리둘레길(안오름)>을 찾아갑니다.

*코로나19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가회원님은 미리 제주행 항공편을 확인하시고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유난히 빛깔이 진한 6월의 혼인지 수국Ⓒ이승태

제주 출신 화가 강요배 선생은 “오름에 올라가본 일이 없는 사람은 제주 풍광의 아름다움을 말할 수 없고, 오름을 모르는 사람은 제주인의 삶을 알지 못한다”면서 제주 오름의 소중함을 얘기했습니다. 이는 제주도가 오름과 오름이 세포처럼 유기적으로 이어진 곳이어서 제주를 알려면 반드시 오름을 알고 올라보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들판 한가운데, 바닷가에, 작은 마을 뒤편에 순하디 순한 모양으로 솟아 제주의 자연풍광을 이룬 오름.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유명 관광지에서는 만날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제주의 모습이 그곳에 있습니다.

2017년 11월 개교하여, 아름다운 제주도 오름을 순례하는 <오름학교>는 격월로, 제주 자연풍광의 결정체이며 마을 형성의 모태인 오름들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그 아름다움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짚고 감상하고 있습니다. ‘오름’은 ‘산’의 제주도 방언으로, 한라산 산록으로부터 해안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작은 화산체들을 이릅니다.

▲민오름 전망대에 오르면 최고의 풍광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길은 넓고 쾌적해 걸음이 즐거운 오름이다.Ⓒ이승태

2023년 6월 강의를 준비하는 교장선생님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2023년 6월 16일 금요일 / 웃바메기오름, 묘산봉, 세화바당과 별방진, 혼인지 수국

벵듸굴 위에 솟은 밤알오름

-웃바매기오름

중산간동로가 지나는 선흘리의 목선동교차로 바로 왼쪽에 알바매기오름이, 알바매기에서 남쪽으로 1km쯤 내려선 곳엔 웃바매기오름이 당당한 자태로 서 있습니다. 밤톨처럼 생겨서 각각 ‘웃밤’, ‘알밤’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오름을 지역 주민들은 ‘바매기(웃바매기, 알바매기)’라고 부르죠. 바매기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밤알을 밤애기(밤아기)로 표현한 게 바매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게 통설입니다.

굼부리 아래의 ‘선새미’ 샘

듬직한 산체와 어울리지 않게 이 두 오름은 조성된 탐방로가 없습니다. 희미한 오솔길을 따라 오르내려야 하는데, 다소 가파른 길은 곳곳에서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찾는 이가 드문 곳입니다. 그만큼 한적한, 날것 그대로의 오름 트레킹을 즐길 수 있기도 하고요.

북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분화구를 가진 웃바매기오름은 오름의 굼부리 아래에서 ‘선새미’라는 샘이 솟아납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법이 없다는 이 샘은 옛날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었다는데, 지금은 들어서는 게 쉽지 않습니다.

알바매기 남쪽을 지나는 도로에서 1km쯤 들어선 곳에 오름 표석이 보입니다. 여기서 오름의 동쪽 능선을 따라 길이 이어집니다. 삼나무로 빼곡한 초입의 숲은 곧 활엽수로 바뀌며 환해집니다. 길이 중간에 희미해지기도 하니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죠.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숲 아래로 억새가 많이 보입니다.

▲웃바매기와 송당리의 오름들. 멀리 다랑쉬오름도 보인다.Ⓒ이승태

날머리에서 만나는 물웅덩이

이정표나 벤치 같은 인공 시설이 없는 정상에서는 동쪽 송당리로 조망이 트입니다. 둔지봉부터 돝오름, 다랑쉬, 높은오름, 체오름, 안돌‧밧돌에 거슨세미, 민오름 등 구좌의 숱한 오름이 만든 멋진 풍광이 눈앞 가득 펼쳐집니다. 오름 바로 앞의 거친 들판, 벵듸도 눈길을 끌고요. 제주만이 가진 광활한 야생의 수풀지대가 오름 못잖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정상에서 올랐던 길을 되짚어 내려서는 게 가장 편하지만, 남동쪽 ‘벵뒤굴’ 쪽으로 가면 더 다양한 오름의 모습을 만날 수 있죠. 길은 여전히 희미하고, 솔잎이 수북하게 깔린 구간도 지납니다. 천연기념물 제490호인 벵뒤굴은 정상에서 10분 남짓이면 닿습니다. 다층구조에 용암주석 같은 다양한 동굴지형이 잘 보존된 곳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미로형 동굴이 4.5km쯤 이어진다는데, 좁은 입구는 철문으로 막혀 있습니다. 비공개 동굴이기 때문입니다.

벵뒤굴에서 오름 동쪽 자락을 따라 날머리까지 농장길이 이어집니다. 길 중간에 오른쪽으로 제법 널따란 물웅덩이가 눈길을 끕니다. 용암 위에 형성된 듯한 연못으로, 바람이 잠잠한 날이면 연못에 비친 반영이 환상적입니다.

▲한라산을 향해 굼부리가 열린 묘산봉. 뒤로 김녕과 바다가 펼쳐졌다.Ⓒ이승태

웅크린 고양이를 닮아 ‘괴살미’

-김녕 묘산봉

김녕엔 일주도로 남쪽에서 김녕항을 내려다보는 두 개의 오름이 있습니다. 동쪽의 것은 공동묘지로 유명한 ‘삿갓오름[입산봉]’이고 그보다 서쪽의 오름은 ‘괴살메’입니다. 옛날에 이 오름에 고양이가 살아서, 또는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양이어서 붙은 이름으로, 달리 ‘괴살미’라고도 부릅니다. 한자로는 ‘묘산(猫山)’, ‘묘악(猫岳)’, ‘묘산봉(猫山峰)’이라고 표기합니다.

한라산을 향해 열린 말굽형 굼부리를 가졌으며, 해발 116.3m에, 오름 자체의 높이가 81m로 꽤 탄탄한 산체를 가졌습니다. 주변에 이렇다 할 오름이 없어서 존재감은 더 도드라집니다.

오름의 남동쪽 능선 끝에는 1368년, 제주도에 처음 들어와 정착한 광산김씨 입도조인 김윤조(金胤祖)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고려 시대 양식으로, 돌을 깎아 네모로 봉분을 두른 게 특징입니다.

탐방은 남동쪽 능선 끝에서 시작됩니다. 완만한 계단을 오른 곳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왼쪽이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B코스로 길이가 700m며, 오른쪽은 오름의 북쪽 허리를 따라 도는 A코스로 800m 길이입니다. 탐방로는 B코스로 올랐다가 끝에서 A코스를 만나서 돌아나오는 원점회귀형입니다.

B코스의 한복판에 정상이 있지만, 어느 곳이라고 특정할 수 없는 평평한 등성이가 이어집니다. 말 그대로 엎드린 고양이의 등 같습니다. 넓은 능선 탐방로 양옆으론 쭉쭉 자란 소나무가 늘어섰고, 몇 곳엔 쉬어갈 수 있는 의자도 보입니다. 걷기 좋고 쾌적한 길입니다. 잠깐씩 전망이 트이는 곳에서 다랑쉬와 돝오름, 둔지봉 같은 이웃한 오름이 눈길을 끕니다.

능선을 내려선 곳에서 B코스는 끝나고, 오른쪽으로 길이 꺾이며 산허리를 휘감고 지나는 A코스가 시작됩니다. 이 길은 B코스 산길보다 조금 좁아지지만, 훨씬 정겹습니다. 소나무 위주던 B코스와 달리 활엽수가 더 많이 보입니다. 특히 초피나무가 자주 나타납니다. 중간에 숲이 트이며 김녕과 앞바다가 훤히 조망되기도 합니다.

탐방로 전체가 채 2km가 되지 않고, 길도 순하고 관리가 잘된 곳이라서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늘이 좋은 오름입니다.

▲에메랄드 빛깔이 도드라진 세화바다의 초여름. 번잡하지 않아 더 좋은 곳이다.Ⓒ이승태

질그랭이 쉬어가는 에메랄드 바다

-세화바당과 별방진

김녕항을 지나 동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카페로 유명한 월정해수욕장과 작고 아담한 평대해변이 차례로 나옵니다. 서귀포 해변들과는 다른 제주도 북쪽 해안의 특징을 잘 보여주죠. 평대에 이웃한 바다가 세화입니다.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의 북동쪽에 자리한 세화해변은 에메랄드 빛깔로 펼쳐진 바다가 마음을 빼앗습니다. 핫플레이스인 ‘제주해녀박물관’을 품었고, 조용한 카페와 더 조용한 소품 가게, 알찬 맛집과 예쁜 숙소까지, 여행자를 위한 여러 편의시설이 곳곳에 자리를 잡으며 제주 마니아들의 사랑을 받는 곳입니다.

제주올레 20코스와 21코스가 만나는 이곳 세화의 브랜드가 ‘질그랭이’입니다. 이는 ‘지긋이 오래 머물다’라는 의미의 제주어로, 번잡한 여행지와 달리 조용하고 제주스러워서 정말 편히 쉬기 좋은 해변마을입니다.

세화해변에서 이웃한 하도리의 ‘별방진’은 조선시대에 잦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쌓은 것입니다.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인 삼별초는 제주를 최후 거점으로 삼고 ‘고토성’, ‘고장성’, ‘애월목성’, ‘항파두리성’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이들 성은 제주도의 군사방어 전략 속에서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죠.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중앙집권적 체제가 정비되면서 해안방어도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 삼읍에 읍치 방어를 위한 읍성이 축조되었고, 점차 해안을 방어하는 관방시설도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17세기 중엽에는 8개의 진성이, 1678년에는 최관 목사가 화북진성을 완성함으로써 9진성이 확립되었습니다. 또 각 진에 속한 25개의 봉수, 38개의 연대와 더불어 방어망이 구축되어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원해에서 접근하는 외적선을 봉수에서 감시하고, 근해에서 외적선의 동향을 연대에서 파악해 진에 전달했습니다.

▲조선시대 제주 9진의 하나였던 별방진은 해안에 접해 쌓았는데, 지금은 민가와 밭이 반반을 차지했다.Ⓒ이승태

진에서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분석해 필요한 지점에 병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했습니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에는 이들 아홉 개 진(수산진, 서귀진, 모슬진, 차귀진, 명월진, 애월진,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중 별방진은 바닷가에 축조된 연해형 진으로, 해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9진 중 명월진이 3050자로 가장 컸고, 두 번째가 2390자의 별방진이었습니다.

별방진은 둘레 1km쯤의 성곽으로, 성문과 객사, 무기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근 성벽을 복원해 원래의 모습에 가까워졌습니다. 지금은 성안에 민가가 들어섰고, 봄날이면 만개한 유채가 검은 성벽과 어우러지며 멋진 제주만의 풍광을 보여줍니다. 바다에 접한 성곽이어서 풍광이 독특하며, 성벽 위를 걸으며 보는 바다와 성안 풍광이 아름답고, 멋진 사진을 남기려는 이들이 줄지어 찾으며 명소가 되었습니다.

▲수국 만발한 6월의 혼인지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이승태

수국과 함께 찾아오는 제주의 여름

-혼인지 수국

수국은 제주를 대표하는 여름꽃입니다. 최근 외국에서 흘러들어온 개민들레가 제주 전역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지만, 수국 앞에서는 쨉도 안 됩니다. 지난해도 있었고, 그보다 더 훨씬 오래전부터 제주에서 피고 지던 꽃으로 매년 철을 기다리게 됩니다. 6월에 제주를 찾은 이들의 SNS는 거의 도배를 하다시피 수국 사진으로 채워집니다.

이상하게도 제주의 전통 수국 명소는 남쪽 서귀포시에 몰려 있습니다. 송악산과 안덕면의 카멜리아힐, 안덕면사무소 정문 일대는 예전부터 수국길로 널리 알려진 곳이고, 동백으로 유명한 남원읍 위미리도 수국이 예쁩니다. 메밀꽃으로 소문 난 표선면의 보롬왓과 대정읍 안성리는 최근 급부상했습니다. 또 한 곳이 이번에 찾아가는 혼인지입니다.

제주올레 2코스가 지나는, 서귀포시 성산읍의 혼인지(婚姻池)는 제주도의 옛 이름인 탐라국의 시조로 알려진 삼신인(三神人)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 온 나무상자에서 나온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만나 결혼한 곳으로 알려진 연못입니다. 삼신인은 나무상자에서 세 공주와 함께 나온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서 제주에 농경문화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결혼은 앞둔 이들에게 6월의 혼인지는 필수 촬영지다.Ⓒ이승태

혼인지 바로 옆에는 작은 용암동굴이 있는데, 여기서 세 신인과 벽랑국 공주들이 혼인하고 같이 잠을 잔 곳이라고 전해옵니다. 입구는 한 곳인데, 내려가 보면 안쪽은 세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혼인지는 봄철 벚꽃으로 화사했다가 초여름엔 수국이 흐드러집니다.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어서 둘러보기가 좋죠. 때문에 결혼을 앞둔 커플의 웨딩사진 촬영장소로도 인기가 많습니다.

2023년 6월 17일 토요일 / 송당목장과 귀빈사, 것구리오름, 민오름(오라동), 항파두리둘레길(안오름)

▲송당목장 가운데의 삼나무 숲길. 저 길 끝에 귀빈사가 있다.Ⓒ이승태

축산의 섬 제주를 꿈 꾸던 대통령의 별장

-송당목장과 귀빈사

제주에서도 오름이 가장 많이 몰린 구좌읍의 송당리에 거대한 땅을 품은 송당목장이 있습니다. 번영로에서 비자림로를 따라 송당리로 들어서다 보면 거슨새미오름과 안돌·밧돌오름오름 맞은편의 넓은 벌판이 송당목장입니다. 이 넓은 목장은 ‘칡오름’과 ‘민오름’을 품었는데, 이 두 오름은 목장 안에 있다 보니 방역을 이유로 탐방이 불가합니다.

송당목장은 제주도에서 처음 생겨난 국립목장입니다. 건립자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입니다. 미8군 사령관이던 벤플리트 장군이 ‘돈을 벌 수 있는 산업’이라며 권유한 축산업을 위해 1958년에 목장을 건설하고 목장 안, 민오름 자락에 대통령과 국가 귀빈의 숙박을 위해 별장인 ‘귀빈사(貴賓舍)’를 지었습니다.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머물러서 ‘이승만 별장’이라 불렸습니다. 148제곱미터의 건물에 4개의 방을 갖췄으며,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춰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기쁨이 동시에 이뤄지기를 바라는 ‘쌍희(囍)’자와 모든 일이 뜻대로 되기를 기원하는 회문 장 등 우리나라의 의장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귀빈사 주인의 실각과 함께 이 별장의 운명 또한 쇠락의 길로 들어서며 한때 폐가로 방치되다가 뜻있는 이들의 요청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제주 축산 역사의 한 장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우리 곁에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귀빈사로 들어서는 목장 길의 삼나무와 귀빈사 마당의 팽나무 한 그루가 장관입니다.

활엽수와 삼나무가 반반

-것구리오름

번영로의 대흘교차로에서 교래리로 이어진 길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말굽형 분화구를 가진 것구리오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름 북쪽에 조선시대에 원(院)이 있었고, 원에서 이용하던 샘인 ‘원물’이 지금도 남아 있죠. 둥근 모양의 것구리오름은 남동쪽이 정상이며, 북서쪽에 목초지로 이용되는 분화구를 품었습니다. 정상의 북‧동‧남쪽 자락은 삼나무가 빼곡하고, 나머지는 모두 낙엽활엽수가 차지했습니다. 오름의 동남쪽은 대천이오름을 만나기까지 무인지경의 광활한 곶자왈 지대여서 드라이브에 좋습니다.

휙 오르내리기 좋은 숲길

오름이 꾀꼬리를 닮아서 또는 옛날에 꾀꼬리가 자주 찾아와 울어서 ‘꾀꼬리오름’으로도 불립니다. 그래서 한자로는 ‘앵악(鶯岳)’, ‘앵봉(鶯峰)’이라고 적죠. 원물에서 도로를 따라 200m쯤 들어선 오른쪽이 들머리가 나옵니다. 탐방로는 정비가 안 된 오솔길이어서 구간에 따라 희미해지기도 하니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늘을 가린 삼나무 숲 사이로 굽어 돌다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 정상부 활엽수림지대로 올라섭니다. 대체로 길이 훤하지만 수풀이 우거지는 여름철이면 고약해지기도 합니다.

통신사 중계용 철탑이 있는 정상은 좁지만 유일하게 초지대를 이룬 곳입니다. 여기서 서쪽으로 삼나무와 활엽수 숲을 차례로 지나다가 북쪽의 굼부리 방향으로 길이 꺾입니다. 내려서는 구간이 꽤 가파르고, 미끄럽습니다. 벽을 쌓은 물웅덩이와 굼부리의 농경지를 벗어나면 북쪽으로 넓은 지붕의 건물 두 채가 보이며, 건물을 지나면 날머리입니다.

▲민오름 전망대서 본 한라산. 오른쪽 앞으로 검은오름과 노루생이오름, 어승생악이 줄을 섰다.Ⓒ이승태

조망 빼어난 오라동 뒷동산

-민오름(오라동)

상여오름과 광이오름, 남조순오름은 한라수목원을 감싸고 형제처럼 한 세트로 나란히 늘어섰습니다. 키도 차례로 커서 남조순오름이 가장 형처럼 보입니다. 오라동 민오름은 남조순오름의 동쪽에 옆집 아이처럼 서 있습니다.

‘민오름’은 ‘붉은오름’과 ‘검은오름’처럼 제주에서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오름의 생긴 모양이나 색깔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뭍의 ‘남산’이나 ‘앞산’과 비슷한 상황이겠습니다. 그래서 제주엔 민오름이 흔합니다. 오름학교 제16강 때 올랐던 선흘리의 민오름과 제19강 때 찾았던 절물오름 맞은편의 봉개동 민오름, 또 이번 제25강 때 찾을 귀빈사의 뒷산도 민오름(송당리)입니다. 또 남원읍 수망리에도 민오름이 있고요. 이곳 제주시 오라동의 민오름까지 모든 민오름은 용눈이오름처럼 나무가 없이 풀밭으로 덮인 민둥산이어서 부르던 이름인데, 지금은 모든 민오름이 숲이 빼곡해 이름이 무색해졌습니다.

도심 속 오름이다 보니 주민들의 산책로로 인기여서 길이 잘 나 있습니다. 정상부엔 넓은 초지에 운동시설이 갖춰졌고, 벤치와 정자, 전망대에 부러 심어 가꾼 화단도 예쁩니다.

대부분은 소나무가 점령했고, 예덕나무와 보리수 등이 섞여서 건강한 숲을 이뤘습니다. 도심 속 인기 산책로여서 들머리가 여러 곳입니다. 오름의 해발고도는 252m, 오름 자체의 높이가 110m쯤이어서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누운 곰의 배처럼 넓은 공터가 드러난 정상부 능선까지는 힘들이지 않고 닿습니다.

민오름은 걷는 내내 사방 조망이 멋들어집니다. 제주국제공항과 제주시내는 물론, 사라오름과 별도봉, 이웃한 남조순오름 일대도 눈길을 끕니다. 전망대에 오르면 최고의 풍광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검은오름과 노루손이오름, 열안지오름, 어승생악 등을 품은 거대한 한라산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민오름은 일곱 개의 작은 봉우리로 이뤄졌습니다. 그만큼 지형이 봉긋봉긋한데, 이 봉우리들이 이룬 완만한 오르내림을 따라 탐방로가 나 있습니다. 솔숲 아래로는 으아리와 골무꽃, 술패랭이 등 온갖 꽃이 피어 걷는 맛을 더해줍니다. 순탄하게 이어가는 동안 조망은 트였다가 숲으로 들어서길 반복하며, 길은 넓고 쾌적해 걸음이 즐거운 오름입니다.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 항파두리성의 동쪽 성벽 부분. 가운데 소나무 한 그루가 선 곳이 안오름 정상이다.Ⓒ이승태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

-항파두리둘레길(안오름)

제주시 서북쪽의 애월읍 고성리 일대에 ‘항파두리성’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유적이 있습니다. 중산간서로 변의 거대하고 둥근 토성인 항파두리는 지금으로부터 750년 전인 1273년, 원나라의 침략에 맞섰던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고려 원종의 출륙환도(出陸還都) 명령과 해산령, 고려 지배층의 부몽화에 불만을 품고 대몽항쟁을 선언, 강화도에서 진도를 거쳐 이곳으로 거점을 옮긴 삼별초가 3년간의 항전에 종지부를 찍은 곳이죠. 외래어 같기도 한 ‘항파두리’는 이 일대 지형이 뉘어놓은 항아리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옵니다. 그런데 삼별초는 어쩌다가 그 험한 해로를 거쳐 이 먼 곳까지 왔을까요?

온갖 궂은일에 동원된 사병이자 중앙군

꽃이 예쁜 들풀이나 심심산골에 자라는 약초를 연상시키는 이름 ‘삼별초’. 실은 살아 있는 권력도 공포에 떨게 하던 고려의 최정예부대를 가리킵니다. 까마득한 옛날, 고려에서는 특별히 가려 뽑은 병사들로 이뤄진 부대를 ‘별초(別抄)’라 불렀습니다. 최씨 무신정권 시절, 최충헌을 이어 실권을 잡은 최우는 자신의 신변과 권력을 지키고 들끓던 도적 떼(실제로는 농민항쟁 세력)를 진압할 목적으로 사병조직인 야별초(夜別抄)를 만들었죠.

그러던 중 몽골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자 야별초를 확대‧개편해 정규군인 좌별초와 우별초로 재정비하고, 여기에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송환된 군사들로 이뤄진 신의군까지 더해지며 삼별초가 결성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고려의 정규군이 된 삼별초는 치안을 유지하고 궁궐을 지켰으며, 요인을 경호하거나 암살하는 데도 동원되었고, 무엇보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몽골의 잦은 침략으로 고려의 정규군이 거의 궤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삼별초는 강도(강화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의 새로운 중앙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사병이면서 고려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는 관군의 성격도 지녔기 때문에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같은 순수 사병보다 활용도가 높고 전투력도 강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김준과 임연, 송송례 등 무신 집정자들이 정변을 일으킬 때마다 삼별초는 그들의 칼이 되었습니다.

한편 1231년(고종 18)에 시작되어 30년쯤 이어지던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고종 치세의 마지막 해인 1259년(고종 46)에 고려의 항복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어 고려 원종이 원나라에 굴복해 개경 환도를 확정, 공표하자 삼별초는 반발했죠. 무신정권의 정치적 기반이자 몽골과의 전쟁에 앞장섰던 그들이었고, 특히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신의군은 강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원종은 이러한 삼별초를 해산시켜 버립니다. 그러자 장군 배중손과 노영희 등의 지휘를 따라 반란을 공식화한 삼별초는 승화후(承化侯) 왕온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고는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거점을 옮깁니다. 이때 1천 척이 넘는 배가 움직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가늠됩니다.

진도는 큰 섬이면서 주변 바다의 조류가 세고 빨라 상대적으로 해전 경험이 적은 몽골군의 접근을 막기에 유리했습니다. 그들은 진도에서 새 성과 궁궐을 짓고 본격적인 항쟁에 돌입하죠. 이에 원종이 진압을 명했으나 이미 기강이 무너진 관군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삼별초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 사이 삼별초는 호남을 비롯해 남해안 주요 지역과 제주도를 실효 지배하며 자신들이야말로 원나라에 굴복하지 않은 고려의 정통 조정임을 선전했습니다.

원종은 결국 원나라에 지원을 요청합니다. 1271년,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원군이 여몽 연합군을 결성, 진도로 진격하죠. 여몽 연합군의 막강한 규모와 화력에 맞서 삼별초는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패해 배중손이 전사하고, 허울뿐이던 왕 왕온마저 피살당합니다. 남은 소수는 김통정의 지휘 아래 제주도로 피신해 항전을 이어갔습니다.

▲남쪽 상공에서 본 항파두리성. 솔숲이 이어진 곳을 따라 바깥 토성이 지난다.Ⓒ이승태

환해장성과 항파두리성

삼별초군이 제주도에 입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들의 입도에 앞서 제주도에서는 이미 삼별초와 여몽 연합군 사이에 거점 확보를 위한 쟁탈전이 진행 중이었죠. 진도 공방전이 한창이던 1270년 9월에 여몽 연합군 측에서는 제주도가 삼별초의 다음 거점이 될 것을 예상, 군사 1,200명을 보내어 제주도를 점거하고 삼별초의 상륙을 막고자 했습니다.

삼별초 쪽에서도 별장 이문경을 선봉장 삼아 군사를 보내 명월포(지금의 한림항 부근)로 상륙케 했고, 두 세력은 제주성 동쪽의 동제원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삼별초가 고전했으나 결국은 방어군을 전멸시키고 제주를 점령합니다.

선발대에 이어 제주도에 도착한 삼별초의 장군 김통정은 여몽 연합군의 추격에 대비해 항파두리에 안팎으로 이중의 성을 쌓았습니다. 길이가 750m인 내성은 돌을, 3.8km쯤인 외성은 흙을 사용했는데, 내성 안쪽엔 지휘부의 여러 건물을 짓고 외성 사방엔 대문도 세웠습니다. 또 애월에 목성을, 바다 쪽에는 방축을 쌓았으며 조천포와 조공포, 귀일포, 명월포 같은 항구마다 함선을 배치했습니다.

제주시 조천면 북촌리와 성산읍 온평리, 남원읍 태흥리 같은 곳에서 확인되는 환해장성은 삼별초의 난과 관계된 유적입니다. 삼별초의 상륙에 대비해 고려군이 쌓았고, 또 이것을 뒤에 삼별초가 더 보강해 이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집니다. 완벽한 성곽 공사라기보다는 해안 쪽에 시간 여유가 없이 임시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것으로, 제주의 동부 해안지대를 따라 길이가 삼백 리쯤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제주에 새 거점을 마련하고 전열을 정비한 삼별초는 이듬해부터 다시 본토의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칩니다. 개경으로 가던 조운선을 습격해 미곡을 뺏고, 고려군과 몽골군의 전함을 불태우는 등 무력을 과시하며 고려 정부의 골머리를 앓게 한 것이죠. 그러나 그 기세는 진도 거점 시기와 달리 크게 약화된 것이었죠.

제주를 기반으로 한 삼별초의 군사 활동이 활발해지자 고려와 원은 사신과 삼별초 지휘부의 친척 등을 보내 회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삼별초는 이를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결국 원은 삼별초 진압을 결정했고, 고려 정부 또한 원에 삼별초의 무력 토벌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붉은오름에서 끝난 삼별초의 꿈

1273년(원종 14) 고려의 김방경과 몽골의 홍다구가 여몽 연합군 12,000명쯤을 이끌고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4월 27일 밤중에 추자도에서 바람을 기다리던 이들은 때마침 불어온 서북풍을 타고 바다를 건너와 다음날 새벽 상륙작전을 펼쳤죠.

김방겸은 먼저 좌익군을 비양도에 상륙시켜 주력이 명월포로 향하는 것처럼 꾸민 후 중군은 함덕포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 또한 치밀했습니다. 주력을 명월포로 돌리긴 했으나 적이 함덕포 쪽으로도 상륙할 것을 짐작하고 병력 일부를 배치해두었기에 함덕에서는 격전이 펼쳐졌습니다. 기록에 이날의 전투로 비취색이던 함덕 앞바다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고 하니 그 치열함이 짐작됩니다.

여몽 연합군을 맞아 초반에 잘 싸우던 삼별초는 끈질긴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함덕으로 상륙한 중군이 저지선을 뚫어내고 서진하자 비양도에서 대기하던 좌익군도 명월포에서 군항포로 방향을 바꿔 상륙해 기습했습니다.

삼별초는 항파두리 북쪽의 파군봉(애월의 바굼지오름)에 모여 이들의 협공에 맞서 싸웠고, 삼별초의 선봉장이던 이문경을 비롯해 양쪽의 수많은 군사가 희생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병력이 많던 여몽 연합군에 비해 소수 정예로 싸우던 삼별초의 타격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이후 항파두리성으로 철수해 적의 추격을 막으려 했지만 쌓인 피로와 떨어진 사기로 전투력은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장군 김통정은 후일을 기약하며 남은 부하 70인과 함께 항파두리 남쪽의 한라산 산간에 솟은 붉은오름으로 후퇴했으나 연합군은 틈을 주지 않고 추격해 이곳에서 삼별초를 전멸시킵니다. 이때 김통정과 그의 부인이 한라산으로 탈출했다가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삼별초의 병력 수효나 무기가 여몽 연합군에 비해 형편없었으나 끈질기게 버티며 끝까지 강화를 거부하고 투쟁하다가 마침내 이곳에서 최후를 마쳤으니, 고려인의 자주 의식의 어떠함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상공에서 본 항파두리성의 지휘부 발굴지. 여기서 삼별초는 최후의 항몽 의지를 다졌다.Ⓒ이승태

삼별초가 남긴 것

삼별초는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삼별초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려 관군은 삼별초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서남해안 모든 섬에 공도령(空島令), 즉 섬을 비우는 정책을 강제 시행했고, 전란의 결과로 제주도는 9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제주 곳곳에서 확인됩니다.

또 삼별초는 제주도 사람들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올 만큼 뭍의 문화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 계기가 되었습니다. 문물과 생활 양식, 언어, 풍속에 더해 농경법과 누에치기, 베 짜는 기술, 가축 치기, 토목·건축 기술 등이 점차 보급되었고, 삼별초군과 함께 입도한 승려들은 탐라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 간 최후의 전장이던 항파두리성은 현재 역사 관광지와 항몽유적지로 정비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과 유물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과 내성의 건물지, 성문의 돌쩌귀들, 순의비와 구시물, 성벽을 따라 조성된 토성길과 올레길도 있어 찾는 이가 많습니다.

항파두리성은 아직도 복원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삼별초는 반역의 무리였을까요? 아니면 침략 세력인 몽골과 무기력한 고려 조정에 맞선 용감한 군대였을까요? 학자들의 평가는 아직 분분합니다. 어찌 보면 두 시각의 교집합쯤에 삼별초의 정체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다급한 상황에서 논리정연하고 올바른 정체성을 찾지는 못했을 테죠. 그러나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원에 맞서서 온몸으로 부딪쳐야만 했던 고려 백성의 드높은 기상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가슴에 자주와 호국의 결의를 되새기게 만듭니다.

항파두리성의 가장 높은 곳에 밋밋하기 짝이 없는 안오름이 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본 후 토성길을 따라 안오름까지 걷는 길이 참 좋습니다. 이 길을 둘러보며 삼별초의 항몽의지를 되새겨 볼까 합니다.

오름학교 제25강은 2023년 6월 16(금)-17(토)일, 1박2일로 제주도에서 열립니다. 상세한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 16일(금)>

08:50 제주공항 1층 3번 게이트 오른쪽(공항 내부임)에서 집합합니다, 참가자는 각자 항공편, 배편을 이용해 제주공항에 도착합니다. 정시에 출발하니 집합시각 엄수 바랍니다. 참가신청 전에 항공편 등을 반드시 체크해주세요. 제25강 여는 모임. 참가지 확인과 인사 나누기

09:00 공항 출발

10:00 웃바메기오름

12:30 점심식사

13:30 묘산봉

15:00 세화바당과 별방진

16:40 혼인지 수국

18:30 저녁식사 후 숙소로(송당송당펜션, 다인실)

<6월 17일(토)>

07:00 아침식사

07:45 버스 탑승

08:00 송당목장 귀빈사

09:30 것구리오름

11:30 점심식사

13:00 민오름(오라동)

14:30 항파두리항몽유적지, 항파두리둘레길 탐방(안오름)

16:30 제주공항 도착, 제25강 마무리모임, 해산

※돌아오는 항공편 티켓은 17일 오후 17:30 이후 출발로 예매해 주세요.

※당일 현지 상황에 따라 코스나 대상지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오름학교 제25강 탐방 안내도Ⓒ오름학교

오름학교 제25강은 6월 16일(금) 아침 8시 50분 제주공항 1층 3번 게이트 오른쪽(공항 내부임)에서 모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오름학교 기사(6월)를 확인 바랍니다. 오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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