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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민주>의 넋들, 진달래로 붉게 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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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독립>과 <민주>의 넋들, 진달래로 붉게 피어나다  

[2023년 4월 서울학교는 <진달래능선 순례길>]

4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90강은 북한산의 진달래능선 아래에 안기신 ‘독립’과 ‘민주’의 열사들을 찾아뵙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서울학교 제5기의 마지막 강의로, 4월 셋째 주 일요일인 4월 16일에 열리니 바뀐 일정에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진달래능선은 북한산의 대동문에서 우이동으로 내려뻗은 산줄기로, 해마다 4월이 오면 온통 붉은 진달래 천지가 되는 곳입니다. 그 아래, 골짜기 곳곳에는 독립열사들의 묘가 들어서 있고 능선의 끝자락에는 꽃잎처럼 스러진 젊은 넋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4.19민주묘지가 있습니다.

▲북한산에 봄이 왔다. 그 아래 진달래능선 자락에는 많은 독립투사와 민주열사들의 넋이 잠들어 있다.ⓒ북한산국립공원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울학교 제90강(제5기 제12강)은 2023년 4월 16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8시 50분, 서울시 국립4.19민주묘지 정문 앞에 모입니다(강북구 4.19로 8길17. 02-996-0456. 시내버스 *간선:104,109,120,144,151,153. *지선:강북01,1119(4·19방향),1126(4.19방향),1144,1165,1166 *우이신설선 도시철도 이용시 4.19민주묘지역에서 도보 5분(600m)).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립4.19민주묘지앞-진달래마을-신숙묘-김도연묘-서상일묘-김창숙묘-양일동묘-섶다리-유림묘-이시영묘-17위광복군합동묘-김병로묘-신하균묘-신익희묘-이준묘-점심식사 겸 뒤풀이-국립4.19민주묘지(중앙분향소/묘역/영정보관소/기념관)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4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 진달래능선 순례길>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 민주이념 계승하여 건국한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헌법 전문에도 나와 있듯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여 건국하였습니다. 이는 일제와 독재에 항거한 독립열사들과 민주열사들의 ‘독립’과 ‘민주’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4.19 묘지는 지금은 국립묘지가 되었지만 군사독재 시절에는 이곳에 참배하는 것만으로도 불온시하여 4.19 혁명정신을 계승하려고 참배를 강행하려는 많은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전투경찰에 의해 ‘닭장차’에 실려 경찰서에 끌려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진달래능선 가는 길ⓒ우보천리

17분의 광복군 무후(無後)열사와 11분의 독립열사가 잠들다

우리는 대한의 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삼천리 금수강산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들 있다 왜놈 발에 밟힌 꽃포기 있다

북간도, 서간도 만주 땅 골짜기를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며 오직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며 불렀을 독립군가는 가사의 내용이 처연하기 그지없습니다만 빼앗긴 조국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광복군들의 옹골찬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은 크게 항일무장투쟁과 실력양성운동의 두 가지로 전개됩니다. 항일무장투쟁은 국가와 군대가 존재하지 않은 조건에서 그 성과를 거두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뿐만 아니라, 이념과 사상의 차이로 주도권 싸움이 전개되면서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항일무장투쟁은 다양한 소단위 형태로 전개되었으며 이런 이유로 비록 미미한 수준일지라도 당시에 74개의 독립군 단체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실력양성운동은 한국은 독립할 역량이 아직은 없으므로 먼저 실력을 기른 후에 독립을 도모하자는 이른바 ‘선 실력양성 후 독립’이라는 준비론적 입장의 애국계몽운동이었습니다. 개화파를 계승한 지식층과 대한제국의 관료 그리고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 물산장려운동, 교육진흥운동, 국채보상운동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진달래능선에 있는,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합동묘에는 17위가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과 아들 지달수 지사(광복군 2지대 간부) 등이 1946년 입국하면서 국내로 봉환한 유해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결혼도 하지 않은 꽃다운 나이에 순국해 후손이 없다 보니 합동묘가 조성되기 전까지 안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서울 조계사에 모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67년 광복군동지회가 이시영 선생 등 애국선열이 먼저 묻힌 수유리에 묘역을 조성했고 1985년 국가보훈처에서 단장했으며 2017년 강북구청에서 추모조형물을 건립했습니다. 그러다가 2022년 8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였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광복군 19위가 잠들어 있었으나 1945년 7월 산서성 태원에서 순국한 김천성 열사가 1975년 8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했고, 1945년 5월 광복군 모집 및 정보공작 중 순국한 한성수 열사 또한 1991년 6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는데 이 두 애국지사는 가족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장이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17위의 한국광복군 무후선열들은...

김성률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적 후방 공작 중 전사하였고, 김순근은 광복군 3지대 대원으로 베이징 지역에서 초모 공작을 했으며, 김운백과 김유신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중국 산시성에서 ‘태항산 전투’ 중 전사하였고, 김찬원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지하 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했으며, 동방석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광복 후 국내에서 별세하였습니다.

문학준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중국군에 파견돼 작전 중 전사했으며, 백정현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일본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탈옥 기도로 총살을 당했고, 안일용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공작 활동 중 순국하였으며, 이도순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광복 후 국내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이한기는 광복군 3지대 대원으로 OSS 훈련대원으로 활동하였고, 이해순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공작 활동 중 체포돼 감옥에서 순국하였으며, 전일묵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초모 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였고, 정상섭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태항산 전투’ 중 전사했고, 조대균은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광복 후 국내에서 별세하였으며, 한휘는 광복군 2지대 대원으로 초모 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돼 순국하였으며 현이평은 광복군 5지대 대원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선무공작 중 피살되었습니다.

진달래능선에 잠드신 11분의 독립열사

진달래 능선에 잠드신 11분의 독립열사는 이념과 투쟁 이력이 모두 다른데 그 이유는 항일무장투쟁이 이념적 당파성을 갖게 됨에 따라 최초의 시작은 국내 독립운동, 해외망명, 무장투쟁 등의 노정을 걷습니다만 항일투쟁의 과정에서 사상과 노선이 달라 민족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으로 나뉘고 이는 해방정국에서 통일을 저해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신숙(申肅 1885~1967)

강재(剛齋) 신숙(申肅)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나 1903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에서 근무하면서 김남수, 김남규 등과 청파동에 문창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진력하였는데 이봉창 의사가 이 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1919년 2월 27일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의 지휘 아래 김영륜과 함께 <독립선언서>의 교정과 인쇄 작업을 맡았고 1920년 봄 극비리에 신상태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북만주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에는 홍진, 지청천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민본정치의 실현, 노본경제의 조직, 인본문화의 건설’ 등 3대 강령과 정치이념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무장 부대인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1947년 천도교 보국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48년 민족자주연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4월 11일에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연락원 자격으로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까지 다녀오는 등 남북분단 저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자유당 시절에는 민주혁신당 중앙위원장, 민권수호국민총연맹 대표지도위원, 광복동지회 부회장으로 독재정권과 투쟁하였고 1960년 4․19혁명 직후에는 국민각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나 갑작스럽게 중풍으로 쓰러져 끝내 완치되지 못하고 1967년 가회동 자택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김도연(金度演 1894~1967)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은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태극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교사들로부터 민족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한글학자인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으며 이 같은 인연으로 훗날 ‘조선어학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습니다. 1913년 일본 유학시절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일제 경찰의 감시와 미행을 피하며 비밀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작성하여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역사적인 2.28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일제는 1942년 <조선어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조선어학회를 해체하려고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하여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사업에 협조한 사람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는데 당시 조선어학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있던 상산은 1942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으며 광복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하였습니다.

서상일(徐相一 1887~1962)

동암(東庵) 서상일(徐相一)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으며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고 광복 후에는 송진우, 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설하고, 총무에 선임되었습니다. 이후 한민당을 탈당하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48년 초대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56년 진보당 전국추진위원 대표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운동을 추진했으나 조봉암과 의견충돌로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1962년에 사망했습니다.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으며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한 탓에 앉은뱅이가 되었는데 그래서 자칭 벽옹(躄翁)이란 별호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1906년 말부터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심산은 전국단연동맹회 성주 대표로 활동하면서 국채보상기금 마련에 앞장섰으나 그것마저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자, 성주지방에서 모은 단연금을 기금으로 자신의 선조인 동강 김우옹을 모신 청천서원에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심산은 모친의 병환 때문에 상경을 미루다가 3.1독립선언에 참여할 기회를 놓쳐, 결국 3·1독립선언이 유교계 인사들이 빠진 채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대표로만 발표되자,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전국의 유림 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상해로 가, 이를 영문으로 번역 인쇄하여 우편으로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사, 공사, 영사관 및 중국의 각 정계 요인들과 한인 동포에게도 보냈습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이 침체하자 1924년부터 북경에서 이회영 등과 상의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로 만주 동삼성 일대에 한인 동포들의 집단거주지를 조성하고 이곳에서 산업을 육성하고 청, 장년을 독립군으로 양성한 뒤 국내로 진공하는 독립전쟁방략을 추진하였습니다. 그 첫 사업으로 자금을 유자명에게 주어 폭탄과 권총 등 무기를 구입하여 천진에서 나석주를 만나 이를 전해주면서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를 단행하도록 하였는데 나석주는 식민수탈기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본인 3명을 사살하고, 4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마지막 남은 한 발의 탄환으로 자결하였습니다.

심산은 광복 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민주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반탁 민주운동에 헌신하였고 1946년에는 전국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 총본부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성균관대학을 재건하여 학장, 총장을 역임하면서 유학의 근대적 발전과 후진양성에 이바지하다가 1962년 8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습니다.

김병로(金炳魯 1887~1964)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는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8세의 나이로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채상순 등 5~6명의 포수와 함께 가담하였고, 고정주가 설립한 창흥의숙 고등과 속성과정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가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과 어울리며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변호사가 되면 첫째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 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가인이 맡았던 ‘시국사건’은 1921년 보합단 사건, 1923년 김상옥 의거, 제2차 의열단 사건, 1926년 6.10만세 사건, 1927년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 고려혁명당 사건, 정의부 사건, 1928년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 1929 대구학생 비밀결사 사건, 통의부 사건,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 흥농사 사건, 1931년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등이 있으며 또 안재홍(1928), 안창호(1932)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았습니다.

1946년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기초위원회 위원, 미군정청 사법부장, 1947년 사법부 내 6인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8월 5일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 처벌을 놓고 갈등을 빚게 됩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 관장을 맡아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강한 의지를 보이며 반민족행위자들의 처벌이 민족적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 공정한 재판을 강조하였으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부하였으며, 1950년 골수염 치료를 위하여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1957년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하고 1964년 자택에서 78세를 일기로 운명하였습니다.

양일동(梁一東 1912~1980)

현곡(玄谷) 양일동(梁一東)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30년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중동중학교를 퇴교당하고,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민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1935년에 일제에 잡혀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일본 이치타니(市谷)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복역 2년 8개월 만에 신병으로 가석방, 고국으로 압송되어 광복 때까지 향리에서 농촌운동과 농민교육에 종사하였다가 1945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여 자유당 때에는 야당계 무소속으로 민주당과 함께 반독재운동을 하였고 5·16군사쿠데타 후에는 구 신민당의 원내총무, 정무위원 등을 지냈습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당선에 이르기까지 5선 의원을 지냈고, 두 번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정지당하였고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 <반공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으며 1973년 동경에서의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때에는 참고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971년 신민당 주류의 유진산과 결별하고 1973년 통일당을 창당, 당수로 있으면서 신민당의 반체제운동에 동조하는 제2야당의 구실을 하였으며, 비록 재정적인 어려움과 원내 세력의 미미함 때문에 통일당의 존재감이 없었지만, 신민당과 합당의 길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성사되지 않자 재야 반체제 세력과의 합작으로 제3당의 출현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아나키스트 유림의 묘역ⓒ서울학교

유림(柳林 1894~1961)

단주(旦洲) 유림(柳林)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유화영, 별명은 고상진으로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이어서 서당 교육을 받았는데, 경북 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다녔습니다. 1919년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동반하고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으며 이곳에는 1911년 망명한 이상룡과 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스승과 선배들이 이회영을 비롯한 신민회 계열 인물들과 주축을 이루어 경학사, 신흥강습소, 부민단, 서로군정서로 이어지는 항일조직을 결성하여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920년 여름에 유학을 위해 상해로 갔고, 거기에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옮겼으며 북경에서 신채호, 김창숙을 만나 당시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고(天鼓)>의 발행을 도왔고 이 무렵 한창 아나키스트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던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을 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나키즘(anarchism)에 대하여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이란 그리이스 말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 같다. 본래 ‘안(an)’은 없다는 뜻이고 ‘아키(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권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 정부를 배격하지, 자율 정부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렇게 볼 때 일제 시기 아나키즘은 강제적 식민지 권력을 부정하는 독립운동 이념으로 기능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일제 경찰에 쫓긴 대다수 학생이 만주로 탈출해 왔으며 이에 1929년 말부터 이듬해 체포될 때까지 단주는 4백 명이나 되는 학생을 수합하여 의성학원(봉천중학)을 창립하여 한인 유학생의 중국학교 입학을 알선하면서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의성학원 운영에 몰두하고 있던 단주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직후인 10월 초에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환국 이후 선생은 외세를 배격하면서 자주적 통일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독립노농당을 결성하고 ‘노농신문’을 창간하여 노농 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쓰던 중, 1961년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였습니다.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은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으며 명재상으로 이름 높았던 백사 이항복의 10대 손으로 서울에서도 대표적인 명문가 출신입니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되고 있었던 상황으로 이것을 막아야 한다고 작정하고,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성재는 교섭국장직을 사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제순 집안과 절교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때 신민회 지도자들은 계몽운동만으로 독립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며 계몽운동에 의병항쟁의 방략을 도입하였는데, 의병처럼 준비되지 않은 전투가 아니라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밀고 나가기 위한 군사력 양성을 도모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전략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하여 일제가 강제 합병하기 전부터 만주지역을 조사하였고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재는 형제들과 더불어 가산을 처분하고 1910년 말 서간도로 가서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정착하여 교육 진흥 및 독립군 양성을 표방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는데, 전자는 동포사회의 자치기관이요 후자는 인력양성기관이었습니다. 경학사의 기능은 부민단과 한족회로 계승, 발전되었고 신흥강습소는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되어 독립군 기지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는데, 이때 경학사 초대 사장은 이상룡, 신흥강습소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추대되었으며, 1920년의 청산리대첩의 승리는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누리던 온갖 특권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쓰고 망명길에 올랐던 이시영 일가의 헌신적인 노력이 하나의 결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 제1진의 한 사람으로 환국하였으나 넷째 형 이회영은 아나키스트가 되어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옥중에서 순국했으며 나머지 네 형제도 중국 전역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다 세상을 떠났으니 만주로 떠났던 6형제 중 혼자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성재는 세 가지 일에 힘을 쏟았는데 하나는 정치활동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으로 활약한 것이고 둘째는 종교활동으로 성균관 총재를 맡은 것과 대종교 활동에 진력한 것이고 셋째로 교육 운동에 앞장섰는데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 양성에 착수하였으니,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을 설립하고 신흥전문학관으로 발전시켜 1, 2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51년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 혼란과 사회 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를 떠났고 다음해인 1952년 시행된 제2대 대통령선거 때에는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습니다.

신익희(申翼熙 1894~1956)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는 1894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나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유학하여 독립운동의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켰는데 정세윤, 송진우, 문일평, 안재홍 등과 함께 유학생의 통일조직으로 ‘학우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발행된 <학지광>의 주필, 총무 등을 맡아 유학생들은 물론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습니다. 1919년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제자인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의 강기덕과 연희전문학교의 한창환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진두지휘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경의 주목을 받게 되어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해공은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이에 적극 동참하여 이시영,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는데 이들에 의해 성안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과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의정원의 결의를 거쳐 선포되었습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 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를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고 이 와중에서도 1946년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 자주성을 함양하였습니다.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경기도 광주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후 초대 국회 부의장과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에 주력하다가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습니다.

신하균(신익희의 아들)

신하균(申河均)은 호를 평산(平山)이라 하였는데, 이는 그의 본관 평산에서 따온 것으로 독립이 불확실하다고 내다본 부친인 신익희가 나중에 죽더라도 본관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아들의 호를 평산이라 지었다고 합니다. 평산은 1923년에 모친과 함께 상해로 부친을 찾아가 공부를 하면서 독립운동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중국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고 중국 중앙은행의 과원조장, 신탁국 조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아버지의 정치활동을 보좌하였으며 이후 민주국민당에 입당한 이래,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신민당에서 정치활동을 하였고 1956년 8월 23일, 아버지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경기도 광주군 제3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처음 당선되었고 이어서 제5대, 제6대 국회의원도 지냈습니다.

▲이준 열사 묘역ⓒ서울학교

이준(李儁 1859~1907)

일성(一醒) 이준(李儁)은 북청군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을 만나서 협성회를 조직하였고 독립협회 평의원에 피선되어 ‘독립신문’ 간행, 독립문 건립을 주도하고, 개화파가 몰락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1898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였습니다. 1904년 일제가 송병준 등 친일분자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 양한묵 등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 회장에 선임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벌였습니다. 1906년에는 국민교육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펼치고, 전 재산을 투척하여 돈화문 근처에 야학인 보광학교를 설립하여 청년계몽운동을 하였으며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고향인 함경도에 한북흥학회를 조직하여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1907년 7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밀리에 고종을 만나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제의 협박으로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았으며 특사로는 정사에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부사로는 전 평리원 검사 이준, 전 주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 15일부터 1개월간 개최되었는데 3명의 특사는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제출하고 한국의 대표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 대표의 노골적인 방해로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일성은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연일 애통해 하다가 1907년 음력 7월 14일 한을 남긴 채 순국하였습니다. 일성의 유해는 순국 3일 후 헤이그 공동묘지에 임시 안장하였고, 같은 해 일제 통감부에서는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은 처교(處絞), 이위종과 이준은 종신형을 선고하였으며 선생의 유해는 순국 후 55년만인 1963년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국민장을 치른 후 수유리 선열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봄을 맞은 국립4.19민주묘지ⓒ국립4.19민주묘지

국립4.19민주묘지에 잠드신 199위의 민주 영령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날 스러져간 눈물 같은 꽃 사태가

맺혔던 한이 풀리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어깨 위로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이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해마다 4월이 오면 강산은 진달래로 붉게 물들지만 차마 잠들 수 없는 스러진 꽃잎들이 누워 있는 북한산 진달래능선 아래 국립4.19민주묘지에는 ‘욕처럼 남은’ 이들의 추모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1960년 4월 헌정사상 최초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 권력에 항거한 시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만 독재정권의 하수인인 경찰의 발포로 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으며 이로 인해 국민적 분노가 전국적으로 분출되어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았던 이승만 독재정권은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이때 꽃잎처럼 스러진 199위의 영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국립4.19민주묘지입니다. 한땐 ‘혁명’ 또는 ‘의거’로 불리다가 5·16 이후에는 ‘의거’로 공식화되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그냥 ‘4·19’로 불리다가 1993년에 이르러 그 의의와 정신이 재조명되어 비로소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원묘지로 서울시에서 관리해 오던 4·19묘지도 성역화 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4·19 35주년) 국립묘지로 승격되었을 뿐만 아니라 1997년 4월 19일에는 전시실 기능을 갖춘 4·19혁명기념관을 개관함에 따라 4·19혁명을 계승할 정신적 산 교육장임과 동시에 민주주의 최고 성지로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 열사의 묘비Ⓒ서울학교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서울학교 기사(4월)를 확인 바랍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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