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 제95강은 과거 순흥도호부와 풍기군이 함께 이웃하여 있었으나 제2차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없어지고 풍기군까지 영주에 귀속되어버린 역사적 사연을 간직한 <풍기고을>로 봄나들이 갑니다. 풍기읍과 순흥면이 비록 영주시에 포함되어 있지만 풍기와 순흥만의 역사적 유적이 많아 별도로 답사를 준비합니다. 지난번 <영주고을> 답사 때 미처 가보지 못한 곳들을 탐방하려고 하는데, 특히 목조건축물의 최고 경지에 이른 당우와 함께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은 부석사를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95강은 2023년 3월 26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5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풍기IC-부석사(일주문/당간지주/대석단/범종루/안양루/석등/무량수전/소조여래불/부석/삼층석탑/조사당/선비화)-순흥향교-청다리(제월교)-금성단-읍내리벽화고분-봉서루-점심식사 겸 뒤풀이-소수서원(숙수사지당간지주/소혼대/성생단/경렴정/강학당/문성공묘/전사청/영정각/장서각/직방재/일신재/학구재/지락재/사료관/탁청지/취한대)-소수박물관-서울의 순입니다.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자신과 동행자의 건강을 위해 최종 백신접종을 완료하시고,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95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풍기는 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에 둘러싸인 분지형의 땅입니다. 풍기에서 바라본 소백산은 서쪽과 북쪽엔 국망봉에서 도솔봉에 이르는 연봉들이 병풍처럼 솟아있고 동쪽과 남쪽엔 야트막한 산줄기들이 겹겹이 펼쳐져 있어 웅장하면서도 사람을 위압하지 않는 부드러운 형상입니다. 소백산의 이런 모습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마치 구름이 겹겹으로 엉기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하였습니다. 동쪽과 남쪽으로 부드럽게 뻗어나간 산줄기는 흡사 미풍에 고요히 출렁이는 잔물결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평화로운 기운이 넘쳐납니다. 부석사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연봉처럼.
사람을 살리는 소백산(小白山)에 기대어
소백산은 남사고(南師古)가 산을 향해 넙죽 엎드려 절하며 “저 산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던 명산으로서 우리나라 산 중에서 가장 온화하고 아름다운 기운을 가졌다고 평했습니다. 소백산은 중턱 이상에는 바위가 거의 없는 육산(肉山)입니다. 높은 곳에 바위가 없으니 산봉우리들은 생김새가 부드럽고 살기가 없습니다.
소백산은 양백(兩白)의 하나인 태백산보다 100여 미터나 높이가 낮음에도 불구하고 그 산세는 훨씬 장엄합니다. 백두대간 상의 소백산의 동북쪽 끝 봉우리인 신선봉에서부터 남서쪽 끝 봉우리인 도솔봉까지 주능선의 길이가 50여 리에 이르며 갈라져 나온 작은 산줄기 사이로 형성된 골짜기들도 매우 길고 깊어 30여 리가 넘는 계곡들도 많습니다.
소백산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중간 허리를 서남쪽으로 가로지르는 백두대간은 영남과 호서, 호남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으로 소백산은 삼국시대 때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한국전쟁 때도 많은 젊음이 스러져간 역사의 현장으로 ‘화합과 상생’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의 분수령으로 그 역할을 감내해야만 했던 민족의 한이 서린 비극의 산이기도 했습니다.
백두대간 상에 있는 소백산을 넘나드는 고개는 죽령으로, 북쪽은 단양이고 남쪽은 풍기입니다. 죽령 옛길은 소백산 제2연화봉과 도솔봉이 이어지는 안부에 자리한 해발 696m의 고갯길로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 3월에 비로소 죽령 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 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竹竹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삼국의 쟁패지, 죽령
서울의 한강 유역과 마찬가지로 죽령도 삼국의 쟁패지였습니다. 한때 백제의 땅이었다가 광개토왕 때 고구려가 차지하고 결국은 진흥왕 때 신라의 땅이 되었으며 고려 때는 왜구가 쳐들어오는 길목이었고 조선 때는 영남 좌도 일원의 고을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서기 470년경)인데 신라가 551년(신라 진흥왕 12) 거칠부 등 여덟 장수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 40년 뒤인 590년(영양왕 1) 고구려 온달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남긴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죽령이 얼마나 막중한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만합니다.
조선 시대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는 마을인 상주, 예천, 선산, 김천, 성주, 고령 등은 경상우도라 하고 동쪽의 마을인 봉화 영주 안동 영양 청송 등은 경상좌도라고 했는데, 영남에서 한양에 가는 길을 좌도고을 사람들은 죽령을 이용하고 우도고을 사람들은 조령(새재)을 이용하였습니다.
죽령에는 김유신과 죽지랑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 사당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희방사 입구에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죽지는 진덕여왕 때 재상 술종의 아들인데 술종이 삭주(지금의 춘천)의 도독부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죽령에서 한 거사를 만나 정답게 얘기하고 헤어졌는데 그것이 꿈이어서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꿈을 꾼 그날 거사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에 술종은 거사가 자기 집에 환생하였다고 믿고 훗날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그를 만난 고개의 이름을 따서 죽지라 지었습니다.
풍기와 순흥 도호부는 영주에 통합되어 풍기읍과 순흥면으로
풍기는 고구려 때 급벌산군, 신라 때 급산군, 고려 때 흥주도호부였으며 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의 태(胎)를 이곳에 연이어 묻게 되면서 순흥부로 승격하였다가 1413년(조선 태종 13) 순흥도호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제2차 단종복위운동이 발각되어 도호부가 폐지되면서 순흥이라는 고을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후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순흥부가 복구되지만, 1914년 일제의 부, 군, 면 통폐합 때 풍기와 함께 영주에 통합돼 다시 사라져버렸습니다.
십승지지의 으뜸, 풍기 금계촌
풍기읍 금계동은 <정감록>에서 말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로 뒷산의 산줄기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어서 마을 이름을 ‘금계동’이라 했습니다. 이곳에는 100여 년 전부터 많은 피난민이 살고 있으며, 세계대전이 발생하면 이곳에서 인간의 씨를 구할 수 있다고 신앙화된 곳이기도 합니다. 금계동 뒷산에는 닭의 모양과 비슷한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금계바위’라고 부릅니다. 금계바위는 대일항쟁기 때 광석 채굴을 목적으로 폭파되어, 현재는 원형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정감록>에 근거한 십승지지는 조선 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피난처로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의 하나입니다. 그 열 곳은 영월의 정동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 가야산의 만수동,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봉화읍),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입니다.
옛 순흥도호부 터에 남아 있는 봉서루
봉서루는 흥주(순흥)도호부 부속 누각으로, 순흥의 진산 비봉산에 사는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한다고 하여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방지하고자 세웠다고 합니다. 누각 이름은 봉서루로 하고, 누각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영봉루(迎鳳樓)’ 현판을 걸었고 누각 부근 땅속에는 봉황알을 의미하는 둥근 바윗돌을 여러 개 묻고, 누각 앞에는 오동나무를 심었습니다.
여말선초 흥주의 남쪽 정자로 한양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배웅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영주가 고향인 삼봉 정도전이 영주 군수로 있다가 떠나는 하륜을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준 곳이기도 하며 그 아쉬움을 담은 2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창건연대가 고려 시대로 최소한 8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영남 3대 누각인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안동 영호루보다 먼저 창건된 누각으로, 조선 초기까지는 최고의 누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초에 소실되었다가 1824년 중건되었으며 일제시대에 누각 곁에 있던 소학교가 불타면서 순흥면사무소 마당으로 옮겨져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다가 면사무소가 신축되면서 2007년 원래 터인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지었습니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 때 피란 와서 흥주도호부 관아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봉서루(鳳棲樓)’와 ‘흥주도호부아문(興州都護府衙門)’, 풍기의 ‘제운루(齊雲樓)’와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衙門)’ 편액 글씨도 남겼는데 이 네 개 현판 원본은 영주 소수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특히 ‘봉서루’ 현판 글씨는 ‘영호루’ ‘무량수전’ 등 공민왕의 다른 글씨와 달리 매우 기운이 넘치는 행서로 썼습니다. 고려 객사 터인 강릉 임영관지 전대청에 걸려있는 현판 ‘임영관(臨瀛館)’의 공민왕 글씨와 비슷한 서풍입니다.
풍기향교와 순흥향교
풍기향교는 본래 임실(금계1동) 서쪽 골짜기에 있었는데, 1542년(중종 37) 군수 주세붕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1692년(숙종 18) 다시 구기로 이건하였고, 1735년(영조 11) 다시 현 위치로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 배치는 넓은 부정형 대지 위에 토석 담장을 돌려 좌측 도로 쪽으로 양심문을 내고, 내삼문과 사당 영역이 남향하고 있습니다. 사당 우측에는 명륜당과 관리사가 있고, 사당 전면에는 현관실이 있습니다. 명륜당 앞에 동재와 서재와 양심루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습니다.
순흥향교는 원래 순흥부 북쪽 금성에서 창건하였으나 1718년(숙종 44) 동쪽 위야동으로 이건하였고, 1750년(영조 26) 현 위치로 재차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건물 배치는 전면 영귀루를 지나면 동재와 주사가 명륜당 앞에 놓여 있고, 그 뒤 별도의 일곽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북쪽 높은 곳에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특이한 평면에 전면 개방된 퇴간을 두었습니다. 건물 벽체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하고 내부는 통 칸에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기단은 막돌 위에 주좌를 가진 원형, 방형, 팔각, 연화문 초석 등을 혼용하고 두리기둥을 세웠습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이고, 가운데 2칸을 양측보다 1척 정도 좁게 하여 마루방으로 꾸몄습니다. 기단은 견치석을 2단으로 돌리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전, 후 열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 기둥을 세웠습니다.
제2차 단종복위운동의 주역 금성대군
금성대군 신단은 소수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단소는 전면의 금성단 문을 들어서면 품(品) 자로 상단은 금성대군, 좌단은 이보흠, 우단은 순절 의사의 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 뒤 사육신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순흥에 위리안치된 금성대군은 순흥 부사 이보흠 및 향중 인사들과 함께 제2차 단종복위운동을 준비하던 중, 시녀 김련과 관노가 격문을 빼내 밀고하는 바람에 들통이 났으며 당시 풍기 현감이던 김효급이 이 사실을 세조에게 알렸습니다. 금성대군은 사사 당했으며,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는 교형에 처하고 계속된 복위운동으로 인해 단종도 죽게 됩니다. 그 후 1719년(숙종 47) 부사 이명희가 왕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였으며 1742년(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하고 1980년에 재청과 주사를 단소의 전면에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숙수사 절터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 백운동서원
소수서원은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입니다. 건립 당시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으로 불렸는데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1550년(명종 5)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으로 지었습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을 배경으로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의 명당에 있는 숙수사 터는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 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 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 풍광이 중국의 여산에 못지 않다고 찬탄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 구름이 골짜기에 서려 있다고 하여, 이름을 백운동이라 하고 그곳에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운 것입니다. 다음 해에는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를 세웠으며 1544년(중종 39)에는 안축과 안보를 추가 배향하였고 1546년(명종 원년) 안향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습니다. 1633년(인조 11)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을 추향하였습니다.
경내에는 강학당(보물), 일신재,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장서각, 문성공묘(보물)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등 중요 유물과 각종 전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보물) 등의 불교 유적도 남아 있습니다.
안향은 고려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자 한반도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로서 본관은 흥녕(興寧)이며 호는 회헌 시호는 문성공입니다. 안향의 본관인 흥녕은 영주시 순흥면으로 흥녕 안씨는 바로 지금의 순흥 안씨입니다.
주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고려에 도입함으로써 유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를 등장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으며 안향 자신도 흥주(흥녕)의 중소지주층의 사대부였습니다. 안향을 시작으로 한 신진사대부의 정계 등장은 질서가 무너져가던 고려를 버리고 새로이 조선을 건국하는 주요 동력이 되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을 중심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도학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문묘에 제향되었습니다.
신재 주세붕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되었습니다. 그는 선현 안향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로 우러러 오던 터에, 1541년(중종 36) 풍기 군수에 부임 후 3일 만에 안향의 고향 순흥을 찾았으나 순흥부는 금성대군 사건으로 이미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주세붕은 순흥읍 터에서 북쪽으로 약 3리쯤인 숙수사지에 들렸는데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 시절 글 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합니다.
문성공묘는 소수서원의 경내에 있는 제향 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주향으로 문정공 안축, 문경공 안보, 문민공 주세붕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습니다. 매년 3월, 9월 초정일날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주세붕이 직접 쓴 제향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홀기문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 기능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로, 장대석의 높은 기단을 쌓아 그 위에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을 놓았습니다. 정면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원 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안향 초상은 찬문에 의하면 1318년(충숙왕 5) 왕명에 의하여 모사된 것으로 학교를 세운 공을 치하하여 문묘에 배향하고 고향인 흥주에 치제할 것을 명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왕명으로 공자의 묘정에 형상을 봉안할 때, 흥주 군수였던 최림이 도목에 의하여 1본을 더 모사하여 순흥향교에 봉안하여 오다가 1457년(세조 3)에 제2차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부가 폐부된 뒤 한양의 안씨 종가에서 보관하다가 문묘에 배향된 소식을 듣고 소수서원으로 옮겼습니다.
초상은 화면을 상하로 2분 하여 상부 공간에는 찬문을 쓰고 하반부에만 인물상을 배치하였는데 흉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입니다. 홍포를 입고 검은색 복두를 쓴 채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향한 노년의 안향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그림 상단에 안향의 아들 안우기의 제찬이 있어 제작 연유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주세붕 초상은 화면 상부로는 넓게 여백을 두고 아래로 인물의 상반신을 크게 배치한 좌안팔분면의 반신상으로, 복장은 사모관대를 한 정장 군복이며 복식 상의 특징이나 안면을 형상하는 필법에 미루어 16세기경 초상화의 양식으로 보입니다. 현재 주씨 문중에 전래되는 전신 교의 좌상의 저본으로 추정되는데 훼손이 심하여 2001∼2002에 보수하였습니다. 주세붕의 초상화는 소수서원 창설에 힘쓴 그의 공로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문성공묘에 위패를 배향하고 영정도 함께 소수서원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 영향 받은 6세기 신라 고분
순흥 벽화고분의 축조 연대는 고분의 현실 남쪽 벽에 쓰인 ‘기미중묘상인명(己未中墓像人名)’으로 보아 대략 539년쯤으로 추정됩니다. 내부 구조는 연도가 마련된 석실분(石室墳)으로서 연도를 통해 들어가면 시신을 모신 현실이 있고, 이 현실의 동쪽으로 관을 올려놓았던 관대가 비교적 높게 마련되어 있으며, 아울러 규모가 작은 보조 관대도 현실의 서북 모서리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한 내부의 모든 벽면과 관대의 측면까지 채색화를 그렸고, 특히 연도의 좌우 벽에 힘이 센 장사상을 그렸습니다. 특히 연도 서쪽벽의 뱀을 손에 감고 있는 장사상은 이 무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고분은 벽화나 구조로 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고대 신라의 고분벽화로 추정되며, 이 고분에 있는 벽화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회화는 물론 당시의 종교관, 내세관 그리고 고구려와의 문화교섭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소백산이 풍기 쪽으로 부려놓은 두 물줄기
죽계구곡은 고려 후기의 명현이자,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의 산실이며 이퇴계와 주세붕 등 조선 시대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가 있어 잘 알려진 계곡입니다. 죽계구곡은 초암사 앞에서 제1곡으로 시작되어, 시냇물을 따라내려 삼괴정을 못미쳐 있는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5리 사이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죽계구곡은 영조 초에 순흥 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처음 정했는데 옛 초암 법당 앞 바위벽에 ‘죽계1곡(竹溪一曲)’이라 커다랗게 새겨져 있고, 시냇물이 넓게 고여 흐르는 물밑 반석에 행서로 세겨진 ‘제일수석(第一水石)’ 4자는 아주 힘차고 활달한 글씨인데 오랜 세월에 갈려 겨우 알아볼 지경입니다. 죽계구곡은 자연경관만 빼어난 곳이 아니라 계곡을 따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있어 역사의 향기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금선계곡은 소백산의 영봉 비로봉에서 발원하여 남쪽 골짜기를 따라 흐르는 계곡으로 금계 저수지 아래 속칭 장선마을을 안고 약 1.5㎞에 걸쳐 형성되어 있습니다. 계곡 중간쯤 물가 절벽 위에 금선정(錦仙亭)이 있는데 주변이 경관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정자 아래에는 널찍한 반석이 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고을의 대표적 유학자인 금계(錦溪) 황준량이 금선대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집니다. 1756년 부임한 풍기 군수 송징계가 ‘금선대(錦仙臺)’란 3자를 바위벽에 새겼으며, 황준량의 후손들이 정자를 지어 금선정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이 계곡을 금선계곡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금선정 서쪽 산 중턱에는 황준량이 학문을 연마하던 금양정사가 있습니다.
소백산 두 물줄기에 기대고 있는 신라 시대 고찰들
초암사는 죽계구곡 상류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사찰로, 신라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세우고자 산수 좋은 이곳에 초막을 지어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명당자리를 골라 부석사를 세운 뒤 초막을 지었던 곳에 절을 지어 초암사라 했습니다. 경내에는 삼층석탑과 동쪽과 서쪽에 부도가 있습니다.
성혈사(聖穴寺)는 소백산 국망봉 아래 월명봉 동남쪽 기슭에 있으며 신라 의상대사가 초암사에서 수도하던 중, 장소가 불편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성혈사’라는 이름은 절 아래 300m쯤 성인이 나온 암굴이 있어 성혈사라 명명하였습니다. 성혈사에는 꽃살 창호로 유명한 나한전이 있는데 배흘림기둥으로 자연미를 살렸고, 창호를 꽃 창살로 장식했으며 특히 창호의 어칸 부분은 연못에 게, 물고기, 동자상, 여의주, 기러기 등을 조각하여 진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람 배치는 산지 가람으로 건물에 따라 주축이 설정된 것이 아니고 지형에 따라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대웅전, 나한전, 산신각, 삼성각, 요사채 등이 있습니다.
비로사는 680년(문무왕 20)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진공대사보법탑비, 석조 아미타불상, 석조 비로자나불좌상 등이 남아 있습니다. 진공대사는 신라 왕계(王系)의 자손으로 가야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937년(태조 20)에 고려 태조에게 나아가 후삼국의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였습니다. 이에 태조는 진공(眞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로사에 보법탑비를 세웠습니다. 비로사 석조아미타 및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말기인 9세기 후반에 조성된 불상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건축물이 즐비한 화엄 수사찰 부석사
부석사는 태백산에서 뻗어내린 봉황산 중턱에 676년(문무왕 1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입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귀국하여 부석사를 창건하여 우리나라 화엄 사상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를 세웠고, 무염 또한 이 절에서 석징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도 이 절에서 장경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 또는 흥교사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부석사라 부르게 된 것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하는데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 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남아 있습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1967년에 선묘 낭자가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앞마당에 묻혀있다는 설화를 검증하고자 중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석등 밑에서부터 무량수전의 불상 아래까지 용의 꼬리 같은 형상을 한 긴 돌(암맥)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발견 당시 이 돌은 윗부분이 깨진 채였는데, 부석사의 정기를 끊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가 끊었다고 합니다. 2001년에 <역사스페셜>에서 앞마당 전체와 무량수전 불상 아래까지 레이더로 탐사하여 12~13m인 용의 등줄기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이 땅 밑에 있음을 재확인하였습니다.
1916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1358년(공민왕 7) 적의 병화를 당하여 1376년(우왕 2)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1377년(우왕 3) 조사당이 재건되었습니다. 고려 정종 때 결응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곳에서 입적하였으며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가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뒤 조선 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석조여래좌상(보물), 삼층석탑(보물), 당간지주(보물), 석조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국보), 조사당(국보), 소조여래좌상(국보), 조사당벽화(국보), 고려각판(보물), 원융국사비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 원각전, 안양루, 선묘각, 응진전, 자인당, 좌우요사, 취현암 등이 있습니다.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룡이 살았다는 우물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버렸습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376년(고려 우왕 2)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 수리하였습니다.
몇 안 남은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고려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봉정사 극락전과 누가 오래 되었나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왜냐면 확실한 시기를 알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전통 건물은 보통 짓고 나서 100~150년 후에 수리하기 때문에 건립 시기는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이르리라고 봅니다.
여하튼 둘 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더 오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형태, 비례미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습니다. 순수하게 건축물로서 완성도를 본다면 무량수전이 더 급이 높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현재까지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진 것 중에서는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입니다.
과거에는 단청이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으로 만든 화려한 바닥돌을 깔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어떤 이유인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현란한 단청을 싫어하는 사람이 특히 좋아하는 건물이 되었습니다.
무량수전은 조선시대 건물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보입니다.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릅니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어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가 종이를 붙이기는 매우 사치스러워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 놓음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중세인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무량수전의 창호는 그 당시로서는 꽤 최신 유행을 따른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입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16세기부터 한지가 대량 생산되어 창호가 일반 가정에도 보급되었고, 절의 창호 역시 각종 장식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무량수전의 기둥 사이의 창호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좌우 양쪽의 창호는 창문으로 기능해서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열리고, 가운데 두 짝의 창호는 문으로 기능하기에 좌우로 열리는 여닫이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전부 여닫이인 동시에 창으로 들어 올리는 4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습니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유전이 깔렸습니다. 즉, 고려시대에는 마치 중국의 건축물처럼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서서 지내는 입식 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역시 그러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이 성행하면서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는 것이 널리 퍼지자 새로 나무 바닥을 깐 것입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낸 것으로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었다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무량수전의 아미타여래상은 왼편에 있는데,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이므로 아미타여래는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무량수전의 불상이 아미타여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가 주존불로 봉안되는 불전이지만, 불상이 무량수전보다 200년 정도 연대가 앞선다고 하는 데다가 부처의 성격을 규정하는 수인도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연대만으로 보면 불상이 먼저 만들어지고 무량수전이 세워진 셈인데, 이렇게 되면 무량수전의 본존불을 '아미타여래'라고 확신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무량수전이 부석사의 금당(절의 중심건물) 역할을 하지만 축조 당시에는 부석사의 강당이었으리란 의견도 있습니다. 절의 중심부가 아닌 절의 끝부분에 있거니와, 불상이 건물 입구가 아니라 측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특이한 점 때문에, 아마도 과거에는 금당이 아니었지만 어떤 이유로 이후 금당으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주장입니다.
소조여래좌상은 무량수전에 봉안된 불상입니다. 소조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흙을 빚어서 만든 불상으로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형태인데 금칠이 되어 있습니다. 소조 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 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입니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으며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 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 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무량수전보다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등으로 4면의 보살상과 석등의 하단에 연꽃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아주 뛰어난 걸작입니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마찬가지로 본전의 중앙 앞에 놓여 있는데, 이는 빛을 부처님 진리의 상징으로 보고 본전 앞을 비취는 광명등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석등을 금당 앞에 2개를 세우는데 석등이 광명등의 역할을 상실하고, 조명기구의 역할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4각 바닥 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 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8각 기둥 형태로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 받침돌을 얹어놓았습니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습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이며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가 생전에 거처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초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1377년(우왕 3)에 세웠고, 1490년(성종 21)과 1493년(성종 24)에 다시 고쳤습니다.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 양식이 무량수전보다 간결하며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 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습니다. 벽화는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입니다. 수덕사 대웅전에도 벽화가 있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고려시대의 벽화가 둘이나 남아 있었지만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는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어 고려 시대의 벽화는 현재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유일합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백색, 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입니다. 양쪽의 두 천부 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입니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건물 앞에 뜬금없이 철창이 있고 그 안에 선비화(골담초)라는 작은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거기서 뿌리가 나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합니다. 건물 처마 아래에 있어 비나 이슬을 맞지 않고도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셈입니다. 철창을 만든 이유는 이 나뭇잎을 따서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해서, 하도 많이 잎을 따가는 바람에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단순히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고, 사실이라 해도 1300년 전의 일인 만큼 믿기 어렵지만 의외로 이 나무는 이황이 1548년에 풍기 군수로 부임하여 부석사에 와서 지은 <선비화(禪扉花)>라는 시에서도 언급됩니다. 이 시는 지금으로부터 460년 전에 지었고 지금의 나무가 그때도 있었다면 꽤 오래된 나무입니다.
擢玉森森依寺門(탁옥삼삼의사문) 옥인 듯 빼어난 가지 촘촘히 절 문에 사는데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기하게 뿌리를 내렸다 하네.
杖頭自有曺溪水(장두자유조계수) 지팡이 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천지가 내려 주는 비, 이슬의 은혜 빌리지 않네.
삼층석탑은 무량수전의 동편 약간 높은 지대에 있으며 2중 기단에 3층의 석탑으로 통일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으며 1960년대 해체 수리 시 3층 탑신 중앙에 얕은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없었고 기단부에서 철제 탑, 불상 조각,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습니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 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 중창기>가 있습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이었으나, 대일항쟁기에 이전되어 지금은 주지실과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석단은 화엄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라시대에 축조방식으로 거대한 축석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입니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 연화대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 중, 하의 삼단으로 보는 가람 경영 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네이버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하여 고을학교 기사(3월)를 확인 바랍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을 즐기려는 동호회원들의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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