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환자가 제공받은 사항을 기록하는 의무기록은, 환자 자신이 진료 받은 사항을 이해하고, 추후 의료제공자가 적절한 진료 방향을 설정하여 치료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돕는 문서이다. 제공받은 서비스를 기록하는 일견 사소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행위는 어떠한 요소들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결과들을 파생시킬까?
의무기록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와 이를 둘러싼 구조적 영향, 파생시키는 효과들을 논의한 사례연구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연구자가 2005년에서 2017년에 걸쳐 총 19개월 동안 북부 파키스탄의 한 3차 공공 병원에서 현지조사를 하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바로 가기 : 병원 서류세계: 북부 파키스탄의 의료적 보고(오보)와 모성건강) 연구자는 과거 집에서 출산하는 비율이 높던 이 지역에서 점차 병원에서 분만하는 비율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성사망률이 높은 현상에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이유를 찾기 위해 병원의 진료현장을 관찰하고 의무기록을 함께 살펴보는 과정에서, 연구자는 자신이 실제 목격한 절차들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에 착안하여 연구자는 의무기록 및 보고에 주목하며 왜 잘못 기록되거나 보고되는지, 무엇이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고찰한다.
연구자는 원인을 탐구하기에 앞서 의무기록 및 보고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와 기능을 살펴본다. 먼저 연구자는 의료제공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병원 기록의 양면적인 기능을 제시한다. 문제를 (적게) 설정하고 진료절차를 통해 치료를 완료했다는 (최소한의) 기록은 곧 제공자가 목표를 달성하고 성공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는 증거가 된다. 한편으로는 의료적 문제가 발생했을 시에 제공자의 결백을 증명하고 책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더불어 환자가 제공받은 사항들을 기록함으로써 추후 다른 증상이 발현되었을 때 참고하여 더욱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이 모든 기록을 종합했을 때는 병원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환자의 치료와 건강 증진에 기여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특히 이 병원의 경우에는 상부조직에 보고를 할 의무가 있었으며, 기록과 보고는 예산지원 여부 및 지원 금액의 범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연구자는 이러한 시스템의 최대 희생자가 바로 환자였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치료가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는 기록과 보고를 하기 위해 정작 가장 중요한 환자의 건강이 저당 잡혔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치료절차나 제한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를 축소보고하거나 생략했기 때문에 결국 환자들은 부작용을 경험하더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병원 측에서는 문제 발생 시 기록된 바가 없거나 정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기가 수월했다. 결국 환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고통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해결방법에서도 점점 멀어졌다.
본 논문에서는 타자후르(가명)라는 환자의 이야기로 예를 든다. 타자후르는 어느 날 오전 7시에 출산을 했지만 오후 7시까지 태반이 나오지 않자 위급한 상황에서 내원하게 된다. 한 간호사는 하혈로 인해 엉겨 붙은 것들을 꺼내고, 다른 간호사는 타자후르의 아랫배를 마사지하며 자궁수축을 돕기 위해 사용되는 약물을 1cc 투여한다. 한편에서는 카테터로 요도를 자극하여 소변이 배출되도록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사지를 계속해서 태반이 나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다. 그러나 곧 의사가 와서 찢어진 곳을 발견하고 바로 봉합을 한다. 오래 지나지 않아 타자후르는 구토를 하기 시작하고, 간호사들은 타자후르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약물이 구토를 유발했을 가능성을 가늠한다. 병원에서는 타자후르의 가족으로부터 급히 혈액을 제공받아 수혈을 진행하고자 했지만 필요한 도구들이 부족해 결국 하지 못했으며,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타자후르를 위해 세 번의 정맥주사(한 번은 혈장)를 놓는다. 연구자는 다음 날 이미 타자후르가 퇴원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후 그녀의 건강상태를 알 수 없었다.
논문의 세 쪽에 걸쳐 연구자가 자세히 묘사한 타자후르의 치료 과정은 과연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타자후르, 비랄 아메드(레지던스 가명). 35세 여성. 오전 7시에 집에서 분만, 태반이 나오지 않음. 정맥주사. 오전 6시 30분에 태반 나옴. 1 파인트 수혈."
이 간단한 기록을 보며 연구자는 정맥주사와 자궁수축 약물의 종류, 양, 이유, 투여시간, 무의식이 지속된 시간 등이 적혀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며, 태반이 나온 시간과 수혈여부가 부정확하게 적혀있음을 발견한다. 연구자는 이 부정확한 기록이 타자후르의 이후 진료에 있어 충분한 참고자료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 발생시 그것이 약물이나 치료에 의한 부작용일지라도 정확한 원인을 찾는데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런 부정확한 기록과 보고는 단순히 실무자 개인의 실수나 잘못 때문인 걸까? 연구자는 이것을 어느 한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으며, 이러한 결과의 배후에는 구조적 요인이 작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례로 적은 수의 직원은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으며, 병원의 인프라가 충분하지 못해 수행하지 못한 것들은 감추어야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직원 수와 인프라는 왜 부족한 상태로 지속되었는가? 그 근본적인 원인에는 세계은행과 IMF가 파키스탄에 부과한 구조조정과 긴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환자의 안전과 건강, 생략된 기록, 구조조정. 사뭇 멀어 보이는 각각의 요소들은 결국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구자는 의료와 관료제, 구조조정이 만나면서 결국 환자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으로 되돌아오는 이 상황에 일침을 날린다. 의무기록과 보고는 결국 환자의 건강과 의료서비스의 질 개선을 위한 것이 아니던가? 이 논문을 비단 파키스탄만의 문제로 볼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의료는 진정 환자의 건강 증진이나 의료서비스 질 개선을 위한 기록과 보고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반대로 상부조직에 성공적인 보고를 하기 위해, 기록 자체를 위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또 병원들의 영리추구 행태가 만연해 있다는 점에서 청구한 진료비의 삭감 방지를 우선적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지도 함께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 서지 정보
- Emma Varley. (2023). Hospital Paperworlds: Medical (Mis)Reporting and Maternal Health in Northern Pakistan. Medical Anthropology Quarterly, 37(1): 1~19. (3월 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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