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정화 대법관)가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혼인 상태가 아니라면 성별정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미성년 자녀를 뒀을 경우 이혼 여부와 상관없이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불허한 2011년 판례가 이날 결정으로 11년 만에 뒤바뀌었다.
이날 대법원은 트랜스젠더 여성 A씨가 낸 등록부정정 신청을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가정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2019년 "가족관계등록부 성별을 '남'에서 '여'로 정정하게 해달라"며 등록부 정정을 신청했다. 그는 2012년 생물학적 남성으로 결혼해 자녀를 뒀지만, 어렸을 적부터 느껴오던 여성 정체성에 괴로워해오다 2018년 이혼 후 해외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2심 재판부는 "신청인의 성별을 여성으로 정정하도록 허용하면 미성년 자녀 입장에선 법률적 평가를 이유로 아버지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뒤바뀌는 상황을 일방적으로 감내해야 하고, 이로 인한 정신적 혼란과 충격에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성별정정 전후로도 트랜스젠더 부모와 그 자녀의 관계는 달라지지 않고, 따라서 트랜스젠더 역시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국의 법적 성별정정은 별도의 법률 없이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에 따라 가정법원의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성별정정 요건은 △성전환수술 여부 △혼인 여부 및 미성년 자녀 유무 △생식능력 유무 등으로 엄격한 편이다.
특히 미성년 자녀를 둔 트랜스젠더가 성별정정을 신청할 경우, 이번 사안을 담당한 2심법원이 언급하기도 했던 '자녀의 혼란과 충격'이 강력한 쟁점으로 작용한다.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한 사회적 차별이 실존하는 만큼, '미성년 자녀가 받을 충격'을 법원이 인정할 가능성도 크다.
다만 인권 전문가들은 이를 이유로 한 성별정정 거부가 트랜스젠더 개인의 평등권 및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자기결정권, 사생활권 등을 침해한다고 판단한다.
인권단체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는 이번 사안과 관련하여 지난 9월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며 "성별 고정관념, 낙인, 해로운 문화적 규범으로 인한 트랜스젠더 차별은 헌법 및 국제인권법이 보장하는 권리들의 완전한 향유를 방해"하고 있다며 "국가는 이처럼 해로운 사회적 방해물을 파악 및 제거하고, 이를 강화하거나 영속화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앰네스티는 또한 "아동의 최선의 이익 보호를 위한 판단은 부모의 법적 성별정정이 자녀의 안녕에 중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사회적 규범에 기대어 도출될 위험이 있다"고도 지적한다.
결국 사회적 차별을 근거로 '아동의 최선의 이익 보호'를 주장하는 일 또한 그 사회적 차별 유지·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지적이다. 유엔(UN) 아동권리위원회는 "국가기관이 아동의 최선의 이익 개념을 남용하여 차별적 정책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대법원은 이번 사안에 대해 "트랜스젠더인 부모의 성별정정이 자녀의 복리에 해가 된다고 일률적으로 볼 수 없고, 오히려 성별정정을 함으로써 자녀의 복리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간 견고히 유지돼온 '아동 보호' 논리에 균열을 낸 셈이다.
성소수자 인권단체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은 이에 성명을 내고 "이번 대법원 결정은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을 권리로서 확인하였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크다"며 "이번 결정을 계기로 트랜스젠더의 성별정정에 대한 정부와 국회 차원의 논의가 이루어질 것을 촉구한다"고 대법원의 결정을 환영했다.
다만 단체는 "미성년 자녀 기준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고 판단의 여지를 남긴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들은 "유엔 등 국제인권규범은 자기결정에 따라 어떠한 강제적 요건 없이 트랜스젠더가 법적 성별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고,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몰타 등 여러 외국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법률도 제정되어 있다"며 "대법원 결정의 취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서울가정법원에서는 조속히 신청인의 성별정정을 허가할 것을 촉구한다"고 전했다.
윤지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 또한 "트랜스젠더 권리 인정의 문을 연 이번 대법원 판결을 환영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차별과 낙인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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