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대회 룰(규칙)은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결정해야 한다'던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부산 현장 비대위 이후 '당심 반영 확대'를 위한 전당대회 시기와 룰 개정 논의를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사석에서 '당원투표 100%로 전당대회를 치러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정 위원장의 입장 변화 배경이 눈길을 끌고 있다.
정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당대회 시기나 전당대회 룰 같은 건 비대위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고 비대위가 구성하는 전준위에서 결정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과 당 지도부 용산 만찬 회동 3일 뒤인 지난달 28일 비대위 비공개 회의에서 정 위원장이 "다음 회의 때 전당대회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한 사실이 알려진 뒤였지만 전당대회 시기와 룰 개정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거리를 뒀던 셈이다. (☞관련기사 : 尹 '당무 불개입' 한다더니?…'용산 만찬회동' 직후 불붙은 與 전당대회)
그러던 정 위원장의 태도는 지난 12일 부산 현장 비대위 이후 달라졌다. 당일 비대위 회의에서 그는 "제 임기가 3월 12일까지"라며 "비대위를 연장할 생각은 없다. 스피드를 내서 3월경에는 전당대회를 치뤄야하지 않겠나"라고 전당대회 시기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이어 지난 15일 정 위원장은 비대위 회의에서 "당의 진로는 당원들이 결정해야 한다"며 "비대위는 오늘부터 정당민주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고 말했다. 현행 '당원투표 7 대 여론조사 3'인 전당대회 룰을 당원투표 비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꾸는 작업을 비대위가 직접 주도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관련기사 : '윤심'으로 가는 국힘 전당대회…정진석 "당 진로는 당원이 결정해야")
정 위원장은 특히 회의 후 기자들이 '전당대회 룰을 전준위 논의 없이 비대위가 직접 결정하느냐'는 질문을 하자 "논의해야 할 것 같다. 비대위원들과 자주 만나야 할 거 같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비대위가 전대 룰을 결정할 권한이 있느냐'는 재질문에도 "저는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며 "최종 결정은 저희가 하는 게 아니라 전국위에서 결정하고, 비대위는 안(案)을 마련할 뿐"이라고 했다.
정 위원장은 또 '한 달 전에는 당원투표 확대안에 대해 생전 들어보지 못한 얘기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때는 잘 몰랐는데 최근에 보니까 책임당원 수가 79만 명에 이른다. 100만 당원 시대가 개막하지 않았느냐"며 "여러 경로로 의견 수렴 중"이라고 답했다. 정 위원장은 지난달 21일에는 당원투표 확대설에 대해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생각", "가짜뉴스"라고 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전당대회에 대한 '윤심'의 향방을 짐작하게 하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경향신문>은 "대통령이 사석에서 '전당대회 룰을 변경할 거면 (당원투표 비중을) 100%로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취지의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는 여권 관계자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이어 16일 <시사저널>은 윤 대통령이 최근 주변에 "다음 총선은 어차피 내가 치르는 것 아니냐"며 이와 유사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보도했다. '당무 불개입'을 여러 차례 공언했던 윤 대통령의 '변심'이 정 위원장의 뒷배가 아닌가 하는 해석이 제기된다.
'윤심 개입' 정황이 보이는 당 지도부의 전당대회 룰 개정 움직임에 비윤계에서는 강한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 차기 당 대표 선호도 여론조사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은 16일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특검 수사팀장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45년 형을 구형했고, 박 전 대통령은 22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 중 공천개입 때문에 2년 징역형을 받았다"며 "윤 대통령에게 엄중하게 말씀드린다. 경선개입은 심각한 불법"이라고 질타했다.
이준석 전 대표도 이날 페이스북에 "고민이 많은 '그분'들에게 팁을 드리자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 때는 단칼에 내리쳐야 한다. 9:1이니 10:0이니 해봐야 눈총만 받는다"며 "원래 정치권에서는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싶을 때 가산점 제도도 활용한다. 전당대회도 그냥 당원 100%하고 (윤 대통령) 심기경호 능력도 20% 정도 가산점도 '멘토단'이 평가해서 부여하면 된다"고 당내의 전당대회 룰 개정 논의를 비꼬았다.
이 전 대표는 "(당원) 명단은 비공개이고 각 당이 명단을 따로 보유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온라인으로 자발적으로 가입한 당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동네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이나 단체활동하시는 (분들) 명단이 통으로 가입되는 경우가 많다. 경선 때마다 필적이 같은 입당원서 수십장이 들어오는 것이 현실이다. 종교집단에서 엄청 모아오기도 한다"며 "여론조사는 샘플링이라 여러 가지 왜곡이 오히려 상쇄되지만 당원 정보는 검증 불가 정보이므로 오히려 왜곡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바이어스(bias. 편향)가 생긴다"고 했다.
친윤계 및 범친윤계에서도 당권주자 중 '당심 확대' 룰 개정에 찬성하는 이는 김기현 의원과 권성동 의원 뿐이다. 윤상현 의원은 전날 한국방송(K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가 지금 7 대 3 비율 아닌가. 이 룰이 한 18년 동안 유지됐다"며 "민주당 같은 경우 지난 대표 경선 때 7.5 대 2.5였다. 우리가 민주당보다 민심 비율이 적어거야 되겠나"라고 했고, 안철수 의원은 지난 14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7대3에 역선택 방지 조항을 적용하면 비당원 국민의힘 지지층 의견을 반영하는 통로"라며 "(당원 100%로 당 대표를 뽑으면) 당 대표가 되더라도 총선 때 당원이 아닌 국민의힘 지지층에 어떻게 호소할 수 있나"라고 했다. 나경원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도 지난 7일 청년 4.0 포럼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당권주자 경쟁력을 보면 지금 룰대로 했을 때 내가 1등"이라며 "이미 전당대회가 시작된 거 같은데 룰을 바꾸는 건 불필요한 논란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 밖의 보수진영에서도 전당대회 룰 개정 논의에 우려 섞인 반응이 나온다. <중앙일보>는 이날자 사설에서 "차기 대표 자리를 노리는 유력 후보들이 이미 경선에 돌입한 상황에서 돌연 특정 계파 후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룰을 바꾼다면 공정성 시비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며 "당심(당원투표)에선 밀리지만 민심(여론조사)에선 앞선 비윤계 후보들을 배제하려는 꼼수 아니냐는 논란이 확산할 게 뻔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같은날 <조선일보>에도 "경선 룰 변경은 교각살우(矯角殺牛)"라며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사양지심은 사라지고 선사후당(先私後黨)의 탐욕만 남은 정당은 민심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우려하는 내용을 담은 박성민 정치컨설턴트의 칼럼이 실렸다.
친윤계 핵심 그룹에서는 윤 대통령 발언을 '당무 개입'으로 볼 수는 없다고 옹호하고 있다. 권성동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모 언론사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이 전당대회 선거제도에 대해 발언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 진위 여부도 알 수 없지만, 선거제도 개선에 대한 의견표명은 누구나 할 수 있다"며 "제도에 대한 단순 의견표명을 '불법' 운운하며 정치적 개입으로 호도해선 안 된다. 누군가를 낙선시키기 위해 제도를 바꾼다는 인식 자체가 황당하다"고 썼다.
국민의힘 소속 정우택 국회부의장도 이날 YTN 라디오 인터뷰에서 "대통령께서도 한 분의 당원이기 때문에 사석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수 있다"며 "이를 당무 개입으로 해석하는 건 과도하다. 저는 지금까지 윤 대통령이 당무에 직접 개입한 사례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친윤계 의원도 최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대통령도 (당무에) 의견은 낼 수 있다"며 "우리가 거기에 귀속되거나 끌려다니는 건 아니다. 서로 입장을 말하면서 타협점으로 가는 건 원활한 당정 관계 유지와 개혁 과제 수행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한편 범친윤계 주자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윤심'을 두고 쟁탈전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안 의원은 이날 SNS에 쓴 글에서 "당 대표는 대통령과 호흡이 중요하다"며 "윤석열 당선인과 국정과제를 선정할 때 많은 얘기가 필요 없었다. 단일화와 인수위를 거치면서 호흡이 갈수록 잘 맞았고, 국정을 바라보는 시각도 비슷했기에 자연스럽게 이심전심이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안 의원은 "현재 당내에서 저만큼 대통령의 국정 비전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저는 국회의원의 임기를 시작한 이후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는 데 당내 누구보다 효과적이고 적합한 목소리를 내왔다"며 "반드시 다음 당 대표는 대통령과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의 호흡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여소야대 국면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국민들로부터 능력을 인정 받아 총선 승리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김 의원도 페이스북 글에서 "윤 대통령께서 어제 열린 국정과제 점검회에서 '개혁이라는 것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반드시 우리가 해내야 한다'며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을 본격화할 뜻을 밝혔다. 눈앞의 이익보다는 긴 안목으로 대한민국의 지속 발전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는 예지! 책임을 질 줄 아는 용기! 지도자로서의 의지!를 보여준 진정한 보수의 모습"이라며 "이것이 바로 보수의 가치이고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 '윤석열다움'"이라고 윤 대통령을 한껏 치켜세웠다.
김 의원은 "대통령의 말씀처럼 개혁은 인기 없는 일이고, 개혁으로 손해 보는 계층의 강력한 저항도 감내해야 한다. 무엇보다 개혁을 추진하기에 5년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다"며 "그 일을 위해 저 김기현은 앞장설 것이다. 비겁하고 무책임하게 뒤에 숨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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