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성의 볼모, 보험계약자
보험회사는 계약자로부터 받은 보험료 중에서 사업비를 제외한 나머지를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그렇다면, 국내 생명보험회사 전체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얼마나 될까? 최근 경제개혁연대가 발표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2022년 6월말 기준 국내 생명보험회사 전체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32.8조 원이다. 이 중에서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31.3조 원인데, 이 중 그 대부분인 29조 원은 삼성전자 주식이다. 삼성전자 투자 비중이 가히 압도적이다.
보험업법은 특정자산의 투자 한도를 최대 3%로 정해놓았다. 보험회사로 하여금 특정 주식에 '몰빵'해서 투자할 수 없도록 해놓은 이유는 투자손실이 커지면 보험료를 지급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험업법 제104조(자산운용의 원칙)에 의하면 "보험회사는 그 자산을 운용할 때 안정성·유동성·수익성 및 공익성이 확보되도록 하여야 하며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그 자산을 운용하여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안정적인 투자의 기본은 분산투자를 통한 위험회피이다. 그러나 삼성생명의 경우 삼성전자 투자 비중이 너무 크다. 이 정도의 대규모 투자로 현재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율은 8.73%이다. 이렇게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과다 보유한 것은 오로지 단 하나의 이유이다.
이재용 회장 등이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이 삼성생명을,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가진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즉, 보험계약자들의 돈을 볼모로 잡아 삼성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2. 삼성에 의한 해석, 보험업법 감독규정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보험업법 개정안의 요지는 보험회사가 시가 기준 다른 회사의 지분 3%를 초과해 보유할 수 없도록 제한하자는 것이다. 사실, 국회에서 보험업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된다. 금융당국에서 보험업법 감독규정만 개정하면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취득원가가 아닌 공정가액(시가평가)으로 수정해서 고시하면 된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지금까지도 감독규정을 개정하지 않고 있다.
2014년 이종걸 의원의 보험업법 개정안은 박근혜 정부가 감독규정을 바꾸지 않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법률로 제어하고자 낸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이 집권여당이 된 이후, 박용진 의원은 최종구 금융위원장에게 감독규정을 취득원가에서 시가대로 개정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야당 시절 이종걸 의원이 요구한 것을 집권여당 의원이 다시 요구한 것이다.
그래도 금융위원회는 꿈쩍하지 않았다. 과거 기사를 검색해보면 금융위원회의 입장을 알 수 있다. 금융위원회는 ‘보험회사 소유주식을 공정가액으로 평가하는 경우 주식가격의 변동에 따라 자산운용 비율, 한도규제 준수여부가 결정되는 문제점이 있으며, 이에 따라 보험회사 자산운용규제의 법적 안정성 차원에서 해당주식을 취득하는 시점에서의 가치(취득원가)를 기준으로 자산운용 한도규제를 적용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2020년 박용진, 이용우 의원에 의해 보험업법 개정안이 다시 발의되자 금융위원회의 입장은 사뭇 달라졌다. 국회에서 법을 개정하면 따르겠다고 말이다. 내년부터 시행되는 IFRS17(국제회계기준 보험계약)과 K-ICS(신지급여력비율)도 시가평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도 해괴망측한 논리를 더는 들이밀 수 없게 된 것이다.
금융위원회는 법이 정한 원칙에 따라 집행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그렇다면 금융위원회의 직무유기는 누구를 위해서일까? 그들이 판단했을 리 없다. 삼성에 의한 해석, 그것이 바로 보험업법 감독규정이다.
3. 삼성을 위한 기준 ① - 국제회계기준(IFRS17)
최근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보유 지분을 2023년 국내에 도입되는 국제회계기준(IFRS17)에서 '자본으로 분류'해도 되는지 금융감독원에 질의했다고 한다. 무슨 자신감일까 싶어 관련 기사들을 검색하며 읽다보니, 잘 짜인 퍼즐이 한 조각씩 맞추어지기 시작했다. 삼성생명의 이 질의는 그들이 어떻게 판을 뒤집어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꿀지를 치밀하게 준비했는지 알 수 있게끔 했다.
2017년,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의 IFRS17 적용 지원을 위한 전문가그룹(TRG)에 삼성생명 출신의 한 인사가 합류했다. (관련기사 보기) 그리고 2019년 IASB는 이사회를 열고 계약자 배당과 관련한 미래 현금흐름을 '금융가정 변동'으로 본다는 해석을 'IFRS17 기준서'에 추가했다. (관련기사 보기) 주식가치 상승으로 유배당 계약 상품에서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간주돼도 보험사가 이를 손익에 곧바로 반영하는 대신 자본으로 회계처리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준서'는 IFRS17의 실제 적용방식을 규정하는 '시행령'에 해당한다.
삼성생명이 자기 사람을 국제회계기준위원회에 심고, 게다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기준서를 변경했다는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삼성생명의 최근 질의는 이미 삼성이 짜놓은 답변을 금융당국이 다시 한 번 확인하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금융당국이 보험업법 감독규정을 개정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 삼성에게 끌려 다니는 꼴을 지켜보게 됐다.
4. 삼성을 위한 기준 ② - 신지급여력제도(K-ICS) 장기보유주식 특혜
2023년부터 보험업계에는 국제회계기준인 IFRS17이 도입되고, 현행 지급여력비율인 RBC는 사라지게 된다. 대신, 자산과 부채를 시가로 평가하는 총 재무제표방식을 기반으로 보험회사에 내재된 각종 리스크 양을 요구자본으로 산출하고, 이에 상응하는 가용자본을 보유하도록 하는 신지급여력제도인 K-ICS가 도입될 예정이다.
기존 K-ICS 4.0은 주식위험액을 선진시장상장주식, 신흥시장상장주식, 우선주, 인프라주식, 기타주식으로 구분해 위험계수를 각각 적용했다. 적용된 주식 위험계수는 각각 35%, 48%, 4~49%, 20%, 49%였다. 각각의 위험계수를 적용해 주식위험에 대한 요구자본을 산출하므로 위험계수가 낮아지면 쌓아야 할 요구자본도 줄어드는 식이다.
그런데 2021년 12월 발표된 K-ICS 최종본에는 '장기보유주식' 항목이 추가되었다. 장기보유주식에 대한 위험계수는 20%가 적용됐다. 삼성생명의 경우 삼성전자를 장기보유주식으로 설정하면 종전까지는 위험계수를 35%로 적용받았으나 이제는 현격히 낮은 20%로 줄어들게 된다. 장기보유주식은 1개만 설정할 수 있는데, 삼성생명은 당연히 삼성전자 주식을 설정할 것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금융당국은 "주식을 단기매매로 운영하면 변동성 노출이 있어 위험계수가 큰데, 기관투자자 입장에서 한 주식을 10년 이상 장기적으로 보유할 경우에는 자본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이를 도입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박용진 의원과 이용우 의원은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보유분을 3% 시가 규제에 따르도록 묶고, 3%를 초과하는 나머지 보유분은 시장에 내다팔라고 요구하고 있다. 반면 정작 금융위원회는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그대로 보유하면 위험계수를 35%에서 20%까지 인하해 주고, 그만큼 요구자본을 줄어주겠다고 K-ICS에 못박았다.
삼성생명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주식은 전체 생명보험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88.2%에 달한다. 한 마디로 금융당국에서 삼성생명만을 위한 기준을 설정한 것이 바로 장기보유주식 혜택이다. 주식의 총량이 아니라 기간으로 위험도를 평가하겠다는 발상은 누구 머리에서 나왔을까?
5.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모든 특혜는 종식되어야 한다
사실 금융은 어렵다. 수치모델이 나오면 더 어렵다. 그러나 모든 법과 제도는 상식을 기반으로 한다. 상식을 배반하도록 금융전문용어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본질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 11월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 보험업법 개정안이 상정되었다. 처음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된 지 무려 8년만이다. 아마 이번에도 금융당국은 매번 그래왔듯이 국회의 논의를 지켜볼 뿐 뒷짐 지고 있을 것이 뻔하다.
보험계약자들의 돈으로 삼성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삼성에만 유리하도록 직무를 유기하고, 규칙을 만들거나 바꾼다면 과연 공정한 것인가? 2014년부터 보험업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지만 8년 동안 이 법 하나 국회에서 통과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은 여전히 삼성공화국에 불과하다.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모든 특혜는 종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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