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뽑습니까? 죄다 쓰레기들인데."
'지방선거에서 누굴 뽑았느냐'라는 질문에, 다소 거친 답이 돌아왔다.
지난 8월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만난 택시기사 이태주(가명)씨는 본인을 무당층 유권자라 소개했다. "민주든 국힘이든 상관은 안 하"지만, 이 씨는 지난 6.1 지방선거 당시 투표장을 찾지 않았다. 도저히 "찍어줄 놈"을 찾지 못해서였다.
오십 평생을 진주에서만 살았다는 이 씨는 "지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가 필요하다면서도 지역정치 무용론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일종의 무력감 때문이다.
가령 2020년 코로나 국면, 이 씨는 지난 진주의료원 사태가 공공의료 체계의 부재라는 이름으로 지역에 돌아오는 일을 지켜봤다. "돌아보니 엄청 심각한 문제였는데 지역 정치인들이 대체 뭘 했나, 지금은 뭘 하고 있나" 그는 되물었다.
2013년 당시 진주의료원 해산 조례는 당시 경상남도의회 다수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의 기습 처리로 통과됐다. 지역 보건의료에 대한 논의는 '병원 내 강성노조'를 탓하는 진영논리 뒤에 묻혀 있었다. 당시 이슈를 주도했던 이는 보수진영 유력 정치인 홍준표 당시 경남도지사, '충성이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자 지역정치인들은 "어차피 그놈이 그놈" 같았다.
지역에 실망한 이 씨의 관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중앙에 쏠렸다. "결국은 대통령 잘 뽑는 게 답" 같다는 것이다. '대선은 어땠냐'란 질문에 그가 갖가지 정치 얘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각 당의 주요 정치인들은 물론 그들의 지역구까지 그는 줄줄이 꿰고 있었다.
지역 곳곳에 이 씨와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 지역 일'에는 민감하지만, 정작 지역정치엔 희망을 놓아버린 이들. 윤석열 대통령의 '이 XX'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전국 누구와도 토론을 벌일 수 있지만, 지역의회 기초의원들이 "대체 뭘 하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보기가 힘든 나라가 한국이다.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정치 현장이 실제 삶과는 가장 멀리 있는 꼴이다.
이 씨가 투표를 거부한 제8회 지방선거의 투표율이 50.9%, 3개월 전 치러진 제20대 대통령선거 투표율은 77.1%였다. 지선의 화두는 대선 이후 양당의 세력 구도였고, 전국 시·도의회의원 선거 전체 당선인 779명 중 양당 제외 당선인은 8명(진보당 3, 무소속 5)이었다. 광역의원의 12%, 기초의원의 10%는 정당의 공천만 받아도 당선된 무투표 당선자들이었다.
견고한 양당체제 아래 정치에서 '지역'이 실종된 꼴이다. 대선 기간, 양당은 지방선거 공천 기준에 대선 기여도를 포함하겠다고 동시에 공언했다. 일찌감치 이에 호응한 출마 예정자들은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는 대신 소속 정당 대선 후보의 피켓을 들었다. 지방선거에서 찍어줄 후보를 찾기가 힘들다는 이 씨의 토로는 지역 정치현장의 이러한 운영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극심한 양당체제가 오직 당선만을 목표로 지역구 국회의원에 대한 '충성경쟁'을 벌이는 지역정치인들을 양산한다. 지역의회는 중앙에 예속된다. 지방선거는 이렇게 양당의 열혈 지지자들에게만 중요한 이벤트로 전락한다.
"다른 경험이 다른 정치를 만든다."
1991년 지방선거가 다시 시작된 지 31년이다. 여전히 지방자치제도, 특히 지방의회는 존립 목적부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지역의원들의 '침묵'은 상징적인 사례다.
지난 5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분석에 따르면 전국 기초의원 중 약 25%(723명)는 연평균 조례 발의 수가 1건 미만이었다. 4년 임기 내내 조례를 단 한건도 발의하지 않은 의원도 184명(6%)에 달했다.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가 2020년 발표한 지방의회 의정활동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18~19년 동안 1139명의 지방의원은 본회의에서 한 번도 발언하지 않았다. 전체 지방의원 수의 1/3이다.
다시 말해 한국은 제대로 된 지역정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시스템의 탓이 크다. '지역정치가 지역민과 유리돼 있으니 정당법·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은 지선 때마다 반복되지만, 경험의 부재는 대안조차 막연하게 만든다.
'군소정당의 난립'이나 '지역이기주의 창궐' 등 법을 개정할 시 예상되는 여러 부작용들은 여전히 관련 법률 개정을 가로막는 핵심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 2004년 헌법재판소가 "의회 내 안정적인 다수세력의 확보"를 이유로 현행 정당법에 대한 합헌 결정을 내린 후, 특정 지역에만 기반을 두고 지역선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지역정당의 창당은 한국에서 여전히 불가능하다.
<프레시안>은 지난 8월부터 약 이주일간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의 여러 도시를 찾았다. 유럽에선 지역정당, 유권자 그룹 등의 정치결사체 설립이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다. 중앙이 아닌 지역의 이야기를 하는 정치인들이 지역 정계에 진출하기 쉬운 구조다. 그곳에서 오직 지역의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하는 지역 정치인들을 만났다. 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지역의 정치현장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한국의 정치현장에도 '균열'은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시민사회 운동, 더 나아가 지역에만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지역정당의 창당이 전국 곳곳에서 시작된 지 오래다. (관련기사 ☞ '영등포당'을 아십니까?…성매매 집결지와 텃밭 앞 '특별한' 정당 연설회) 해외 취재 이후, 취재팀은 지난 9월 한 달 동안 국내 각 지역에서 '다른 정치'를 시도하고 있는 지역 활동가들을 추가로 만났다.
'지역정당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있는 서울시 은평구와 영등포구, 경기도 과천시, 경상남도 진주시 등 지역 곳곳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기획에 담겼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지역정당 창당을 막는 현행 정당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외 정당 밖에서 제도정치에 도전하거나, 시민참여 플랫폼을 활용하고 있는 지역 속 청년·여성들의 이야기도 취재했다.
기획의 의도는 유럽 정치제도의 '이식'이 아니다. 정치는 그 나라 고유의 문화, 제도, 관습 등 모든 것에서 영향을 받는다. 선진국의 정치 체제를 무작정 따라가야 한다거나 유권자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는 식의 계몽주의적 이야기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만 지역정치, 더 나아가서 지방의회의 모습과 그를 구성하고 있는 지역정치인의 모습에 대해 더 근본적으로 다가가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유럽과 국내를 동시에 조망했다. 먼 곳에서 막연히 들려오던 이야기를 구체화하고, 들리지 않았을 뿐 곁에 존재하던 이야기를 재구성하려 한다. <프레시안>이 둘러본 모든 지역은 서로 달랐지만, 그 접점은 존재했다.
각지의 투쟁과 성과, 한계를 돌아보는 일이 지역에 왜, 그리고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묻는 다소 원론적인 질문과 이어지길 바란다. 그 질문이, 현재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정당법 개정 이슈와 같은 구체적인 대안에도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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