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및 첨단산업 수도권 쏠림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산업 관점에서 살펴보면 국토 전체 면적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게 살고 있으니, 대기업 본사 및 연구개발(R&D) 센터뿐 아니라 유망 벤처기업이 몰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가 점점 심화하는 와중에도 각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는 첨단 신산업 육성을 위한 계획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지역 내 신산업이 공고히 뿌리내릴 기반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정부는 격차를 완화하고자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라는 국정 목표를 내놓았다. 그러나 균형발전, 격차 완화라는 거대 담론은 세세한 각론, 즉 지역이 마주한 개별 문제점 파악이 선행 혹은 동반되어야 함에도 현실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이분법적인 공간구조 틀 속에서 수도권 일극 체제 해소 방안에만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성은 수도권과 경쟁할 수 있는 비수도권 지역이 사실상 부재한 현실 속에서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딱 하나의 성공 사례를 통한 배니스터 효과
그러면 과연 수도권 일극 체제를 탈피하고 다극 체제로의 전환이 가능할까? 마찬가지로 비수도권 지자체에서 첨단 신산업 육성이 가능할까?
필자 개인적으론 딱 하나의 성공 사례가 나와준다면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지리라 생각한다. 삶의 질 등이 수도권과 동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적할 수준 정도의 비수도권 지역이 나와준다면 이는 다른 지역에도 자연스레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즉,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어찌 보면 딱 하나의 성공 사례를 '우선'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산업 측면에서도 비수도권 지역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신산업 육성을 통해 청년인구 이탈을 막고 자생력 제고가 이뤄진 사례가 생겨난다면 다른 지역에서도 뒤이어 성공 사례가 나오리라 생각한다.
이는 '배니스터 효과'(The Bannister Effect)와 관련 있다. 배니스터 효과란 인간이 4분 이내에 1마일(1609m)을 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믿음을 1954년 로저 배니스터가 3분 59초에 돌파하며 그간의 통념을 깨자 다른 선수들도 연달아 4분의 벽을 돌파한 현상을 말한다. 즉,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한 사람이 가능케 하면, 다른 사람도 생각이 바뀌면서 결과가 달라지는 현상으로써 하나의 성공 사례가 나오면 이에 자극을 받아 연달아 다른 성공 사례를 유도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필자가 재직 중인 국토연구원에서는 '비수도권 신산업 클러스터 육성방안 : 충청권 바이오산업 사례'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60여 명의 다양한 인터뷰 대상자와 심층 논의 후 '어쩌면' 성공 사례가 나올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 가능성을 보았다. 여기에서는 비수도권 지역에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벤처기업 육성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비수도권 지역의 산업구조 취약점, 대기업 생산공장 의존성
1960년대 산업화 이후 상당수 비수도권 지역경제는 대기업 생산공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고용 파급효과가 큰 생산공장 유무에 따라 지역의 흥망성쇠가 좌우될 만큼 기업 의존적 경제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가뜩이나 취약한 지역 산업구조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욱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 무역성장을 주도하던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의 구조적 한계로 다국적기업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자 국외 제조공장을 본국으로 회귀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전략을 펼치는 중이다. 특히, 미국은 기술 패권 회복을 위해 '반도체 및 과학법', '국가생명공학 및 바이오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 등을 통해 성장 가능성이 큰 첨단산업 전반에 걸쳐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상당수 지자체는 여전히 대기업 및 다국적기업의 생산공장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지역 내 일자리 창출에 가장 확실한 방안이기도 하고, 지자체장의 임기를 고려할 때 단기적인 시간 동안 가장 확실한 성과 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지역경제의 자립성이나 산업구조 건전성 측면에서는 대기업 유치가 아닌 지역에 연고를 둔 성장 가능성이 큰 벤처기업/강소기업 육성방안으로 전략의 변화가 필요하다.
대기업의 생산공장에 의존적인 지역산업 구조는 기업의 전략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이미 군산지역의 경제구조를 지탱하던 현대중공업(대기업) 군산 조선소와 GM(다국적기업)의 군산공장 폐쇄가 종국에는 지역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고 정부의 개입을 불러일으키며 '산업위기대응 특별지역'으로 지정된 바를 목격했다.
비수도권 지역의 벤처기업 육성 및 생태계 활성화 필요성
특정 기업 의존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비수도권 지역에서 건실한 벤처기업이 많을수록 좋은데 사실 인력, 자금 부족 등 지방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그러나 벤처기업은 여전히 아이디어(기술)를 갖춘 소수 인력과 비교적 작은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창업할 수 있다는 장점과 최근 지자체마다 창조경제혁신센터 등 창업지원을 돕는 중간 지원 기관의 역량이 높아진 점은 긍정적인 요소다.
또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운영하는 민간주도형 예비창업지원 프로그램(TIPS)을 포함하여 아이디어만 좋으면 창업 장소에 상관없이 국내외 투자업계로부터 투자유치도 가능하니 비수도권이라는 지리적 제약을 받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만난 비수도권 기업인 중에는 1990년대 후반 국외 투자자로부터 투자받아 창업하여 연달아 세 번 성공적으로 기업을 매각하고 네 번째 창업 한 대표도 있고, 2000년대 초에 6평 남짓 컨테이너에서 창업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대표도 있다.
창업하기 좋은 환경인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광역철도는커녕 지역 내 대중교통도 불편한 곳에서 창업했고, 투자자나 기타 지원 여건이 부족한 현실에서도 성공적으로 창업을 한 기업인이 지역에도 상당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이들이 여전히 지역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물면서 후배 벤처기업에 자금투자, 컨설팅, 네트워크 형성 등에 크게 기여한다는 사실이었다.
성공한 비수도권 기업인은 공간이 주는 익숙함, 애착, 네트워크 등으로 지역에 뿌리내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후배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와 경험에 기반한 지식을 공유하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지역의 벤처생태계는 더욱 공고해지고, 역동성이 생겨나며, 지속하여 혁신적인 기업이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듯 비수도권 지역은 내외부적 요인에 의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대기업 생산공장이 아닌 벤처기업 생태계 조성에 중점을 두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비수도권 소재 벤처기업 육성·활성화 방안
지방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대표를 만나보면 제일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가 비수도권에서는 좋은 인재를 채용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몇 년 경력을 쌓은 즉시전력감 인재는 호시탐탐 삶의 질이 더 나은 수도권으로 이전하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또한, 투자를 위해 벤처캐피털 심사역과 만날 기회도 수도권과 비교하여 현저히 낮다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와 기업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기업 대표들을 만나보면 기업에서 할 수 있는 건 대기업 수준의 연봉과 아파트(숙소) 제공, 스톡옵션 등이라고 한다. 필자는 여기에 더해, 파격적인 근무 여건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젊은 세대가 일하고 싶어 하는 대기업 상당수는 꽤 유연한 근무체계를 갖고 있지만, 지방소재 기업 상당수는 이런 유연 근무체계 등이 부족하다. 주5일 출근을 고수하기보다는 주4일 혹은 주 4.5일(금요일 오전 출근만 혹은 월요일 오후 출근만)을 구직자에게 제안하면 어떨까? 원격근무를 활성화하고 차라리 수도권까지 통근 버스를 운행하는 방안은?
지역 내 인재를 붙잡아두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지역의 인재를 유입하기 위한 전략을 세울 때, 일주일에 3~4일만 지역에 머물게 하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럼 지자체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장 어려우면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건 정주 여건 개선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문제일 수 있지만, 지방일수록 자동차가 없으면 불편하다. 물리적 도로가 있다 한들 거점 공간을 잇는 교통서비스가 불편하니 출퇴근이 힘들다.
또 수도권보다 직주근접의 장점이 있음에도 퇴근 이후 여가생활을 할 소위 젊은이들을 위한 놀이문화가 부족하다. 지자체는 지역 내 건실한 기업에 대한 홍보의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학생들은 지역 소재 유망 기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지원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건 기업이 지역을 떠나지 않도록, 즉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간단한 예로, 신생기업이 성장하여 확장(scale-up)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공장용지 부족 문제 등을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해결하여 지역에 많은 기업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인식의 변화, '가능성'이 '가능함'으로
최근 비수도권 지역에서도 유망한 벤처기업이 많이 나오는 추세인데, 지자체는 여전히 단기적이고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대기업/다국적기업의 생산공장 유치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도권 일극 체제를 탈피하고 격차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지방에 돈 잘 버는 기업이 많이 생겨나 직원의 연봉·복지 등에서 비교우위가 발생해야 청년들의 수도권 쏠림도 막고, 지역의 경제산업구조도 더욱 건실해지리라 생각한다.
비수도권 지역에서 판교만큼이나 벤처생태계가 활발한 곳이 조성되고, 송도만큼이나 바이오산업 경쟁력을 갖춘 지역이 딱 하나만 나와 준다면, 배니스터 효과로 인해 다른 성공 사례도 연달아 나올 거란 긍정적인 전망도 가능해 보인다.
즉, 수도권 일극 체제를 탈피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하나의 비수도권 성공 신화일지도 모른다. 그게 신산업 육성이든 세계적 유니콘 기업의 탄생이든 아니면 벤처생태계 환경 조성이 됐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야 우리의 인식이 막연한 '가능성'에서 확고한 '가능함'으로 바뀔 수 있다.
■ 필자소개
전봉경 위원은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도시 및 지역계획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국토연구원 국토계획·지역연구본부에서 부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지역산업, 균형발전, 혁신시스템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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