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8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에서 오랜만에 김정은 위원장이 시정연설을 가졌다. 이번 시정연설에서도 여전히 자력갱생 노선을 고집하며 향후 북한의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우선 핵무력 정책의 법제화를 일대 사변이라고 지칭하며, 북한은 핵무력이 더 이상 협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둘째, 국가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차질 없이 추진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자력갱생을 보장하기 위해 경제전반의 활성화와 공급능력의 회복 및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셋째, 식량문제와 인민소비품문제를 조만간 해결하기 위해 농업생산 및 경공업 발전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넷째, 대규모 건설사업, 특히 동·서해를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 사업을 언급했다. 다섯째, 방역능력을 높이기 위해 백신 접종 실시와 마스크 착용을 권고했다.
북한이 처한 상황, 북한경제 실정 등을 고려하지 않고 연설 자체만 본다면 평면적이고 크게 주목받을 부분은 없다. 그런데 북한 현실을 감안할 때 시정연설의 내용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핵무력 법제화는 핵을 사용하는 5가지 조건을 내건 것이 주요 내용이지만 임의성, 무조건성을 내포해 사실상 무제한의 핵 선제공격을 명기하고 있어서 사태 심각성의 도를 넘어서고 있다.
북한 내부의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하면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말만 있지, 실제는 제대로 추진될 수 없는 상황으로 평가되는데,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경제 현실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금속공업, 화학공업 및 전력부문 등에 많은 돈이 투입됐고, 이를 기반으로 농업 및 경공업 부문을 잘 세우면 먹는 문제와 생필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전히 전기는 안 들어오고 밀보리 재배 확대로 인해 오히려 농업생산은 떨어진 것이 현실이다.
생필품 생산을 위해 원부자재의 공급이 필요하지만 해외조달 길이 막혀있으므로 생산 자체에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에 슬쩍 동·서해를 연결하는 대운하 건설사업 계획을 언급했다. 사전에 과학적 타산을 해야 한다고는 했지만 북한체제의 특성상 조만간 대운하 연결사업이 가장 중요한 국가사업으로 부각될 듯하다.
백신 접종을 위해 외부의 지원이 불가피하지만 여전히 국경은 닫힌 상태다. 이와 같이 종전의 시정연설과는 달리 중요하게 강조한 사항들 대부분이 북한이 처한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다.
국경폐쇄가 경제적 어려움의 트리거
북한의 경제상황은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은 경제적 어려움의 원인을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더해 코로나, 자연재해 등으로 돌리고 있다.
북한의 원인분석과는 달리 북한경제가 심각해진 이유는 국경폐쇄가 트리거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한국의 5.24 조치로 남북한 경제교류가 중단된 이후 북한과 중국의 무역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일종의 풍선효과다.
2017년 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강화되기 직전까지 북·중 무역은 70억 달러를 상회하기도 했다. 여기에 비공식 무역까지 포함하면 북한의 대외무역은 역대 최고 수준을 보였고 북한경제의 대외의존도는 30%를 상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탄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수출품목이 제재 대상이 되고, 중국도 일부 제재에 동참하면서 북·중 무역은 빠르게 감소했지만, 그래도 연간 2~30억 달러 수준을 유지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인한 펜데믹으로 2020년 초반부터 북·중 무역이 사실상 중단됐다.
더욱이 북한은 2020년 10월 이후 북한 내부에 코로나 진입을 차단한다는 이유로 국경을 전면 폐쇄함에 따라 명맥을 유지하던 비공식 무역마저도 중단됐다. 동 시기에 북한은 자력갱생 노선을 선포하며 2021년부터 국가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반면 북한경제는 1990년대 이후 시장화가 진행되었고, 최근에는 경제의 대부분이 시장에 의해 작동되어 왔다. 주민들은 시장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조달하고, 공장·기업소는 외부에서 조달한 원자재로 생필품을 생산해서 시장에 내다팔아 운영해 왔다. 협동농장은 생산한 알곡의 일부만 국가에 납부하고 생산량의 대부분은 시장에 팔아서 생활하는 방식이 일상화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공업부문의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와 농업부문의 포전담당제를 통해 이러한 변화를 일부 수용하기 시작했고, 2019년 헌법개정에서는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를 경제운영의 기본 방침으로 규정했다.
사회주의 기업책임관리제는 말 그대로 기업 스스로 생산물을 정하고, 수익을 창출해서 종업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공장·기업소는 해당 종업원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식량도 공급해야 하고, 생활비도 지급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난 십수년 동안 공장·기업소가 돌아갈 수 있도록 설비를 공급하고, 원부자재를 조달하는 초기 자금을 '돈주'나 외부 투자자들이 일상적으로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제로 국경이 폐쇄된 지 2년 가까이 지나고 있다. 해외에서 조달하던 설비 및 원부자재는 공급루트가 차단됐다. 급하게 내부에서 조달해야 했지만, 이를 위한 설비 투자는 물론 전기공급 등이 어렵기 때문에 단기간 내 내부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농업부문 역시 종자 및 비료 조달 등에 애로요인이 발생했고, 내부조달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부분의 경제 단위들은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국경이 열리기를 기다렸는데 2년째 접어들고 있다. 2022년 초반 잠시 북·중 국경이 열리는 듯했지만, 북한 내의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이번에는 중국이 북·중 국경을 닫았다. 시장화의 확산으로 대외의존도가 높아진 북한경제에 국경폐쇄의 장기화는 북한경제를 한계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핵무력 증강에 반비례한다
북한경제는 이미 시장화가 깊숙이 진행되어 왔다. 불과 3년 전까지 북한은 주민들에 의한 시장화를 헌법에도 간접적으로 명기하는 등 제도적으로 수용하는 듯했다. 그런데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협상 결렬 이후 북한당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기 시작했다. 자력갱생을 기반으로 한 국가경제개발5개년 계획이 그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시정연설에서 사회주의 경제운영방식이 다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주장한 것은 그만큼 강제로 시장화를 억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비핵화의 비타협성을 강조한 핵무력의 법제화는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물론 중국 및 러시아와의 경제교류 재개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북한 핵은 한국, 일본, 미국 등만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및 러시아도 예외일 수 없음이 이번 법제화에서 드러나고 있다. 만일 중국이 제재 강화에 동참한다면 북·중 국경폐쇄에 버금가는 어려움을 북한경제에 줄 것이다.
또한 밀보리 재배 면적의 확대는 기존 북한농업생산 부문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함에 따라 오히려 전반적인 곡물생산량의 감소를 초래하고 있다. 국경폐쇄로 오로지 내부에서만 식량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체 생산량 감소는 식량부족 현상을 더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북한주민들의 식생활이 알곡 위주에서 밀가루를 이용한 빵이나 국수의 비중이 높아지는 변화를 보여왔는데, 국경폐쇄로 밀가루 수입이 안 되니 밀을 직접 재배하라는 지시일 것이다.
그런데 북한주민의 주식인 옥수수 재배면적을 갑자기 줄이고 사전 실험재배와 종자개발 등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밀보리 재배면적을 확대하라고 하면 당연히 생산량 감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 북한이 인도 등 동남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식량 지원 요청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러시아와는 재래식 무기 지원 및 전후 복구 인력 제공 등을 협의하면서 식량 및 석유 지원 등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력갱생 노선이 잘 되고 있다는 말과는 달리 종래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급하게 물자를 확보하려는 움직임들이 곳곳에서 포착된다. 북한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경제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예측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포기하고 자력갱생 기조에 맞춰 또다시 적응하면 되겠지만, 조만간 국경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피부로 느끼는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더욱이 북한당국은 기존의 시장화에 역행하는 대책 없는 정책을 내놓으며 주민들을 내몰고 있다. 지금 북한이 선택할 길은 외부세계에 지원을 요청하는 과감함이다. 핵무력으로 없는 외부의 위협을 만들어 내어 이를 차단하겠다는 허구와 씨름하면서 고갈된 내부동원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에 긴급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해야 할 시기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이 도움을 요청할 경우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지금은 문을 활짝 열고 긴급 수혈을 받아들여 북한경제를 살려놓고 봐야 한다.
1994년 이후 3년 연속된 자연재해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시기 북한은 유엔 등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례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핵무력 사용 공간을 확장할수록 북한경제는 왜소해지고 회복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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