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찌질이 중에서 대장 도문딩이 앞장서는데, 덧배기 병신춤으로 놀이마당을 두어 바퀴 돌면서 동네사람들과 흥을 돌리기 시작한다. "일자(一字)나 한 장 들고나 보니 일일송송 화송송 밤중 샛별이 완연하구나." 라는 장타령을 돋우면 뒤에 따라오는 문딩이들이 "품바나 품바나 잘한다" 라며 맞받아친다. 이렇게 나의 탈바가지 놀이가 시작되었었다. 대학 2학년 때였다.
대학 입학하자마자 나는 탈춤을 처음 접했다. 춤을 잘 추지 못하여 나에게 돌아오는 배역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여러 가지 춤판에 빠지지 않고 구경 다녔다. 당시 탈춤을 처음 선보였던 대학 캠퍼스 풀밭에서 봉산탈춤 공연할 때면 몇 백 명이 모일 정도로 탈춤의 인기가 높았다. 일 학년 때부터 봉산 팔목중 4목과 5목중 춤을 추었는데 어깨는 굳어 허리마저 안돈다고 핀잔을 자주 받았다. 그래도 흥을 잃지 않고 계속 따라 다녔다. 춤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2학년 여름방학 가산오광대 발굴과 전수를 위해 한 달 이상을 경상남도 진주시 근처 축동면 가산리에 먹고 춤추며 탈도 만들고 살았었다. 가산오광대를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 전파한 이훈상(동아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선배의 기획으로 이뤄진 가산오광대와의 인연은 나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찌질이었는데 춤을 추면서 점점 세상을 열어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가산오광대를 기록하고 배우는 답사(총)인원이 40명 가까이 되었는데, 저녁마다 춤사위를 배우면서 날마다 막걸리 2말을 춤의 에너지로 삼았었다. 서른 가구도 채 안 되던 작은 가산 마을 전체가 한 달 동안 축전이였다. 악사였던 한계홍 선생님, 조용한 성품으로 양반역의 김오복 선생님, 큰 키에 말뚝이 채로 하늘을 치며 호방했던 리얼 말뚝이 한윤영 선생님, 그리고 꽹쇠 천재였던 한주영 선생님이 생각난다. 이분들 나중에 탈춤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서 생활이 조금 폈기는 하지만 그 때에는 살림살이 힘들었다. 그래도 우리들과 같이 춤을 추고 놀았다.
당시 30대로서 비교적 가산 마을의 젊은 형들이 있었는데, 방학래 형과 백상옥 형과 40대 한우성 선생님도 생각난다. 지금은 보유자 한우성 선생님이 가산오광대 전반을 이끌고 계신 것 같다. 어느 저녁 놀이판이었는데, 그날 문딩이 배역 한 분이 갑작스레 집에 일이 있어서 마을회관 놀이터에 못 나왔다. 오(5)문딩이인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고 하면서 상옥 형이 옆에 서있던 나보고 "쫑딕아, 니 여기 문딩이 바가지 하나 씨고 내 뒤로 온나." 어떨 결에 나의 문둥이 배역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문둥이 대장인 도문딩이까지 했다. 절름발이에서부터 입찌그랭이까지 모든 문딩이 배역을 다했으니 말이다. 가산에서 한 달 동안 배운 실력으로 1975년 그 더운 8월 가산에서 가장 가까운 사천읍 시민공원에서 공연까지 했다. 그 당시 삼천포시는 컸지만 사천읍은 동네 마을 수준이었다. 거기 사천읍 회관이 있었는데, 가산 연희자와 우리 학생 놀이패 일행은 1킬로미터에 다다르는 긴 마을길 따라 매구굿을 치면서 본 무대인 시민회관 무대로 올라갔다. 그렇게 나의 무대생활이 시작되었다. 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역시 문딩이 춤으로 데뷔했다.
나는 규격화된 춤사위에는 약했는데, 그때그때 흥에 맞춰 규격과 규정 없는 문딩이 병신춤에는 상당한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듣게 되었다. 뭐나 대단한 소질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칭찬에 나는 스스로 속기를 자청하여 병신춤에 자신을 갖게 되었다. 무선마이크 없었던 때라 바가지를 쓴 상태에서 춤추면서 동시에 장타령 소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나는 고음을 내면서 바가지 틈 사이로 소리를 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 이 소리 저 소리 내다보니 내 나름대로의 소리를 찾았다는 뜻이다. 이후 나는 춤보다 오히려 소리에 더 자신을 갖게 되었다.
가산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해 가을 케이비에스 티비 방송국에서 가산오광대를 소개하는 맛뵈기 공연 초대를 받았다. 오방신장무와 오문둥이 춤을 선보였다. 나는 하던 대로 티비 무대에서도 문딩이 춤을 추었다. 그런데 피디가 갑자기 그만하라며 우리 춤을 중지시켰다. 장애인 협회에서 항의가 올 수 있으므로 방송은 안 된다고 했다. 당시 방송국 피디조차도 봉산탈춤을 처음 본 사람이었는데 하물며 가산오광대야 말할 것도 없었다. 병신춤의 대가로 뒤늦게 알려진 공옥진 선생님이 새롭게 유명해지면서 탈춤이나 창무극 등이 티비에 자주 나오게 되었다. 공옥진 선생님, 유명해졌지만 너무 가난하게 살다가 쓸쓸히 돌아가셨다.
시골 연희자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가산오광대를 무형문화재로 등록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편 전승문화가 국가관리 안으로 들어오면 탈춤의 생생한 민간풍속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도 많이 했다. 그러나 먹고 살면서 춤을 출 수 있는 현실의 생계 여건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민 가득한 토론을 거치면서 무형문화재 등록을 추진했고, 그 당시 나는 군복무 중이어서 크게 나서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써서 가산오광대는 1980년도 말에 국가무형문화재 73호로 등록됐다.
이후 나는 인생의 변곡을 맞으면서 늦은 나이에 독일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리고 탈판이나 놀이패에서 완전히 떠났다. 일부러 노는 습성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철학 공부를 위해서 독일로 갔지만 내가 하는 철학 분야는 과학 쪽이어서 여태까지 해오던 풍류의 삶과는 전혀 다른 논리의 세계였다. 그 이후 나는 양면, 그리고 이중의 세계 속에서 몇 십 년을 살았다.
몇 년 전이었다. 2017년 가을 채희완 형이 갑작스런 전화를 나에게 줬다. "종덕아, 너 오래간 만에 춤 좀 춰봐라." 헉, 나는 다시 마수에 걸려들었다. 희완 형이 그동안 주-욱 일해오던 민족미학연구소에서 해마다 연말이면 주관해온 창작탈춤패 공연에서 봉산탈춤 한 번 춰보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리 하겠다고 답변했다. 40년 전 췄던 춤사위가 기억날까? 무대도 제법 큰 부산 민주공원 소극장이었다. 정말 큰 걱정이었다. 나는 공연 전 날 미리 가서 춤 선배로부터 4목과 목동춤을 다시 배웠다. 좁은 여관방에서도 침대를 한쪽으로 밀쳐놓고 4목 춤사위를 밤새도록 익혔다. 드디어 공연은 시작됐다. 20명 넘는 공연출연자 중에서 오직 나만이 미숙자였기 때문에 연출자 희완 형은 내가 춤사위를 틀릴까 봐 전전긍긍하셨다. 다행히 춤사위 하나 놓치지 않고 내 몫인 봉산 4목과 뭇동춤을 겨우 마쳤고, 전체 공연도 성공적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40년 전 춤사위를 다 잊었었는데 어떻게 기억했는지. 춤사위를 연결하는 춤의 순서를 싸그리 까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외사위, 겹사위, 양사위, 만사위 그리고 까치걸음 등 춤동작 하나하나는 생생히 기억되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춤은 몸의 기억이다. 내가 그동안 책으로 공부한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 까먹고 말지만, 장단과 가락에 맡겨진 나의 춤은 내 몸으로 기억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억은 살아있다. 머릿속 지식의 기억은 굴절되고 짜깁기도 되지만, 몸의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생생히 접목하는 삶의 실존이다. 몸의 기억은 세월을 뛰어넘는 생명의 통로이다. 오랜 동안 잊었던 춤사위를 조금이나마 몸 안으로 모시면서 생명의 동력을 호흡할 수 있었다. 가짜와 기만이 득세하여 생명이 꺼져가는 세상에서 몸을 기억하는 여러 가지 통로를 더 찾아봐야겠다.
필자 최종덕 : 1970년대 대학 탈춤패, 현재 독립학자 (현대자연철학 전공)https://philonatu.com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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