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지하는 글씨와 그림에서도 당신의 시 못지 않은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주었다. 글씨보다 그림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또 그림에 더 열중하였지만, 사실상 그의 그림과 글씨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반듯이 거기에 걸맞는 화제를 들어감으로써 작품으로서 완결미를 갖추었으니, 서화(書畵)가 일체로 되는 세계였다.
김지하의 글씨는 그의 시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정형과 법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글자의 크기가 일정치 않고 한 글자 안에서도 강약의 리듬이 강하다. 그의 난초 그림 중에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는 화제가 쓰여 있는 작품이 있다. 풀이하여 '잘 되고 못 됨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불계공졸'은 추사 김정희가 즐겨 사용한 문자도장으로 널리 알려진 문구이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는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았다"는 평을 받았는데 김지하의 글씨 또한 그런 세계로 나아갔다.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김지하는 한글과 한자 모두 독특한 자기 서체를 갖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추사를 본받아 썼다며 '방 추사(倣 秋史)'라 밝힌 작품도 있고 간혹 예서체와 전서체를 구사하기도 했지만, 김지하 글씨의 본령은 역시 초서와 행서의 필법에 의지한 울림이 강한 한글 서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지하 글씨의 필획은 대단히 유려하다. 흘림체가 갖고 있는 특성을 살리면서 한 글자 안에서 크기를 달리하여 그가 200자 원고지에 쓴 <황톳길>을 보면, '황'자에서 ㅎ과 ㅇ의 크기가 다르고 '핏자국'은 세 글자가 크기가 다 다르다. 이것을 붓글씨로 쓴 <불귀(不歸)>의 첫 행 '못 돌아가리'를 보면 더욱 명료히 드러난다. 특히 그의 붓글씨에서는 붓에 가하는 힘을 달리하여 글자의 짙고 옅음이 리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김지하의 글씨는 기본적으로 유려한 가운데 무언가를 호소하는 듯한 절절한 울림이 있다.
김지하는 한글 서체만으로 본격적인 작품을 남긴 바 없지만, 1991년 어느 날 인사동 평화만들기 카페에서 만취한 상태에서 단숨에 써 내려간 이용악의 <그리움>이라는 시를 외워서 쓴 것을 보면 그의 글씨가 갖고 있는 내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2.
김지하가 본격적으로 난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 12월, 오랜 감옥 생활 끝에 출소한 뒤 원주에 칩거하면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영향과 지도를 받으며 '지하 난(芝河 蘭)'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무위당의 난초는 잡초처럼 그리면서 스스럼없는 필법에 허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김지하의 초기 난초 그림을 보면 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춘란(春蘭)의 매끄럽고 날렵하고 유려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화제를 그의 독특한 글씨로 써넣어 작품으로서 완결미를 보여주었다. 80년대 전반기 김지하는 오랜 세월 감옥에 있으면서 보고 싶었던 벗, 선생, 후배들을 위해 많은 난초를 그렸다. 1983년 어느 날, 내가 원주로 찾아뵈러 갔을 때 나뿐만 아니라 내 벗들에 줄 난초 그림을 그려 봉투에 담아두고 이름 대로 전해주라고 하였다.
정판교는 말하기를 "내가 난초를 그리는 것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를 갖고 세상을 위하여 애쓰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는데, 김지하의 난초 그림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실제로 80년대를 풍미한 재야단체의 기금마련전에 김지하는 수많은 난초그림을 희사하였다.
김지하의 난초는 1986년 해남 시절에도 유려한 난엽의 아리따움을 자랑한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와 일산 시절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풍란(風蘭)으로 바뀐다. 화제부터 달라졌다. 비근한 예로 한 <풍란> 작품에는 '이착연 경지무구(履錯然 敬之無咎)'라는 글이 쓰여 있다. 이는 주역 64괘 중 30번째인 이(離)괘의 초구(初九)를 풀이한 것으로 "밟음이 공경스러우면 허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 함축미를 담은 것이다. 그리고 2001년 11월, 김지하는 인사동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가지면서 자신의 난초 그림에 대하여 세 가지를 말하였다.
첫째는 표연난(飄然蘭) : 혼돈(카오스) 속에서 새 질서를 찾는 난.
둘째는 소산난(疏散蘭) : 흩어진 가운데 새 질서를 찾는 난.
셋째는 몽양난(夢養蘭) : 태고의 무법을 지키는 난
이러한 김지하의 난초 그림이 지향하는 세계는 한마디로 '기우뚱한 균형'이었다. 그것이 김지하가 늘 강조해온 '미(美)의 율려(律呂)'였다. 우리는 김지하가 동학에 심취하여 전통사상을 다시 우리시대에 소환하였음은 모두가 알고 존경하는 바이지만, 한편 김지하는 동서양의 고전도 파고들어 존재와 현상의 제 법칙을 깊이 있게 성찰하였다. 그 대표적인 동양사상의 예가 <주역>을 깊이 있게 탐구한 것이다. 동학에 심취한 김지하가 불교의 달마도를 그린 것도 그렇다. 이에 대해 김지하는 "동학은 내 실천의 눈동자요, 불교는 내 인식의 망막이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동양 사상뿐만 아니다. 서양 미학과 미술에도 심취하여 김지하는 나 같은 후배에게 헤겔의 제자인 칼 로젠크란츠(K. Rosenkranz, 1805∼1879)의 <추(醜)의 미학>을 읽으라고 권하였고, 이탈리아 형이상학파 화가인 키리코(Giorgio de Chirico, 1888~1978)나 멕시코의 민속 주제를 현대회화로 승화시킨 타마요(Rufino Tamayo, 1899~1991) 같은 화가에 주목하라고 훈도하였다.
김지하의 이런 예술적 성찰은 난초 그림보다도 2000년대 들어와 보여준 매화와 달마 그림에 더 잘 나타나게 된다.
3.
2014년, 김지하는 인사동 선화랑에서 본격적인 작품전을 가졌다. 원주의 후배 김영복의 기획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회에는 묵매도, 달마도, 수묵산수도, 그리고 채색 모란도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되었다.
이때 보여준 김지하의 매화 그림은 그야말로 '추의 미학'이고 '밟아도 공경스러우면 허물이 없는' 세계였다. 김지하는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난초는 선비들이 즐겨 그리는 문인화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매화는 달랐다. 기굴(奇崛)한 농묵(濃墨)의 매화 줄기에 작은 담묵(淡墨)의 꽃송이가 빼곡이 피어난 모습은 그의 화제대로 "괴로움 속의 깊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김지하는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수묵산수화를 그렸다. 농묵과 담묵이 카오스를 이루면서도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가 추구해온 대로 화면 속에 '기우뚱한 균형'이 유지된다. 그는 작가의 변에서 이렇게 말했다.
"수묵산수는 우주의 본체에 대한 접근이다. 서양화의 사실주의와 다르다. 산(어두움)과 물(밝음), 농경과 유목 문화의 대배 등을 담채와 진채(眞彩)로 드러내 보았다."
김지하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그림의 세계에 몰입한 것은 <달마도>에서 그 진가가 나타난다. 달마도는 상징적이고 초현실적인 인물화인데, 인물화는 여간한 아마추어는 그릴 수 없다. 그림에 대한 숙련이나 천분이 있지 않고는 그릴 수 없다. 김지하에게는 일찍부터 그것이 있었다. 대설 <남(南)>의 표지화 그림이나 86년 그림마당 민 개관기념전에 출품되었던 춤추는 호랑이를 그린 <공갈무도(恐喝舞圖)>는 오윤의 <무호도(舞虎圖)>와 쌍벽을 이루는 명화였다.
김지하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사물을 보면 형상이 잡혀 그걸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 했는데, 집안 어른들이 그림을 그리면 가난을 못 면한다고 못 그리게 했단다. 그래서 손을 묶어 놓으면 발가락으로 숯을 집어 벽에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도 미술과에 가지 못하고 미학과로 들어갔다.
당시 서울대 미학과는 미술대학에 있어서 데생 수업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지하가 평생의 은사로 모시는 동양미학의 김정록 교수는 당신이 화가이기도 하여 사군자와 수묵화를 직접 가르쳤다. 이런 소양이 김지하의 달마도라는 새 장르를 낳았다.
김지하의 달마도는 연담 김명국의 저 유명한 <달마도>의 달마와 달리 '코믹 달마'로 선승(禪僧)을 달마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지하 자신은 이 '코믹 달마'가 만화로 전락하지 않을까 경계하면서 달마의 표정과 거기에 어울리는 선게(禪揭) 한 마디를 화제로 써넣어 그가 역설적으로 말하는 '초현실적 현실'을 담아냈다. "꽃이 지다.", "이 푸른 신새벽에 일어나 무엇을 하려는가" 화제에 따라 달마의 얼굴 표정과 눈동자의 모습이 다르다. 이를 보면 김지하의 달마도는 그림과 글씨와 시구가 삼박자를 이루며 시서화(詩書畵)가 일체를 이룬다.
그리고 김지하는 이 달마도를 빌려 자신의 <자화상>을 한 폭 그렸는데, 우락부락하기 그지없는 상으로 눈썹이 휘날린다. 왜 그렇게 그렸냐고 물으니 웃으며 대답하기를 자신은 눈썹이 잘 생겼다고 했다.
굽히지 않는 저항과 용기있는 투쟁으로 한 세상을 살아온 불굴의 투사이면서도 김지하의 일면에는 여린 순정이 있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나팔꽃'같은 밝은 서정도 있다. 그런 순정과 서정을 그린 것이 채색 모란도이다. 붉은색 물감을 몰골법(沒骨法)으로 단숨에 뭉쳐 풀어낸 속필(速筆)의 꽃송이가 청순하고 싱그럽기만 한데, 화제는 "이월 보름은 봄이 가깝다."라고 희망을 말하기도 하고, "모란도 갈 길을 간다네"라며 아쉬움을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채색 모란도는 화사하면서 '애린'을 생각게 하는 아련한 아픔이 동반된다. 김지하는 전시회 팜플렛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어려서 제일 그리고 싶었던 건 뜰 뒤의 모란이었습니다."
김지하는 결국 그런 모란꽃을 화사한 채색화로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김지하는 위대한 시인이자 동시에 위대한 현대 문인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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