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당은 신의 일을 행하는 자라고 스스로 그럽니다.
신의 일을 하던 이가 돌아가셨으니
이제 누가 그 일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요?
노겸 김지하 시인은 살아생전,
이도 저도 발붙이지 못하고 죽어 떠도는
'찢어진' 중음신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중음신으로 살던 이가 이제 돌아가셔서
중음신이 되어 떠돌고 있습니다.
살아 중음신이 죽어 또 중음신이 되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요?
중음신의 중음신이니,
풍자인가요? 해탈인가요? 역려(逆旅)인가요?
살아남은 자는, 남녘땅 사람들은
언제나 비통하고 억울하고 참담합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고난과 폭풍우의 바다에
어디라 정착도, 침몰도 못하고 떠도는
난파선이라 비유하였다지요?
거듭되는 피난과 유랑과 병마의 바다에 떠도는 신세니,
갖은 몸고생, 마음고생 끝에 가셨으니,
살아남은 자들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합니다.
이제 남은 자들이 모여
떠도는 혼이 안착하기를 비는
민중문화예술 49재를 올립니다.
2.
1981년 초 봄 서울 어느 중국인 식당에서
6년 8개월 만에 마흔 살
김지하 시인을 맞이하여,
흩어진 김지하패 광대들의 모임에서입니다.
오랜만의 맞절을 마치기도 무섭게
감방에서, 절대 고독과 절망의 시공간에서 뜨겁게 흘린
환희의 눈물을 얘기하셨습니다.
하나는
쇠창살 사이에 티끌이 쌓여 손톱만한 흙덩이에
어디선지 날아 심어진 씨앗이
뿌리를 박고 싹을 티운 풀잎을 보고서입니다.
생명의 거룩함과 신비에
눈물로 쏟은 환희이었지요.
또 하나는
동학 2대 교조 해월 최시형 선사께서 말씀하신
'향아설위'(向我設位)를
어두운 감방에서 넌즛 듣고 하염없이 흘린 눈물이랍니다.
두 번째 흘리신 눈물의 의미는 묘연하기만 해서
아무도 그 자리에선
동의, 동감의 눈물을 함께 흘리지 못하였습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인
나를 향해 제상을 차린다는 뜻인 줄
그때 듣고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민중에 대한 깨달음인 줄은 몰랐습니다.
나중 민중의 개념이 사회과학적 개념을 넘어
생명의 담지자로 깨닫게 되고,
'향아설위'가 바로 '민중의 내면적 생성적 시간임'을
깨닫게 되기는 한참 뒤였습니다.
민중의 시간이란
"자기만의 소망에 의해 생성하고,
자기의 그리움과 목적의식이
자기 소망에 의해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충만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 다시없는 그 자리에서,
진정한 민족광대란
민중의 중첩된 정서 체험을 전승하는 예인으로,
개체보존의 생명에너지를 덜어낸 바로 그 빈자리에
민중의 신명을 채움으로써,
그 자신의 신명으로
일반 민중의 숨은 신명을 불질러 내는 무당인 것임을
스스로 다짐할 따름이었습니다.
3.
이제 김시인의 살아생전 걸어오신 험로를 더듬어
살아남은 광대들의 추모굿
"남녘땅 뱃노래"를 올립니다.
황토길, 소리내력이, 타는 목마름으로,
새, 밥, 애린, 남녘땅 뱃노래를 거쳐
드디어 '흰그늘의 미학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버림받은 자, 현대판 이 땅의 바리데기들의 서천행이,
여성 동학, 여성 후천개벽,
생명 평화 우주개벽의 미학행으로 길을 재촉합니다.
그러나 가는 길은 결코 평탄치 않습니다.
1974년 2월 25일
<고행-1974>의 아프고도 좋은 인연을 드높이는 한편으로
1991년 5월 5일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죽임의 바다' 등에 낀 살을
풀어 헤치지 않고서는,
죽임을 죽인 뒤끝에 남겨진 어둠의 응어리를
샅샅이 쓸어 거두어내지 않고서는
결코 화해와 평화의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문화패가 올리는 문화예술 49재는
이 시대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 나선
생명평화 신명천지 굿입니다.
카타르시스가 아닌 '씻김'의 자리,
'화해', '평화'의 자리입니다.
5만년 만에 다시 못 올
향아설위의 자리입니다.
4.
생명평화 신명천지의 바다로
닻을 올려라.
뒤돌아 보지도 마시고,
더 이상 깊게 들지도 마시고,
생명평화의 바다,
신명이 샘솟는 좋은 나라에 닿아
유목적으로 정착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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