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서방에 엿 먹이자"…전쟁 한 달, 러시아 엘리트들에겐 무슨 일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서방에 엿 먹이자"…전쟁 한 달, 러시아 엘리트들에겐 무슨 일이?

[해외시각] 협상에 의한 조속한 평화 이뤄져야

다음은 러시아의 독립 언론인 파리다 루스타모바가 4월 1일 발표한 "'이제 우리가 서방에 엿을 먹여주지' 전쟁 한 달 후 러시아 엘리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나"의 주요 내용이다. 2월 24일 우크라이나전쟁 발발 이후 약 한 달간 러시아 정부와 국영기업 간부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이 기사에서 루스타모바는 전쟁 이후 러시아 지배계층이 푸틴의 지휘 아래 단단하게 결속했으며 적어도 10-15년간 국제적 고립을 감수하며 서방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녀는 러시아 정부의 선전선동과 서방의 가혹한 경제 제재로 인해 지배계층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온 세계가 러시아에 적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면서, 지방 정부 관리의 말을 빌려 전쟁 직후 반반이었던 찬반 여론은 3월 이후 75 대 25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특히 지배계층 내부에서 푸틴에게 전쟁 중단을 조언하거나 반대 의사를 표명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이제 러시아는 완전히 푸틴 1인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러시아 언론인의 평가는 서방측이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와도 일치한다. 지난해까지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의 수석전략가였던 데이비드 우가 최근 여론조사기관 RIWI에 의뢰해 러시아, 미국, 중국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세계적 힘의 대결에서 우리나라가 이길 것"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러시아가 80%, 미국 72%, 중국 64%로 나타났다.(<아시아 타임스> 4월 22일, 'Hostilities benefiting Putin at home')

이 여론조사는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한 일반적 방식의 여론조사가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의견을 물어보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3월 30일부터 4월 18일까지 러시아 국민 1,300명, 미국 1,600명, 중국 2,200명이 조사에 응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들의 주관적인 심리상태를 드러낼 뿐, 사태의 객관적 결과를 평가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시아 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는 3월 하순 이후 루블화 가치를 안정시켰으며 모스크바의 경제 활동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약 3천억 달러에 이르는 러시아 외환보유금 압류 등 서방의 가혹한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아직까지는 러시아 경제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쟁 이후 지금까지 유럽 국가들의 러시아산 가스 및 석유 수입대금이 매일 8억 달러씩 러시아에 송금되고 있다. 유럽은 가스의 40%, 석유의 25%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에너지 수입을 전면 중단할 수 없는 처지다. 최소한 1,2년은 에너지 수입을 계속해야 한다. 이 때문에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그리스 재무장관 등 서방의 경제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서방의 경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몇 년간은 전쟁을 계속할 능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즉 협상에 의한 조속한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크라이나의 파괴와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국 독자들의 러시아 내 상황 이해를 돕기 위해 기사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파리다 루스타모바는 BBC 러시아 기자 등을 거쳤으며 서방에서도 독립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언론인이다.

원문("Now we're going to f*ck them all." What's happening in Russia's elites after a month of war)은 그녀의 개인 홈페이지(faridaily.substack.com)에서 찾을 수 있다. 편집자

▲독립 언론인 파리다 루스타모바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 ⓒ파리다 루스타모바 홈페이지

"서방이 우리에게 제재를 가했다고, 그럼 우리도 그들에게 엿을 먹여주지. 앞으로 러시아산 가스는 루블화 없이는 살 수 없을 걸. 하지만 이건 이제 시작일 뿐이야. 서방 모두를 엿 먹일 거니까"

최근 러시아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이렇게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오랜 동안 푸틴 측근이었으나 자유주의 성향인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침공 직후인) 한 달 전만 해도 그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유혈 사태(전쟁)를 멈추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제 러시아의 권력 내부에 "불충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 물론 공무원이나 국영기업 간부, 정부와 가까운 기업계 인사들도 개인적 대화에서는 최소한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피력한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정부 관리나 국영기업 간부의 대규모 이탈은 없었다. 대기업들도 침묵을 지키거나 평화를 강조하며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는 정도에 그친다.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수 명의 푸틴 측근, 그리고 십 수 명의 정부 관리 및 국영기업 간부와 얘기를 나눴다. 취재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강력한 제재 이후, 이에 대한 지배계층의 반응. 둘째는 누구라도 푸틴에게 전쟁 중지를 설득하려는 노력이 있는지 여부.

그 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난 한 달을 지나면서 푸틴의 꿈이 완벽하게 실현됐다는 것이다. 그것은 러시아 지배계층을 자신의 휘하에 하나로 묶어내는 것이었다. 러시아 엘리트들은 이제 자신의 삶이 오직 러시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양한 분파와 파벌들의 차이나 영향력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과거 확보했던 지위나 자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평화조약이 이뤄진다 해도 이러한 러시아 엘리트의 삶의 느낌이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크렘린과 가까운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평화가 찾아오기는 하겠지만, 그 평화가 우리를 이전의 삶으로 되돌려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전쟁 이후 러시아 사회에서 푸틴의 지도력이 더욱 확고해진 두 가지 이유로 정부의 프로파갠다와 서방의 경제 제재를 꼽았다. 세계 전체가 러시아를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속에서 러시아 시민들은 "서방을 증오하며 하나로 뭉치고 있다"는 것이다.

계엄령 하에서

러시아는 현재 공식적으로 전쟁이 아니라 "특수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선전기구들은 온힘을 다해 선동 작업을 벌이고 있다. 국영 방송들은 국방부 브리핑에 근거한 일방적 전투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선전 목적의 토크쇼도 진행되고 있다. 국영 방송에 세뇌된 시민들은 러시아 군이 돈바스지역을 공격하려는 신나치세력과 싸우고 있다고 믿는다.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슬라브족을 절멸시키기 위한 생물무기를 개발 중이라는 무시무시한 소식에 시민들은 공포에 떨기도 한다.

푸틴 자신이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은 서방의 이익에 봉사하는 조국의 적이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3월 16일 푸틴은 "서방 국가들은 이른바 오열, 즉 배신자들을 활용하려 한다. 이들은 돈은 러시아에서 벌면서도 삶은 외국에서 사는 자들이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서방은 러시아 사회를 해체시키려 한다. 자신에 대한 지지가 절대적임을 확신시키기 위해 푸틴은 각종 집회와 모임을 열고 있다.

하지만 전쟁 초기에는 전쟁에 대한 시민들의 반대가 공개적으로 표출됐다. 첫 며칠 동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전쟁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고 유명 예술가, 영화감독, 작가 및 지식인들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반전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주일 이내에 당국은 모든 독립 언론을 폐쇄했고, 군사 검열을 시행했으며, 거리 시위를 즉각 차단했다. 첫 2주간 1만 5천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한 지방정부의 고위 관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정보전쟁에서 밀렸다.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부정적 생각을 가졌으며 찬반 여론이 50 대 50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곧 국영 매체들이 나서서 괜찮은 내용들을 내보냈다. 한편 서방에서 모든 러시아인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예술가, 체육인들의 국제 행사 참가를 원천봉쇄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지금은 약 75% 정도가 군사작전을 지지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응집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반전 주장은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다. 주변적 얘기일 뿐이다."

이 지역에서는 지방선거가 예정돼 있어 지역민의 민심 동향을 주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소식통에 따르면 "전쟁을 끝내자"라는 목소리는 이제 사라졌다. 물론 시민들은 전쟁 종식을 원하지만, 단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 아래에서만"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서방의 경제 제재와 전쟁에 따른 정치경제적 결과가 러시아의 일반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서방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즉 정권으로부터의 이반이 아니라 결속을 촉구할 것이라는 얘기, 물론 실업이 크게 늘어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서방 기업의(IKEA, 애플, 맥도널드 등) 대규모 철수와 기업 활동 중단, 민간 항공기의 러시아 취항 금지, 루블화 가치 하락, 달러 및 유로화의 품귀, 이런 현상들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전 세계가 자신들에 적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 국민들은 특정한 행동 양식을 보이고 있다. 한 고위 관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대한 조국 전쟁(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재건을 시작했다. 30년이 지난 후 조국은 정상을 되찾았다. 서방 사람들은 러시아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를 잘 모른 채 우리를 도발했다. 서방의 도발은 정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이의를 제기해 왔던 사람들에게조차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이제 러시아 국민을 앞으로 오랜 동안 정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방을 증오할 것이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뭉칠 것이다. 특히 중장년층에서. 이러한 러시아인들의 정서를 서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한 20년은 젊어진 것 같다며 큰소리를 쳤는데, 나의 솔직한 느낌으로는 이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일시적 방어적 반응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친정부 성향의 전러시아여론조사센터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 74%가 "특수 군사작전"을 지지하며, 푸틴의 지지도는 67.2%에서 전쟁 이후 80.6%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내가 전쟁을 지칭하는 러시아정부의 공식 용어인 "특수 군사작전"이란 말을 굳이 사용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평화 시에도 친정부 사회학자들의 말을 신뢰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전시에는 어떻겠는가. 오늘날 러시아의 모든 정보는 군사 선동 목적에 완전하게 종속돼 있다. 따라서 독립적 성향의 사회학자들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전쟁"에 대한 지지 여부를 묻는다면 찬성 비율은 낮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하긴 독립적 성향의 레바다 센터의 책임자에 따르면, 이미 전쟁 이전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여론조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당국의 박해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바다 센터는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3월 말 여론조사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3월 들어 주요 국가 기구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상승했다. 대통령 지지도는 83%, 총리 71%, 행정부 70%, 의회는 59%를 기록했다. 상황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는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독립 언론인 파리다 루스타모바 ⓒ파리다 루스타모바 홈페이지

푸틴의 꿈이 현실화 되다

서방의 유례없이 가혹한 경제 제재로 외국에 보유했던 아파트와 맨션, 요트 등을 잃고 해외 방문 기회조차 박탈당한 러시아 엘리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서방의 제재 대상에는 정부 관리와 국회의원, 정보기관 간부들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까지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던 사업가과 기업 간부들까지 포함됐다. 이들 중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올레그 틴코프, 미하일 프리드만, 표트르 아벤, 엘렉세이 모다쇼프, 헤르만 그레프와 그 측근들, 그리고 이고르 슈발레프 등이 포함돼 있다.

한 고위 공무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고로 그는 한 달 전 내게 러시아의 제국적 야망은 다른 방향으로, 즉 경제 발전 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었다.

"서방이 패럴림픽(베이징 장애인 올림픽) 선수들의 참가조차 봉쇄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다, 이제 아이폰 따위는 쓰지 말자. 중국제 쓰면 되지. 지금 내가 가진 차는 독일제인데, 앞으론 중국산이나 러시아 자동차를 타면 되겠네. 이제 와 보니 대통령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상황은 애초부터 불가피한 것이었다. 서방은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가했을 것이다."

고위직과 중간직 등 각급 관리들과 대화해본 결과 개인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푸틴에게 그야말로 횡재였다. 오랫동안 그가 이룩하지 못했던 일, 즉 러시아 엘리트들을 그의 지휘 아래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든 것이다. 서방 제재에 포함된 한 국영기업의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개인에 대한 제재가 엘리트들을 결속시켰다. 모든 사람들이 미래를 예상하면서 적어도 10-15년간은 자신의 삶이 러시아에 국한되리라는 것, 자녀들도 러사아 내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해외에서의 삶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이들은 상처 받았다. 이들이 정권 타도에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신 러시아에서의 삶의 향상을 도모할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이제까지 상당한 거리를 유지해 왔던 일반 시민과 엘리트들이 단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같은 배에 탔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정부와 국영기업 간부들과의 대화를 통해 엘리트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든 사람들 대부분은 최근 상황에 보다 열정적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1990년대와 같이 돈을 벌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제재 대상에 오른 국영기업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서방은 우리를 바보로 아나?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우리는 러시아인이다. 제재? 별 것 아니다. 우리는 움직일 것이고 일할 것이다. 그 결과를 두고 보자고."

소련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낸 45-50세의 중년층은 노년층만큼 열정적은 아니지만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입장에서 해오던 일을 동요 없이 계속하고 있다. 기술 관료이지만 상당히 고위직인 한 중년 인사는 "이제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년층은 "그래,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들판에서 애를 낳아야 하는 상황에 이를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대안이 있나?"

가장 당황스러워 하는 층은 자신이 이룬 최근의 성취 대부분을 잃게 된 35-40세 그룹이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낀다. 또한 외국에 살면서 자신들에게 이렇게 살라거나 정권 타도에 나서라든가 등의 설교를 일삼는 해외 거주 러시아인들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다.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젊은이는(역시 서방의 제재 대상이다) "그들에게 ‘닥쳐’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쟁을 지지하지 않는 또 다른 젊은 공무원은 자신이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의 삶이 고통스럽지만 외국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개인에 대한 제재와 외부 세계와의 교류 차단은 러시아 엘리트들에게 또 다른 결과를 초래했다. 해외 자산을 박탈당한 데다 서방과의 극한 대립에 따른 정치의 경직화로 이제까지 다른 견해와 이해관계를 가졌던 여러 분파들이 "함께 고생하는(squeezed together)" 처지가 된 것이다. 한 소식통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분파나 그룹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모든 사람이 경제적, 정치적로 취약하며 이제까지 이뤘던 것을 잃었다. 나름의 의견과 접근 기회를 가졌던 이들이 여러 방향과 기회를 통해 푸틴을 설득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어떤 식으로든 푸틴과 대화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얘기를 해봤지만 푸틴은 특별히 경청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난 3월 푸틴과 대화했던 한 인사의 전언이다.

푸틴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생각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푸틴을 설득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나의 질문에 대해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마디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눌 수는 있겠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푸틴은 나름 분명한 현실 인식을 갖고 있으며 이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한다. 요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서방과 친구가 되려 했으나, 서방은 우리를 적이라고 선언했다.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편입시켜 그곳에 러시아를 겨냥한 미사일을 배치하려 한다. 도발은 그들이 먼저 한 것이며 러시아에게 다른 출구는 없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협상 과정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렇게 전하면서 푸틴을 만나는 것 자체가 점점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심지어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이나 발레리 게라시모프 합참의장조차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사실 오래 전부터 푸틴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거의 듣지 않는 편이었다.

지난 한 달간(3월) 푸틴이 누군가와 일 대 일로 만났다든가 또는 러시아 엘리트 중 하나가 전쟁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는 공식 보도는 전혀 없었다. 푸틴의 측근 중에도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 국가회계원 원장 알렉세이 쿠드린과 스베르방크 총재 헤르만 그레프는 푸틴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다. 크렘린의 이른바 "자유주의 분파(liberal tower)"로 불렸던 이들은 최근 영향력을 거의 잃어 존재 자체가 미미해졌지만, 그래도 푸틴을 직접 만나 얘기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푸틴과 쿠드린, 그레프는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에서 함께 일했다. 쿠드린은 1996년 푸틴의 모스크바 진출을 도왔고, 그레프는 2000년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 경제개발 계획을 감독했다. 쿠드린과 그레프는 각각 경제 분야 장관으로서 몇몇 핵심적 경제개혁을 주도했으며, 이것이 고유가와 맞물리면서 2000-2008년 러시아 경제의 고성장을 이끌었다. 쿠드린과 그레프 덕분에 러시아는 당초 일정보다 일찍 파리클럽에 빚진 외채를 상환했으며 그 결과 푸틴은 독립적 외교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쿠드린은 두 번이나 세계 최고의 재무장관이란 영예를 누렸으며(2003년 <뱅커> 잡지 선정, 2010년 <유로머니> 선정), 2013년 푸틴은 "쿠드린과 같은 인물과 함께 일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쿠드린은 메드베데프 대통령과의 불화로 공직을 떠나 있었지만, 푸틴은 쿠드린을 자신의 친구로서 측근에 두었다.

소식통에 따르면 쿠드린은 전쟁 발발 직후 푸틴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 대화는 전쟁 이전에 예정됐던 만남이었는데, 당시 쿠드린은 전쟁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진언했다고 한다. 경제가 1990년대 초와 같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며 이에 따라 사회적 혼란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푸틴은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쿠드린의 측근에 따르면, 푸틴이 전쟁 계속 의지를 굽히지 않는 데 대해 대화 이후 수 일 간 쿠드린은 충격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쿠드린 자신은 3월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썼다.

"최근 수 주일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아마도 이 변화는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한편 그레프와 그가 2007년부터 총재를 맡고 있는 스베르방크는 침공 직후 미국과 유럽연합의 가혹한 경제제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통들에 따르면, 그레프는 푸틴에게 전쟁 중단을 진언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베르방크는 해외에 있는 직원들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다. 해외 직원들은 귀국하든가, 아니면 회사를 사직해야 한다.

한 고위 관리는 쿠드린이나 그레프는 물론 어느 누구도 푸틴에게 전쟁 중단을 설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푸틴 자신이 측근들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부질없는 일이고.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판국에 어떻게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나"

그는 전투의 중요 국면이 지난 다음에야 그런 조언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사업가 미하일 프리드만도 미국 언론 블룸버그에 지금 푸틴에게 전쟁 지속에 반하는 조언을 하는 것은 곧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내가 만난 소식통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푸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또 다른 인물로는 중앙은행 총재 엘비라 나비울리나를 꼽을 수 있다. 그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동료는 아니지만 20년 이상 푸틴을 위해 일해 왔다. 푸틴이 정권을 잡을 즈음인 1999-2000년 나비울리나는 푸틴의 경제개혁 청사진인 ‘전략-2010’의 공동 저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2013년 중앙은행 총재에 임명됐으며 이번 여름에 임기가 끝난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나비울리나는 전쟁 발발 직후 총재직을 사임하려 했으나 푸틴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푸틴, 나비울리나와 모두 가까운 두 명의 소식통과 정부 내 사정에 밝은 또 다른 두 소식통은 이 보도에 의문을 표시했다.

한 소식통은 "이런 식으로 상황을 묘사하는 사람들은 러시아 정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한마디로 일방적 기대"라고 일축했다. 그에 따르면 나비울리나는 모스크바 정치 게임의 룰을 잘 알고 있으며, 만일 그녀가 정말로 사직을 원했다면 아마 기껏해야 이렇게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상황이 엄중해지고 있고, 저의 업무 수행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 저를 내치신다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라고.

나비울리나의 지인들은 그녀가 현 상황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중 정부 사정에도 밝은 한 지인은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지난 해 가을, 나비울리나를 시기하는 측에서 그녀에게 비디오 영상을 보냈다. 그녀의 남편과 다른 여인이 함께 있는 영상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더럽고 추잡한 영상이었는데, 미슈스틴 총리의 홍보팀이 관여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열심히 일하는 그녀를 욕보인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도 그녀는 사임하지 않았다."

그는 푸틴과 논쟁을 하거나 일방적으로 사임하는 것은 곧 배신으로 간주되며 이에 대해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했다.

고위 관리의 개인적 저항

지금까지 푸틴의 전쟁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거나 반대 행동을 한 고위 인사는 딱 두 명이다.

한 사람은 전 부총리 아르카디 드보르코비치로 그는 3월 중순 공개적으로 전쟁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는 그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체스협회가 만장일치로 러시아 선수의 국제대회 참가 금지 결정을 내리면서 그의 입지가 약화된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국민적 배신"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그가 총재로 있던 스콜코보 정부 기금 총재직에서도 사퇴했다. 그의 사직은 항의 성격이 아니라 비난에 대한 굴복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1990년대 보리스 옐친의 최측근이며 제1 경제부총리로 악명 높은 충격요법(shock therapy)에 의한 경제개혁을 주도했던 아나톨리 추바이스다. 그는 지속가능 개발에 관한 대통령 자문역을 맡고 있었는데, 지난 3월 23일 터키로의 망명이 확인됐고 3월 25일 러시아 정부는 그의 해임을 공포했다. 그와 가족은 열흘 예정으로 터키 여행을 떠났으나 귀국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추바이스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없는 정치인이라는 점이다. 정부 관리들과 관영 매체들은 그의 망명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따라서 그의 망명이 다른 고위 인사의 망명을 불러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추바이스는 푸틴의 핵심 측근이 아니며, 적어도 지난 10년간 어떤 정치적 영향력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푸틴은 추바이스를 공안기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는데, 이는 1997년 푸틴에게 대통령궁 진출을 권유한 인물이 바로 추바이스였기 때문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