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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멋모르고 동아리 친구들과 추던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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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고등학생 시절 멋모르고 동아리 친구들과 추던 때처럼"

[탈춤과 나] 윤원중의 탈춤

2008년, 저는 할 줄 아는 것 없고 진로도 막막하던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탈춤 동아리 ‘탈바라기’에 가입한 것도 그저 친구들과 재밌게 놀 수 있을 것 같단 철없던 생각으로 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처음 접한 탈춤으로 제 삶의 방향이 정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요.

고개잡이, 발들기 등 타령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고, 먼저 외운 춤을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다 보면 나도 뭔가 잘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란 생각에 즐거웠습니다. 서로 가르쳐주고 자세를 교정해주고, 장난스레 지적도 하는 시간이 제겐 친구들과의 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합동 춤을 출 때면 이 무대 위에서 하나의 단체가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그렇게 기본춤을 배우고, 공연을 준비하며, 여러 배역 중 1가지를 배울 수 있는 선택의 시간이 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먼저 나서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을 챙기는 것 보다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배역을 양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장 힘이 많이 든다는 사자춤 배역으로 춤을 배우게 되엇습니다.

사자춤은 저에게 있어 하늘과 땅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 시켜주고, 협동의 의미를 알려주는 춤이였습니다. 몸이 뚱뚱했기에 자연스럽게 뒷사자를 맡아 춤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생각한 것 보다 춤이 다양하였고, 앞사자를 위한 협조를 해야 되는 춤이였습니다.

그런 춤이다 보니 함께하는 재미를 알아가던 저에게 있어 힘이 들더라도 같이할 수 있는 춤이라는 의미에서 재미를 가져 힘든시간도 참고 견디며, 친구들과 춤을 배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전주에서 계최하는 세계 무술대회에 특별히 춤 대회도 운영한 해가 있었는데 그해에 세계 춤 대회에 나가 고등부 대상을 타는 기쁨까지 맛봤을 때, 저는 처음으로 탈춤을 추며 살아가는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무엇을 하며 살지 생각조차 없었던 제게 새롭게 길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길을 걸어 보겠다는 열정이 제 마음에 처음 생긴 후부터, 저는 다른 친구들이 독서실에 가거나 야자를 하는 시간에 연습실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2010 제주도 제16회 전국청소년 민속예술제 세명컴퓨터고등학교 참여 ⓒ윤원중

보통 연습실은 지금의 선정릉역에 있는 무형문화재전수관 연습실을 이용하였는데, 매일 연습실에 들리기 전 봉산탈춤 보존회 사무실에 들려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인사드리며, 선생님들의 춤사위를 한 사위 배울 때마다 고등학교 때 배우던 탈춤은 정말 예술적 기술보다는 모두 모여 춤추는 것의 즐거움을 기준으로 교육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첫 선생님이셨던 이성주 선생님께 감사함을 가지며 탈춤을 춤추는 미래를 좀 더 꿈 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아홉 살 삶에도 슬픔은 찾아왔습니다. 동아리 활동으로 미래를 꿈꾸게 된 제게 개인 레슨까지 해주시며, 정성스레 가르쳐주시던 첫 탈춤 선생님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겪은 충격과 슬픔 때문에 선생님과 함께한 탈춤도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춤을 즐겁게 출 수 없을 거라는 절망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였던 것일까요.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던 제게 한 선생님이 다가와 안타깝다는 듯 얘기하셨습니다.

“예술은 누군가 이어주지 않으면 끊어지는 것인데 너희 선생님의 예술은 이렇게 끝나겠구나.....”

소주 한 잔을 혼자 드시는 그 선생님의 씁쓸한 모습에 저는 더 울었습니다. 그 날부터 하루하루 울고 잠자기만을 반복하던 와중, 그 선생님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울적하게 전화를 받은 제게 전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넋 빠진 새X가 울면 문제가 해결이 되냐? 지X하지 말고 다음 주에 레슨하게 연습실로 나와.’

한심하다는 듯한 그 목소리는 겉으론 쌀쌀맞아도 마음속으로는 몹시 아껴주는 아버지 같았습니다. 그 전화 한 통에 머리가 새하얘졌습니다. 그동안 선생님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제 미래마저 회피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선생님의 예술을 잇자. 그러면 선생님은 돌아가셨을지언정 예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한동안 추지 못하던 탈춤이 갑자기 추고 싶어졌습니다. 곧바로 한삼을 챙겨 옥상에 올라가 그 밤에 누가 보든 말든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게 모신 두 번째 선생님 덕에 심기일전으로 다시 입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아리에선 화목하게 즐기기만 했던 탈춤이 입시를 앞두고선 호되고 무서운 훈련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탈춤의 길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려 하셨던 것일까요. 계속되는 연습에 지치다가도, 각자 입시를 위해 동아리를 나간 친구들이 연습실에 찾아오면 마주 보고 외사위를 추고 탈짓을 하며 함께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습니다. 마침내 대학 합격 발표가 난 날, 돌아가신 선생님 생각에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습니다. 바보처럼 상념에 빠져있느라 합격 소식도 알리지 않다가 선생님께 또 한 번 혼이 난 건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입니다.

대학 생활은 정말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듯이 팔을 꺾으며 성큼성큼 걸어가는 양주별산대놀이. 굿거리장단에 물 흐르듯이 추다가 으씨게를 넣으며, 흥을 돋우는 고성오광대. 퉁소 소리에 맞추어 딱딱거리며 모래기를 추는 북청사자놀음... 다양한 춤을 배우느라 지루할 틈도 못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배움을 넓혀가던 때에 거짓말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두 번째 선생님께서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은 필연이 아닐까. 내가 너무 선생님들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했기 때문에 단명하시게 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누구에게 조언을 구할 생각도 없이 ‘예술계를 떠나야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미련이 남는 건 돌아가신 두 분의 유지가 끊길 거란 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은 가르침을 여기저기 전달해보았지만 제 생각대로 되진 않았습니다. 제 선생님들의 예술을, 제가 사랑하는 분들의 가르침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맡기려던 것이 욕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나니 떠나고 싶던 탈춤판이... 잊고 싶었던 선생님들의 춤선이... 잊었던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하나 둘 선명해졌습니다. 춤추는 사람은 탈, 의상, 소품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 것은 다 이해하고 만들 줄 알아야 한다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공연 물품을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습니다. 동대문 천 시장이나 을지로 방산시장을 발품 팔아 누비며 산 재료로 씨름할 때면 곁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가면을 만들 때는 종이를 작게 잘라 천천히 붙여 견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의상마다 천의 재질이나 재봉선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소품은 과거에서 내려온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손수 제작한 탈과 의상을 갖추고 춤을 춰보니, 왜 선생님들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탈춤을 사랑하고 아끼셨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외로운 반복 연습 시간을 견디셨는지. 또 소품 하나하나 직접 제작하셨는지. 그분들도 처음 받았던 가르침 그대로, 그분들의 선생님과 함께하듯 사신 것이었을까요.

그리하여 지금 저는 선생님들께 배운 대로 춤을 추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의 예술에 반해 찾아와 함께 춤출 수 있는 예술가를 기다리며 말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멋모르고 동아리 친구들과 추던 때처럼, 즐거움으로 가득한 무대를 동료들과 만드는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2011 경주 한중일 교류 행사중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 11학번 ⓒ윤원중
▲2022 불후의명곡 최불암편

마지막으로 놀랍게도 지금의 저는 마치 저의 기도를 신이 듣고 이루어 주신 것 마냥 많은 탈꾼들을 만나 춤도추고, 연주도 하며,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는 중입니다.

탈춤의 즐거움을 처음 일깨워주신 이성주 선생님. 탈춤을 추는 삶에 대해 많은 것을 지도해주신 손병만 선생님. 두 분 선생님께 세명컴퓨터 고등학교 탈바라기 출신 윤원중이 무한한 감사와 그리움을 담아 이글을 올립니다.

윤원중 : 한예종 연희과 11학번. 봉산탈춤전공 샘도내기 대표 협동조합 아트컴퍼니 샘도내기 대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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