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5월 23일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25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스카르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Galdámez, 1917~1980) 대주교 시복(諡福)식이 열렸다. 생전에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민중 편에서 군부독재 정권의 인권탄압을 비판하다가 1980년 미사 도중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졌던 로메로 대주교는 사후 남미 전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로메로라는 이름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 인권수호의 대명사가 되었다.
로메로 대주교의 복자 지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죽음이 신앙 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적 행위 때문인가 논란이 있었기에 바티칸 내부의 일부 추기경들이 그의 시복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014년 2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를 '신앙의 증오'(hatred of the faith)에 의해 죽음당한 순교자로 선포하면서 시복의 길이 열렸다. 신앙의 증오에 의해 죽음당하면 기적 심사 없이 시복될 수 있는 까닭이다. 교황은 시복식을 맞아 발표한 서한에서 "하느님께서 로메로 대주교에게 신자들의 고통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리며, 사람들은 그에게서 하느님 나라와 좀 더 평등하고 품위 있는 사회 건설에 투신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복자 로메로 대주교는 3년 뒤인 2018년 10월 14일 성 베드로 대광장에서 거행된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의 시성식에서 성인으로 선포됨으로써 하느님 백성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살아 있는 성녀'라고 칭송받던 마더 데레사조차 복자에서 성인이 되는 데 13년이 걸렸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품을 받은 지 3년밖에 안 된 로메로 대주교를 다시 성인으로 선포한 이유는 그를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제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교황은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는 교회가 낫다"(<복음의 기쁨> 49항)고 외치며 가난한 이들 편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재촉했다. 로메로 성인이야말로 이를 삶과 죽음으로 모범적으로 증거했던 것이다.
카리타스의 수호자로 우뚝 선 순교자 로메로 대주교
그런데 장애인복지 전문가인 내 관심을 모은 것은 세계 각국 천주교주교회 산하 사회복지 담당기구인 카리타스들의 연합체 국제카리타스(Caritas Internationalis)가 지난 2015년 5월 17일 제20차 총회를 마치며 로메로 대주교를 수호자로 추대한다는 뉴스였다. "로메로 대주교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순교함으로써 카리타스에 빛의 표지(beacon of light)가 되었다"면서 이제까지의 수호자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와 콜카타의 복녀 데레사(마더 데레사)와 함께 공동 수호자로 선언한 것이다다.
조용하게 이뤄진 교회의 이런 변화를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가 마더 데레사로 상징되는 시혜적 복지에서 한 걸음 진보함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현대 사회복지 흐름은 이미 보충적이고 개인적인 보조에서 제도적인 사회 개혁으로, 자선에서 시민 권리로, 빈민구제에서 복지사회 건설로 나아가고 있다. 가난한 이들을 낳는 원인인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구조를 혁파해 근본적 해결을 도모하는 방향이다.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가 이제껏 자선사업에 치중해 온 것은 이런 시대적 흐름에 무척 뒤쳐진 것이었다. 사회복지에서 마더 데레사의 자선사업이 비판받고, 탈시설을 외치는 장애인 당사자들로부터 대규모 거주시설인 꽃동네 폐쇄 요구가 나온 것도 그 이유다. 지난 2014년 꽃동네 교황 방문을 앞두고 그를 반대하며 교황청에 내가 올린 탄원서 내용도 그런 것이었다.
그날 국제카리타스 총회 개막미사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도 그런 움직임에 힘을 실었다. 교황은 "카리타스 사람은 단순한 자선 일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교회의 모든 인도주의 개발 조직은 그리스도 사랑의 힘을 드러내고,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 가고자 하는 교회의 열망을 드러낸다"면서 "교회의 실체로서 카리타스는 초대 교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새롭게 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성찬의 식탁을 차리시듯 모두를 위한 식탁을 차려야 하고 그러기를 간청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한 카리타스 총회는 폐막 성명에서 "개발은 모든 소득 계층과 사회 구성원들이 포함되어야 하며 이 같은 전략에는 반드시 인간이 그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사회정의 위한 투쟁이 그리스도교 사회복지?
기존 그리스도교회의 사회복지 '사업'에 익숙한 이들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다 암살당한 로메로 대주교가 사회복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의아해할 것이다. 지난 2014년 방한 때 프란치스코 교황이 꽃동네를 방문해서 "자선사업에서 나아가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여 모든 사람이 저마다 품위 있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기쁨을 누리게 하라"고 강론했는데, 바로 로메로 대주교가 인간 성장과 인간 증진을 도모하는 삶을 살다 순교 당했다.
로메로 대주교는 엘살바도르의 탄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 편에 서서 그들의 인권을 옹호했으며, 착취와 탄압을 낳는 사회구조를 혁파하려다 권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구원은 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닌, 이 땅의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것이다"며 엘살바도르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주화운동 참여를 독려했으며, 미사 강론 때마다 군부독재를 비판했다. 그는 그렇게 가난한 민중 곁에서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면서 협박하며 살해 위협할 때면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엘살바도르 민중 안에서 부활할 것이다"라는 예언 어린 고백까지 한다.
결국 로메로 대주교는 1980년 3월 24일 산살바도르의 프로비덴시아 병원 천주의 섭리 소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가운데 군부의 사주를 받은 4명의 괴한에 의해 암살당한다. 예언대로 로메로는 죽었지만, 엘살바도르 민중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았다. 그의 죽음은 그가 암살당하기 한 달 전, 미국 카터 대통령에게 엘살바도르 군부를 지원하지 말라고 서한 보낸 것에서 비롯되었음은 확실했다. 이처럼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펼치다 죽음당한 그 행위를 교회가 순교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과 복음적 가치에 새로운 영감을 준 로메로 대주교는 자기 목숨을 희생해 정의와 평화를 이룬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20세기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카리타스 영역으로 들어온 사회정의 위한 투쟁
그러기에 로메로 대주교를 통해 사회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 카리타스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의미 깊다. 이제껏 교회는 사회정의를 광야의 소리로만 외쳐왔었는데, 이젠 사회복지분야에서도 교회가 사회정의 실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하고,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빈익빈 부익부를 낳는 구조악과 실제로 싸워야한다는 것이다.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가 되라"는 교황의 권고대로 현장교회에 새롭게 눈을 뜨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복팔단(眞福八端)이 지닌 의미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이다. 이미 예수께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말씀하시고 그것을 ‘참된 행복’이라고 하셨다. 이런 진복팔단의 복음적 가치에서 어떻게 정치적 의미를 배제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삼중직(예언직, 사제직, 왕직) 자체가 대단히 정치적 의미를 지녔으니, 사회변화를 위한 실제적 투신으로 우리를 이끄는 까닭이다.
사회구성원 가운데 다른 이들보다 복지를 더 많이 받아야할 사람들을 받아들여 함께 사는 것이 복지사회라면, 그것은 보다 인간적인 사회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그 사회는 더욱 인간화되는 상승작용을 부르니, 2000년 전 예수께서 그 시대의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내 사회로 불러들이며 하신 작업이 그것이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내 백 마리 양떼가 함께 모여 있어 소외된 이가 없는 사회공동체를 그분은 하늘나라라고 하셨다. 요즘 말로 하면 복지공동체다. 구약시대의 예언자 전통에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 정의의 실현이었는데, 정의를 향한 투쟁 그 뿌리는 그토록 깊기만 하다.
여기에서 "올바른 정치 참여야말로 가장 적절한 자선이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대로 사회복지와 정의 실현이 하나로 만난다. 정치의 목적이 국민복지 곧 사회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평하고 정의로운 구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면, 이런 정의로운 구조가 훼손될 때 하느님 정의를 세우기 위한 투쟁 그 예언자적 의무에서 교회가 비켜갈 여지는 전혀 없다. 그것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사목헌장 Gaudium et Spes 1항)라고 표현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제시된 교회 모습 자체가 정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온전히 참여하면서 "주변부에서 잊혀지고 고통 받으며 살고 있는 민중에게 다가가는 사목적인 교회다. 가난한 이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세계체제에 도전하는 예언자적이고 목소리를 내는 교회다." (팻 모린의 '로메로의 시복과 우리 교회'에서)
교회의 심장에 자리 잡은 로메로, 다시 찾은 예수의 복지 마인드
그렇게 '성인이 되는 길'에 가난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정의와 인간발전을 이루려는 복음적 투쟁과 투신이 로메로 대주교를 통해 합류했다. 어쩌면 성인 로메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기치로 삼았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반세기만에 맺은 첫 열매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이들을 옹호하며 정의와 해방을 촉진한 로메로의 거룩한 삶을 카리타스가 모범으로 받아들인 것은, 교황이 앞에서 언급한 대로 교회의 실체인 카리타스, 그 교회의 심장 한 가운데에 로메로 성인의 삶이 자리 잡은 것이 된다. 동시에 그것은 지난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사회복지가 잃어버렸던 예수의 마음, '구조 혁파를 통해 소외된 이들을 사회로 통합시켰던' 그 복지 마인드를 다시 되찾았다는 소중한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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