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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 탈춤을 접할 때 설레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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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 탈춤을 접할 때 설레는 마음으로

[탈춤과 나] 오현수의 탈춤

나는 마산오광대에서 탈춤을 추면서 (사)경남민예총 이사장을 맡고 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현수이다. 1983년, 나는 재수생으로 경남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우리 고향에는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4년제 정규 대학교에 합격하는 것이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당시 후포 어촌의 일은 위험한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 험한 일에서 벗어나 안정된 직업과 출세를 위해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이고, 우리 고향에서 이는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너울 파도가 자주 치는 후포의 동해 바다는 나에게 위협적인 반면에 마산의 남해 파도는 고요한 바다였다. 그런데 내 인생에 반전이 왔다. 그것이 탈춤과의 만남이었다.

나와 탈춤과 첫 인연의 그날은 83년 무더운 초여름 하오였다. 그날에는 수업이 아주 늦게 잡혀있어서 점심을 먹고 교내에 있는 월영지라는 연못가 그늘 아래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시원한 그늘 아래 꿀 같은 단잠이 한참 지나서 어디선가 풍물소리가 잠결에 들리는데 내 몸이 저절로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월영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교내 민속촌이었다.

그 곳에는 대여섯 학생들이 누더기 같은 흰옷을 입고 풍물장단에 맞춰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는데 그 모습들이 너무나 흥겨워 수업하려 가는 것도 까먹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추임새를 넣어 가며 춤을 한참 춘 후 그늘 아래에 고무 동이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막걸리를 시원스럽게 벌컥벌컥 마시고, 깍두기를 안주 삼아 와작와작 씹는 소리가 어찌나 정겹게 들리는지, 사람 미치고 환장할 정도로 끌림이 있었다. 지금 같으면 체면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겠지만 당시 나로서는 대학교 1학년이고, 시골 촌뜨기 숙맥이라 그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대리만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춤 한 자락 추고, 막걸리 한 사발에 담소를 나누는 그 정경이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모습들이 어찌나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바로 가입을 하고 싶었으나 그때에는 정부 방침으로 인해 동아리 새내기 가입은 가을학기에 공식적으로 모집할 때 가입해야 했다.

▲장인문화예술제-경남대최초단대풍물패 ⓒ오현수

어느덧 가을학기가 도래했다. 나는 조금도 주저거림 없이 가입하였다. 동아리에 들어가 보니 봄 학기부터 참여했던 동기생이 있어 좀 의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순진했던 것 같다. 가입 후 거의 매일 동아리방으로 등교하다시피 하였다. 수업 중에 풍물소리가 나면 지체 없이 나올 정도였다. 탈춤과 풍물에 미치도록 빠지다 보니 전공학과에는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탈춤동아리 활동 중 가장 신나고도 힘든 것은 아마도 전수생활이 아닐까 싶다. 83년 겨울 전수가 나의 첫 전수였다. 그래서 다른 어떤 전수생활보다 추억꺼리가 많다. 그때 우리 동아리에서는 경비가 턱없이 부족해 통영오광대 전수관으로 바로 가지 못했다. 진동 광암 해수욕장 인근에 숙소를 두고 2~3km 떨어진 삼진중학교 강당에서 5일간 자체 전수하고, 나머지 5일은 전수관에서 하기로 선배들에 의해 결정이 났다. 나는 처음으로 가는 전수생활이라 고생문인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마냥 설레고 신났다.

아! 드디어 전수 가는 날! 우리들은 아침 일찍 경남대학교 정문 앞에 있는 댓거리 버스정류장에서 모여서 1차 거점인 진동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 나는 새내기라 개인 짐만 챙겨서 가벼운 마음으로 모임 장소에 갔는데, 선배들이 들고 온 짐들이 장난이 아니었다. 악기는 당연하고 이불, 식기, 각종 부식거리 등 이건 완전히 1.4후퇴 피난살이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 많은 짐들을 마음씨 좋은 기사아저씨 배려로 버스 짐칸에 꾸역꾸역 밀어 넣고 기분 좋게 진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소풍가는 즐거운 기분으로 달리는 버스 차창 밖 스쳐가는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침내, 진동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아 드디어 고생문이 열리는 날 추운 겨울, 이불 보따리 한 짐 등짐 메고 양손에 또 다른 짐 보따리를 들고 진동시장을 거쳐 3~4km를 무작정 걸어가야만 했다. 첫날 저녁은 보리밥을 맛나게 먹고, 학습에 들어갔다. 학습 후 막걸리로 뒤풀이를 했다. 얼마 안가서 막걸리가 떨어졌다. 선배들이 사오라고 한다. 나는 설마 3~4km 떨어진 읍내는 아니겠지 생각하고 순순히 “예 알겠습니다.”하고는 선배들에게 어딘지 묻자 읍내에 있으니 마신 술이 깨기 전에 빨리 사갖고 오란다. 동기생 둘이서 새가 빠지게 뛰어 가서 사오면서 선배들의 욕을 실컷 하였든 추억이 떠오른다. 다음 날 아침밥을 먹고 우리 모두는 읍내에 있는 삼진고등학교 강당으로 향했다.

전 날 마신 술이 덜 깼지만, 시원한 겨울아침 바다를 보면서 가니 기분은 상쾌했다.

▲통영오광대 전수 ⓒ오현수
▲말뫼뻘 사람들 ⓒ오현수

그날부터 우리는 맹연습에 돌입했다. 끼니는 수제비로 연명하고 우리 새내기들은 거의 휴식시간이 없을 정도로 빡빡한 연습과 밤마다 뒤풀이로 하얀 밤을 새우기가 일 수였다. 이밖에 여러 추억들이 있으나 열거하자면 너무 많다. 솔담배 이야기, 수제비국물에 안경 빠뜨린 이야기 등 당시로선 가슴이 아프고 힘든 전수생활의 이야기꺼리지만 그 덕에 나의 첫 전수는 나를 춤꾼으로 발돋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후 전수가 끝나고 고향집으로 가야 되는데 나는 바로 가지 않고 창원전문대학, 창원대학교 탈춤동아리 전수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새내기 춤꾼으로 변모되어졌다.

그 이후로 나는 학사경고를 받고 어쩔 수 없이 군에 갈 수밖에 없었다. 1987년 복학한 나는 당시 군부독재라는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마당극도 하면서 문화예술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 아! 이것이 내 운명임을 알고 그해 6월에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선배, 동료 졸업생들이 만든 놀이패 <베꾸마당>에 가입하였다. <베꾸마당>을 하면서 노동자문화운동에 적극 활동하여 마창노동자풍물패연합을 결성하는데 나름 역할을 하였으며, 다수의 노동극 작품으로 노동현장과 시민들에게 찾아가서 공연을 했다. 대표작인, 마산수출자유지역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풍자한 ‘말뫼뻘 사람들’이라는 작품으로 제1회 전국민족극한마당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때에는 강습과 공연이 너무 많아 눈코 뜰 새없이 바빴다. 당시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입은 참 많았으나 고스란히 단체에 귀속되고 내가 지급받는 하루 활동비는 고작 토큰 몇 개였다. 이 사실을 요즘 젊은 예술인들에게 이야기하니 “왜 그렇게 하느냐고 바보 아닙니까?”면서 믿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를 회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반면에 당시 <베꾸마당> 단원 중에 안정된 직업과 직장을 가진 선배들이 있었는데 소정의 회비만 내면 그만이었다. 그중 한 선배는 자기가 한 강습은 꼭 강습료를 지급받아 가곤 하였다. 밤늦게 연습 마치고 막차 버스를 놓쳐 자취방으로 갈 수가 없으면 공간에서 자야할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 그 선배가 월 숙박료를 내야한다기에 자취방을 빼고 그 방비를 단체에 고스란히 낸 적이 있다. 당시 그 선배의 논조는 “문화예술 활동가는 독립 운동하듯이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나로서는 당시 20대 중반 어린 나이였기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사명감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 열심히 활동하였다.

활동 중에 1990년 6월 집안 어른들의 권유로 결혼하게 되었다. 단체에서는 개인 생활비를 지급할 수 없다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베꾸마당> 활동을 하면서 또 다른 경제활동을 해야만 했다. 도서판매원으로 시작해서 택시기사, 나이트종업원, 신문배달 등등 10년을 버텼다. 시간이 갈수록 수입은 늘지 않는데 생활비는 늘어나고 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광대생활을 청산하고 이 지긋지긋한 마산을 버리기로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가족들을 창원에 두고 홀로 대구로 올라가서 장돌뱅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수입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장돌뱅이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수입이 늘어가고 과거 못난 가장에서 벗어나 가정을 책임지는 떳떳한 가장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가끔 창원, 마산에서 복귀하여 같이 하자는 유혹이 있었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 하며 일절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이중수 선배로부터 마산오광대를 복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복원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광대공연을 몇 번 하다 보니 내 마음 깊은 곳에 광대의 끼가 스물스물 다시 움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현실 정리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의 생각이 확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바로 2008년 광대들의 영원한 교주 채희완 선생님과 1박2일 회갑연 잔치였다. 전국 광대들이 모처럼 모여 살아있는 흥나는 굿판이었다. 장돌뱅이 생활을 하면서 마당굿판을 마음 한구석에 깊이 묻어두고 사는 나에게 변함없이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전국 광대들과 진한 해후였다. 그날 이후 ‘나 광대로 돌아가리라’하며 때를 기다렸다.

50대 초반의 나이에 내 삶을 돌이켜 보고 ‘어떠한 삶이 참 인생인가’하며 다시 정리하는 계기도 되었다. 새로운 하나를 얻으려면 묵은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결국, 난 선택했다. 장돌뱅이 삶을 정리하고 탈춤과 풍물을 기반으로 하는 마당굿패 <새물>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대표를 맡아 다시 광대의 삶을 시작했다. 2012년 창단된 마당굿패 <새물>은 마산민예총에서 주관하는 ’2012 새물맞이 굿‘에서 마산 바다 오염된 환경문제를 다루는 작품으로 시작하여 세월호의 노란 바다, 여성 성구매자의 죽음, 일제 강제징용 등을 주제로 다양한 시대적 아픔을 담은 작품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 돌아왔노라! 어라! 돌아왔지만 옛날 같지가 않는 현장의 다양함 어찌 하랴!! ”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음을 인정하고 처음 탈춤을 접할 때 설레는 마음으로 마산오광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 합천대평 군물농악, 민예총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영남 민족극 한마당, 말뫼뻘 사람ⓒ오현수
▲전대사습놀이 마산농악풍년놀이 ⓒ오현수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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