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㉝ 타게 에를란데르 下 스웨덴의 노사정 대화는 오페라와 샴페인 얘기부터 시작했다. (☞바로가기)
㉞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上 (☞바로가기)
㉟ 에이나르 게르하르센 下 (☞바로가기)
㊱ 꼬이비스토·할로넨 上 (☞바로가기)
핀란드의 청년정치와 한국의 현실 : "여러 가지로 선배세대로서 미안합니다. … 힘들지만 자신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진보세력 1세대로서 진보정당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데 기여할 것"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난 얼마 뒤 노회찬은 <경향신문>의 유인경 선임기자와 인터뷰(<경향신문>, 2013.2.23.)를 했다.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비례후보 경선 부정 사태와 중앙위 폭력사태)에 대한 우려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터뷰 내용은 '진보의 현대화'로 이어졌다. 노회찬의 결론은 "스웨덴·핀란드 스타일의 모델과 방식을 참고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인경 : 진보정당이나 진보세력의 앞날을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노회찬 : 걱정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세력들이 스스로 작년과 같이 붕괴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것은 보수의 승리가 아니다. 시대는 경제민주화와 역사의 진보를 요구하는데, 우리 진보세력이 준비와 역량이 부족해 승리를 내준 것이다. 유시민과 노회찬이 아니더라도 진보는 시대 요구에 따라 더 깊게 뿌리 내려야 한다. 그동안의 잘못된 고집, 국민과 소통하는 행동양식 등 낡은 악습을 타파하고 뼈를 깎는 심정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수술을 감행하거나 전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암울할 때 희망이 싹튼다고 믿는다.
유인경 : 진짜 희망이 있다고 보나.
노회찬 : 요즘 나를 아끼는 선배들이 진보 그만하고 심상정과 같이 민주당에 가서 새판을 짜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김문수 지사처럼 새누리당에 가서 더 큰 변화를 하라고도 한다.
다 나를 아끼는 마음에서 해주시는 조언이지만 사회가 잘 되려면 힘 있고 건강한 진보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변함이 없다. 내가 거름이 돼서라도 싹을 틔우고 후배들이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을 보고 싶다.
(…)
그동안 진보진영이 20~30년 전의 NL·PD 등 자기편 가르기나 이념문제만 떠드니 국민 호응을 얻기 어렵다. 이젠 우리 사회를 어떤 복지국가로 만들어나가겠다는 총체적 프로그램을 내놓아야 할 때다. 진보진영의 현대화가 시급하다.
유인경 : 진보의 현대화란 무엇을 의미하나.
노회찬 : 외국에서는 '진보'란 말을 안 쓴다. 당의 명칭도 사회민주주의당이나 노동당 등이다. 이젠 진보란 말이 암호 같은 용어가 됐다.
스웨덴·핀란드 스타일의 모델과 방식을 참고로 해야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철저히 민주주의가 보장되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고쳐가고 진정한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 사회주의를 도입한 것이다.
복지국가가 목표라면 속도와 방향의 문제가 있겠지만 그 길은 사회민주주의밖에 없다. 미국 같은 강대국도 의료보장 등에서 복지국가가 못되는 이유는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회민주주의의 실현이 필요하다.
유인경 : 이번에 국회의원직은 상실했지만 '국민의원'으로 승격했다.
노회찬 : 이번 (삼성X파일) 판결은 유감이지만, 국민과 역사 앞에 무릎 꿇을 일은 아니다. 앞으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고 사회정의와 진리가 바로 서고 강자와 약자가 공존상생하는 복지국가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무엇보다 진보세력 1세대로서 진보정당이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에 앞서 2010년 한겨레의 '복지국가 논쟁'에서 노회찬은 '복지가 뜨거운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데 여기에서 복지국가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진보신당의 '3차원 복지국가론'을 피력했다.
"사실 특정한 제도들은 복지국가의 중심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들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 수단을 통해 실현해야 할 중심 가치는 모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지국가란 이러한 가치를 다른 어떤 가치들, 가령 추상적인 집단 이익('국가', '민족' 등)이나 수치 위주의 경제 성장보다 우위에 놓는 사회다.
그것은 또한 부와 권력을 독점한 자들의 이해가 이러한 목표와 충돌한다면 후자를 위해 전자를 과감히 제어할 수 있는 사회다.
한마디로 한국 사회가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정치 영역에서 제한된 형태로만 실현한 민주주의를 이제 사회경제 영역으로까지 실질적으로 확장하자는 것이며, 재벌, 금융 투기 세력 등 거대 자본의 새로운 독재에 맞서 '강한' 민주주의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면 크게 세 가지 과제를 함께 추진해야 한다. 그것은 첫째 보편적 복지이고, 둘째 노동 연대이며, 셋째 생태사회 전환이다.
그래서 진보신당의 복지국가 비전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보편복지, 노동 연대, 생태전환의 '삼차원' 복지국가 정도가 적절하겠다." (이창곤, 「보편복지·노동권·생태가 미래사회 '세바퀴'-삼차원 복지국가/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한겨레>, 2010.8.17.)
핀란드의 청년정치‧여성정치와 산나 마린 총리 : "산나 마린이 한국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2000년 3월 한 소녀가 TV 앞에 앉아 타르야 할로넨이 핀란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핀란드로서도 역사적 순간이었고 소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성별에 상관없이 여성도 정상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소녀의 이름은 산나 마린이었다.
핀란드의 청년정치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부터였다.
2019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민주당(SDP)이 승리한 이후 12월에는 현역 정치지도자 중 최연소인 34살의 산나 마린(Sanna Marin, 1985.11.16.~)을 신임 총리로 선출했다. 사실 무명의 정치인에서 단숨에 총리까지 올라선 산나 마린에 대해 핀란드 사람들도 잘 몰랐다고 한다.
사민당은 중앙당, 녹색당, 좌파동맹, 스웨덴인민당 등 4개 정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4개 정당의 당대표 역시 모두 여성이고, 이 중 3명이 30대다. 산나 마린 총리가 발표한 내각 구성원의 평균 연령은 48.5살. 전체 18명의 장관 가운데 11명이 여성이다.
안톤 뢴홀름(39) 사민당 사무총장은 "결국 사회의 주역은 청년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생각을 심각하게 들어줄 필요가 있다"며 "이들이 정치에서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주고 역량을 키우는 것이 당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신소영, 「"'사회 주역은 청년' 솔직히 인정해야"…'청년 정치' 핀란드가 주는 교훈」, <한겨레>, 2020.3.30.)
2020년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사흘간 핀란드 내륙의 산업도시 땀뻬레(Tampere)에서 120년 역사를 통해 핀란드 복지국가 건설을 주도한 핀란드 사회민주당(SDP)의 제46차 당대회가 열렸다. 핀란드 사민당은 1899년 노동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된(1903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 현존하는 핀란드 정당들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다.
당 대회 하이라이트는 3년 임기의 새 대표를 선출하는 것으로, 이를 계기로 '안띠 린네 당대표-산나 마린 총리'로 나눠졌던 당 리더십과 정부 리더십의 일치를 이루게 됐다. (서현수, 「34세 여성 총리가 이끄는 핀란드의 사민주의, 여전히 살아있다」, <프레시안>, 2020.8.31.)
산나 마린은 "총리가 자기 집 청소기를 돌리고 화장실을 청소하며, 다른 시민들과 함께 장을 보고 자신의 아이를 동네 어린이집에 보내는 나라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고 언급하며 첫날 총리 연설을 시작했다.
마지막 날 당대표 노선 연설에서는 "우리의 임무는 모든 아이들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 이념과 세계 속 임무가 응결돼 있습니다. 북유럽 복지국가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지금도 우리에게 인간적 조건을 개선하고 미래와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는 도구입니다. 평등, 연대, 그리고 자유는 우리의 근본 가치입니다"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마린은 2020년대의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사민주의의 기본 가치 실현을 위한 핵심 정책 의제들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북유럽 복지국가의 건설을 위해 2035년 핀란드 탄소중립사회의 목표를 실현한다.
둘째, 어린이집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교육과 역량 훈련에 대한 보편적 기회를 보장하는 무상, 평등 교육의 기반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무상 의무교육 기간의 18세 연장, 교육 불평등 해소, 노동 생활의 변화에 대비한 평생학습 강화 등 지속적 교육개혁을 실현한다.
셋째,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수출 감소와 실업 증가 등 경제적, 사회적 상황의 심각성에 신속히 대처하는 한편 가까운 미래에 적극적인 경기부양 및 재정정책을 실천한다.
넷째, 기술혁신과 노동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동시에 삶의 가치와 행복, 자율성을 회복하기 위해 임금감소 없는 노동시간 단축 방안(일일 6시간 제안)을 적극 검토한다.
마린 총리가 이끄는 핀란드는 '밀레니얼(1980∼2000년 출생자) 여성 내각'을 구성했다. 집권 사민당을 포함해 연정을 구성하는 5개 정당 대표가 모두 여성이고 이 중 4명이 30대다. 젊은 정치인은 소셜미디어, 게임 등을 통해 유권자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소셜미디어 애용자인 마린은 2020년 10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채 목걸이와 재킷만 걸치고 가슴골을 드러낸 사진을 선보였다. 일각에서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서 적절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수많은 2030 세대들이 총리와 비슷한 옷을 입은 자신의 인증 사진을 올리며 '나는 산나와 함께한다. (#imwithsanna)'는 응원 해시태그를 달았다. (「젊은 지도자, 유럽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이유」, <동아일보>, 2021.6.6.)
서현수 한국교원대 교수는 핀란드의 정치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30대 초반 여성들이 최고 정책결정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현 핀란드 정부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국가에서 높은 수준의 성평등과 여성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나아가 아동·청소년, 노인, 장애인, 이민자·난민,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인권 보장이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가치가 있다." (「34세 여성 총리가 이끄는 핀란드의 사민주의, 여전히 살아있다」, <프레시안>, 2020.8.31.)
한편 노회찬의 길동무이자 노회찬정치학교 교장을 맡기도 한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정치학 교수는 우리에게 '그들'(핀란드의 산나 마린 총리, 뉴질랜드 노동당의 저신다 아던 총리, 스웨덴 녹색당의 구스타프 프리돌린 장관, 독일 녹색당의 안나 뤼어만 의원 등)과 같은, 이념과 정책적 차원에서 진취적인 청년 정치인이 없는 이유를 ①정치적 무관심이라는 현실과 ②심각한 부의 집중 현상 등 두 가지로 설명하며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산나 마린은 단지 34세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정치 이력을 보면 그의 등장을 가능케 한 핀란드의 정치·사회·문화적 환경의 특성을 포착할 수 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이혼 후 동성 가정을 꾸린 어머니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의 기준에서 보자면 결코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산나 마린은 탐페레 대학교에 들어가 재학 중 사회민주당에서 청년단 활동을 했고, 23세에 정치에 입문해 27세에는 시의원이 돼 풀뿌리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30세에 국회의원이 됐고 34세에 장관과 총리를 연이어 맡았다.
이러한 이력을 '입지전적 인물'이나 '고속 출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시대에 뒤쳐진 사람일 것이다. 정치적 지위의 획득을 '개인의 초인적 역량에 기댄 사적인 입신의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2030세대 국회의원은 20대 국회에서(2019년 기준) 단 3명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평균연령은 58세이고, 장관 평균연령은 60세다. 여성의원 비율은 17%에 그쳐 OECD 회원국가 중 하위권이다.
왜 한국에서는 핀란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정치 참여는 물론 정치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탈정치적 현실'과 그러한 탈정치적 현실을 공고히 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연' 때문이다.
한국이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와 달리 시민정치교육과 정당 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연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비정규직─혹은 불안전─노동자층이 여전히 노동인구의 60%를 상회한다. 이런 노동 현실에 처해 있는 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관련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용이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육체적 휴식마저도 사치인 현실에서 정치 관련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석할 여유를 갖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작고한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라는 연설을 통해 환경미화 노동자들처럼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 서민들이 정치로부터 유령 취급을 받는다며 일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나 마린이 한국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과연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의 청년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핀란드 총리가 나올 수 없는가」,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2020년 3월호.)
핀란드는 젊은 정치인을 키우는 각종 제도 또한 잘 갖춰져 있다. 핀란드 의회 내 9개 정당은 모두 청년조직을 갖췄다. 핀란드 청소년은 15세 때부터 정당 청년조직에 가입할 수 있다. 2006년 만들어진 청소년기본법 8조는 "청소년에게 지역사회의 청소년 단체 및 정책을 다루는 일에 참여할 기회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고 정해 놓았다. (「젊은 지도자, 유럽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이유」, <동아일보>, 2021.6.6.)
국제의원연명(IPU)가 발간한 2021년 보고서를 보면 '세계 주요국 40대 미만 국회의원 비율'을 보면 이탈리아(42.7%), 스웨덴(31.4%)에 이어 핀란드가 29.0%로 3위를 차지했다.
2020년 5월 출범한 한국의 21대 국회 300명 의원 나이는 평균 54.9세다. 20, 30대 의원은 4.3%(13명)에 불과했다. 미국(11.5%), 일본(8.4%)의 2030 의원 비율 역시 한국보다는 높다.
'헬조선' 대한민국, 노회찬의 '꿈'과 '청년의 당' : "대한민국의 청년을 품은 정치인"
민주노동당 초대 기획위원장 출신으로 노회찬과 함께 진보정당 활동을 한 길동무였던, 인문학 작가 박홍순은 <미술관 옆 인문학>(서해문집, 2011)에서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의 고단함은 인간에게서 서로에 대한 따뜻한 시선마저 앗아가 버린다. 매일의 삶이 고된 노동의 연속일 때, 그리하여 세포와 신경 하나하나에까지 피로가 축적돼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삶에 관심이나 애정을 갖기가 힘들다. 하루를 능동적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수동적으로 힘겹게 밀어내는 느낌일 때는 타인의 시선조차 무겁게 느껴진다."
2010년 겨울 어느 날 한윤형(인터넷 논객)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과의 만남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윤형 : 사람들은 문제 해결이나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대안을 말하기 이전에 자신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
최근 20대들이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가 어떤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노회찬 : 넓게 얘기하면 아무래도 경쟁이겠죠. 좋은 대학 들어가기 위한 경쟁,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경쟁, 그 다음에 더 나은 생활, 즉 출세를 위한 경쟁, 이것은 최상위 계층을 제외하고서는 전 계층에게 강요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아동들이 전 세계에서 잠을 가장 적게 잔다고 합니다. 수면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 그 다음에 학습시간, 공부시간이 가장 많은 청소년기, 그 다음에 청소년기를 지나서는 연간 평균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 그 다음에는 노년층이 되죠. 노인 자살이 가장 많은 나라. 이렇게 끔찍한 기록의 연속이죠.
그렇게 고생했으면 그 다음에 좀 편해야 되는데, 고난의 행군이죠. 평생. 거의 불교에서 얘기하는 고해의 수준. 한반도가 고해의 땅이죠.
한윤형 : 그와 같이 경쟁에 몰두하는 젊은이들에게 당신들의 삶에 이런 걸 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어떤 부분이 있을지요?
노회찬 :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것은 생존경쟁에서 본능적인 몸부림으로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과연 경쟁에서 이길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 또 그 경쟁이 주는 폐해, 이런 것까지 감안해본다면 경쟁의 룰을 바꾸는 것, 즉 생존의 조건을 바꾸는 것에 동시에 신경 써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당신이 더 쉽게 이기도록 해 주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할 순 없다, 그러나 두려움과 공포에 주눅 들지 않는 경쟁의 룰을 만들려면 정치의 구도가 바뀌어야 하고 이것을 위해 함께 고민하자",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윤형 : 만약 20대로 돌아간다면, 어떤 모습이실지?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요?
노회찬 : 나의 20대는 상실과 아픔의 시기였어요. 사랑하는 것들로부터의 이별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지요. 물론 후회는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 된다면 똑같이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역사의 반복이 아니라 내가 그냥 새로운 20대로 돌아간다면 과거 20대 때 어쩔 수 없이 이별했던 많은 것들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연애도 실컷 하고 첼로도 마음껏 연주하고 싶습니다. (「20대를 위한 나라는 없다」,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2008년 12월 3일 '마들명사초청특강' 자리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한국 사회는 불행으로 동맹맺은 사회다.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라고 질타한 바 있다. 그에 화답하면서 노회찬 마들연구소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현실이 어렵다고, '동물의 왕국'으로부터 멀어지고 '인간의 나라' 가까이로 가기 위한 길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절망과 체념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불행이 아닌 행복으로 동맹맺어 서로를 다독이며 헤쳐 나가야 합니다."
"불행으로 동맹맺은" '헬조선'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회찬이 강조한 것이 바로 '정치'와 '정치를 통한 변화'였고, 그것의 견인차는 '진보정당'이었다.
"꿈의 본질적인 속성은 역설에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판단이 멈춘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어떤 운동이다. 그것은 어둠을 만났을 때 더 빛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꿈은 현실을 토대로 생겨나지만, 생겨나는 순간부터 운동을 멈추는 법이 없어 전혀 비현실적인 무언가를 현실로 만들어버린다."
"이제까지 적지 않은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든 꿈이 현실로 될 것이라 말할 순 없다. 진보정당의 꿈을 놓지 못하는 것은 현실가능성이 크기 때문도 아니고, 그 꿈이 너무 아름다워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도 아니다. 그 꿈 이외에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 꿈이 실현되지 않고서는 정치가 사람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노회찬, 「우리들의 겨울은 따뜻했다: 다시, 꿈꾸기 위하여」,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2011년 8월 하순 어느 날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이라는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소장 최태욱)의 '자유인(自由人) 인터뷰' 질문에 대해 노회찬은 이렇게 답하기도 했다.
"첫 마디는 '미안합니다'입니다. 여러 가지로 선배세대로서 미안합니다. 우리 때보다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청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보다는 우선 자신이 사는 데 집중해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살아 있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 좋은 것이 없기 때문에 삶에 대한 애착과 희망을 갖고 살아보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자세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자신이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힘들지만 자신의 삶을 살기 바랍니다."
1970-80년대 청년기를 보낸 노회찬. '청년'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386세대'와 '306세대'를 함께 언급한 데서 한 단면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는) 화이트칼라라는 세대를 사회적으로 생산해내고 중산층이 양산된 시기였다.
(…)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형편이 나아졌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무권리 상태였다. 이들은 여기에 분노했다. 정치적 권리를 되찾자는 것이 화이트칼라의 요구였다. '386'이라는 것은 이 세대들의 정서적 표현이다. 386이라는 말 속에는 대학을 졸업했다는 말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1960년대에 태어난 30대 중에는 8(1980년대 학번)자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에 못 가고 고교 졸업 후 노동자로 취업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을 '306세대'라 부른다. 그들이 '왜 우리한테는 분배를 안 해주냐?' 했던 것이 789투쟁이었다." (노회찬,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노회찬의 마지막 정치적 거처였던,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 정의당 강령(「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향하여」)에는 '청년들'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이다. 일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폭넓은 연대를 주도할 것이다.
우리는 비정규직의 정당이다. 비정규직, 영세 자영업자, 청년 구직자와 같이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약자를 대표하는 데 우선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
패자부활전은 사라지고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끊어졌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불평등은 청년들을 좌절로 몰아가고 있다.
(…)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듯, 모든 노동은 존엄하다. 모두의 노동이 존엄해지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약자들의 노동을 우선적으로 보호할 것이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2017년 4월 10일 정의당 선대위 청년선대본 발대식이 노회찬 상임선대위원장과 김형탁 조직2본부장, 배준호 청년선대본부장을 비롯한 청년선대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자타칭 '청년 멘토'였던 노회찬 정의당 상임선대위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헬조선'이라는 말을 써가며 한국 사회에서 청년이 처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청년 선대본부가 발족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크다. 기본적으로 진보정당은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의 정당 특히 청년의 당 그리고 여성의 당, 또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당임을 자임하고 있다. 아직까지 한국 현실에서 청년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은커녕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간수하기가 대단히 힘든 처지에 놓여있다.
사실 '헬조선'이라는 말도 다른 계층이 아니라 청년의 어두운 현실 때문에 등장한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청년의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노회찬은 격려의 말을 전했다.
"정의당과 같은 진보정당이 표방하고 있는 가치와 지향하고 있는 지점들이 우리 청년들의 처지와 우리사회에서 청년의 역할과 마주치는 부분이 많다.
단순히 대통령 선거에서 청년들의 표를 확보하는 것을 넘어서서 청년 부문 속에서 진보정당의 든든한 기준들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한다."
닫는 글: "대한민국의 청년을 품은 정치인"
"대한민국의 청년을 품은 정치인."
2018년 7월 노회찬이 떠난 이틀 뒤 한 언론사의 기자가 그를 표현한 말이었다.
"2018년 7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회찬의 빈소에는 기득권에 거칠게 맞서며 힘없고 소외된 사람을 대변했던 고인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긴 조문객들의 눈물이 뿌려졌다. 교복 차림의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 등 청년층은 눈시울을 붉히며 고인의 영정을 응시했다.
젊은 세대의 정치 혐오가 극에 달한 현실을 감안하면 노 원내대표의 빈소는 여느 정치인의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노 원내대표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로 젊은이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젊은 시절 긴 투옥 생활을 한 탓에 때를 놓쳐 자녀도 얻지 못했던 그는 대신 대한민국의 청년을 품은 정치인이었다." (임준한 기자, 「[백브리핑]아! 노회찬, "오보라 믿고 싶어요"…청년층 애도 이어지는 이유」, <아시아경제>, 2018.7.25.)
앞에서 언급한 노회찬과의 인터뷰를 마친 뒤 한윤형은 만남의 후기를 이렇게 적었다.
"그는 속도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물에 해박했고, 질문을 받으면 곧바로 답변을 구성했다. 가히 토론의 달인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세상 문제에 대해 언제나 곧바로 답변이 준비돼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 약간은 불안해지기도 하는 지점이다.
끊임없이 대안이 뭐냐고 추궁당해야 하는 의석 1석의 진보정당 대표.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는 대중들.
그의 거침없는 말의 내면에는, 긴 세월 수없이 곤혹스러운 선택 앞에 서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당당함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라는 것 나는 안다. 그 숙고의 결과 그는 현실적으로 가장 불리하고 영리하지 못한 선택들을 해 왔던 것이고, 그는 이 불리함을 숨 쉴 틈 없는 사유와 말의 구성을 통해 돌파해온 것이리라.
겨울, 비가 내리고 있었다.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노 대표는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눈부신 햇살과 함께, 저 어두운 골목길을 환히 밝히며 걸어오는 모습을 순간 상상해 보았다." (「20대를 위한 나라는 없다」, <진보의 재탄생>, 꾸리에, 2010)
노회찬이 떠나고 2년여의 시간이 흐른 2020년 11월 28일 '노회찬의 꿈과 뜻'을 이어갈 '제2, 제3의 노회찬을 기르고 지원하는' 노회찬정치학교 2기 기본과정을 마친 23명의 수료식이 있었다. 수료생인 홍주리 님의 '졸업 에세이' 내용 일부를 소개하며 오늘의 기록이야기 <꼬이비스토‧할로넨의 핀란드와 노회찬> 편을 마친다.
"노회찬정치학교를 수강하면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문장은 '정치는 자원의 정의로운 분배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의로운 분배, 치우치지 않은 분배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기후위기와 코로나19로 인해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죽음의 전 단계인 감염병 코로나가 '그들'에서 '당신'으로, 그리고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 상황에 '공감'이란 것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나아가라'는 유언은 제게 한 사람이라도 더 공감하고 '그들'이 아닌 '당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라는 말로 이해됩니다. 변하지 않는 세상에 화가 나고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매일매일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나가 보려 합니다.
'그들'이 '당신'이 되는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그게 노회찬 의원님의 정치였던 것 같습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저는 오늘도 한 걸음 나아가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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