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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어떤 세상이 올까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㉜] part 3 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 타게 에를란데르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 편집자.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시리즈 모아보기)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part 3 스칸디나비아(북유럽) 복지모델을 만나다

㉙ 들어가는 글 북유럽식 사민주의, 인구 5000만 한국에도 가능하다면 (☞바로가기)

㉚ 올로프 팔메 上 "젊은 정치를 보고싶다…왜 한국정치를 '19금'에 묶어놓나"(☞바로가기)

㉛ 올로프 팔메 下 "넌 특별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스웨덴"정치는 일상이다"(☞바로가기)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어떤 세상이 올까요?" :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나라"

2004년 정운영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스웨덴을 불러냈다.

정운영 : 한국의 민주노동당은 여러 모로 스웨덴 모델에 많은 교훈을 받은 것 같은데요.

노회찬 : 스웨덴은 현존하는 사회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가장 친노동적인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가 페이퍼 위의 이념이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와 철학으로 자리잡은 유일한 경우가 스웨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운영,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 랜덤하우스중앙)

▲2009년 1월 20일 노회찬마들연구소 신년 심포지움에서 기조발표를 하는 노회찬 ⓒ노회찬재단

2009년 1월 20일 노회찬마들연구소(이사장: 노회찬) 신년 심포지엄('이명박 정부 1년 평가: 2009년 대한민국, 위기 진단과 해법 찾기')에서 노회찬은 기조발표를 했다. 주제는 '한국사회의 정치와 경제: 이제는 패러다임의 대전환'으로, 노회찬은 특히 스웨덴형 모델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경제패러다임의 전환과 관련해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현재 우리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스웨덴형 모델의 특징에 대한 사려 깊은 천착이다. 그것의 이념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스웨덴형 모델이 가난한 보통사람들의 삶의 고통을 경감시켜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사실 내가 좀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지점은 이러한 스웨덴 모델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스웨덴 모델에 대한 대부분의 논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무엇보다도 운동의 정치, 즉 강한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의 힘에 기반하며 그 힘은 지속적인 사회적 소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핵심은 사회에 뿌리를 둔 진보정당과 노동조합으로 상징되는 위력적인 운동의 힘으로, 그것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모델이나 시스템도 작동 불가능하다는 것이 스웨덴 모델이 던지는 역사적 시사점이다."

4년 뒤인 2013년 1월 25일 진보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소장: 조현연)의 '진보정의당의 정체성 찾기' 2차 집담회에서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19대 국회의원)는 주제발표('진보정치의 위기와 정체성 찾기')를 했다. 토론자로는 박원석 진보정의당 국회의원,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이정미 진보정의당 최고위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등이 함께 했다.

▲2013년 1월 25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진보정의당의 정체성 찾기' 집담회 ⓒ진보정의연구소

이 자리에서 노회찬은 진보정의당 2단계 창당의 방향과 계획에 대해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우리가 보장하는 한국의 미래 모델과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자. 그것이 바로 한국형 사회민주주의를 정립해가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제까지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선거를 통한 권력의지의 실현, 추구하는 가치와 표명하는 정책들로 볼 때 일종의 사민주의 정당으로 분류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지난 시기 국가사회주의와 사민주의 진영 간의 오랜 반목과 대립의 역사에 갇혀 사민주의를 살아있는 정치과정과 미래계획으로 다루는 것을 금기시해왔다. 이제 이런 낡은 금기로부터 진보정당을 해방시킬 때가 됐다. 진보정의당 당간부 의식조사에서 북유럽의 스웨덴 모델에 대한 호감도가 90%를 넘는 현실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우리가 갈 길이 전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이 과연 솔직한 태도인가? 

사회민주주의는 나라 수만큼 다양하며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에 기반해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여러 시도와 그 결과물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참고로 노회찬이 언급한, 진보정의당 부설 진보정의연구소가 조사한 <당 주요간부 의식조사(1차), 2013.1.14~17>를 보면, '바람직한 국가모델'로 압도적 다수(91.6%)가 '스웨덴형'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진보정의연구소가 발표한 <2014 정의당 당원 정치의식 설문조사 결과분석 보고서>(2013.11.24.)를 보면, 당원들 대부분은 자신이 '진보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평했으며, 53.1%의 당원들은 '사회민주주의'가 정의당이 지향해야 할 정치이념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사회민주주의 53.1%, 진보적 자유주의 32.4%,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 9.5%, 자유주의 2.6%)

"진보정의당이 추구하는 가치는 강한 노동과 넓은 복지 그리고 생태와 평화의 존중이다. 민주주의에 철저하게 기반해서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낳는 폐해를 극복하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우리의 신념이다. 현대적 진보정당이 하나의 사상, 유일사상을 강요할 수는 없다. 최대강령으로서의 이념적 지향은 각자의 몫이며 당은 다원적 민주주의로 이의 공존을 보장해야 한다.

동시에 복지국가를 열어나갈 책임있는 진보정당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의 정당을 이루는 공통분모이며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우리의 최소강령이다.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우리가 보장하는 한국의 미래 모델과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가자. 그것이 바로 한국적 사회민주주의를 정립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이 집권하면 어떤 세상이 올까요?"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를 낸 뒤 <채널예스>의 손민규(인문MD)와의 인터뷰에서, 그리고 책의 내용에서 노회찬의 대답은 이랬다.

"진보정당이 꿈꾸는 건 희한한 세상이 아니에요. 꿈과 현실을 모두 소중히 여겨야 하지만 어차피 현실은 현실입니다. 진보정당이 만들고자 하는 현실은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같은 나라입니다."

"우리의 공통점은 스웨덴 등과 같은 사민주의 복지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집권해서 만들려고 하는 사회는 이런 정도의 사회라는 것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도리다. 

(…) 

진보의 이미지가 이렇게 망가지고 오해가 겹쳐있는 상황에서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정체성을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사민주의 역사를 보면 좀 개량주의적인 측면이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하는 것이 사민주의이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개량주의 비판) 때문에 내부논란을 키울 필요는 없다. 진보라는 말을 가지고는 우리를 설명하는 데 국민들도 지쳤고, 우리도 지쳤다. 설명이 안 된다."

타게 에를란데르, 그는 누구? :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의 하나"인 스웨덴 '국민의 아버지'

▲타게 에를란데르 스웨덴 총리. <복지국가 스웨덴 국민의 아버지 '타게 에를란데르' 1, 2> (EBS 지식채널e, 2016.10.8.; 10.15.) 화면 갈무리

지금 당장 진보정당이 집권해서 만들려고 하는 사회, 그것은 '지구촌 복지국가의 대명사' 스웨덴이었고, 그 길을 연 사람이 바로 '스웨덴 국민의 아버지' 에를란데르 스웨덴 총리였다.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누군지 물어보면 대답이 한결같다고 한다.

23년간 총리를 지낸 사람. 재임 중 11번의 선거를 모두 승리로 이끌었고, 1968년 총선에서는 스웨덴 선거 사상 처음으로 과반의석으로 사민당이 단독으로 재집권한 뒤 자신의 장기집권을 끝내고 체질개선이 필요하다 여겨 오랜 동지이자 준비된 후계자인 팔메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떠난 사람. 그의 이름은 타게 에를란데르(Tage Erlander, 1901.6.13~1985.6.21)였다.

우리에게 비교적 낯설게 다가오는 에를란데르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당(SDA, 이하 사민당)의 리더였으며 1946년부터 1969년까지 23년간 총리로 재임, '스웨덴의 가장 긴 총리'라 불렸다.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대학생 시절, '사회 개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급진좌파 운동권 학생이었던 에를란데르는 1930년 룬트 주의 시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32년에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1944년 무임소 장관으로 발탁되었고 1945년 교육부 장관이 됐다. 당시 사민당은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 1885.10.28~1946.10.6) 총리가 1946년에 급서하는 바람에 그 뒤를 이어 에를란데르가 총리가 되었다.

"나는 총리가 될 만한 재목이 못 되는 사람이다. 하지만 젊은 나를 지지해 준 동지 그리고 나를 후원해주는 국민들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너는(본인에게 하는 말) 정치인으로서 국민과 국가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돼있는가?" 에를란데르가 총리가 되던 날 적은 메모 내용 중

2차 세계대전 직후 총리로 취임한 에를란데르는 전임자인 한손이 제창한 '국민의 집(Folkhemmet)'을 스웨덴의 복지 모델로 완성했다. 그 과정에 그는 보수 야당과도 대화하고 협력했으며, 노동조합은 물론 기업가들과 끊임없는 대화를 지속해서 스웨덴의 정치와 경제가 대화와 협조로 이뤄지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래서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팔메의 인기가 더 높지만 정치학자들은 '에를란데르 없이 팔메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에를란데르에 대한 평가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

스웨덴 사민당의 황금기는 1936년부터 1986년이다. 이 50년 중 1976년부터 1982년까지 6년을 제외한 44년간 집권한 사민당의 총리는 한손과 에를란데르, 그리고 팔메뿐이었다. 10년을 집권한 한손, 23년을 집권한 에를란데르, 다시 11년을 집권한 팔메는 그 기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스웨덴을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복지 시스템과 민주주의 체제로 만들었다. (이석원 기자, 「오늘의 스웨덴 있게 한 지도자 타게 에를란데르」, <위클리서울>, 2019.8.5.)

2013년 김형탁 진보정의연구소 부소장은 최연혁 교수의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를 읽은 소감을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부럽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 

이 사회는 투명하다. 23년을 총리로 재임했던 타게 에를란데르라는 존경받는 정치인이 있다. 매주 목요일마다 재계의 주요 인사와 노조 대표들을 만찬에 초대해 꾸준히 대화를 하면서 상생의 정치를 폈던 사람이다.

그가 1969년 총리직을 내려놓았을 때 정작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살 집 한 채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모든 국민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민당은 고민한 결과 스톡홀름 외곽 사민당 청년 연수원이 있는 봄메쉬빅에 별장을 지어 주었다."

"최연혁 교수는 스웨덴이 대한민국의 유토피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맞는 이상향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의 책 제목에서 보이듯이 스웨덴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미래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의 하나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미래는 '정치'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점이 우리가 스웨덴을 다시 보게 되는 지점이다. 스웨덴이 걸었던 50년의 세월을 왜 우리는 걷지 못하겠는가." (스웨덴이 걸었던 50년의 시간: [기고]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최연혁)을 읽고, <레디앙>, 2013.3.29.)

▲<복지국가 스웨덴 국민의 아버지 '타게 에를란데르' 1, 2> (EBS 지식채널e, 2016.10.8.; 10.15.) 화면 갈무리
▲<복지국가 스웨덴 국민의 아버지 '타게 에를란데르' 1, 2> (EBS 지식채널e, 2016.10.8.; 10.15.) 화면 갈무리

'국민의 집'('인민의 집', '국민의 가정', Folkhemmet; People's Home)은 스웨덴 사민당과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를란데르는 전임자인 페르 알빈 한손이 제창한 '국민의 집'을 스웨덴의 복지 모델로 완성했다. 스웨덴 복지의 시작은 1928년 사민당의 당수였던 한손의 의회 연설로 연설을 통해 처음으로 '국민의 집'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국가는 모든 국민의 좋은 집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 집', '국민의 가정'이라는 말이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가리키는 은유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가정이란 공동체, 그리고 함께함을 뜻합니다. 훌륭한 가정은 그 어떤 구성원도 특별대우하거나 천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편애하거나 홀대하지도 않습니다. 훌륭한 가정에는 평등·사려·협력·도움이 존재합니다. 

가정은 가족의 울타리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과 시민을 품는 커다란 가정도 있습니다. 그런 가정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를 갈라놓는 사회적·경제적 장벽이 없습니다. 스웨덴은 아직 국민의 가정이 아닙니다."

※ '국민의 집'은 애초 우파의 용어였다. 1909년 알프레드 페테르손이라는 스웨덴 농민운동 지도자가 처음 그 말을 정치적으로 사용했다. "우리 사회가 국민의 위대한 가정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뒤이어 민족주의자 루돌프 셸렌이 '국민의 집'이란 말로 근대 사회가 잃어버린 민족적 연대와 공동체 정서를 환기시켰다. 

이 우파의 용어를 탈취해 좌파의 언어로 바꾸어낸 사람이 사민당 지도자 한손이었다. 우파의 허를 찌르는 전략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공동체주의적 호소, 민족주의적 열정은 보수 세력의 전유물이었다. 유독 스웨덴에서만 공동체주의와 민족주의가 좌파 사민주의의 언어로 통용됐는데,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한손의 리더십 덕이었다고 정치학자 셰리 버먼은 <정치가 우선한다>에서 말한다.

스웨덴 사민당이 보수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당이 처음부터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스웨덴 사민주의의 역사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로 난 제3의 길이었다. 1889년 결성 때부터 스웨덴 사민당은 민주주의 쟁취를 사회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들은 자유당 좌파와 연대해 보통선거권의 확대에 주력했다. 보통선거권이야말로 민중이 자신의 집에서 주인이 되는 데 필수 조건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

1920년대 '고난의 시기'에 유럽을 휩쓴 것은 '국민'과 '민족'을 앞세운 반민주적 극우 이념들이었다. 반면에 스웨덴에서 민족적 단합과 국민적 연대를 주도한 것은 사민당이었다. 사민당은 민주주의 원칙 위에 공동체 이념을 세웠다. 대공황의 한파가 몰아치던 1932년 선거에서 사민당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민당은 자본주의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공장 노동자인지, 농민인지, 점원인지, 공무원인지, 지식인인지 묻지 않는다." (고명섭 기자, 「[한겨레프리즘] '국민의 집' 짓기」, <한겨레>, 2011.1.19.)

사민당 당수가 된 한손은 1928년 총선 패배를 계기로 혁신에 착수했다. 그 방향은 기존보다 좀 더 실용주의적, 대중적, 통합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랫동안 당을 이끌어 왔던 독일 사민당 및 카우츠키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한손은 당과 대중을 결합시키는 리더십, 대중성의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정책과 제도 이전에, 대중을 설득하고 그 지지를 바탕으로 정치적 힘을 조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이념과 철학을 재구성하고,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 농민, 중산층 등으로 지지의 외연을 넓혀나가는 전략으로 구체화되었다. '국민의 집'이 바로 그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척박한 땅 말고는 가진 게 없어 '저주 받은 돌부리의 나라'로 불린 스웨덴은 에를란데르의 총리 임기 동안 '모든 국민이 다 함께 잘 사는 나라'로 거듭났다. 스웨덴 대학에서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각자의 미래를 예측해서 써 보라고 했을 때 학생들이 적는 내용이 있다고 한다. 

"나의 미래는 낙관적이다. 나의 미래는 스웨덴의 미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내가 힘들 때 도움을 주고 위기가 닥쳤을 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타게 에를란데르,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든 민중의 아버지」, 교보문고, <북뉴스> 칼럼, 2016.3.9.)

이처럼 '국민의 집' 개념은 이른바 '스웨덴식 사회주의'의 시작이다. 한 가정의 구성원이 평안하려면 그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고, 그런 다음 모든 가족은 그 가정, 즉 집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은 '국민의 집'이야말로 스웨덴이 추구하는 진정한 계급투쟁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1932년 사민당이 집권을 한 후 '국민의 집'은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와 올로프 팔메 총리에 의해 구체적으로 발전했고, 결국 정파의 이해관계나 정당의 이념과는 상관없는 '스웨덴의 기본 이념'이 된 것이다. (이석원 기자, 「복지는 이념이 아니라 정치의 기본이다」, <위클리 서울>, 2019.7.22.)

하지만 한손이 국민의 집을 주창했을 당시 일부 좌파나 비그포르스와 뮈그달 부부 등 진보적인 인사들은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일부 좌파들은 스웨덴 사민당이 우경화한 징후로 파악했다. 산업 국유화 등 전통적인 좌파 노선이 폐기된 자리에 공동체주의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구호가 들어섰다는 것이다. 또 전통적인 가정을 옹호하는 가부장적인 느낌을 준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역설적으로 '국민의 집'이라는 구호는 보수 성향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효과를 거뒀다. 약간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국민의 집'이라는 구호는 보편적 복지 정책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감을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당시 노동운동 진영이 스웨덴 사회에서 노동자가 지내는 처지를 '불쌍한 대우를 받는 주워온 자식'에 비유하곤 했던 전통과 맞물리면서, '행복한 가정'을 떠올리게 하는 '국민의 집'이라는 표현은 현장 노동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성현석 기자, 「'인민의 집', 그들만의 천국?)」, <프레시안>, 2008.10.18.)

스웨덴 '민중의 집'과 한국 '민중의 집' : "'민중의 집' 없이 스웨덴은 존재할 수 없다"

"노동자와 도시 서민들에게 문화, 유흥, 평생교육, 그리고 만남과 연대의 공간인 민중의 집."

"'정치'와 '일상'이 만나는 공간. 이보다 더 매력적인 공간이 있을까"

"놀랍게도 민중의 집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운동, 노동자 운동이 결합된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탈리아의 Casa del Popolo, 포루투갈의 Casa do Povo, 독일의 Gewerkschaftshaus, 스위스의 Volkshaus, 스위스와 프랑스의 Maison du Peuple 또는 Bourse de Travail, 영국의 People′s Palace, 오스트리아의 Volksbildungshaus, 네덜란드의 Volksgebouw 등 모두 '민중의 집'이라고 해석되는 동일한 명칭의 공간들이 나라마다 존재했다." (정경섭, <민중의 집>, <레디앙>, 2012)

스웨덴의 잘 갖춰진 복지제도, 노사간 타협적 대타협 등의 뿌리에는 '민중의 집'이 있었다. 민중의 집은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풀뿌리 지역조직으로, 노동운동과 지역 풀뿌리 정치운동의 필요에 의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스웨덴 민중의 집은 사민당과 노총의 성장 기반이었고 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긴밀한 결합의 상징이었다.

오늘날 스웨덴 민중의 집(Folkets Hus, People's House)은 '국민의 집'(Folkhemmet; People's Home)으로 상징되는 복지국가 스웨덴이 어떻게 지역사회의 민주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련의 궤적과 같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스웨덴 민중의 집은 20세기 복지국가를 거쳐 2020년 현재 533개로 늘어났다. 현재는 노동자와 서민의 문화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간의 형태 역시 공연 무대, 모임 장소, 갤러리, 영화관, 스튜디오, 레스토랑, 카페 등 다양하다.

정경섭의 <민중의 집: 술과 이웃, 토론과 배움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레디앙, 2012)은 스웨덴 민중의 집을 이렇게 소개했다.

"스웨덴 민중의 집은 대부분의 스웨덴 사람들 가슴에 살아 있고 남아 있으며, 민중의 집이 없이는 살아 있는 마을도 고립되고 황폐해질 것이다. 한마디로 민중의 집이 없이 스웨덴은 존재할 수 없다. 

(…) 

스웨덴 모델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민중의 집 얘기를 들어본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스웨덴에는 크고 작은 민중의 집이 전국적으로 500개 이상이 있으며,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 숫자만 연간 5000만 명으로 스웨덴 인구의 5배가 넘는다. 놀라운 수치다. 민중의 집이 그만큼 사람들 일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수치다. 

(…) 

이뿐 아니라 민중의 집은 값싼 와인과 빵 같은 생필품을 공급해주는 곳이자, 병원·약국 역할도 했다. 연극 공연, 음악회 개최, 영화 상영, 스포츠 경기 등 다양한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토론과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다." (정경섭, <민중의 집>, 레디앙, 2012의 출판사 서평)

2010년 8월 노회찬의 길동무 정경섭은 꿈에 그리던 '성지 순례'를 감행했다.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민중의 집을 45일 동안 둘러봤다. 국내에 민중의 집과 관련된 자료가 없어 외국 자료를 번역하는 데에만 1년이 넘는 기간이 걸렸다. 그 결과는 2012년 <민중의 집> 출간으로 빛을 봤다.

"진보진영에서 유럽의 진보정당사나 노동운동엔 관심이 많았지만 유럽 진보의 일상사를 밝힌 건 처음일 거예요."

※ '성지 순례'의 작은 에피소드 하나

정경섭에 대한 무한신뢰를 갖고 있는 레디앙의 이광호 대표가 아니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함께 동행하기로 한 김원정(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사실상 이 책의 공저자라고 할 수 있다)에 대한 신뢰가 보태져 지인들이 여비를 보탰다. 그런데 유럽행 비행기를 탔던 그들에게서 들려온 첫 번째 소식은 낭보가 아닌 비보였다. 첫 방문지인 스페인에 도착한지 나흘 만에 가져간 짐의 대부분을 도둑을 맞았다는 것. 세상에!

그렇게 좌충우돌 여행기가 될 뻔한 이 유럽 민중의 집 탐방기는 그로부터 무려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술과 이웃, 토론과 배움이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책으로 나왔다. (오진아, 「그곳에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 있다: 책 <민중의 집> 그리고 우리 동네 '마포 민중의 집' 이야기」, <레디앙>, 2012.10.10.)

▲노회찬 트위터(2012.8.7.) 갈무리

2012년 8월 노회찬은 트위터에 글과 함께 책 표지 사진을 올렸다.

"강추! 정경섭의 <민중의 집>! 책은 역시 쓸 자격이 있는 사람이 써야 합니다. 한국에서 민중의 집을 직접 만든 저자가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의 민중의 집을 둘러보고 쓴 역작입니다."

'민중의 집-노회찬'에 대한 기억과 관련해 정경섭과 통화를 했을 때, 정경섭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2021.6.10.)

"2010년 8월 유럽 민중의 집 탐방을 준비할 때 진보신당 차원의 지원이 있었다. 당시 당대표는 노회찬이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와 만났을 때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민중의 집>이 출간됐을 때는 개인의 SNS를 통한 책 홍보도 해주셨다."

"작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유럽 탐방에서 돌아온 직후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훔쳐간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싱크대 위에 노 대표님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혹시 도둑이 그걸 보고 그냥 돌아간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본다. 훔쳐갈 물건이 특별히 있던 살림살이도 아니었지만 하하…."

2014년 10월 노회찬의 길동무 정경섭 마포 민중의 집 공동대표와 강상구 구로 민중의 집 대표, 그리고 오현주 마포 민중의 집 사무국장은 스웨덴 민중의 집 연합회의 초청을 받아 스웨덴 민중의 집을 방문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스웨덴 사민당이 집권하는 데 민중의 집은 절대적 역할을 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민중의 집이 없었더라면 정치적 모임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민중의 집은 사민당의 성장과 집권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지역) 교육과 문화 활동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민당은 노동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주요한 대중 전략은 민중의 집, 협동조합, 노동자교육협회다."

스웨덴 사민당 중앙당의 한 관계자와 의원이 말한 내용이었다. 정경섭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스웨덴 방문 기간에 민중의 집을 포함해 많은 단체를 방문했는데 노동자교육협회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스웨덴의 최대 시민교육기관인 노동자교육협회는 사민당과 스웨덴 노총, 협동조합협의회가 공동으로 만든 단체이다. 전국적으로 약 3만5000 개의 스터디그룹을 운영하고 있는데, 다양한 시민교육이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념교육부터 시작해서 실생활에 필요한 실무교육까지를 10여 명으로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학습하고 있다. 

대규모 교육이 아니라 소규모 스터디 그룹을 만드는 것은 그들만의 철학이다. 소규모 그룹에서 토론하고 학습하는 과정을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전설적 총리인 올로프 팔메가 '스웨덴 민주주의는 스터디 서클 민주주의'라고 했던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정경섭, 「스웨덴 풀뿌리 민주주의가 자라는 곳」, <한겨레21> 1037호, 2014.11.21.)

▲2014년 10월 스웨덴 롹스베드 민중의 집 모습 (사진 출처: 오현주 페이스북)

강상구는 스웨덴 민중의 집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스웨덴 민중의 집 운동은 민중의 집 연합회로 모여 있다. 민중의 집 연합회는 전국 곳곳에 600개에 이르는 민중의 집과 120개에 달하는 민중공원, 그리고 직영 영화관 5개의 연합체이다. 이미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스웨덴 민중의 집은 '만남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사민당, 스웨덴 노총과 함께 스웨덴을 사회복지국가로 이끈 '대중운동'이었다."

"롹스베드 민중의 집은 스톡홀롬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1980년에 지어졌는데, 현재 민중의 집 대표는 원래 민중의 집 건물에서 청소노동자로 일을 했었다고 한다. 나중에 노동조합 활동을 거쳐, 정치에 입문하고 스톡홀롬 부시장을 한 그는, 몇 년 전부터 민중의 집 대표로 일하고 있다." (「변화의 길 위에 있는 스웨덴 '민중의 집' 운동을 보며」, <레디앙>, 2014.12.4.)

노동자교육협회가 지원하는 '공부모임(스터디 서클)'의 모습은 정경섭과 강상구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스터디 서클이란 특정한 교사 없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경계가 느슨한 구조의 배움 공동체다. 3만5000이라는 숫자도 물론 놀라왔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학습을 원하는 노동자들은 누구나 '공부모임'을 꾸리는 게 일종의 문화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강상구는 스웨덴 방문 거의 막바지에 만난 노동자교육협회의 고위 관계자에게 물었다. "공부모임에 다양한 교재를 제공한다고 들었는데, 교재 종류가 몇 가지나 되나?" 그의 대답은 이랬다.

"약 7만8000 가지다."

한국의 '민중의 집'과 정경섭과 홍세화, 그리고 노회찬 : "공덕동의 촛불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2008년 7월 12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 날 붉은악마가 축제를 벌였던 서울광장은 다시 촛불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87년 6월이 재현되고 있다는 바람과 평가도 난무하였다. 동시에 김경욱 이랜드노조위원장의 <촛불은 왜 비정규직 문제에 주목하지 않는가>라는 절규도 울려 퍼졌다. 실제 1987년 6월에도 우리는 그랬다. 이른바 대중성을 내세워 <직선제 개헌>으로 요구를 한정시키려는 보수야당과 국민운동본부 일부세력에 맞서서 <민중생존권> 관련 요구를 앞세우기 위해 얼마나 싸워왔던가! 

(…)

시청 앞을 헤매다가 저녁 늦게 공덕동 <민중의 집> 일일주점에 들렀다. 심광현 공동대표는 민중의 집을 만드는데 기울인 수년간의 노력을 설명하며 이제 진보신당이 책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함께 공동대표를 맡은 정경섭 위원장이 있는 한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박진희 위원장을 비롯한 구 사회당 관계자들도 여럿 참석했고 김경욱, 이남신 동지들도 이랜드 식구와 함께 왔다. 마포당원들은 당원 수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이제 서울에서 관악 등의 시대는 가고 마포의 시대가 왔다며 나에게 현실을 직시할 것을 주문하였다.

밤이 늦도록 빗속의 촛불은 종로를 지키고 공덕동의 촛불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진보정치> 15호(2000.7.14.~7.20) 기사 갈무리

마포 민중의 집 공동대표를 맡은 정경섭 진보신당 마포지역위 위원장은 일찍부터 진보정당의 지역활동 사례로 '민중의 집'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기자 시절 정경섭은 <기획연재: 민주노동당 과제와 대안⑧> 가운데 외국 진보정당의 사례로 '민중의 집'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를 올렸다. 

"외국 진보정당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꾸준한 지역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브라질 PT당의 '문화'를 통한 지역활동이나 독일 녹색당의 세심한 활동은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현재는 좌익민주당과 재건공산당으로 나뉘어졌다)의 주민조직인 '민중의 집' 역시 지역주민들과 당을 거부감 없이 연결시켜주고 있다. 민줌의 집은 지역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1층에는 빠(BAR), 카드실, 당구장이 있고 2층에는 정당사무소, 지역노조사무소, 민주단체사무소 등이 들어서 있으며 3은 각종 집회, 강연회, 댄스파티가 이뤄질 수 있는 다목적홀이 있다. 지하는 각종 써클실, 체육실, 암실 등이 갖춰져 있고, 빠는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술을 마시며 토론을 벌일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나의 진보센터 같으면서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민회관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다."

"영국 노동당의 경우도 지부 사무실이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박홍순 중앙당 기획위원장은 지난 8일 대전에서 열린 전국 사무처장 수련회에서 '1~2년의 사업의 작은 성과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10년 20년을 바라보면서 꾸준하고 능동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며 '이탈리아 공산당의 민중의 집도 2차대전 이후 50년 동안의 축적된 노력을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며 꾸준한 활동을 강조했다." (<진보정치> 15호, 2000.7.14.~7.20)

▲<마포 민중의 집> 개소식 사진(2008.7.) (사진 제공: 정경섭)
▲첫 출발할 때의 마포 민중의 집 모습 (사진 제공: 오진아)

2006년 초 민주노동당 마포지역위원장 정경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나 스웨덴에서 성행하고 있는 '민중의 집'과 같은 지역 거점공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민중의 집 연구모임'을 결성하였다. 2007년 말 민중의 집 건립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공동대표 3인(홍세화, 심광현, 정경섭)과 사무국, 교육/문화 프로그램 기획모임으로 구성된 건립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2008년 7월 마포구 망원동에 문을 연, 대한민국 1호점인 <마포 민중의 집>은 진보신당 마포지역위(위원장: 정경섭)가 주축이 되어 새로운 지역 정치를 펼치기 위해 설립됐다. 이후 중랑구와 구로구(201.10.15)에서도 설립됐다. 진보신당 민생사업실이 작성한 <진보신당 지역사업 사례조사 보고서-마포당협 '민중의 집' 사업 사례>(2010.6.)에서 정경섭은 이렇게 밝혔다.

"민중의 집은 노동조합과 함께 하고 정치가 있는 공동체운동이다. 기본적으로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자는 모토를 갖고 있다. 그리고 '왜 공동체가 확산되고 저소득층이 함께하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서 착안하여 사회적 가치를 평등화한다는 의미에서 민중의 집의 모든 강좌는 무료로 진행한다.

한국 사회에서 저소득층이 공동체에 편입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사실 공동체 운영에 돈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마도 사회적으로 서열화된 계급이 존재하는 탓에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노동을 하는 분들이 공동체 내에서 주눅 드는부분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료로 강좌하고 무료로 배우는 것으로 진행한다. 예를 들면 기타를 배우고 싶다는 회원이 있으면 회원 또는 비회원이라도 네트워크 되어 있는 사람들 중에 기타를 칠 줄 아는 사람을 섭외해서 강좌를 맡겨 기타반을 여는 식이다."

▲<진보의 재탄생> 책내용 갈무리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마포 민중의 집 공동대표인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은 '민중의 집' 같은 '일상의 정치'를 강화하자고 노회찬(진보신당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랬다.

홍세화 : 진보정당의 실천은 바로 이들(지난 10년 동안 권력에 몸담았던 일부 세력들)이 멈추고 만, 또 망가뜨린 신뢰의 상실 위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무엇이어야 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첫 번째 일상의 정치에 가장 주목하는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마포 <민중의 집>같은 기획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사회적 현안에 결합하고 고통의 현장에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교육문화공간으로서의 민중의 집 같은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먼 미래의 기획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공간들 말이지요.

노회찬 : 정치란 건 다름 아닌 설득의 과정인데, 설득하고 동의를 얻고 지지까지 이끌어내서 그 내용을 다시 현실화시켜내는 그런 과정인데 (…) 거대 담론과 생활정치를 대립시키고 그중에 취사선택을 하는 것에 저는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 오히려 생활정치를 통해서 거대 담론으로 연결해 가고, 구체성을 확보한 거대 담론으로 더 풍부한 생활정치로 다시 돌아가는 순환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민중의 집> 기획은 순환의 모델을 만드는 중요한 실험이고 경험적 토대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 

생활 진보가 실천될 때, 삶의 현장 곳곳에 의식과 실천의 거미줄이 형성될 때, 비로소 보수정치세력들의 민생 퍼레이드가 무력화 될 수 있고, 비로소 진지전을 이야기할 수가 있겠지요.

홍세화 : 지역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접촉할 수 있는 <민중의 집>을 진보신당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이기를 대표를 만난 김에 강력하게 요청드리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그것을 하나의 작은 실체로라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내야 될 거 아니냐, 대표께서도 이의는 없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노회찬 : 하하하. 당연하고요. 지금은 여러 가지 폐단을 이유로 사라졌지만, 과거의 지구당과는 다른 모델, 정당정치가 지역에서 자신의 가치와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모델들이 무엇일까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의 집>이 그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삶에 근거를 둔, 사회적 연대망에 기초를 둔 실험들이 적극적으로 시도되어야겠지요. 선거에 대응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전략적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홍세화 : 매일 같이 사람들이 만나고 떠들고 하지만, 제가 볼 때는 거의 부유(浮游)하는 것일 뿐이고, 진정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사라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느낄 수 있고,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고 하는 것은 참된 만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일 텐데 말이지요. (…) 

<민중의 집> 같은 곳에서의 만남들이 자본주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진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만남으로 바꿀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을 갖고 있는 거죠. 사람들에게 아! 그래도 진보정당은, 그 속에서 사람들 만나면 다른 어떤 향기가 느껴진다는, 거창한 이야기나 하면서 자기만족을 하는 팍팍하고 이런 것이 아닌, 그윽한 포근함. 이런 만남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되지 않겠느냐 라는 거죠.

노회찬 : 당이 강령, 당헌, 당규만 앙상하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풍부한 문화적 재원들을 확보하고 이걸 매개로 생활을 정치로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노력을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을 지지하게 하기 위해서 만드는 딱딱한 자리가 아니라 푹신푹신한 느낌의 공간들, 반드시 당이 전면에 나서지 않더라도 뒷받침하는 다른 틀, <민중의 집>이라든가, 또 당이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말입니다. 자기 관심사에 따른 다양한 소모임들도 중요하겠지요. (「홍세화, 노회찬에게 묻다」, 노회찬 외,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 꾸리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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