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시리즈모아보기)
part 2 유럽 사민당 리더와의 조우
⑯ 들어가는 글 유럽의 사회민주당으로부터, 한국의 진보정당에게 (☞바로가기)
⑰ 키어 하디 上 민주노동당에서 영국 노동당을 봤다 (☞바로가기)
⑱ 키어 하디 下 민주노동당의 첫걸음..."50년 후엔 진보가 집권할 것" (☞바로가기)
⑲ 켄 리빙스턴 上 영국의 ‘빨갱이 켄’, 지금의 런던을 만들다 (☞바로가기)
⑳ 켄 리빙스턴 下 "한국의 ‘레미제라블’은 치러지지 않는 장례식장에 있다" (☞바로가기)
㉑ 빌리 브란트 上 독일의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로가기)
㉒ 빌리 브란트 下 "파독간호사, 파독광부라 하지 말고 ‘애국자’라 해야 합니다" (☞바로가기)
㉓ 장 조레스 上 국회로 간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 그리고 노회찬 (☞바로가기)
㉔ 장 조레스 下 진실과 정의 앞에 선 ‘삼성 X파일 사건’ (☞바로가기)
㉕ 프랑수아 미테랑 上 (☞바로가기)
'좌파 인플레이션' 현상 : "그래 네 머리가 벗겨지기 전에 좋은 세상이 올 거야"
2005년 5월 6일 노회찬(민주노동당 17대 국회의원)의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다. 이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한국 정치인 중 최초로 '그랑제꼴 시앙스포'에서 강연하다
2008년 11월 18일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공동대표는 프랑스의 정치학 중심 명문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인 파리 정치대학(시앙스포, Sciences Po)에서 강연을 했다. 진보신당은 한국 정치인 사상 최초라고 밝히며, "이 날 강연에서 준비된 강의실이 청중으로 가득 차, 서서 강연을 듣는 사람도 생기는 등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전하기도 했다. 강연 제목은 '오바마 시대 미국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
노회찬은 강연을 통해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에서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개념은 미국과 중국 간의 새로운 갈등과 대립을 초래할 수 있으며, 동북아 평화는 물론 남북관계의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설하면서, "오바마 정부의 변화가 미국 일방주의 및 군사적 패권주의 포기로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통일 한국의 포지셔닝을 묻는 질문에 대해 "통일 한국은 한미상호군사동맹과 같은 동맹체제가 아닌 주변 강국과의 비동맹, 중립국가의 형태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어 노회찬은 "IMF, 세계은행, GATT로 이어지는 브래튼우즈체제에 기반해 있는 세계경제체제의 재편 시기에, 한국의 외교는 미국의 외교 우산 아래에서 단순히 대북 경쟁에 치중하는 외교 실종을 가져왔다"고 비판하며 "미국 일변도나, 북한과의 경쟁에서 벗어나 유럽, 중국, 남미 등 (한국 외교가) 다변화돼야 하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11월 15일 저녁 파리에 도착한 노회찬, 유성재, 박용진 등 일행은 파리에서 개최된 진보신당 유럽당원모임 회의장으로 갔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에서 모인 당원들과 파리지역에서 거주하는 지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회의와 토론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날 회의는 유럽지역의 당원의 활동 진로를 모색하면서 새로이 조직을 가다듬고 중앙당에 바라는 사항들을 정리했으며, 아울러 진보신당 당원뿐만 아니라, 지지자들, 그리고 유럽 지역 내 진보적인 한국인들을 아우르기 위한 네트워크 '유로진보넷'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교환했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을 참배하다 :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다
다음날인 11월 16일 아침 일찍 노회찬 일행과 진보신당 유럽당원들은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Le Mur des Fédérés)을 참배했다. '마지막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학살기간 동안 이 벽 앞에서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시민의 자치정부였던 '파리코뮌'(Paris Commune, 1871.3.18.~5.28.)의 147명 시민병사들이 총살됐다. 벽에 수없이 박힌 총알구멍들이 그때의 아픈 역사를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훗날 레닌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예행연습'이라고 평한 파리코뮌은 탄생한 지 72일 만에 이렇게 사라졌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파리코뮌 진압 이후에도 계속 생명을 유지했다. 코뮌이 일어난 지 110년 뒤인 1981년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후보가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1871.5.21.~28)'라고 간단히 적혀 있는 표지판이 노회찬 일행을 맞아주었다. 노회찬과 일행들은 피처럼 붉은 장미꽃을 헌화했고, 주먹을 쥐고 낮으나 결의에 찬 목소리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다. 간간히 뿌려지는 가랑비가 숙연함을 더해주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파리코뮌 전사들의 벽'은 2010년 홍세화-노회찬의 인터뷰 만남에서 홍세화의 회상을 통해 등장하기도 했다.
※ 참조) 홍세화(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 「"무기를 들어요! 시민 여러분, 무기를 들어요!": [작은책] 책이 이끄는 여행…'민중의 함성'과 '코뮌 전사의 벽'」 (<프레시안>, 2017.9.2.)
1871년 3월 26일 화요일, 파리 민중들은 투표를 통해 코뮌을 성립시켰다.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 그리고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지배 체제의 노예의 자리에서 "심판자이면서 저항자, 파트너이면서 자신의 힘의 주체적 행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 그렇게 "코뮌은 불행한 사람들, 투기에서 배제된 사람들,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사람들, 빈민가 사람들과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코뮌 만세! 사회 공화국 만세!
… 그렇게 파리 코뮌은 두 달 남짓 존속한 뒤 5월 28일 일요일 아침 몰리에르, 라퐁텐 등 수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파리 최대의 공동묘지 페르 라쉐즈의 동북쪽 벽에서 마지막 코뮌 전사들이 총살당하면서 막을 내렸다. 티에르 정부는 코뮌 전사들에게 총살당한 인질 100여 명과 전투에서 죽은 베르사유군 877명의 "원수를 갚으려고" 파리 시민과 코뮌 전사들 2만 명을 학살했다. 바로 '피의 일주일'이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노회찬은 파리시가 2007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대중교통 수단의 한 방법으로써 자전거를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지 둘러보았다. 파리 시내 300미터 간격으로 세워진 자전거 역에는 이용권카드를 사용해 자전거를 타고 목적지 부근의 역에 다시 세워 놓으면 된다. 노회찬은 직접 자전거를 타고 파리 시내를 돌아보며 자전거의 안전장치, 가격의 합리성과 운용의 효율성 등을 확인했다.
※ 2007년 여름, 파리시는 친환경적인 교통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인 공용자전거 대여 시스템 '벨리브'(Velib')를 도입했다. 'Velo'(자전거)와 'liberté'(자유)를 합성해 만든 이름처럼 파리 시내 곳곳을 자유로이 누비는 회색 자전거 Velib'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선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주 OECD 대한민국 대표부 홈페이지, 2017.3.3.)
해장으로 먹은 파리 바게트 빵
유럽 일정 두 번째 밤에 (최김)경호는 노회찬 일행을 자신의 하숙방으로 초대했다. 박용진은 그날 밤을 이렇게 스케치했다.
2020년 5월 28일 박용진 21대 국회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13호의 '문화인 노회찬'에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파리의 아침, 딱딱했던 바게트는 맛이 어땠나요?」란 제목의 글을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실었다.
'식도락가' 미테랑과 '방랑 식객' 노회찬
2007년 누군가 노회찬에게 물었다. '정치가가 되지 않았으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느냐?' 노회찬의 답은 이랬다.
'식도락가' 미테랑의 <엘리제궁의 요리사> : "섣달 그믐날 생애 최후의 만찬을 가지겠다."
미테랑 대통령은 '빠리의 산책가'라고 불릴 만큼 시내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최소한 3일은 산책. 아마도 그의 문화예술 애호정신과 식도락가 기질 그리고 15권에 이르는 저술활동을 뒷받침 하는 독서와 서적 수집에 대한 열정이 그를 늘상 걷게 만든 것 같다. (「진정한 빠리의 산책가 – 프랑수와 미테랑 대통령」, <유로포커스>, 2006.1.9.)
1995년 말 미테랑은 연례행사인 이집트 순례길에 올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암세포 전이로 인해 자신에게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나날들이 남아 있다는 것을. 식도락가 미테랑은 프랑스로 돌아와 선언한다. "섣달 그믐날 생애 최후의 만찬을 가지겠다."
가족과 지인 서른 명 정도가 초대받은 가운데, 미테랑은 손님과 별도의 식탁에서 프랑스 최상류층에게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메뉴의 요리를 앞에 두고 혼자 식사했다.
석화에서 시작된 음식이 나오면 깨어났다가 먹고 다시 잠에 빠져들기를 되풀이하는 사이 코스 요리는 마지막 요리에 이르렀다. 미테랑의 최후의 만찬은 바로 오르톨랑 통구이였다. 이후 미테랑은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다가 (79세를 일기로) 1996년 1월 8일 세상을 떴다. (<한국일보>, 2021.4.3.)
"요리는 기쁨이고 예술이며 삶"이라는 메시지를 곳곳에서 보여주는 영화 '엘리제궁의 요리사'(Les Saveurs du palais, 2012, 감독 크리스티앙 벵상)는, 미테랑 대통령의 식탁을 책임진 파리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관저)의 유일한 여성 셰프 라보리 오르탕스(카트린느 프로 역)의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두 가지 갈래로 진행된다. 대통령을 둘러싼 참모들, 그들과 이미 한 배를 탄 주방 권력자들, 그리고 이 완고한 기존 셰프들 사이에 뛰어든 '낙하산 탄 여인' 오르탕스의 분투기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연어로 가득 채운 양배추 요리, 허브향이 코를 자극하는 양갈비 구이, 송로버섯과 절묘한 궁합을 이루는 빵, 송아지 고기와 돼지고기를 이용해 케이크처럼 만들어낸 이름도 아름다운 '오로르의 베개' 등 그야말로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온갖 요리들이 화면에 가득 찬다. (<매일경제>, 2015.4.2.)
지침이 있으면 좋겠다는 오르탕스에게 미테랑은 말한다.
오르탕스가 따라 준 와인과 송로버섯 브레드를 먹고 마시며 미테랑은 말한다.
'블랙뤼미에르(필름스토커)'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추억이다"라면서, <매일경제>에 올린 글(「[영화] 블랙뤼미에르의 영화 뒤집기 '엘리제궁의 요리사'」, 2015.4.2.)에 이렇게 적었다.
'방랑 식객' 노회찬의 <음식천국> : "음식은 상처받은 영혼과 마음을 치유해준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은 '먹기 위해 사노라'고 대답하며 소탈하게 웃던 노회찬. <음식천국 노회찬>의 이인우 작가는 "그 우문직답 속에는 평생 민중의 삶을 직시하며 진보정치를 추구해 온 한 '사회주의자'의 진실이 을밀대 육수 맛처럼 스며들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음식천국 노회찬: 맛집에서 나눈 '노회찬의 삶과 꿈>(일빛, 2021)은 한겨레 이인우 기자가 100여 명에 이르는 노회찬의 길동무들과 노회찬이 사랑한 27곳의 식당, 주점을 다니며 나눈 이야기와 추억을 담은 책이다. 이인우는 「내가 꿈꾸는 나라-염리동 평양냉면집 '을밀대'에서」라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박규님 현 노회찬재단 운영실장의 여는글 「산하에 봄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호영 셰프는 추천글(「책에서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을 통해 이렇게 마음을 전했다.
황교익 맛칼럼니스트의 추천사는 이렇다.
닫는 글 : "그의 죽음은 내게 간절하던 하나의 꿈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 "그는 인생의 찬비에 내몰린 이들에게 우산과도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의 '문화 대통령 미테랑'은 1995년 6월 임기를 완수하고 물러나 회고록을 집필하며 자신의 죽음에 대비했다.
"정치인은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임기와 책무가 완수되고 나이를 먹어 지평선에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글을 남길 필요가 있다"고 서문에 적은 미테랑은, "할 수 있었던 일은 다했다"는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좌우명이 자신의 묘비명에 새겨지길 바란다며 회고록(<두 목소리에 담긴 회고>)을 맺었다. (<중앙일보>, 1995.4.11.)
앞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노회찬> 편에서도 밝힌 것처럼, 2014년 어느날 노회찬은 '생전에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노회찬은 미테랑처럼 '할 수 있었던 일을 다 했을까?' 그리고 '잘 놀다 갔을까?'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
<키어 하디와 노회찬> 편에서도 인용한, 거울(물)에 비친 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라는 신영복 선생의 '무감어수 감어인(無鑒於水 鑒於人)'이라는 경구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노회찬의 길동무였던 목수정, 한애규 두 분 작가의 회상으로 오늘의 기록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파리에 거주 중인 목수정 작가가 갑작스런 비보를 듣고 이틀 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이다. (「파리에서 만난 노회찬, 모두를 놀라게 한 사연: [노회찬을 기리며] 기쁨과 용기, 분노와 지혜로 가득했던 노회찬」, <오마이뉴스>, 2018.7.25.)
목수정은 2008년 11월 19일 노회찬의 프랑스 CGT(프랑스 노총) 강연에서 문화정책에 대한 한 유학생의 물음에 대한 답을 기억해냈다.
2008년 7월 빈소를 찾은 목수정을 또 다른 노회찬의 길동무인 김민정 시인이 만나 둘은 대화를 나눴다. 김민정은 노회찬을 통해 초면인 목수정과의 인연을 이었다.
목수정은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18호 「(문화인 노회찬) 문화적 유희로 충만했던 동시대의 전인(全人)」에 이렇게 적었다.
노회찬의 오랜 지인인 한애규(테라코타 작가)가 노회찬재단 소식지 <민들레> 9호(2020.1.30.)의 '문화인 노회찬'에 실은 「전시장에 들어서다」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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