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① 다섯 번째 기록 이야기를 열며 (☞바로가기)
②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③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④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⑤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⑥ 호찌민 上 "씩식한 군인이 돼 베트공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⑦ 호찌민 下 "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가기)
⑧ 저우언라이 上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바로가기)
⑨ 저우언라이 下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바로가기)
⑩ 룩셈부르크 上 '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나다 (☞바로가기)
⑪ 룩셈부르크 下 로자 룩셈부르크의 '츠비츠비', 그리고 노회찬의 '잘 놀다 간다' (☞바로가기)
⑫ 그람시 上 민주노동당의 분당,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 (☞바로가기)
⑬ 그람시 下 '희대의 반항아' 그람시와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 노회찬 (☞바로가기)
⑭ 체 게바라 上 (☞바로가기)
금지된 영화 <대부>와 <대부2>, 그리고 쿠바혁명 : '인생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의 역설
<카미노 데 쿠바 : 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로 가는 길)>(이매진, 2019)에서 손호철은 영화 <대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쿠바혁명의 성공은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전복과 함께 마피아가 쿠바 아바나에 세운 카지노 왕국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후속작 영화 <대부2>에서는, 아바나에 진출한 마피아 보스 하이만 로스는 마이클 코를레오네(알 파치노)에게 쿠바가 왜 마피아에게는 지상낙원인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바티스타 자택의 송년 파티에 초대받은 것은 뇌물 300만 달러를 스위스은행에 입금한 대가였다. (이철 고문, 「쿠바 어떻게 달라졌나」, 미주한국일보, 2016.7.20.)
노회찬의 삶의 여정에 영화 <대부>는 두어 차례 등장한다. 장항준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학창시절 가장 많이 보고 감동받은 영화' 중 하나로 <대부>를 꼽았다. (「두 영화광의 만남-영화감독 장항준과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 729호, 2009.11.17.~11.24.)
노회찬은 경기고등학교 1학년 3반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학급지 <한벗> 2호를 만들었다. 발행인은 한영택 담임선생님, 편집인은 정광필, 편집위원은 노회찬·강일경·김병식·김상필·나덕렬·박종서·백영·염상진·유석주·윤복식·이종걸·장석·최병우·한동희·한명광·허서구.
편집인 정광필은 이렇게 회상한다.
노회찬은 시 형식의 「누구나」와 「雜說」, 영화 감상글 「대부」 등 세 편을 써서 2호에 올렸다. 이 가운데 노회찬의 <대부> 감상글을 간추리면 이렇다.
노회찬은 영화 스토리를 "어느 일요일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 정원에서 코르레오네는 어린 손자와 노닐면서 조용히 쓰러진다. 위대한 '갇·파더'인 돈·비토·코르레오네는 안락한 죽음을 맞는 것이다. 누구의 명령도 없이 가족과 '훼미리'를 지키며 일생을 마쳐 최후의 유언이란 '인생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였다"로 마무리한 뒤 4쪽의 글을 이렇게 맺었다.
까까머리를 한 고교 1학년 노회찬의 <대부> 감상평에는 쿠바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아쉽게도'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 '귀 있는 자 들어라'를 살포한 노회찬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나도 모르게 있었나 보다.
카메라와 담배 : "혁명가 체 게바라나 영국 정치인 처칠처럼 사진가나 문필가로도 작업하고 싶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된 체 게바라.
어릴 적부터 체 게바라는 자신이 본 것을 노트에 적고 아버지를 따라서 사진찍기를 좋아했던,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었다.
커서도 체 게바라는 혁명 전이든 혁명 중이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때든 카메라를 품에 끼고 다닌 기록사진이 많다. 쿠바의 사진가 알베르토 코르다의 쿠바 혁명기록 흑백사진집 <한 혁명의 일기>(Diario de una Revolucion)에도 게바라는 거의 카메라를 든 모습으로 담겨있다. 혁명가이자 자연인으로서 취미 이상의 사진적 가치를 인식한 모습이라 하겠다. (이경,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바꾼다」, <불교공뉴스>, 2020.4.25.)
※ 체 게바라를 기억하고 있는 혁명동지이자 사진가인 1925년생 라울 코랄레스는, 고히미르-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곳으로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마을-로 찾아온 한국인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라울 코랄레스는 총 대신 사진기를 들고 종군기자처럼 체 게바라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혁명전쟁을 기록한 사람은 그와 그 제자인 알베르토 코르다였다. 웬만한 체 게바라의 전기에 나오는 사진은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다.
정치인이자 문화예술 애호가였던 '문화인' 노회찬. 그에게는 문화예술계 지인들이 꽤 많았다.
노회찬이 떠난 다음 해, 그를 추모하며 <1주기 추모미술전 : 함께 꿈꾸는 세상>이 열렸다. 2019년 7월, 노회찬재단이 주최하고 전태일기념관에서였다. 미술전에 '눈발을 맞으며 투쟁 구호를 외치는 노회찬', '빗자루 기타리스트 노회찬', '첼로를 켜는 노회찬' 사진을 출품한 이상엽 사진작가는 대표적인 문화예술계 지인 중 한 명이다.
노회찬에 대해 "그가 혁명가 체 게바라나 영국 정치인 처칠처럼 사진가나 문필가로도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을 종종 비치곤 했다"고 회고하던 이상엽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사망 당시 체 게바라의 배낭 속에는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본 것을 노트에 적었다"는 체 게바라의 메모 습관처럼, 노회찬도 정당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손바닥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필요한 경우 메모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요약하거나, 혼자 걸으며 사색할 때 떠오른 생각을 메모했다. 이광호 작가가 <노회찬 평전>을 준비하며 정리한 메모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체 게바라처럼 사진가로도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을 종종 비치곤" 한 노회찬은 사진 관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문화 애호가인 선친에 대한 기억과 함께 떠올렸다.
아버지의 '사진 모델'이었던 어린 노회찬은 커서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개인 소장 사진기와 망원 렌즈도 여러 점 있었고, 스마트 폰으로 촬영하는 것도 즐겨했다.
한 일화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촉구를 위해 대한문 앞에서 30일 단식농성을 할 당시에도,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얼마 전 구입한 스마트폰 망원렌즈로 길동무들의 사진을 찍곤 했다. 그 가운데 오랫동안 활동을 함께 한 길동무이자, 천막농성장을 지킨 박규님과 오재영의 얼굴 사진도 있었다.
"나 사진 나름 꽤 잘 찍죠?"
단식농성으로 힘들고 지친 몸 상태임에도, 사진을 보여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노회찬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체 게바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진기보다는 어쩌면 시가가 아닐까 싶다. 그에게 쿠바산 시가는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정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때도 함께 한 인생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체 게바라는 한 대에 10센트 정도 하는 싼 시가를 피웠다. 당시 그는 값비싼 시가도 피울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싼 시가에 만족했다. 어려서부터 천식을 앓은 그는 담배연기가 천식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 게바라와 동시대를 산 존 F. 케네디 역시 쿠바산 시가 마니아였다. 케네디는 1962년 쿠바를 봉쇄하기 위한 경제 제재(Embargo)를 지시한 인물. 그런데 그는 쿠바 시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시가를 사재기한 뒤 쿠바와의 국교단절 문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가와 관련, 체 게바라와 케네디를 두고 이러한 말이 전해진다.
'3.8 장미꽃' 선물을 시작한 2005년 3월 8일. 오랜 골초였던 노회찬은 국회 법사위 일정으로 유럽을 방문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두 달 뒤인 5월 8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금연 후기를 적으며 담배에 대해 "하도 오래 전의 일이어서 첫 만남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면서 "고민을 거듭할 때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그는 항상 가까이 있어주었다"고 회상했다.
노회찬이 '그'와 헤어진 결정적 이유는 "77세의 어머님이 그렇게 하길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얻는 즐거움이 아무리 큰들, 그와 헤어질 경우 어머님이 갖게 될 마음의 평안함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닫는글 : "Hasta siempre-Commandante Che Guevara", "Hasta siempre, 노회찬!"
체 게바라가 남긴 어록 가운데 하나다.
'80년 5월 광주'라는 역사적 충격 속에서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 말고는 독재 타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노회찬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는 인민노련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명예회복 판정을 내렸다.
노회찬은 복권됐지만 민주화운동 유공자나 보상 신청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이랬다.
※ "운동권 출신의 제일 큰 문제가 타인에게는 엄청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관대한 것이다." 노회찬의 이 표현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신경림 시인의 시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 실천문학, 1988에 수록)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신경림의 시는 이른바 '운동권'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1997년 10월 11일 쿠바 산타클라라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tion).
체 게바라 사후 30년 만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석 달 전, 체 게바라의 마지막 전쟁터 볼리비아에서 찾아낸 그의 유해가 함께 처형된 6명과 함께 혁명의 고향 쿠바로 돌아온 것이다.
장례식의 마지막 날인 10월 17일. 쿠바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는 "그 누구도 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우리의 혁명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제 그가 꿈꾸어왔고, 살아온, 또 그를 위한 널찍한 공간이 있는 온 세상이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체 게바라를 추도했다.
<체 게바라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50만 명의 추도객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 소리는 광장과 체 게바라 동상과 7개의 관을 완전히 뒤덮었다. (<한국일보>, 1997.10.20.; <시사저널>, 1997.11.6)
2018년 7월 노회찬이 떠나고 며칠 뒤 여인철 민족문제연구소 전 운영위원장·장준하부활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진보의 아이콘'이라 불렸던 노회찬, 그가 세상을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 누워있는 곳으로 가서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일 듯한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추모음악을 바치려 한다"며 몇몇 노래의 제목과 유튜브 주소를 올렸다.
여인철이 마지막 추모음악으로 올린 것은 쿠바의 음악가 카를로스 푸에블라(Carlos Puebla)가 작곡해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 곡, <아스타 시엠프레, 코만단테>(Hasta siempre-Commandante Che Guevara 게바라 사령관이여, 언제까지나)였다. 체 게바라의 장례식 마지막 날 50만 명의 추도객들이 함께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이 곡은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또 다른 나라에서의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나며 한 말, "Hasta la Victoria Siempre(승리의 그날까지 영원히)"에 응답하듯 작곡한 노래로 가사를 번역하면 이렇다.
"노랫말이 마치 노회찬과 정의당의 얘기인 듯하다"며 여인철의 마무리 글을 소개하며 오늘의 기록 이야기 <체 게바라와 노회찬> 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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