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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에서 쿠바혁명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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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영화 <대부>에서 쿠바혁명을 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⑮]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체 게바라 下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① 다섯 번째 기록 이야기를 열며 (☞바로가기)

②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③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④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⑤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⑥ 호찌민 上 "씩식한 군인이 돼 베트공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⑦ 호찌민 下 "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가기)

⑧ 저우언라이 上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바로가기)

⑨ 저우언라이 下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바로가기)

⑩ 룩셈부르크 上 '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나다 (☞바로가기)

⑪ 룩셈부르크 下 로자 룩셈부르크의 '츠비츠비', 그리고 노회찬의 '잘 놀다 간다' (☞바로가기)

⑫ 그람시 上 민주노동당의 분당,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 (☞바로가기)

⑬ 그람시 下 '희대의 반항아' 그람시와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 노회찬 (☞바로가기)

⑭ 체 게바라 上 (☞바로가기)

금지된 영화 <대부>와 <대부2>, 그리고 쿠바혁명 : '인생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의 역설

▲영화 <대부 2> 포스터

▲1973년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영화 <대부>의 신문 광고 

<카미노 데 쿠바 : 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로 가는 길)>(이매진, 2019)에서 손호철은 영화 <대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3부작인 이 영화의 2부에는 1950년대 아바나가 나온다. 그 시절 마피아가 장악한 아바나는 도박장과 성매매가 번성한 '미국의 하수구'였다.

마피아 두목들은 아바나 현지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문제도 논의할 겸해 아바나에서 연말 정기 모임을 연다. 그 모임에 참석한 대부 마이클 코를레오네(알 파치노)는 아버지 돈 비토 코를레오네(말런 브랜도)를 공격해서 자기를 내키지 않는 대부의 길로 가게 만든데다가 암살까지 하려 한 경쟁 세력의 두목을 새해맞이 축제의 혼란 속에서 처치한다. 

바로 그때 아바나로 들어오는 전략 요충지인 산타클라라에 반군을 진압하러 떠난 쿠바 정예군이 참패한 소식이 파티장에 전해진다. 놀란 독재자 플헨시오 바티스타 대통령은 허겁지겁 망명을 떠나고, 무정부 상태의 혼란 속에서 마이클 코를레오네도 미국으로 급히 빠져나온다.

1959년 1월 1일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끈 쿠바 혁명이 승리한 날이다."

쿠바혁명의 성공은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전복과 함께 마피아가 쿠바 아바나에 세운 카지노 왕국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후속작 영화 <대부2>에서는, 아바나에 진출한 마피아 보스 하이만 로스는 마이클 코를레오네(알 파치노)에게 쿠바가 왜 마피아에게는 지상낙원인가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봐, 자네는 젊어. 미래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해. 우리의 미래는 쿠바야. FBI가 괴롭히기를 하나, IRS가 세금감사를 하나. 바티스타(쿠바 대통령)에게 좀 갖다 바치면 만사가 해결이야."

마이클 코를레오네가 바티스타 자택의 송년 파티에 초대받은 것은 뇌물 300만 달러를 스위스은행에 입금한 대가였다. (이철 고문, 「쿠바 어떻게 달라졌나」, 미주한국일보, 2016.7.20.)

노회찬의 삶의 여정에 영화 <대부>는 두어 차례 등장한다. 장항준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노회찬은 '학창시절 가장 많이 보고 감동받은 영화' 중 하나로 <대부>를 꼽았다. (「두 영화광의 만남-영화감독 장항준과 진보신당 대표 노회찬」, 729호, 2009.11.17.~11.24.)

장항준 : 학창 시절에 많이 보고 감동받은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영화들이었을 것 같은데요. 대략 어떤 영화들이었나요?

노회찬 : 당시에 네 번 본 영화가 있는데,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왔던 <젊은이의 양지>였어요. 그 영화도 사실은 미국사회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생겨난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였죠.

장항준 :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촘촘하게 잘 만든 영화인 것 같아요.

노회찬 : 네 번 중에 두 번은 엘리자베스 테일러 얼굴 보려고 간 것입니다만. (웃음) 그 시절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이 두 편인데, <닥터 지바고>와 <대부>였어요. <닥터 지바고>는 중학생 때 누나가 단체관람하는 걸 따라가서 처음 본 이후로 지금까지 다른 판본으로 10번 넘게 봤죠. <대부>가 개봉했을 때는 학생이어서 당연히 볼 수 없었는데 사복 입고 가서 봤고요.

장항준 : <대부> 3부작 중에서는 몇 번째가 개인적인 취향에 맞으시던가요?

노회찬 : 2편이죠. 1편도 손댈 데 없이 완벽하다고 생각됩니다만 2편에는 서사성이 있잖습니까. 제 취향이 그쪽 계열이기도 하고요.

장항준 : 저도 최근에 기고할 일이 있어서 <대부2>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요. 저는 2편이 시리즈의 1편인 것 같아서 좋았어요. 

다시 보면서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넘어갔던 장면에서 크게 감명을 받았는데요. 젊은 시절의 비토 콜레오네(로버트 드 니로)가 동네 유지를 죽이러 가는 장면을 보면 바깥 길거리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고, 건물 내부 계단에는 복도 등이 깜빡깜빡 점멸되고 있어요. 

그 어둠 속에서 비토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점멸과 함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하는 대목에서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더라고요.

노회찬 : <대부>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그 대비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1편 결혼식 장면도 그렇고, 2편의 그 장면에서도 살인자는 옥상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아래에서는 축제가 이어지고. 그 대비들이 매우 자연스럽게 긴장감을 주는 거죠.

▲경기고 1학년 3반 학급지 <한벗> 2호(1973.12.17.) 표지 ⓒ노회찬재단

노회찬은 경기고등학교 1학년 3반 시절, 친구들과 함께 학급지 <한벗> 2호를 만들었다. 발행인은 한영택 담임선생님, 편집인은 정광필, 편집위원은 노회찬·강일경·김병식·김상필·나덕렬·박종서·백영·염상진·유석주·윤복식·이종걸·장석·최병우·한동희·한명광·허서구.

편집인 정광필은 이렇게 회상한다.

"친구들이 방학을 맞아 지난 학기를 돌아보니 너무도 즐거웠던 일도 많고 사연도 많았던지라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학급지를 만들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편집위원을 구성하게 되었는데 노회찬이 편집장을 맡고, 이종걸, 장석, 박종서, 남궁영, 정광필 그리고 몇몇이 더 모였다. 겨울방학 때도 한 번 더 모였다."

노회찬은 시 형식의 「누구나」와 「雜說」, 영화 감상글 「대부」 등 세 편을 써서 2호에 올렸다. 이 가운데 노회찬의 <대부> 감상글을 간추리면 이렇다.

"우선 금지된 영화를 보았다는 점에서 큰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서 이 글을 쓴다. 나에게 감명을 기대 이상으로 준 이 영화는 제작에 620만$이 들고 마피아의 압력과 방해로 촬영이 늦어진, 또 73년도 아카데미 오스카상에서 작품상 그리고 주연남우상, 각본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오락물보다는 예술작품으로 평가되어야 할 이 문제작은 마이클 역의 알 파치노의 매력적인 연기와 마론 브란도의 허스키, 시실리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로맨틱한 정사, 그때 흐르는 Speak softly love and hold me warm against your heart로 시작되는 주제가 등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감명을 줄지 안 줄 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런지 어떨런지 모르겠다."

노회찬은 영화 스토리를 "어느 일요일 아침.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 정원에서 코르레오네는 어린 손자와 노닐면서 조용히 쓰러진다. 위대한 '갇·파더'인 돈·비토·코르레오네는 안락한 죽음을 맞는 것이다. 누구의 명령도 없이 가족과 '훼미리'를 지키며 일생을 마쳐 최후의 유언이란 '인생은 이렇게도 아름다운가!'였다"로 마무리한 뒤 4쪽의 글을 이렇게 맺었다.

"할 얘기가 많으나 앞으로 이 영화를 볼 급우들을 생각해서 괜히 흥을 깨뜨려 놓을까봐 그만 생략하는 바이다."

까까머리를 한 고교 1학년 노회찬의 <대부> 감상평에는 쿠바혁명에 관한 이야기는 '아쉽게도' 없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 '귀 있는 자 들어라'를 살포한 노회찬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나도 모르게 있었나 보다.

카메라와 담배 : "혁명가 체 게바라나 영국 정치인 처칠처럼 사진가나 문필가로도 작업하고 싶다"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된 체 게바라.

어릴 적부터 체 게바라는 자신이 본 것을 노트에 적고 아버지를 따라서 사진찍기를 좋아했던, 감수성 풍부한 소년이었다.

커서도 체 게바라는 혁명 전이든 혁명 중이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때든 카메라를 품에 끼고 다닌 기록사진이 많다. 쿠바의 사진가 알베르토 코르다의 쿠바 혁명기록 흑백사진집 <한 혁명의 일기>(Diario de una Revolucion)에도 게바라는 거의 카메라를 든 모습으로 담겨있다. 혁명가이자 자연인으로서 취미 이상의 사진적 가치를 인식한 모습이라 하겠다. (이경, 「한 장의 사진이 세상을 바꾼다」, <불교공뉴스>, 2020.4.25.)

※ 체 게바라를 기억하고 있는 혁명동지이자 사진가인 1925년생 라울 코랄레스는, 고히미르-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곳으로 아바나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마을-로 찾아온 한국인 기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체 게바라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한 가지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보면 돼. 체 게바라는 위대한 혁명가였지?'

콜라레스는 사진도 때론 총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가 체 게바라의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면 시가를 물고 빙긋이 웃고 있는 체 게바라의 모습 대신 중무장을 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전투를 치르는 혁명가만 상상할지도 모른다. 체 게바라의 웃음과 독서, 시가 등 체 게바라의 모습이 그의 사진을 통해 부활했다." (<경향신문>, 2007.4.27.)

라울 코랄레스는 총 대신 사진기를 들고 종군기자처럼 체 게바라의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혁명전쟁을 기록한 사람은 그와 그 제자인 알베르토 코르다였다. 웬만한 체 게바라의 전기에 나오는 사진은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이다.

▲자신의 사진기로 사진 찍기 좋아했던 체 게바라.
▲2010년 4월 24일 '진보신당 4대강 답사 프로젝트: 흐르는 강물처럼-한강 편'에 함께 한 '사진사' 노회찬. 왼쪽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두 사람은 변영주 감독,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이상엽 작가

정치인이자 문화예술 애호가였던 '문화인' 노회찬. 그에게는 문화예술계 지인들이 꽤 많았다.

노회찬이 떠난 다음 해, 그를 추모하며 <1주기 추모미술전 : 함께 꿈꾸는 세상>이 열렸다. 2019년 7월, 노회찬재단이 주최하고 전태일기념관에서였다. 미술전에 '눈발을 맞으며 투쟁 구호를 외치는 노회찬', '빗자루 기타리스트 노회찬', '첼로를 켜는 노회찬' 사진을 출품한 이상엽 사진작가는 대표적인 문화예술계 지인 중 한 명이다.

노회찬에 대해 "그가 혁명가 체 게바라나 영국 정치인 처칠처럼 사진가나 문필가로도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을 종종 비치곤 했다"고 회고하던 이상엽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노회찬의 매력은 소탈하고 탈권위적이라는데 있어요. 작품을 보는 직관력도 좋았고요. 문화예술인들 만나면서 그런 매력이 더욱 각별했고 예술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도 놓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러시아 음악과 노래를 각별히 사랑했지만, 전시 보는 것도 즐겼어요. 작품들을 사서 수집도 했는데, 경매에서 팔아서 파업기금 등으로 지원도 했어요. 

조직 중심으로 돌아가는 진보정치 풍토에서 문화예술하는 이들의 목소리와 감성을 반영하려고 많이 고민하고 애썼던 분입니다." (노형석 기자, 「뜨거웠던 노회찬…뜨겁게 그리워하는 작가들」, <한겨레>, 2019.7.15.)

▲노회찬이 소장했던 카메라와 망원렌즈 ⓒ노회찬재단

사망 당시 체 게바라의 배낭 속에는 지도 외에 두 권의 비망록과 녹색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본 것을 노트에 적었다"는 체 게바라의 메모 습관처럼, 노회찬도 정당 활동을 하면서 오랫동안 손바닥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필요한 경우 메모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요약하거나, 혼자 걸으며 사색할 때 떠오른 생각을 메모했다. 이광호 작가가 <노회찬 평전>을 준비하며 정리한 메모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혁명하기 위해 집권, 집권해야 혁명할 수 있다.'

"체 게바라처럼 사진가로도 작업하고 싶다는 욕망을 종종 비치곤" 한 노회찬은 사진 관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문화 애호가인 선친에 대한 기억과 함께 떠올렸다.

"아버지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해 집에 작은 암실을 만들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이 아주 많습니다. 아버지에게 불려나가 사진모델이 됐는데 저는 그게 제일 싫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찍은 사진도 많아요." (구영식 기자와의 <진보의 자격> 미정리 인터뷰)

▲대한문 앞 30일 단식농성장(2011.7.13.~8.11.)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노회찬. 아래 두 사람은 오랫동안 보좌관 활동을 해온 박규님과 오재영. ⓒ노회찬재단

아버지의 '사진 모델'이었던 어린 노회찬은 커서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했다. 개인 소장 사진기와 망원 렌즈도 여러 점 있었고, 스마트 폰으로 촬영하는 것도 즐겨했다.

한 일화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촉구를 위해 대한문 앞에서 30일 단식농성을 할 당시에도, 노회찬 진보신당 상임고문은 얼마 전 구입한 스마트폰 망원렌즈로 길동무들의 사진을 찍곤 했다. 그 가운데 오랫동안 활동을 함께 한 길동무이자, 천막농성장을 지킨 박규님과 오재영의 얼굴 사진도 있었다.

"나 사진 나름 꽤 잘 찍죠?"

단식농성으로 힘들고 지친 몸 상태임에도, 사진을 보여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노회찬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쿠바산 시가를 피우는 체 게바라 (출처: 영화 <Che. Un hombre nuevo (체 게바라: 뉴맨)> 화면 갈무리)

'체 게바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진기보다는 어쩌면 시가가 아닐까 싶다. 그에게 쿠바산 시가는 기호품이라기보다는, 정글에서 게릴라 활동을 할 때도 함께 한 인생의 동반자 같은 존재였다.

체 게바라는 한 대에 10센트 정도 하는 싼 시가를 피웠다. 당시 그는 값비싼 시가도 피울 수 있는 지위에 있었지만 싼 시가에 만족했다. 어려서부터 천식을 앓은 그는 담배연기가 천식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고 한다.

※ 게바라와 동시대를 산 존 F. 케네디 역시 쿠바산 시가 마니아였다. 케네디는 1962년 쿠바를 봉쇄하기 위한 경제 제재(Embargo)를 지시한 인물. 그런데 그는 쿠바 시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시가를 사재기한 뒤 쿠바와의 국교단절 문서에 서명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가와 관련, 체 게바라와 케네디를 두고 이러한 말이 전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쿠바산 시가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케네디는 쿠바산 시가만을 사랑했지만, 게바라는 쿠바와 쿠바 민중까지 사랑했다." (<대전일보>, 2008.7.16.)

'3.8 장미꽃' 선물을 시작한 2005년 3월 8일. 오랜 골초였던 노회찬은 국회 법사위 일정으로 유럽을 방문하면서 담배를 끊었다. 두 달 뒤인 5월 8일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금연 후기를 적으며 담배에 대해 "하도 오래 전의 일이어서 첫 만남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면서 "고민을 거듭할 때나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그는 항상 가까이 있어주었다"고 회상했다. 

노회찬이 '그'와 헤어진 결정적 이유는 "77세의 어머님이 그렇게 하길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서 얻는 즐거움이 아무리 큰들, 그와 헤어질 경우 어머님이 갖게 될 마음의 평안함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닫는글 : "Hasta siempre-Commandante Che Guevara", "Hasta siempre, 노회찬!"

"진정한 혁명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 진정한 혁명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으로 이끄는 것이다. 이런 자질이 부족한 혁명으로는 진실을 직시할 수 없다."

체 게바라가 남긴 어록 가운데 하나다.

'80년 5월 광주'라는 역사적 충격 속에서 "대중의 힘에 기반을 둔 혁명 말고는 독재 타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노회찬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 2004년부터 2005년 사이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는 인민노련 사건 관련자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명예회복 판정을 내렸다.

노회찬은 복권됐지만 민주화운동 유공자나 보상 신청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이랬다.

"예전부터 운동이 희생의 대가를 바라는 식이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해왔다. 솔직히 얘기하면 희생도 아니다. 자신이 좋아서 한 것인데 그것을 희생했다고 얘기할 수 있나. 그래서 나는 민주화운동 보상도 신청하지 않았다. 내가 왜 보상받나? 내가 원해서 한 것뿐이다. 오히려 이 길을 택하지 않았으면 깨닫지 못했을 것을 많이 깨달았다.

노동운동을 택했을 당시에는 먼저 깨닫고 많이 배운 사람으로서 더 힘든 사람을 구원하러 간다는 심정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누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을 깨닫게 되면서 구원받았다. 

남들은 내가 운동하다 억울하게 감옥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감옥에 가게 될 줄 알고 있었다. 그냥 먹고살기 위해 운동하다가 감옥에 간 사람은 보상받아야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다 알고 한 일이다. 그런데 무슨 보상을 받나?

(…) 

이 일을 했던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혜택을 받은 것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남들이 하지 못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은 굉장히 자기기만일 수 있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 

(…) 

운동권 출신의 제일 큰 문제가 타인에게는 엄청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관대한 것이다. 정치는 도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다수의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도덕을 추구한다고 하는 순간, 그건 위선이라고 본다." (노회찬·구영식,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비아북, 2014)

※ "운동권 출신의 제일 큰 문제가 타인에게는 엄청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관대한 것이다." 노회찬의 이 표현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신경림 시인의 시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 실천문학, 1988에 수록)를 떠올리게 한다. 당시 신경림의 시는 이른바 '운동권'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갔던 것 같다.

이런 내가 되어야 한다

일상에 빠지지 않고

대의를 위해 나아가며

억눌리는 자에게 헌신적이며 

억누르는 자에게 용감하며 

스스로에게 비판적이며 

동지에 대한 비판도 망설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치열히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히 여기며 

날마다 진보하며 

성실성에 있어 

동지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보되 

새로운 모습을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며

진실한 용기로 늘 뜨겁고 

언제나 타성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며 

모든 것을 창의적으로 바꾸어내며 

어떠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고

내가 잊어서는 안 될 이름을 늘 기억하며

내 작은 힘이 타인의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배려를 잊지 말고

한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역사와 함께 흐를 수 있는 

그런 내가 되어야 한다.

1997년 10월 11일 쿠바 산타클라라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tion).

체 게바라 사후 30년 만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석 달 전, 체 게바라의 마지막 전쟁터 볼리비아에서 찾아낸 그의 유해가 함께 처형된 6명과 함께 혁명의 고향 쿠바로 돌아온 것이다. 

장례식의 마지막 날인 10월 17일. 쿠바국가평의회 의장인 피델 카스트로는 "그 누구도 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우리의 혁명의지를 꺾을 수 없다. 이제 그가 꿈꾸어왔고, 살아온, 또 그를 위한 널찍한 공간이 있는 온 세상이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체 게바라를 추도했다.

<체 게바라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50만 명의 추도객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 소리는 광장과 체 게바라 동상과 7개의 관을 완전히 뒤덮었다. (<한국일보>, 1997.10.20.; <시사저널>, 1997.11.6)

2018년 7월 노회찬이 떠나고 며칠 뒤 여인철 민족문제연구소 전 운영위원장·장준하부활시민연대 공동대표는 "'진보의 아이콘'이라 불렸던 노회찬, 그가 세상을 떠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 개인적 친분은 없지만,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 누워있는 곳으로 가서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일 듯한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추모음악을 바치려 한다"며 몇몇 노래의 제목과 유튜브 주소를 올렸다.

1. 영국의 뮤지컬 작곡가 앤드류 L. 웨버의 진혼곡(requiem) 중 'Pie Jesu(자비로우신 예수님)'

2. 프랑스 샹송의 전설,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의 '나의 신이여(Mon Dieu).'

3. 스위스 태생의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 에르네스트 블로흐(Ernest Bloch)의 '기도(Prayer)'

(「[여인철의 음악카페] 노회찬 의원 추모특집」, <진실의 길>, 2018.7.26.)

▲'베네수엘라의 진주'라 불리는 민중가수 솔레다드 브라보(Soledad Bravo)의 노래 유튜브 화면 갈무리

여인철이 마지막 추모음악으로 올린 것은 쿠바의 음악가 카를로스 푸에블라(Carlos Puebla)가 작곡해 체 게바라에게 헌정한 곡, <아스타 시엠프레, 코만단테>(Hasta siempre-Commandante Che Guevara 게바라 사령관이여, 언제까지나)였다. 체 게바라의 장례식 마지막 날 50만 명의 추도객들이 함께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

이 곡은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또 다른 나라에서의 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나며 한 말, "Hasta la Victoria Siempre(승리의 그날까지 영원히)"에 응답하듯 작곡한 노래로 가사를 번역하면 이렇다.

"우리는 역사적 위업을 통해

당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당신의 용맹의 태양이 당신을 죽음으로 가게 만든 그 곳에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마치 당신과 함께인 것처럼 전진할 것입니다

피델과 함께 우리는 당신에게 말할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사령관 동지!'라고"

"노랫말이 마치 노회찬과 정의당의 얘기인 듯하다"며 여인철의 마무리 글을 소개하며 오늘의 기록 이야기 <체 게바라와 노회찬> 편을 닫는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마음속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했던 체 게바라, 그의 '불가능한 꿈'이 볼리비아 밀림에서 멈췄듯, 노회찬의 '불가능한 꿈'은 '여기서' 이제 멈췄다.

총을 든 적은 없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혁명가 같은 삶을 살았던 노회찬, 그와 개인적 친분은 없으나 호감을 갖고 지지, 응원했던 한 사람으로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비통한 마음으로 이렇게 적는다. 오늘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정의로운 노회찬 의원을 위해.

'Hasta siempre, 노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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