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 노회찬·유시민·진중권의 <폭넓은 생각을 위한 역사 속 말빨 사전 101>에서 스물세 번째와 서른여덟 번째 항목으로 추천한 체 게바라의 '말빨'
"바보같다고 생각될지 모르나, 진짜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에 의해 인도된다. 인간성(Humanity)에의 사랑, 정의(Justice)에의 사랑, 진실(Truth)에의 사랑, 사랑이 없는 진짜 혁명가를 상상하기는 불가능하다."
- 쿠바 혁명 성공 후 UN총회 출석을 위해 뉴욕 체재 중, "혁명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이라는
인터뷰 질문에 대한 체 게바라의 대답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고통당하고 있는 부정(不正)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는 인간이 되거라. 그것이야말로 혁명가로서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므로."
-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로 향할 즈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5명의 자식들에게 남긴 편지
체 게바라의 "인간·정의·진실에의 사랑"과 "부정(不正)에 대한 슬픔", 그것은 "나는 그 무엇보다도 인간이 좋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칭호는 휴머니스트다. 그만큼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도 크다"(정치와평화연구소의 컴퓨터통신, <P&P 정치뉴스>와의 인터뷰, 1995.11.3.)는 '휴머니스트' 노회찬의 "함께맞는 비"와 "6411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체 게바라와 노회찬>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박세열과 손문상의 <뜨거운 여행: 체 게바라로 난 길>과 노회찬 :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방식을 찾는 또 하나의 몸부림"
2010년 8월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한 책에 '이상을 실현하는 또 하나의 몸부림'이라는 제목의 추천사를 쓴다. 386세대 시사만화가 손문상과 88만원 세대 <프레시안> 박세열 기자의 또 하나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인 <뜨거운 여행, 체 게바라로 난 길>(텍스트, 2010)이 그 책이다.
길지만 노회찬의 추천사를 옮겨본다. 추천사에는 체 게바라와 함께 칠레의 아옌데,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브라질의 룰라 등의 이름도 살짝 등장한다. 이 가운데 아옌데와 룰라 두 사람은 노회찬이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이다.
"체 게바라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대문 의류 시장에 가서 체 게바라의 얼굴 문양이 찍힌 티셔츠를 사 입는 방법도 있고 두툼한 <체 게바라 평전>을 통독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스물세 살의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종주하며 둘러보았던 남미의 여러 지역을 6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와 함께 대화하면서 여행한다면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이 또 있겠는가?
(…)
물론 이 여행은 애초부터 편할 수가 없는 여행이다. 20대 초반의 에르네스토 게바라는 이 여행길에서 민중의 편에 서서 낡은 체제를 전복하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후 볼리비아에서 1967년 전사했다.
체 게바라가 자신의 책 <게릴라전>을 선물하면서 "다른 방법을 통해 같은 결과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동지애를 가지고"라며 연대 의식을 표했다는 아옌데는, 1970년 혁명으로 대통령이 됐으나 3년 뒤 군사 쿠데타 과정에서 사망했다.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미국의 남미 정책이 크게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브라질의 룰라는 "다른 방법을 통해 같은 결과를 성취하려는 노력"을 실험 중에 있다.
또 잃어버린 혁명에 대한 죄책감을 변함없는 체 게바라에 대한 존경으로 보상하려는 일련의 사람들이 관광의 대상으로 게바라의 흔적을 찾는 여행길에서 저자들은 한국에서 온 사회주의자냐는 물음에 한동안 대답을 못하는 한국적 한계까지 체험하고 있다.
칠레에서 만난 어느 청년은 저자들의 여행 취지를 듣고 "자기도 체 게바라의 이상에 공감하며, 그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데 동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엔 하나의 일을 하더라도 풀어 가는 방식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고, 체 게바라든 누구든 그 같은 이상을 실현하는 데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이 땀 냄새 물씬 나는 '발로 쓴 보고서'이지만 저자의 발만큼 그들의 머리와 가슴도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여행이 의미 있는 것은 혁명 박물관에서 박제화된 체 게바라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그의 이상을 실현하는 현실적인 방식을 찾는 또 하나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출판사 서평'은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21세기인 지금, 체 게바라를 추억하고 20세기의 혁명을 되짚어 보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혹자는 다소 촌스럽다고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다고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손문상은 체 게바라의 추억과 혁명의 추억을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둔 채 살아왔고 박세열은 체 게바라를 동경했다. 그런 두 마음이 모아져 둘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여정을 따라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그리고 쿠바로 이르는 70일 동안의 여행을 단행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서 체 게바라를 되살리려 한 것은 아니다. 혁명을 다시금 일깨우고자 하는 마음은 더군다나 없었다. 둘은 그저 체 게바라로 난 길을 따라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70일간의 남미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박세열은 이렇게 말했다.
"이 여행이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경로를 답사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여행에서 어떤 '결론'을 얻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밀려왔다.
그러나 60여 년 전의 체 게바라와 함께라면 결코 '결말'을 찾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체 게바라를 안고 떠난 여행에서 체 게바라를 분실한 것 같았다.
실눈이 떠진 것은, 여행에서 보낸 시간만큼 길어진 수염을 붙이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였다. 엄청난 촛불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2008년 1월 20일, 눈 내리는 풍경을 뚫고 출발했던 여행의 결말 아닌 결말은 거기 있었다. 20세기의 '혁명'과 21세기의 '혁명'의 차이는 촛불의 물결이 출렁이는 정도의, 그 '더딤'에 있지 않을까.
요컨대 내 여행의 종착지는 쿠바가 아니라 광화문이었고, 분실한 체 게바라를 그곳에서 다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호철의 <카미노 데 쿠바: 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로 가는 길)> : "고 노회찬 의원에게 전하는 보고서, 마음으로 함께 한 두 명의 동행"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끈 사회주의 무장 혁명가들이 6년에 가까운 싸움 끝에 1959년 1월 1일, 정부군을 몰아냈다. 한 줌 혁명가들에 의해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가 됐다.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쿠바를 일주해, 그 경험을 정리한 책 <카미노 데 쿠바: 즐거운 혁명의 나라 쿠바로 가는 길)>(이매진, 2019)을 펴냈다. 쿠바혁명 루트를 따라가는 여행길이었다. 60년 전 피델과 체의 이동 경로 그대로 산티아고데쿠바로부터 시에라마에스트라, 산타클라라, 아바나로 이어졌다. (이들 코스 중간에 혁명과는 상관없는 도시인 히론, 마탄사스도 포함된다. 히론은 미국이 쿠바 혁명 정부를 무너뜨리려 획책한 피그 만 침공의 현장이다. 마탄사스는 일제 강점기 많은 한국인이 이민해 정착한 도시다.)
쿠바로 가는 길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손호철이 마음으로 함께 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라틴아메리카 전문가일뿐 아니라 '백과전서파'로 불릴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자랑하던,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후배 정치학자 故 이성형 박사였다.
이성형의 대표 저서 가운데 하나인 <배를 타고 아바나를 떠날 때>(창비, 2001)의 1부 '카리브해의 유혹: 쿠바 기행'은 쿠바인들의 눈에 비치는 체 게바라의 모습, 미국의 무자비한 경제봉쇄정책, 봉쇄기의 굶주림을 견디는 쿠바인들의 닭고기 요리법, 까스뜨로의 카리스마와 자신감, 어린 모세 엘리안 사건과 미국-쿠바간의 갈등, 새로이 빛을 발하는 쿠바의 음악의 저력 등을 담고 있다.
이성형 이화여대 교수는 2009년, '인터넷 혁명 시대에, 사이버 게릴라가 창궐하는 이 시대에 왜 사람들은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체 게바라를 그릴까?', '왜 하필이면 체 게바라일까?'를 묻고는 이렇게 답했다.
"68세대의 잃어버린 향수가 우리에게도 남아 있는 것일까. 이상주의를 갈구하는 젊은 세대의 길 찾기의 일환일까. 아니면 독일풍의 교양소설로 읽히는 것일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같은 성장소설 말이다.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체 게바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가 풍기는 묘한 아우라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게릴라로 죽었지만 불멸의 이미지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쿠바산 시가 몬테크리스토를 피우는 모습은 가히 베네통 광고 사진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는 게릴라 이전에 지극히 사적(私的)인 인간이었다.
여행 중에도 일기장을 꼼꼼히 챙겼고, 틈틈이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엽서를 부쳤으며, 마지막에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투쟁을 수행할 당시에도 글을 남겼다. 결코 게릴라답지 않은 독서광이기도 했다.
(…)
이 자서전의 전반부는 일종의 여행기이다. 전도유망한 아르헨티나 중류층 출신의 한 의학도가 라틴아메리카의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대륙에 제도화된 빈곤과 불의에 분노하는 모습을 진솔하게 기록한다. (…)
피어오르는 시가 연기 속에서 혁명 속에서 그는 삶을 태웠고, 반제 투쟁의 성자가 됐다." (「[세상을 바꾼 삶의 기록-자서전 30선] <25>체 게바라 자서전」, <동아일보>, 2009.9.28.)
손호철의 쿠바 여행에 마음으로 함께 한 또 다른 한 사람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외로운 길을 함께 걸어온" 노회찬이었다. 손호철은 이 책을 '잔존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함께 가려던 고 노회찬 의원에게 전하는 보고서'로 정의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노 의원은 휴가를 내서라도 쿠바 여행에 꼭 함께 가고 싶다며 같이 가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는데, 여행 도중에 비열한 드루킹 관련 조사 소식을 듣고 귀국하자마자 비보를 접해야 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실험을 다룬 이 작은 책이 노 의원이 꿈꾼 한국의 진보정치를 실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손호철이 함께 가지 못해 아쉬워했던 이성형과 노회찬은 2009년 서울 노원구 상계동 마들연구소(이사장 노회찬)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인연을 쌓았다. 이성형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는, 그해 11월3일 열린 15회 명사초청특강에서 '한 잔의 커피에 담긴 세상 이야기'를 주제로 '중남미, 창조와 변용을 수반하는 뒤섞임과 다양성의 문화'에 대해 청중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슬람 음료'가 '크리스천 음료'로 탄생하는 데는 퇴마의식이 필요했다.
커피가 로마에 들어왔을 때 클레멘트 8세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달콤한 이 사탄의 음료를 이단세력(무슬림)들만 마시게 하기에는 너무 고통스럽다. 악마를 쫓아내고 세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이 음료를 크리스천의 강장제로 만들어야만 할 것이다.' 1600년 로마 교황청은 커피를 '기독교 음료'로 공인했다.
카페는 곧 유럽 세계에 재빨리 퍼졌다.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베를린 모든 곳에 커피하우스가 번성했다.
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들은 커피하우스에서 새로운 미래를 설계했다. 부르주아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비즈니스 기회를 엿보았고, 새롭게 열리고 있는 해외시장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카페 로이즈에서는 로이즈 보험회사가 탄생했다. 낡은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계몽주의 세례를 받은 혁명가들도 살롱이나 카페에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커피는 이제 성장하는 부르주아 공론장의 윤활유가 됐다. 커피는 곧 '민주주의 음료'로 변신했고, 카페는 발자크의 말대로 '민중의 의회'가 됐다." (이성형, 「시공 뛰어넘은 검정 카멜레온 '커피'」, 2003.1.25.)
"불가능을 꿈꾼 혁명가" 체 게바라는 누구?
'쿠바'하면 빠지지 않고 떠올려지는 인물. 바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6.14.~1967.10. 9.)다.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유명해진 인물이다.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쿠바는 평화로운 나라였다. 이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아프리카의 수십만 노예들이 수입되고, 정치와 경제가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때 체 게바라가 나타난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그러나 의사로서 개인의 안정적인 삶보다는 대의를 위해 쿠바로 건너가 쿠바혁명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김명섭, 「[김명섭 교수의 커피이야기] 57. 크리스털마운틴 커피」, <강원도민일보>, 2020.3.28.)
베레모를 눌러쓰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쿠바산 시가를 피우며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 잘생긴 외모까지 더해져 체 게바라는 지금도 '살아있는 신화'이다. 동·서양 할 것 없는 체에 대한 숭배 열풍은 그의 전기와 영화는 물론 티셔츠와 온갖 사진, 모자, 엽서, 심지어 속옷에도 새겨져 있다.
체 게바라는 쿠바 안에서도 인기 있는 인물이었다. 호세마르티 공항에서 만난 택시기사에서부터 여행하는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체 게바라에 대해 물으면 그저 '멋진 사람!'이란 말이 되돌아온다. (안정숙 기자, 「3. 라틴아메리카 개혁의 이념적 지도자」, 용인시민신문, 2006.5.7.)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체 게바라를 표현한 말이다.
"의사에다 혁명가, 게릴라 전술가, 쿠바 국립은행 총재, 재무장관, 외교관에다 뛰어난 저술가 등 보통사람이라면 일생에 한 가지도 이룰까 말까 한 다양한 일들을 그것도 9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이뤄낸 사람." 김미선 (「옮긴이의 말: 진실에 대한 광적인 애정」,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 실천문학사, 2000)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아주 좋아했고 특히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을 외우곤 했다. 평생 천식에 시달리는 등 몸이 약했지만 수영, 축구, 골프, 사이클, 럭비 등에 뛰어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에 진학한 체 게바라는 1951년 12월부터 다음 해 7월까지 500cc 중고 오토바이(힘센 녀석'이라는 뜻의 '라 포데로사 II')를 타고 남아메리카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 채 바꿔놨다. 여행 중에 목격한 민중의 비참한 삶, 그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그를 혁명가의 길로 이끌었다.
혁명운동을 모색하던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서 카스트로 형제를 만난다. 그리고 쿠바 혁명에 합류해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어 1956년 12월 2일,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82명의 혁명가들은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도착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이동하는 중 12명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세를 규합, 2년 뒤인 1959년 1월 1일 아바나를 완전히 점령했다.
쿠바 혁명에 성공한 뒤 체 게바라는 국립은행 총재와 농림장관 등 요직을 거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편지만 남긴 채 또 다시 혁명의 길로 뛰어들었다.
'제3세계의 해방은 결국 제3세계 스스로 달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체 게바라는 1965년 다시 게릴라 전사가 돼 아프리카 콩고에서 활약했다. 잠시 쿠바에 들렀다가 최종 목적지로 향한 곳은 중남미대륙의 볼리비아였다. 그는 "혁명은 개인보다 중요하고, 개인은 세계 어디든 부정이 있을 때 이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 볼리비아 정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서 변변찮은 무기도 지원군도 없는 투쟁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다. 2년 뒤인 1967년 10월 9일, 미국 CIA와 볼리비아군의 합동 작전에 의해 생포된 그는 39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총살당했다. 가슴 속에 항상 불가능한 혁명을 꿈꾸던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는 혁명의 정신을 남기고 영원한 여행길로 떠났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혁명의 상징으로 불리는 체 게바라. 그가 없었다면 과연 쿠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 지도자로 정치력을 발휘했다면 체 게바라는 피델 다음의 2인자로 전투력과 내부 인화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의사로서만 아니라 교육자로 그리고 혁명의 최선봉에 선 전사이자 지휘관으로 쿠바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규봉, 「우리시대 가장 완전한 인간 '체 게바라': [역사와 함께하는 쿠바 자전거기행 15]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 <오마이뉴스>, 2012.11.22.)
※ 쿠바 사람들 사이에 게바라는 '체(Che)'로 불린다. '체'는 2인칭 단수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봐, 자네'와 같은 의미로 붙이는 말로, 게바라가 대화를 할 때 습관적으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2년 11월 29일 개봉된 트리스탄 바우에르 (Tristan Bauer)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체 게바라: 뉴맨(Che. Un hombre nuevo)>의 시놉시스는 이렇게 소개한다.
"39세의 나이에 사살된 체 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아이콘이다. 오늘날까지 체 게바라의 이미지, 업적, 사상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체 게바라의 인간적인 모습, 끊임없는 노력과 연구, 놀라운 결단력,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체 게바라가 마지막 체포된 볼리비아의 군사기록보관소에서 발견된 새로운 자료들과 쿠바에 생존하는 가족들이 말하는 그에 대한 증언,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체 게바라의 육성 자료 등이 통해 체 게바라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그는 폭력과 불평등으로 얼룩진 현재 우리 삶과 같은 당시 기록을 담으면서, 체 게바라의 주관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글, 녹음 기록, 내레이션 등을 통해 당시 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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