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노회찬을 '아저씨'라고 부른 김민정 시인의 회상 속에 로자는 노회찬과 함께 등장한다. 김민정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김민정은 노 의원을 '아저씨'라 불렀다)가 <밤이 선생이다> 읽고 제 트위터 쪽지로 '잘봤다'는 말을 전해오면서 인연이 시작되었던 것 같아요. 아저씨가 책이 좋아서 사고 보면 다 '난다' 책이라고, 그러니 제가 얼마나 힘이 났겠어요.
작년 여름에 황현산, 노회찬, 저, 준이(박준 시인) 넷이서 밥을 먹은 적이 있어요. 밥 먹고 나오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구나, 막 발을 구르게 되는 거예요."
(…)
"아저씨가 사건에 휘말렸을 때 말도 걸지 못하겠고 해서 읽으실 책만 잔뜩 보내드렸거든요. 그중 한 권이 베를린을 주제로 한 책이었는데 거기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한 얘기가 나와요.
아저씨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주었어요.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뤄줘서 고마웠습니다. 1996년 그녀의 주검이 던져진 폭 5m도 안 되는 란트베르 운하를 찾고 프리드리히펠데 묘지로 가서 그녀 이름인 장미를 바치고 독일 소주를 바쳤던 일이 생각납니다. 못다 쓴 주제들로 후속편 만들면 바로 사보겠습니다^^' 그렇게 몰래몰래 책을 준비했는데…."김민정 (<경향신문>, 2018.12.22.)
김민정이 말한, 베를린을 주제로 한 책은 한은형의 <베를린에 없던 사람에게도>(난다, 2018.4)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책의 한 챕터로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이 들어 있었다. 작가는 베를린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르크스의 동상에서, 베타니엔 갤러리에서, 나치의 벙커였던 건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에서 독일이라는 나라가 가진 역사의 특수성 역시 상징적으로 끌어냈다.
한은형은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꿨던 여전사의 이름을 붙인 거리는 베를린에서 프롤레타리아스러움과 가장 거리가 먼 곳이 되고 말았다. 이곳에는 세분화된 취향과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한 상점들이 있었고, 그것을 제대로 즐기려면 충분한 돈이 필요했다.
(…)
그때까지 나는 로자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키가 아주 작은 여자였다는 것, 절름발이였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다는 것,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 정도가 내가 로자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광장(Rosa-Luxemburg-Platz)은 독일 베를린에 있는 광장이다. 인민극장과 카를 리프크네히트 하우스로 둘러싸여 있는데 후자는 독일 좌파당의 중앙당사다. 1926년 이 광장에서 독일 공산당이 창당되었다. 1933년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으로 지명되기 5일 전 나치당의 대규모 집회가 있었던 역사적 현장이기도 했다.
로자와 노회찬, 두 사람의 공통점 : 식물을 통한 자연과의 교감
청주교도소 수감시절 반입 도서(교부일 1991.11.9.)로 노회찬이 읽은 로자의 <러시아 혁명: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박영옥 역, 두레, 1989)의 「버트램 울프의 서문」에는 로자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녀는 많은 재능을 갖고 태어난 조숙한 아이였다. 1919년 1월 암살될 때까지 그녀는 전 생애에 걸쳐 그녀의 정신이 갖고 있는 다른 많은 능력들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 정치에 덜 몰입하고자 하는 갈망에 유혹당하고 괴로워했다."
「서문」에는 1917년 봄, 로자가 감옥에 있을 때 동료인 젊은 의사 한스 디펜바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도 있는데, 식물과 식물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3년 전 돌연 식물학에 심취했을 때 저는 얼마나 기뻤던지 모릅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제 모든 열정을 바쳐 혼신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세계·당·저작에 관한 생각은 제게서 사라지고 오직 한 가지 열정에 온통 사로잡혔습니다. 봄 들판을 거닐면서, 한아름 가득 풀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 풀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이름을 확인하고 노트에 붙입니다.
그 봄 내내 저는 열병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조그마한 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슨 과에 속한 풀인지조차 알 수 없었을 때, 저는 얼마나 괴로웠던지……. 마침내 그 일을 끝마치고 나면 저는 들판에 있을 때와 같이 편안해집니다. 저는 혼자서 격정과 열정에 사로잡혀 그 일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열정적으로 한다면 그 속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독일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로자 룩셈부르크>(1986)는 로자의 책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와 개혁 또는 혁명>을 읽고 글 뒤에 숨어 있는 여성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통해 '로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희망했다. 감독의 눈에 비친 로자는 "인간보다 자연에게 더욱 가까운 유대감을 느꼈고 문학과 음악, 미술과 식물학, 지질학에 관심이 높은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노회찬은 어릴 때부터 곤충과 식물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비아북, 2014)를 펴낸 뒤 문화웹진 <채널예스>의 손민규(인문PD)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치를 안 했다면,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노회찬의 대답은 이랬다.
"하고 싶은 일이야 많았죠. 그래서 뭘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생물을 참 좋아했어요. 생물반도 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걸 좋아했어요. 좋아하는 책 분야 중 하나가 식물과 동물 생태를 연구해서 인간 생활 사회에 접목시키는 것인데요. 생물을 미세하게 관찰해서 그것에서 원리나 습관을 읽어내고 우리 인간 살아가는 방식과 연결하는 책을 즐겨 읽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했을 수도 있죠."
인민노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 감옥에 갇혀 있던 시절 노회찬이 부산의 부모님께 부친 편지에는 식물 이야기는 자주 등장한다. 몇 개 추려서 옮겨본다.
"엊그제부터 바깥의 개나리가 활짝 피었습니다. 산수유도 이미 만개하였고 살구꽃과 복숭아꽃이 그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지요." (1991.4.9.)
"꽃이 열매를 남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특히 요즘 같은 계절에는 생명의 소멸이 또 다른 생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상징적 例를 보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기만 합니다. 살구는 벌써 홍조를 띠기 시작하였고 복숭아와 딸기도 빠르게 커 가고 있습니다." (1991.5.11.)
"어느새 입추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더위가 좀 더 남았지만 마음은 이미 가을, 겨울로 달려갑니다. 장마비를 맞으며 해바라기의 키가 1m를 넘어섰습니다. 다알리아는 은퇴하였고 은행나무는 여전합니다. 사루비아를 갖다 놓을까 아니면 좀 더 기다렸다 국화를 갖다 놓을까 생각중입니다." (1991.7.30.)
"오늘 아침엔 예기치 않게 자그마한 국화 화분 하나를 선사받았습니다. (…) 국화는 원래 어둠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에 개화를 늦추기 위해 온실에선 밤에도 형광등을 켜놓기도 한답니다. 이제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감방 안에 들어왔으니 저 국화는 천천히 꽃을 피우며 이 가을이 깊도록 품위를 자랑하겠지요." (1991.10.1.)
"옥담 밖의 미루나무가 하루가 다르게 붉고 누런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원예반 뜰의 은행나무 잎도 벌써 누런빛을 보이기 시작하였지요. (…) 씨앗이 여문 해바라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국화. 코스모스. 맨드라미만이 외롭게 되어 마지막 가을을 보내고 있습니다. (…) 꽃 중에선 과꽃이 그리고 풀 중에선 딸기가 가장 늦게까지 버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과꽃은 첫서리가 내린 후에도 시들지 않았고 딸기는 아직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저도 물론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991.11.13.)
"징역살이 하는 자신을 겨울잠을 자러 들어온 곰으로 비유한 한 후배가 있었습니다만 실제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저 칸나뿌리를 묻듯 우리의 가슴을-분노와 희망 모두를 조용히 묻듯 일년 내내 계속되는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봄이 오면 칸나뿌리를 캐내듯 우리의 분노와 희망도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것을 그대로 캐내게 되겠지요." (1991.11.20.)
"방안의 은행나무는 완전히 노란빛으로 물들었습니다. 화분이 약간 말라있어 물을 주었더니 곧 잎이 축 늘어져버렸습니다. 가을에 비가 온 후 낙엽들이 유달리 많이 생기는 것은 빗물에 맞아 잎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빗물을 흡수한 결과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1991.12.3.)
"四月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이곳의 개나리는 쌀알만한 꽃봉오리를 달고서 벌써 2주째 태연자약하게 봄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꽃을 피울 기온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자연의 섭리를 체득하고 있는 生命에게서 기다림의 여유를 배웁니다." (1992.3.25.)
2004년 8월 31일. 노회찬은 광릉수목원 업무보고 및 광릉 숲 회생기원을 위한 위령제에 참석한 뒤 숲을 둘러봤다. <노회찬의 난중일기> 중 「2004년 들어와서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로 유명한) 이유미 박사가 토종 물봉선화를 가리키며 이름을 외우라고 한다. 흔히 손톱 물들이는 데 쓰는 '울 밑에 선 봉선화'는 겨우 백년 전에 들어온 외래종이라고 말해준다. … 산초나무를 가리키며 추어탕 먹을 때 넣는 산초는 산초나무의 열매가 아니라 초피나무 열매란다."
"우리나라 특산종인 금강초롱꽃의 학명이 일본인 이름으로 된 사실을 들며 식물 이름도 '국력'이 반영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름을 아는 식물은 더 아끼고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식물 이름을 알게 하는 것이 곧 자연보호의 지름길일 수 있다는 게 이유미 박사의 지론이다. 영어단어 2,000개를 아는 것보다 나무, 풀 이름 200개를 알고 있는 것이 훨씬 값진 것이라고 맞장구쳤다.
(…) 아쉬움을 묻어두고 식물의 세계를 떠나 동물의 세계로 돌아왔다.
(…) 생일이라고 여러 사람이 저녁을 함께하자고 한다. 부모님 슬하를 떠나고 철이 든 후 생일을 기념한 적이 없다. 아직 뒤를 돌아보기엔 이른 나이이고, 존재를 기념할 만큼 해놓은 일도 없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날이고 반성을 해야 할 날이다."
"숲은 미래다.
숲은 관념이 아니라 과학이다.
숲이 병들면 미래가 병드는 것이다.
숲에서 지낸 7시간.
2004년 들어서서 가장 좋은 하루를 보냈다."
로자와 노회찬, 장석준을 통해 이어지다 : "가장 빛나는 별" '붉은 로자'와 "우리 모두 노회찬이 되자"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노회찬과 진보정당 활동을 함께 해온 길동무 장석준은 어설픈 '운동권' 대학생 시절을 회상하며 "만약 나를 인도한 게 당시 사회과학서점에서 흔히 보던 소련 국정교과서 번역본들이었다면, 혼란과 회의가 그만큼 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빛나는 별이 로자 룩셈부르크였다"(경향신문, 2016.4.15.)고 밝힌 적이 있었다.
로자가 살해된 지 100주기가 되는 2019년 1월 15일 <프레시안>의 '장석준의 칼럼'에 「로자 룩셈부르크, 20세기가 우리 시대에 남긴 숙제」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며 '가장 빛나는 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월 15일은 독일 현대사와 20세기 좌파 역사 모두에 커다란 상처로 기억된다. 1919년 독일혁명 와중에 급진좌파의 걸출한 두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 날 무참히 학살당했다. 특히 올해는 그로부터 정확히 100 년이 되는 해다. 이때의 역사는 언제 읽어도 당혹스럽다."
10달 뒤인 2019년 11월 장석준은 <세계진보정당운동사: '큰 개혁'과 '작은 혁명'들의 이야기>(서해문집)를 출간했다. 이 책은 세계 최초의 진보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 이야기로 시작했다. 개혁과 혁명에 대해 아마도 가장 유명한 논쟁을 벌인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해당 장의 주인공이었다. 두 사람의 논쟁을 소개하면서 장석준은 "한국에서 진보정당운동에 어떠한 모색이나 도전이 필요할지 생각해보거나 토론하려는 분들을 염두에 뒀다"며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민주주의가 발전한 시대에 좌파정당은, 9할은 베른슈타인주의, 즉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 그러나 개혁노선의 틀 안에서만 마냥 머무르면 막상 개혁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다. 좁은 의회정치 문법에 갇히면 일상의 세력균형을 바꾸는 실질적 힘인 대중행동과 유리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혁명만 부르짖는다고 하여 대안이 될 수는 없다.
(…) 21세기 진보정당운동은 이 두 함정, 즉 '작은' 개혁들만 좇는 개혁정당과 '큰' 혁명만을 꿈꾸는 혁명정당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역설적으로, '큰' 개혁들과 '작은' 혁명들에 익숙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
노회찬이 떠난 며칠 뒤 장석준은 그를 기리며 「우리 모두 노회찬이 되자: '제복권력'과의 긴 싸움, 노회찬은 전사했다」(<프레시안>, 2018.7.30.)는 제목의 추모글을 올렸다.
"때로는 말 하고 글 쓰는 직업이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 세상에는 말문이 막히고 글월 한 줄 적기 힘든 때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글과 말보다는 신음과 비명이 인간에게 더 어울리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노회찬 의원이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기고 갔다. 청천벽력 같은 죽음과 이 마지막 말 앞에서 나는 그저 신음을 토할 뿐이다. 비명을 더하지 못함은 오직 그의 부재가 아직도 실감나지 않아서다.
그래도 나는 글이란 걸 써야 한다. 그가 없는 세상도 일주일을 넘긴 지금, 그의 삶과 죽음을 쓰기도 참으로 어렵지만, 쓰지 않기도 불가능한 탓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노회찬이라는 큰 강 중 단지 한 지류만을 골라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하지만 한갓 지류라 하더라도 이는 그의 돌연한 죽음, 아니 차라리 장렬한 전사(戰死)와 직결된 이야기다."
"노회찬 의원의 비극 역시 승리의 노래를 구가하던 이 나라 민주주의의 초라한 맨 얼굴을 폭로한 것은 아닌가?
(…)
대의권력은 자본권력과 결탁한 제복권력에 무참히 짓밟혔다.
(…)
노회찬 의원이 마지막 선 곳에서 끝까지 깊은 절망 하나를 떨쳐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바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대중의 이 자기파괴적인 정치관이 아니었을까. 이것이야말로 그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덫이 아니었을까.
(…)
정치개혁이란 국회 의석을 한 석이라도 줄이거나 선출직 공직자들의 손발을 묶을 장치를 하나라도 더 만드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노회찬'들로 국회를 채우고 이들 '제2, 제3의 노회찬'들이 제대로 '대의'하는 정치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들을 제압해가는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닫는글 : "츠비-츠비"('zwi-zwi')와 "잘 놀다 간다"
'붉은 로자' 룩셈부르크는 부드럽고 차분했으며 새와 꽃을 사랑했다. 그녀는 "순진하고 감동적인 인자함과 시적 아름다움의 소유자로서" 그녀는 문학과 시에 대한 빼어난 감상 능력과 독서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렌트는 말하기를 "그녀는 선천적인 '책벌레'일 뿐이었으므로 만약 이 세계가 자유와 공정함에 대한 그녀의 감수성을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동물학이나 식물학 혹은 역사학이나 경제학, 수학에 더 몰두했을 것이다(탕누어,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무미건조한 세계에서 저자와 독자가 살아남으려면>, 글항아리, 2020).
자연과 생명을 사랑한 휴머니스트 로자. 1917년 2월 마틸다 야코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로자는 묘비에 "츠비-츠비"('zwi-zwi')란 두 음절을 새겨주길 바랐다.
"그건 박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예요. 저는 이 소리를 꽤 그럴싸하게 흉내 내죠. 제가 이 소리를 내기만 하면 즉시 박새들이 날아오르곤 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 두 음절은 보통 빛나는 쇠못처럼 솔직하고 담담한데 요 며칠은 조심스러운 떨림과 미세한 가슴 소리가 섞여 있었어요. 미스 야코프, 당신은 그게 무엇을 뜻한다고 생각하나요? 그건 곧 다가올 봄이 살며시 보내오는 첫 번째 숨결이랍니다. 얼음과 눈, 외로움의 고통을 겪고서도 우리(박새와 저)는 봄이 오는 것을 느꼈어요!
만일 제가 조급한 나머지 그날까지 살지 못한다면 부디 일지 말아주세요. 제 묘비에 'zwi-zwi'라고 새겨주는 것을 말이에요. (…) 이것 말고는 다른 어떤 말도 적지 말아주세요."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로자의 무덤 앞 동판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1919년 1월 15일 살해되다"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묘비명 1919>를 통해 로자를 이렇게 기렸다.
붉은 로자도 이제 사라졌다
어디에 그녀가 누워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가난한 자들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부유한 자들이 그녀를 세상 밖으로 쫓아냈다
'생전에 묘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구영식 <오마이뉴스> 기자의 질문에 노회찬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제가 써달라고 할지도 의문이지만 굳이 써야 한다면, '잘 놀다 간다', 이렇게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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