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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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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나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⑩]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 로자 룩셈부르크 上

이번 노회찬의 기록이야기 제목은 <기록으로 찾아가는,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 칼 마르크스에서 브라질의 룰라까지>이다. 칼 마르크스부터 브라질의 룰라에 이르기까지 '나라 밖 인물' 20여 명과의 직·간접적인 만남과 인연을 주제로 노회찬의 여정과 활동을 재구성한 것이다.

<노회찬의 나라 밖 인물 산책>은 11월 1일부터 매주 월·수·금 3번 씩 연재된다. '평등하고 공정한나라 노회찬재단'(노회찬재단)과 <프레시안>이 함께한다.편집자.

part 1 혁명 그리고 정치

마르크스 上 "대한민국의 진보, 어디로 가시나이까"...노회찬, 마르크스를 만나다(☞바로가기)

마르크스 下 "정치가 정치를 잊을 때, 가장 취약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바로가기)

레닌 上 레닌의 '불꽃' 만난 노회찬, 한국사회 논쟁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레닌 下 노회찬, '혁명가의 길'에서 '정치가의 길'로 (☞바로가기)

호찌민 上 "씩식한 군인이 돼 베트공 없애겠다"던 노회찬 어린이, 어쩌다? (☞바로가기)

호찌민 下 "정적들도 그에게 정중한 조사의 말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가기)

저우언라이 上 중국 '인민의 총리' 저우언라이와 이어지다 (☞바로가기)

저우언라이 下 "민주노동당의 '주은래' 노회찬의 꿈" (☞바로가기)

ⓒ노회찬재단

여는글

'붉은 로자'에게 붉은 장미와 소주를 올리다 : "잔 다르크를 버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찾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

▲1996년 6월 로자 무덤 앞에 소주를 올리는 노회찬 ⓒ노회찬재단

▲함께 대중행사에 참여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이트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겸 중앙선대본부장 노회찬은 후에 '난중일기'라 불리는 <선대본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85년 전 오늘 밤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되었다. 향년 48세. 지금 내 나이다"라고 적은 노회찬의 1월 15일자 일기는, 1987년 서독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참회의 뜻으로 제작한, 동베를린 란트베르 운하의 뒷벽 추모동판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동베를린 란트베르 운하 뒷벽, 로자 룩셈부르크 추모동판 앞에서(1996.6.) ⓒ노회찬재단

"1919년 1월 15일 저녁 로자 룩셈부르크 박사와 카를 리프크네이트 박사는 독일 국경수비대 소속 병사와 장교에 의해 폭행당하고 살해되었다. 

(…) 

억압과 애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투쟁에서 확신에 찬 사회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이트는 국수주의적 정치 살인의 희생자로 죽었다. 생명 경시와 인간에 대한 잔혹성은 인간이 비인간적일 수 있음을 인식케 한다. 그러한 폭력은 어떠한 갈등해결의 수단으로 남아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 베를린, 1987"

인민노련 사건으로 2년 4개월 수감생활을 한 노회찬은 만기출소(1992.4.1.) 뒤에 여권을 내주지 않아 해외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여권이 나오자 1996년 6월 독일을 방문해 동베를린 외곽 프리드리히스펠데 '사회주의자 묘지'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잠들지 않는 붉은 장미' 로자 룩셈부르크가 혁명가, 사회주의자, 반나치스 투쟁, 스페인내전으로 숨진 사람들과 함께 잠들어 있었다. 노회찬은 그의 이름인 장미를 바치고 독일 소주를 올렸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을 떠올리며.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이름으로 독재를 행하는 훌륭한 사람들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것은 노동자의 자기해방이 아니면 안 된다. 누구도 당신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사람은 없다."

▲노회찬과 정운영 

8년 뒤인 2004년 어느 날 <우리 시대 진보의 파수꾼 노회찬>을 출간하기 위해 노회찬을 만난 정운영은 인터뷰 중에 룩셈부르크를 호명하며 그에게 물었다. 둘이 나눈 대화를 옮겨본다.

정운영 : <난중일기> 1월 15일자에 "85년 전 오늘 밤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되었다. 향년 48세. 지금 바로 내 나이다." 그런 구절이 나오는데, 도대체 그런 날짜까지 기억하시는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습니까?

노회찬 : 하하하. 워낙 좋아해서 마음에 늘 담아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죠. 그게 암기로 되는 문제가 아니지요. 

제가 이 사람의 이론에 100퍼센트 동의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에 의미 있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 그 전에는 못 나가게 해서 마흔한 살에 처음으로 여권을 받았는데, 영국에서 무슨 발표를 하나 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냥 들어오면 또 못 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독일까지 갔습니다. 그때 1980년대 운동권 이론가 중 하나였던 이진경이 독일에 있었는데, 과거 감옥을 같이 살면서 나가면 반드시 망한 사회주의 국가를 같이 보자고 약속했던 터여서 베를린에 유학 온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때 로자의 시신이 떠올랐던 운하도 가보고, 묘에도 갔었습니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가게가 다 닫았는데 친구들을 졸라 술 한 병을 가져오도록 해서 한국식으로 추도를 했지요.

정운영 : 혹시 한국의 진보정치가 그녀의 이론과 실천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노회찬 : 대중의 자발성에 대한 그의 확신은 다소 지나치고 너무 감성적이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믿음과, 그것에 기초한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은 엘리트에 의해 주도되는 민주주의의 폐단을 일찍이 간파했다는 점에서 음미할 바가 큽니다. 

또 한 가지 그는 짧지 않은 그의 생애에서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일찍이 그리고 너무 빈번히 뒤나 옆을 둘러보는 사람들과 좋은 대비가 됩니다.

정운영 : "지금 내 나이다." 그 말씀에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데요.

노회찬 : 네. 글쎄요. 지금 제 나이가 그에게는 전 생애였는데…. 저는 로자와 비슷하게조차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살아있고 앞으로 더 많이 살아야 하는데, 이제까지 못한 것은 앞으로 잘 하면 되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미완성이고 부족한 것이 더 많았던 이 나이도 아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온 생애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뭐 저한테 스스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썼던 것 같아요.

기록을 찾아가다보면 노회찬은 고등학교 시절 로자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3월 24일자 <선대본 일기>에 로자는 한국의 박순천, 프랑스의 잔다르크와 함께 등장했다.

"오늘 유목정당의 당수가 되어 천막 당무에 들어간 박근혜는 화장실이 없어서 근처 빌딩까지 용무를 보러갔다고 <일간스포츠> 오미정 기자는 전한다. 최초의 여자 당수 박순천이 국회에 여자 화장실이 없어서 방광염에 걸린 적이 있다고 노년에 실토한 것이 생각난다.

1967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박순천은 전국을 누비며 유세를 했다. 야간 유세가 허용되던 당시 수은등 밑에 모인 수백여 명의 군중 앞에서 치마저고리 차림의 박순천이 쩌렁쩌렁 웅변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박정희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이 한심한 세상에…….'

당시 초등학교 5학년생의 눈에는 박순천이야말로 유관순이었고 잔다르크였다. 이 어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세상물정을 알기 시작할 때 박순천은 육영수를 잃은 박정희를 지지하고 있었다. 잔 다르크를 버리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찾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그는 누구?

▲로자 룩셈부르크

▲1907년 반전집회에서 연설하는 로자

'붉은 로자'(베르톨트 브레히트), '혁명의 살아 있는 불꽃'(클라라 체트킨), '마르크스 이후 최고의 두뇌'(프란쯔 메링).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인류에 짙은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금까지 기억되는 몇 안 되는 사회주의 혁명가의 한 사람이자 '비운의 혁명가'인 로자 룩셈부르크를 이르는 말이다. 로자의 비극적 최후를 접한 레닌은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시에 동지였던 그녀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며 추모했다.

"독수리는 때때로 닭보다 낮게 날 수는 있지만 닭은 결코 독수리처럼 높이 비상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3.5.~1919.1.15.)는 여성, 장애인, 유태인이라는 3중고를 극복하면서 혁명에 헌신하다 48세 때 참혹하게 살해당한, 폴란드 출신의 독일의 걸출한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정치이론가다.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로 상징되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Sozialreform oder Revolution)는 로자에게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줬다.

로자는 특히 대중의 동의와 자발성을 강조하며 레닌의 '위로부터' 준비된 혁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당조직 문제에 있어서 레닌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던 로자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조직문제>에서 레닌의 당이론을 '메마른 야경꾼 정신'이라 비판했다. 그녀는 러시아 혁명 이후 진행될 볼세비키당의 관료화 독재화를 예견하며 다음과 같은 경고를 했다.

"자유를 제한하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적 생활이 그토록 빈곤하고, 그토록 도식적이며, 그토록 메마르게 된 것은 바로 민주주의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부와 지적 진보의 풍요로운 원천들을 모두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군부와 자본가와 관료들에 맞서 싸울 것을 선동하는 스파르타쿠스단의 홍보 포스터

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이 발발하고 독일 사민당이 제국주의 전쟁을 받아들이자 로자는 전쟁을 반대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부르조아적인 선의의 기대나 외교수단에 의한 평화의 조정은 거의 환상과 기만의 가면 속에서 자본가의 이익 옹호와 자본주의 제도의 영구지속성을 꾀하려고 하는 것이며, 동시에 노동자계급을 현혹시켜 그 세력을 약체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사회주의와는 통일을 이루고 있다." (孝橋正一, <영원한 여성 로자 룩셈부르크: 생애.사상.편지>, 여래, 1983)

전쟁의 발발로 총검사용이 일상화된 것은 로자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덩어리였다. 전쟁을 방지하지 못하고 심지어 점잖게 반대조차 하지 못했던 인터내셔널의 실패와, 무엇보다도 평범한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전쟁에 광분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절망에 빠져 한때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버트램 울프, 「서문」, 로자 룩셈부르크, 박영옥 역, <러시아 혁명: 레닌주의냐 마르크스주의냐>, 두레, 1989).

로자는 러시아혁명의 여파로 일어난 1918년 독일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Spartacus-Bund)을 이끌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단은 1919년 1월 소비에트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섣부른 봉기를 일으키고,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며 반대했던 로자 역시 봉기 실패가 불러온 학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됐다.

얼마 뒤인 1919년 1월 16일자 독일 신문은 '로자가 감옥으로 이송되다 분노한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5월 31일, 차가운 물속을 떠돌던 그녀의 시체가 떠오르고 살인자들은 법정에 세워졌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군부의 전쟁 수행에 협력한, 임시정부를 이끌던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인지와 연루, 지시 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정부가 고작 몇 주 전에 그 혁명에 앞장선 이들에게 총구를 겨눈 것이었다.

1920년 6월 13일 로자는 리프크네히트를 비롯한 서른두 명의 동지들이 묻혀 있는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스펠데 묘지에 묻혔다.

▲1919년 1월 18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추모집회

두 사람의 사망 사흘 뒤인 1919년 1월 18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추모집회에서 트로츠키(군사위원회 의장)는 추모 연설을 했다.

"두 명의 지도자가 우리 대열에서 사라졌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그들의 이름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위대한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습니다.

(…) 

여전히 우리는 희망만이 아니라 자신감을 가지고 기대합니다. 오늘 독일에서 반동이 물결치고 있음에도, 그곳에 붉은 시월이 등장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우리는 한순간도 잃지 않습니다. 위대한 투사들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되갚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신은 충족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그 둘의 정신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트네히트여, 동지들은 더 이상 이승에 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당신들의 강력한 정신을 함께 느낀다. 우리는 당신의 깃발 아래에서 싸울 것이다. 투쟁하는 우리 대열은 동지들의 숭고한 헌신에 감화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맹세한다. 만약 때가 되어 혁명이 요구한다면, 주저함 없이 목숨을 걸 것이다. 동지들이 죽은 바로 그 깃발 아래에서! 친구이며 무장한 동지여, 로자 룩셈부르크여, 칼 리프크네히트여!'"

▲2004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 4주년 기념행사 (<진보정치>, 164호, 2004.2.2.~2.8)

사민당을 중심으로 한 독일 진보세력의 1919년 혁명 실패는 결국 10여년 뒤 나치스의 집권을 가져왔다. 김민웅 <프레시안> 기획위원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서 앞서 언급한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 1월 15일자 내용을 인용한 뒤, 민주노동당 창당 4주년을 축하하며 이렇게 글을 맺었다.

"사회주의를 끝까지 민주주의의 문제로 인식한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의 확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은, 노동자들 자신의 해방을 향한 주체적 의지와 행동이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완결에 요구되는 역사적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

민주노동당 창당 4주년의 역사는 지난 세월 이 땅의 진보진영이 겪었던 희생과 헌신 위에 서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단지 4년이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이 1차 대전 이후 세계적 진보운동에 합류하기 시작했던 지난 100년에 가까운 세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 그러기에 민주노동당의 역사적 현존은 만만치 않다. 다만, 현실 정치에서의 연륜이 짧다고 여길 뿐이다. 

(…)

민주노동당 4주년을 축하하며,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 완성을 위한 민주혁명의 역군이 되어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생명력을 최고의 가치로 놓지 못하게 하는 야만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교육의 현실을 극복하고 이 나라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삶과 역사에 주체가 되어가는 길을 뚫어나가는 일에 큰 몫을 다해나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이다." (김민웅, 「'민주혁명의 역군'이 되기를 기대하며」, 2004.1.30.)

김민웅에 화답하듯 창당 4주년을 맞아 노회찬(민주노동당 사무총장‧중앙선대본부장)은 기관지 <진보정치>(164호, 2004.2.2.~2.8)에 「민주노동당 4년 의미와 전망: 실험은 끝났다」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창당 4주년을 맞은 민주노동당은 이제 실험이 아니라 현실이다. (…) 민주노동당의 창당은 30년이 넘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적통을 잇는 것이었다. 특히 1980년 이래의 변혁적 반외세 민중운동의 21세기 전형으로 제시되었다. 수 십 년에 걸친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성과 위에서 민주노동당은 창당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출범은 반세기 넘게 지속된 보수정치 독점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외세와 대지본의 앞잡이에 불과한 낡은 정치세력들이 지역패권과 정경유착으로 유지하던 권력을 피와 땀과 고통만으로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엄숙한 선언이었다.

창당 4주년, 실험을 끝낸 민주노동당의 과제는 무겁고 크다. 이제 민주노동당은 구체적인 집권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10년 안에 집권할 수 있는 로드랩 없이 더 이상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또한 민주노동당은 자신의 성격과 궁극적인 목표를 재확인해야 할 때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이 만들 세상이 어떤 사회인지, 어떤 경로와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이뤄낼 것인지를 확정하고 이를 광명천지에 밝혀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민주노동당만의 힘으로 이뤄질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집권도 이를 위한 고지의 선점에 불과하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자신을 길러낸 토양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 대중조직의 질서를 재편하고 강화하는 데 민주노동당도 나서야할 때가 되었다."

노회찬의 기고 글은 천영세 민주노동당 부대표 겸 선대위원장이 낭독한 창당 4주년 기념사의 마지막 글귀를 인용하며 끝을 맺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가지 못한 길을 걸어가는 개척자들입니다. 애초에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면서 길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낸 이 길을 따라서 이 땅의 4천만 민중이 걸어올 것이고, 나아가 7천만 민족이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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