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덤정치를 넘어서
다시 대선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대선 때만 되면 온 나라가 무슨 마법에라도 홀린 것처럼 제 정신을 잃어버리는 듯하다. 단적으로 이재명 후보가 로봇을 학대했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동을 보라. 주요 언론이 무슨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기사를 내고 지식인이라는 자들도 맞장구를 친다. 아무리 반대편에 선 정치인이라도 그렇지, 꼭 그렇게 언어도단에 가까운 표현으로 헐뜯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무얼 얻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정치와 정치 문화가 이렇게까지 저질인가 싶어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담한 심경이 되는 걸 어쩔 수 없다.
근본적으로는 '승자독식'의 게임 규칙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면 차지하고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다. 대통령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고, 너무 많은 사람에게 이권을 챙겨줄 수 있어서다. 꼭 실현하고픈 정책에 대한 포부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흔히 '공약'으로 표현되는 정책은 만드는 것도 졸속이지만 현실 정치에서 실현해 내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기기만 하면 덩굴 채 굴러오는 엄청난 원초적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이전투구의 모습만이 난무하지 싶다.
바로 이런 배경 위에서 이른바 '팬덤정치'라는 게 생겨났을 거다. 한국에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나중에 죽거나 최소한 감옥에 가는 일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정치 지형 속에서 승자독식이 만들어내는 원한의 골이 깊어서다. 그래서 많은 시민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정치인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다. 노무현 대통령 사후 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식된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에 둔 팬덤정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꽤나 숭고해 보이는 일이기는 한데, 이런 시민정치가 언제나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를 낳은 것 같지는 않다. 정책 등에 대한 민주적 숙의의 과정을 뒷전으로 밀어놓았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많은 방관자와 또 그만큼 많은 '혐오' 세력을 만들어냈다.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그렇지 않아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치인인데, 이 후보를 둘러싸고서도 그런 팬덤정치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른바 '사이다 발언'과 성남시장 시절부터 보여 준 과단성 있는 정책 집행을 통해 열렬한 지지자들도 많이 모았지만, 또 그만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들어냈다. 그냥 내 주위만 보더라도 그를 포퓰리스트라느니 정치적 반대자들을 배척한다느니 하면서 공격하다가 급기야 그의 성장 과정과 사생활 문제까지 건드리며 그를 혐오하고 저주까지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진보주의자와 오랜 민주당 지지자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그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설사 그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시대가 요구하는 사회 개혁의 과제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제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의 팬덤정치를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역시 우리 시민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놀라운 시민적 덕성과 열정으로 민주주의를 구해내고 지켜 온 우리 시민들은 미완에 그친 촛불혁명의 완수를 위해 시민정치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일 충분한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우리 시민들은 단순한 팬덤정치에서 벗어나 좀 더 올곧이 주권자 시민이 중심에 서는 새로운 시민정치의 양식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열렬한 지지는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그런 식의 지지는 시민들의 주권자성을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요점은 지금까지와 같은 팬덤정치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지지의 내용과 방식을 바꾸어 보자는 데 있다. 지지자들의 행태가 싫어 이재명 후보에게 표를 주지 못하겠다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현실도 겸허하고 냉철하게 받아 들였으면 좋겠다. 지지하되, 그것도 열렬하게 지지하되, 시민이 좀 더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해 보자는 것이다.
그런 일은 시민들의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정책을 향했을 때 가능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선거에 나온 후보들이 제시하는 공약을 보면, 충분히 숙의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우선, 아직 미숙한 정당 정치로 인해 정당 자체가 당론으로 추구하는 정치적 의제 자체가 많지 않거나 불투명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선에서는 주로 각 후보의 '캠프' 단위로 정책 개발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정책들은,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그 캠프에 참여하는 교수나 전문가들이 충분한 검토와 공론장의 깊은 토론 없이 그저 언론과 시민의 이목을 끌기 위해 만들어낸 것들도 많다. 집권에 성공하더라도 공약으로 내세운 많은 정책이 휴지통으로 가게 되는 배경이다. 이제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실현해야 할 정치적 의제들을 만들어 내는 데 직접 참여해보면 어떨까?
물론 시민들이 무슨 대단한 정책적 전문성을 가졌다고는 하기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시민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인 삶을 통해 절박하게 느끼고 확인한다. 만약 시민들의 이런 절박함과 직접성이 전문가의 식견과 만날 수 있다면, 훨씬 더 의미 있으면서도 실천가능한 정책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초기 '마스크 대란'을 잠재울 수 있었던 '마스크 5부제' 정책은 시민들의 제안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떠올려 보라.
시민의제 운동을 제안한다
의회제(내각제) 국가인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지난 총선에서 대표적인 부동산 임대 업체인 '도이체 보넨'이라는 회사를 몰수하자는 시민의제를 투표에 부치는 운동이 일어나서 대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 물론 다수의 동의로 그 의제가 통과되었다고는 해도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집권 사민당을 포함한 정당들은 사실은 임대료 폭등 때문에 시민들이 제기한 그 의제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 안아야 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애초 집권 사민당의 시장을 포함한 정치인들은 그 의제가 위헌적이라며 수용을 머뭇거렸는데, 시민들의 광범위한 동의가 확인되자 태도를 바꾸었다. 집권 사민당은 실제로 그 회사를 몰수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임대료를 획기적으로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를 안게 되었고, 아마 어떤 식으로든 임대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들이 나올 것이다.
국민발안제가 없는 우리나라와 같은 대통령제 민주주의에서 그런 일을 그대로 모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후보의 공약만들기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민의제 운동을 해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참여연대는 산업안전망 강화와 노동권 보장, 주거안정과 자산불평등 완화, 경제민주화와 중소상공인 보호, 권력기관 개혁과 민주적 통제 강화, 인권과 기본권 보장, 평화와 군축 등 6대 분야에 걸쳐 31개의 구체적인 개혁 의제를 발표했다. 이런 식으로 시민사회가 나서 시민들의 생각을 모아내서 다양한 시민의제를 발굴하고 시민들의 지지를 모아 정치권에 제시해보면 어떨까 한다. 물론 각종 SNS를 통한 다른 방식의 시도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번 대선에서는 틀림없이 부동산 문제에 대한 해법이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이재명 후보는 '대장동 사태'를 계기로 완전 공영 개발과 개발이익 완전 환수를 내세울 뿐만 아니라, 부동산 문제 자체의 해법으로 국토보유세를 부과하고 그를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있다. 모두 훌륭한 정책 방향이긴 한데, 집권 후 정말로 실현될 수 있게끔 충분히 검토되고 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만 말하자면, 저런 구상에는 당장 우리나라 집값 폭등 문제는 과도한 수도권 집중 문제와 중첩되어 있다는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 개발을 어떻게 할지도 중요하지만, 좀 더 장기적인 차원에서 개발의 필요 자체를 억제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지난 수십 년간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늘 공급 부족이 문제라면서(정말 그런가?) 끊임없이 여기저기 아파트를 지어왔다. 길도 새로 만들고, GTX 같은 새로운 교통수단도 도입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 많은 사람이 수도권에 몰리는 것이었고, 또 그래서 계속해서 수요가 증가하고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수도권 집중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맥락에서 나는 획기적인 분권 및 국토균형발전정책을 시민의제로 제기하고 싶다.
이재명 후보 캠프나 민주당 차원에서도 이런 식의 시민의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게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우리 사회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정당과 캠프가 마련한 정책이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책들의 기본 지향 정도만 분명히 해 둔 상태에서 시민들이 제안한 의제들을 수용하여 전문가들의 의견과 조율하여 타당한 실현 방안들을 모색한다면, 훨씬 나은 정책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시민의 지지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 공식적인 시민의제 플랫폼을 만들어서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그를 통해 시민과 함께 공약을 다듬는 일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주변에 보면 국토보유세는 찬성하지만 전국민에게는 결국 '푼돈'으로 돌아가고 말 기본소득 식 분배에는 찬성하지 못한다는 이들이 많다. 만약 그 정책을 무조건 고집하면 그들은 그 정책때문에라도 표를 안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국토보유세를 통해 형성된 '공동부'를 어떻게 사용할지 정도는 시민들이 민주적 숙의 과정을 통해 결정하도록 열어두면 어떨까? 그래서 가령 그 재원으로 청년층이나 취약층의 주거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데 쓰자는 제안도 함께 검토하면서 최종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시민들도 이재명 후보를 기꺼이 지지할 것이다.
이번 대선은 2010년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두 거대 양당 후보 사이의 초박빙의 대결이 펼쳐질 가능성이 크다. 당시 노회찬 후보가 득표한 3.6%는 0.6% 차이로 패한 민주당 한명숙 후보의 패배를 가장 아쉽게 만든 부분이었는데, 내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다고 지금 심상정 후보를 압박해서는 안 된다. 민주당과 정의당 사이에 패인 골이 너무 깊어 보이기도 하지만, 정의당엔 정의당의 길이 있을 터이다. 민주당으로서는 '대중적 진보'의 깃발에 맞게 어떻게든 더 많은 시민이 더 많은 관심과 열정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선거를 치르기를 바란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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