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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 집중하던 시절, 문화운동으로 승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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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공연에 집중하던 시절, 문화운동으로 승화하다

[탈춤과 나] 23. 마승락의 탈춤 ②끝

4-2) 여름 농활 문선대 공연을 연출하다

88년 여름 정읍 농활은 예년의 농활과 달리 탈춤반은 한 마을에서 농사일을 거드는 농활이 아니라 ‘부당수세 철폐 운동’을 위한 문화선전대로 농활에 참여했다. 당시 정읍 농민회에서는 수세에 대한 부당성을 알리고, 수세 철폐를 위한 집회를 마을 곳곳에 열 계획을 하고 있었던 차였다. 집회에 앞서 문화공연을 하면 집회에 농민들을 모으기도 좋고, 일종의 계몽성(?) 공연을 한 뒤 집회로 이어나가고, 자연스레 가두행진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학 탈춤반의 공연이 끝나면 뒤풀이가 바로 집회로 이어졌고, 그 집회는 바로 학교 정문을 뚫고 시위로 이어지는 경험이 있었던 터라 총학생회에서도 농민회에서도 그렇게 되길 원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요구에 탈춤반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농활 가기 전, 급하게 대본을 쓰고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88년 여름 농활은 농활 기간 내내 마을 농사일을 거드는 대신, 정읍 일대 여러 마을에서 순회공연 하는 소위 ‘문선대 농활’을 한 것이다.

이는 당시 건대 탈춤반뿐 아니라, 다른 몇몇 대학에서도 탈춤반이 문선대로 농활을 갔던 것으로 안다.

▲88년 7월 농활공연 ‘못내 못내 절대 못내!’ 사진 1- ‘부당수세 철폐’ 현수막이 뒤로 보이는 가운데 신태인역 광장에서 농민들이 문선대 공연을 보고 있다.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보자는 의미로 ‘단심줄 엮기’를 차용하였다. ⓒ마승락
▲88년 7월 농활공연 ‘못내 못내 절대 못내!’ 사진 2, 3 - 좌측 사진은 88학번 이미애, 우측 사진은 우측부터 87학번 류탁균, 88학번 조난주, 88학번 이미애, 미상 이 마을 아낙 연기를 하고 있다. ⓒ마승락

4-3) 8.15 서울지역대학생문화패연합(서대문연) 연합공연을 연출하다

88년 연초부터 ‘서울지역대학탈패협의회(서탈협)’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80년에 78학번 형들이 주축이 되어 ‘연탈’ 모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고대 84 ‘아나’ 형(본명이 허용호였던가?), 총신대 85(이름 미상) 형들이 주축이 되어 서울지역 탈패들이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서울지역의 거의 모든 대학의 탈춤반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국민대, 단국대, 덕성여대, 동국대, 동덕여대, 상명여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성신여대, 세종대, 숙명여대, 숭실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국외국어대, 한양대, 홍익대 등- 이상 가나다순) 86학번이 한 학교에서 한두 명 정도가 주축이 되어 모임을 했다. 서울지역 대학 탈패들이 공동으로 전수도 받고, 서로의 공연도 관람하고, 공동의 사업도 해보자는 취지였는데 이후 수년간 이어져 서탈협 공동전수가 해마다 정례화되기도 했었다.

그해 8월, 올림픽을 목전에 두고, 학생운동권에서는 단독 올림픽을 반대하고 남북 공동으로 올림픽을 진행하자는 주장과 함께 그 서슬 퍼런 시기에 남북 대학생 교류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로 대표되는 큰 움직임이 그것이었다. 8.15를 앞두고 당시 전국의 대학생 수만 명이 연세대로 집결하였고, 서탈협에서는 2개의 공동사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는 숭실대 86 서후석과 이대 86 김건영 등이 주축이 되어 20여 명의 탈춤패가 판문점에서 풍물굿을 벌이자는 것이었는데, 당연히 원천 봉쇄되었다. 결국은 연세대에서 판문점을 향한 출정식 길놀이로 대체되었고, 선두에 섰던 조통특위위원장 서울대 85 김중기(현재 배우)와 함께 연합 상쇠 서후석을 비롯한 대다수가 굴비 엮이듯이 줄줄이 연행되었다. 또 다른 공동사업은 8.15 연세대 집회 전야제에 서울지역대학문화패연합(탈패, 노래패, 풍물패 등) 연합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이 연합공연의 연출을 내가 맡게 되었는데, 당시 노래패가 꽤나 영향력이 컸고, 풍물패도 만만치 않았는데, 탈춤패가, 고작 3학년이 연출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서대문연에서도 서탈협의 입김이 제일 셌던 것 같고, 서탈협에서는 ‘한라의 넋으로!’를 연출하여 이미 연출력을 검증받은(?) 나를 연합공연의 연출로 밀었던 것 같다.

이 연합공연의 연출을 맡은 나는 이 공연이 끝나면 바로 수배가 떨어질 것을 감수하겠다는 나름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해 초 서울대 연극반에서 공연한 ‘통일밥’을 쓴 주인석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8.15 전야제 연대 노천극장에서 수만 명의 학생이 운집한 가운데 서대문연 연합공연은 연합 노래패와 풍물패, 탈춤패가 참여하여 나의 연출로 뜨거운 열기 속에 공연되었고, 나는 그 이후로 몇 달 동안 경찰을 피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러 대학교 탈춤반을 오가며 더부살이를 해야 했다. 아쉽지만 그 공연 사진이나 영상은 아직 구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이런 것이 증거가 되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설사 기록이 남아있더라도 서둘러 지워야 했기에 아마 앞으로도 구하기는 힘들 것 같다.

4-4) 가을 송파산대놀이 전 과장을 공연하다

이 당시 대학 문화패들은 공연역량을 어떻게 하면 더 끌어올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깊었던 시기였다. 사회 전문패와의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던 편이었다. 자연스럽게 문화패마다 전문성을 키우려는 노력이 뒤따랐다. 서탈협의 거의 모든 대학 탈춤패에서는 창작마당극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탈춤반 출신이 만든 ‘놀이패 한두레’ 선배와의 교류가 빈번했다. 88년 ‘놀이패 한두레’의 공연 ‘한춤’에도 출연했던 외대 탈춤반 78학번 심규호 형이 아직 외대 대학원에 남아계신 시기여서 10여 명의 서탈협 탈꾼들이 ‘점아 점아 콩점아’를 따라 하며, 창작춤을 배우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와 함께 탈춤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는데, 허구한 날 데모에, 세미나에 치중한 나머지 창작공연의 질은 계속 떨어지고, 탈춤반이 탈춤도 제대로 못 추는 것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자연스레 몇몇 대학에서는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이면 탈춤 전수회관을 찾아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 탈춤을 배우는 학교가 많아졌다. 

건대 탈춤반에서는 86학번 회장 이영식과 내가 의기투합하여 일찌감치 가을 공연에는 송파산대놀이 전 과장을 하기로 하였다. 8.15공연을 마치고 건대 탈반은 송파산대놀이 전수회관을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송파산대놀이를 익혔고, 전수 조교의 감수로 탈과 의상을 제작하였다. 1학기 정기 공연을 타 대학교에 초청받아 받은 공연사례비(약 200만 원 정도로 기억한다)가 종잣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두 달여에 걸친 송파 탈과 의상 제작에는 선후배가 따로 없이 모두 달려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10월 가을 동아리 축제에 건대 탈춤반의 ‘송파산대놀이’ 전과장 공연을 올렸다. 그간 공연이 시위성(?) 공연이었다면 이 공연은 축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88년 10월 송파산대놀이 공연 사진 1 – 본공연에 앞서 문과대 앞에서 길놀이 진행 중이다. 쇠 잡은 이가 상쇠 86학번 회장 이영식, 부쇠가 86학번 박혜란, 징잽이 87학번 류탁균, 그 뒤로 88학번 조난주, 87학번 이정선, 필자가 장구를 잡고 있고 87학번 회장 양희조와 87학번 김학준이 북을 잡고 있다. ⓒ마승락
▲88년 10월 송파산대놀이 공연 사진 2 – 본공연에 앞서 문과대 앞에서 길놀이가 휘몰이로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마승락
▲88년 10월 송파산대놀이 공연 사진 3 – 공연 전 저마다 탈과 의상을 갖추고 자세를 취한 88학번 회장 김영석, 채경목, 이영묵의 느긋하고 흐뭇한 표정이 그전 공연에서의 두려움이나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다. ⓒ마승락

4-5) 10.28 2주년 기념 연합공연을 연출하다

86년 10월 28일! 학생운동권의 상당수가 건대에 모여들었고, 으레 집회가 있으면 탈춤패는 길놀이에 나섰던 터라 그날도 북을 잡고 길놀이에 나섰었다. 느닷없이 전투경찰이 최루탄을 마구 쏘아대며 교내로 난입하였고, 놀란 학생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본관이며, 사회과학관으로 피해야 했다. 얼마나 벼르고 준비된 치밀한 작전이었던지 경찰들은 순식간에 천여 명의 대학생들을 두 개 건물에 고립시켰다. 나와 같은 동기 안영철은 그야말로 영문도 모른 채 그 무리 휩쓸려 4일간 고립되었다가 사범대 3층 복사실에 숨어 용케도 잡히지 않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건대 총학생회에서는 10.28 2주년 집회를 하기로 하였고, 건대 문화패 연합공연이 추진되었다. 탈춤반을 주축으로, 민요연구회, 풍물패가 연합공연을 하게 되었고, 장르가 다른 문화패의 연합공연으로는 집체극이 제격이었다. 이 공연 역시 연합공연 연출 경험이 있는 내가 연출을 맡게 되었다.

▲88년 10.28 2주년 건대 문화패 연합 집체극 공연 사진 –좌측부터 88학번 채경목, 이영묵, 김병선, 조난주, 87학번 회장 양희조, 88학번 회장 김영석, 88학번 민승현, 이미애와 87학번 김학준이다. ⓒ마승락

이렇게 1년에 5개 공연을 하였으니, 공연 때마다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던 87학번과 88학번의 성적표가 형편없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 역시 학과는 등지고 오로지 공연에 집중하다 보니 하반기부터는 내 진로를 자연스레 문화 운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생운동권과는 서서히 거리를 두게 되었고, 89년 2월, 나는 ‘놀이패 한두레’에 입단을 하여 딴따라의 길을 걷게 된다.

마승락 건국대 탈춤반 86학번, 전 놀이패 한두레 대표, 전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 (사)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이사, (사)한국소극장연합회 이사, (사)ASSITEJ (한국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 역임, 현재 제주에서 목수로 일하며 가끔 춤도 추고 있음.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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