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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의 길을 가게 만든 탈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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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따라의 길을 가게 만든 탈춤

[탈춤과 나] 23. 마승락의 탈춤 ①

1) 탈춤반 가입

내가 대학을 들어간 해는 1986년이다. 80년 광주의 아픔이 지난 지 몇 해 되지 않았기에 5월이 다가오면 그즈음 모든 대학이 그렇듯, 내가 다니던 건국대에서도 게시판은 물론이고, 학생들이 지나는 곳곳에 80년 광주의 학살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대자보가 빼곡하게 넘쳐 붙어있던 시대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평범한 대학 1학년 과 대표였고, 소위 범생이인 데다,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그 처절한 5월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고 ROTC에 지원했었다. 4월에 이어 5월에도 교내에는 허구한 날 최루탄이 난무했고, 최루탄 연기를 피해 흩어지던 학생들을 나는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고, 스스로 용기 없음과 본인의 영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자책하는 대신, ‘저들도 저리 흩어지는 걸 보면 저들도 두려워서 그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별다른 동요 없이 잘 지나갈 즈음, 같은 산업공학과 2학년 과 대표라 대화도 자주 나누었던 정청래(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형과 학생운동권에 대해 설전(돌이켜 보면 그것은 설전이라기보다, 내가 왜 데모할 수 없는가에 대한 변명이었고, 학생운동권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내 나름의 억지에 가까운 논리를 폈던 것으로 기억한다)을 하게 되었고, 당시 청래 형은 ‘네 생각이 그렇다면 탈춤반에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다’며 탈춤반 가입을 권유하였다.

2) 인생의 변곡점이 된 고마운 세 선배를 만나다

여름방학을 앞둔 시점에 나는 탈춤반에 가입하였다. 학생운동권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그 당시 건대 학생운동권 중 가장 빨간(?) 탈춤반을 들어간 내게 탈춤이나 풍물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오로지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세미나 시간에 참가하여 당시 한 학번 위였던 신우식, 윤영균, 김길용, 곽성신 형들에 대항하여 형들의 세뇌(?)에 반대 논리를 펼치는 것이 내 탈춤반 활동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85 형들에게나 동기들에게 비친 나는 ‘어디서 이런 또라이가 굴러와서 애를 먹이나!’ 싶었을 게다.

그 과정 중에 나는 점차 의식화(?)되기 시작하였고, 중대한 결정을 해야만 할 시기가 찾아왔다. 1학기에 신청한 ROTC 합격 통지가 왔고, 등록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2학년부터는 탈춤반을 멀리하고 군사훈련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ROTC를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나 자신의 탄탄한 앞날을 선택한다면 이쯤에서 탈춤반 생활을 슬슬 정리하고 2학년부터는 취업을 위해 그간 애써 외면했던 것처럼 그대로 살아가면 될 터인데.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깊숙하게 발 들여 놓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ROTC를 포기하였다. 이 선택은 내가 이후 탈춤반 생활을 계속 이어가고 나아가 딴따라를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최초의 결정이 되었다.

86년 10월 28일! 당시 수도권 학생운동권의 상당수가 건대에 모여들었고, 이를 기회로 학생운동권을 고립시키려는 당국의 음모가 있었다. 난 영문도 모른 채 천여 명의 학생과 휩쓸려 4일간 고립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를 돌이켜보면 두려움도 컸지만,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강한 반감도 키워진 것 같다. 다행히 운 좋게 잡히지 않고 빠져나왔지만, 나는 여전히 학생운동권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판적인 시선을 가진 삐딱한(?) 탈춤반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나를 제대로 잡아준 선배는 85형들로서는 버거웠을 터이고, 당시 복학생이었던 81학번 김기중, 김양수 형과 83학번 김은자 선배였다. 이 세 선배와 우리 동기회장 이영식과 나를 포함 5명이 안성농민회 구성에 일조하기 위해 겨울 농활을 준비하면서 나는 세 선배로부터 내가 그동안 얼마나 비겁하고 모순된 논리로 나를 포장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방관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처절히(?) 반성하게 되었다. 

3) 탈춤에 재능을 발견하다

하지만 나는 이때까지도 여전히 탈춤이나 풍물에 관심이 없었다.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토론을 일삼는 것이 내게는 더 흥미진진한 일이었기에 2학년이 되어 후배를 받았지만 어쩌다 탈춤을 추게 되면 동기나 후배들로부터 로봇 같다는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던 내가 5월 정기 공연에 주연을 맡아 창작마당극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운동권 학생을 둔 어머니의 아픔을 다룬 ‘오 어머니!’라는 작품이었는데 당시 85 신우식 형이 쓰고 연출했다. 태어나서 연기라는 것은 기껏해야 초등학교도 들어가기도 전에 교회에서 성극을 잠깐 했던 경험이 전부였던 내게 주연이라니? 아마도 그 작품을 쓰고 연출한 신우식 형은 자신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썼을 터이고, 그 주인공을 내게 맡긴 것은 탈춤이나 풍물을 못 해도 맡길 수 있는 배역인데다, 그 긴 대사를 외울만해서 맡긴 것이 아닐까 싶다.

▲87년 5월 정기공연 ‘오! 어머니!’ 사진- 장구잽이 앞에 데모하다 잡혀 온 학생역이 필자이고, 장구잽이가 81학번 김기중, 쇠를 잡은 이가 81학번 김양수 형이다. 좌측 농민 복은 87학번 양희조, 87학번 김정선이다. ⓒ마승락

87년 6월항쟁! 대학생들만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한 ‘호헌철폐! 독재 타도!’ 그 가슴 터지는 듯한 함성은 어느덧 나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권을 세워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무장하게 했다. 그 벅찬 가슴과 뜨거운 함성이 아직 남아있던, 그해 여름 농활에서 내게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아직도 여전히 탈춤과 풍물에 젬병이었던 내가 농활 마지막 날 밤에 마을 사람들과의 잔치에서 내 생애 처음으로 나도 모르게 장단을 탄 것이다! 별다른 춤사위도 아니고 그냥 흥겹고 신나서 막춤을 추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장단을 타고 있는 느낌이 든 것이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통성기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느꼈던 ‘성령 체험’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이 엄청난 경험 이후 나는 비로소 탈춤에 흥미를 느끼고 탈춤 추는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송파산대놀이 전수 조교였던 이경철 형님께 송파산대놀이 전수를 받을 때는 이미 뻣뻣한 ‘로봇 춤’을 벗어난 것은 물론이다. 심지어 송파의 맛을 잘 살려 춤출 수 있게 되었고, 이경철 형께서 특별히 지목하여 ‘너 꽤 잘 춘다’라고 칭찬을 받을 경지(?)에 도달하였다.

4) 88년! 나를 딴따라의 길로 접어들게 하다

88년! 지금 돌이켜보아도 내가 딴따라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들이 펼쳐진 해이다. 5월 정기공연 창작마당극, 7월 여름 농활 문선대 공연, 8.15 서울지역대학생문화패연합(서대문연)연합공연, 10월 송파산대놀이 전 과장 공연과 10.28 2주년 집체극 공연에 이르기까지 한 해에 무려 5개 공연을 연출하였더니, 나는 물론이거니와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문화 운동을 하게 될 것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4-1) 4.3으로 5월 창작마당극을 연출하다.

현기영 선생님의 소설 ‘순이 삼촌’을 접한 것은 87년 겨울이었다. 이 소설 한 편을 읽고 난 뒤 내가 받은 충격은 80년 5월 광주항쟁의 실상을 처음 접했을 당시 못지않았다. 그때만 해도 구하기도 쉽지 않았던 4.3 관련된 자료를 여기저기서 어렵사리 구해 읽었다. 4.3에 대해 금기시하던 때라 국민 대다수는 알지도 못하였고, 제주에서조차 4.3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어 그저 쉬쉬하고 있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88년 5월 정기 공연을 4.3으로 만들어야겠다 싶어 당시 동기들과 선후배들과 자료를 공유하였다. 하지만 막상 공연을 만들려고 하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소설 ‘순이 삼촌’을 모티브로 삼아 1차 초고를 쓰기는 썼으나, 이것을 형상화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창작마당극이라는 것을 처음 쓰고 연출이라는 걸 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가뭄에 단비와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3월, 전국의 창작극 전문 단체가 대거 상경하여, 서울 종로 3가 미리내 소극장에서 한 달이 넘도록 ‘제1회 전국민족극 한마당’을 펼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전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패키지 티켓을 구매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간 뻔질나게 미리내 소극장을 들락거렸고, 공연을 보고 난 뒤에는, 삼삼오오 모여 종로 피맛골에서 공연 관람 후기를 안주 삼아 막걸릿잔을 숱하게 부딪쳤다. 이런 관극 경험이 훌륭한 바탕이 되어 4.3을 소재로 한 창작마당극 ‘한라의 넋으로!’를 대단히 성공적으로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공연은 당시 ‘서울지역대학생탈패협의회(서탈협)’창립 멤버들도 대거 관람하였는데, 이들이 각 대학 총학생회에도 영향을 미쳐 천안 상명대, 서울 홍익대에 초청받아 꽤 많은(?) 돈을 받고 공연하였다. 이 공연수익금으로 2학기에 송파산대놀이 의상과 탈을 제작할 수 있었다.

▲88년 5월 정기공연 ‘한라의 넋으로!’ 사진 1- 마지막 장면인데 놀이패 한두레의 ‘한춤’에서 나온 깃발춤을 차용하여 형상화했다. ⓒ마승락
▲88년 5월 정기공연 ‘한라의 넋으로!’ 사진 2- ‘단독선거 결사반대’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장면으로 좌측부터 88학번 회장 김영석, 87 김정선, 86 박혜란, 87학번 회장 양희조 이다. ⓒ마승락
▲88년 5월 정기공연 ‘한라의 넋으로!’ 사진 3-학살당한 4.3 원혼들이 통일을 염원하는 태극을 만들어 가고 있고, 주위에서 북소리로 힘을 북돋우는 장면이다. 개복청(옷 갈아입는 공간이면서, 악사 석 배경이 되었다) 앞 쇠를 잡은 이가 당시 건대 최고의 상쇠 86학번 이영식이고, 장구잽이가 85학번 신우식 형이다. 필자는 북을 잡고 있다. ⓒ마승락
▲88년 5월 정기공연 ‘한라의 넋으로!’ 사진 4- 천안 상명대 초청공연 중, 미군정과 군부, 서북청년단이 창작탈을 쓰고 소개 작전 회의를 연기하고 있다. 가운데 미군정 역은 키가 제일 컸던 88학번 채경목이 맡아 연기했고, 좌측 군부 역이 87학번 김학준, 우측 서북청년단 역이 88학번 김병선이다. ⓒ마승락

최근에 4.3 소재의 마당극 사를 정리하는 춤평론가 최해리 선생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놀이패 한라산이 88년에 공연한 작품은 ‘향파두리놀이’였고, 89년부터 본격적인 4.3 마당극을 공연하였으니, 건대 탈춤반의 ‘한라의 넋으로!’가 비록 전문패의 공연은 아니지만 4.3 소재의 최초의 마당극이 아닐까 추정했다. 88년에 외대 탈춤반에서도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공연을 했던 것으로 확인은 했고, 또 다른 대학 탈춤반에서도 4.3을 소재로 창작마당극이 공연되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한라의 넋으로!’처럼 2개 대학에 초청되어 공연할 만큼 파급력은 없었을 터이니 ‘한라의 넋으로!’가 대한민국 최초로 4.3을 다룬 창작마당극이라고 우겨도 무리 없을듯하다.

마승락 건국대 탈춤반 86학번, 전 놀이패 한두레 대표, 전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 대표, (사)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이사, (사)한국소극장연합회 이사, (사)ASSITEJ (한국아동청소년연극협회) 이사 역임, 현재 제주에서 목수로 일하며 가끔 춤도 추고 있음.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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