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3월이 되면 대학가에서는 동아리 신입회원 모집이 시작되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연극을 좋아해서 대학에 가면 연극을 하겠다고 생각을 하였던 나는 1978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바로 옆에 탈춤반이라는 동아리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전까지 탈춤이란 말을 전혀 듣도 보도 못하였던 나는 탈춤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그 순간 연극반을 지나치고 탈춤반에 회원등록을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 45여 년 동안 탈춤은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회원 모집 기간이 끝나자 마자 탈춤반 초대 회장 3학년 이균옥 형이 양주를 다녀오라고 했다. 첫 탈춤 강습으로 양주별산대를 배우기로 했으니 춤 선생님을 모셔와야 한다고. 주말 아침 동기 박재욱과 함께 주소만 들고 무작정 양주로 찾아갔다. 당시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 유경성 회장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니 마을 일로 바쁘다고 ‘나중에 얘기하자’ 하셔서 우리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잔심부름을 하면서 하루 종일 선생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저녁 무렵이 되자 선생님께서 갑자기 생각난 듯 ‘아직 안 갔냐? 참, 너희들 춤 가르쳐 달라고 했지’라며 마침 따님이 대구에 시집가서 살고 있으니 춤을 가르쳐 줄 수 있겠다며 연락처를 적어주셨다. 그렇게 양주 기본무를 처음 배우기 시작하였고, 5월 축전이 임박해서 지금은 돌아가신 기능보유자 고명달 박교응 두 분 선생님이 직접 학교로 오셔서 ‘양주별산대놀이’의 ‘노장 과장’의 ‘파계승놀이’, ‘신장수 놀이’, ‘취발이 놀이’를 지도해 주셨다. 그야말로 멋도 모르고 공연을 하였다. 대운동장, 관중들은 대사도 들리지 않는 멀리 떨어진 스탠드 위 높은 위치에 있고 탈꾼들은 휑한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그렇게 경북대의 탈춤반이 시작되었고, 나의 대학 생활도 비로소 시작되었다.
1978년 여름 방학, 가산오광대놀이를 전수 받으러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마을회관으로 간 우리 동아리 회원은 17명이었다. 2학기부터 회장을 맡기로 한 김사열 선배님을 비롯하여 열성 회원들은 한여름 무더위를 이기고 예능보유자이신 한윤영 선생님(우리는 도리깨 선생님이라고 불렀다)으로부터 가산오광대놀이 전 과장을 전수받았다. 10일간의 여름 전수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회원들의 모습은 햇볕에 새까맣게 거슬리고 살은 쏙 빠진 그야말로 거지같은 모습이었지만 서로 마주보고 웃는 얼굴에는 하얀 이빨이 반짝거렸다. 그저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시인 신경림의 말처럼.
그리고 10월 가을 축전, 학내 야외농구장에서 정기공연으로 가산오광대놀이를 공연하였다. 수업이 끝나는 시간 어스름이 몰려올 때쯤 길놀이가 풍물소리에 따라 마당에는 기름 방망이에 횃불이 밝혀졌다. 하교 길에 농구장 옆을 지나던 학생 관중들이 줄을 이어 공연장인 농구장으로 몰려왔다. 그날 구경꾼이 너무 몰려서 농구골대 위에까지 올라가서 구경하던 중 무게 중심을 잃은 골대가 쓰러지는 사태가 일어났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지만 가슴이 서늘해지는 사고였다. 당시에는 유신체제와 학내 사찰 등으로 분위기가 으스스한 가운데 특히 탈춤과 탈춤반을 둘러싼 시선은 예사롭지 않았지만 탈춤의 인기는 오히려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11월 2일, 대학 본관 앞 로타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내용의 구국선언문이 낭독되고 “총장은 물러가고, 학원사찰 중지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바로 그날, 시위를 주도한 탈춤반 선배 76학번 류시대 형이 지도교수 연구실에서 연행되었다. 항상 유머가 가득하고 의리가 강했으며, 가산오광대에서 옹생원 역을 멋지게 연기하여 동아리 후배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류시대 형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후배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교내에서 스승이 제자를 신고했다는 소문에 울분이 머리 끝까지 치솟은 채로 탈반 후배들은 신발 끈을 조여매고 2차 시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7일 교내 로타리에서 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내를 행진하는 2차 시위가 일어났고 진압경찰대가 학내로 진입하면서 시위는 대규모로 확대되면서 투석전이 벌어졌다.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대의 맨 앞줄에는 탈반 동기들의 땀에 젖은 결연한 얼굴들이 눈에 띠었다. 가로막는 경찰 바리케이드를 무력화시킨 행렬은 교내를 벗어나 당시 경북 도청 앞을 거쳐 중앙로를 가로질러 2⋅28 학생운동 기념탑이 있었던 명덕로타리까지 긴 일자로 행진을 벌였다. 시위대 맨 앞줄에 서서 뒤를 돌아보니 경북 도청에서 대구역까지 일자로 뻗은 통일로가 까맣게 학생들의 머리만 보였다. 태어나서 그런 군중의 대열은 처음 보았다.
다음 날 밝기도 전, 휴교가 되면서 주동자 색출이 시작되었다. 탈춤반 회장인 김사열 선배는 깜깜한 새벽에 연행되었고, 수사관들은 시위주동자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 중 탈춤반 후배들의 이름을 대라고 심문을 했지만 끝까지 모른다고 버티는 바람에 김사열 선배 혼자 모든 짐을 지게 되었다. 결국 무기정학을 받고 운명이 바뀌게 되어 평탄치 않은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이 당시 상황은 ‘탈춤과 나’⑦ 김사열의 탈춤 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음)
심문하는 수사관에게 사진에 찍힌 인물들이 그냥 78학번 김대규, 박재욱, 서정희, 양천순, 유창열, 이상찬, 정일준, 최재우 등이라고 했더라면 지금 나와 탈반 동기들 마음의 빚이 조금은 덜 했을거늘… 그때부터 유신 체제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경북대 집회는 늘 탈춤반이 있어야 뭔가 분위기가 살았다고 한다.
1983년, 학교를 졸업할 무렵 계명대 탈반의 형남수, 윤상순, 경북대 연극반의 김민자, 경북대 탈반의 김사열, 박일민, 박재욱, 이균옥, 채 명, 최재우 등이 모여서 대구에서 놀이패 ‘탈’을 만들었다. ‘이 시대 이땅의 놀이를 우리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구의 날뫼북춤, 밀양백중놀이의 밀양오북춤 그리고 멀리 진도북춤 등을 배우면서 나는 한층 전문적으로 우리문화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놀이패 탈 창립 공연으로 창작탈춤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 지언정”(공동 창작 / 박일민 탈제작 / 박재욱 김민자 공동연출 / 채 명 안무)을 무대에 올렸다. 재학 시절 창작탈춤 ‘냄새굿놀이’를 만들어본 경험을 살려 만든 작품이었다. 지금은 전국적인 마당극 배우가 된 김헌근의 공식 데뷔 작품이기도 하였다.
그 후 놀이패 ‘탈’은 창작탈춤 ‘꼬리뽑힌 호랑이’(김사열 대본 / 최재우 연출 / 채 명 안무), 창작탈춤 ‘엉겅퀴꽃’(장재화 대본 / 형남수 연출) 등 우리 시대의 탈춤을 위하여 몇 편의 창작탈춤을 더 제작한 후 마당극 ‘이 땅은 니캉 내캉’(장재화 대본 / 김창우 장재화 공동연출)을 공연하였다. 이 작품은 제1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서 공연되어 놀이패 신명의 ‘일어서는 사람들’, 극단 토박이의 ‘금희의 오월’ 등과 함께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마당극에 이어서 마당춤 ‘통일북춤’(채 명 안무)를 만들어 대학로에서도 공연하는 한편 각종 집회에 문화공연으로 초청되기도 하였다.
놀이패 ‘탈’은 당대의 주제의식을 살린 작품의 창작에 전념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통 탈춤의 복원에도 적극적이었다. 당시까지 구전으로만 남아있던 경산시 자인면의 자인팔광대놀이 복원 사업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자인 사람들만으로는 연희 기능이 없어서 자인 주민 이종대와 국문학을 전공하던 놀이패 ‘탈’의 이균옥을 위시하여 김미수, 김헌근, 도진용, 박재욱, 변영호, 안문규, 윤상순, 최재우, 형남수 등이 참여하여 마침내 자인팔광대놀이를 복원하여 1988년 자인단오제에서 공연을 하였다. 이후 놀이패 ‘탈’은 1990년 극단 ‘함께사는 세상’으로 변신하여 대구의 유일한 마당극 단체로 숨결을 이어가고 있다.
1998년 3월, 요 근래 몇 년 사이 대학가에서 탈춤 문화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졸업생들은 학내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자 여러 궁리를 하였다. 그 중 하나가 경북대 민속문화연구회 창립 20주년 기념 '한국의 탈' 전시회와 강연회, 탈춤공연을 하는 것이었다. 예술마당 ‘솔’에서 열린 '전통탈 전시회'는 전국 각 대학민속보존연구반, 탈춤연구회 등이 소장하고 있는 송파산대놀이, 고성오광대, 동래들놀음 등 12가지 탈놀이에 등장하는 탈 2백여점이 전시되었고, 임재해 교수(안동대 민속학과)의 '하회탈의 도드라진 멋과 트집의 미학' 주제 강연회가 열렸으며, 탈춤공연은 ‘양주별산대놀이’ 중 ‘애사당 법고놀이’와 ‘파계승놀이’(경북대 민연회 졸업생 모임), ‘고성오광대놀이’ 중 ‘영감할미’과장 (계명대 민연반 졸업생 모임)이 펼쳐졌다. 현 대구 민예총 권순신 이사장이 취발이 역을 그렇게 해학적으로 잘 하는 줄 처음 알게 되었으며, 고성오광대의 할미라는 인물의 캐릭터가 그렇게 섹시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공연이었다. 오랜 만에 학창 시절의 기분을 만끽한 대구 출신의 탈패들은 ‘뒷풀이가 좋아야 공연이 좋았다’는 말처럼 그날 뒷풀이를 거나하게 치렀지만 가슴 한 켠에는 뭔가 빈 구석이 컸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오윤의 “시름지친 잔주름살 환히 펴고요 형님, 우라질 것 놉시다요 도동동당동 ~” 이라는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헛헛하게 막걸리 잔을 빈 속에 끝없이 퍼부어 넣었다.
1978년, 내가 처음 탈춤을 접한 그해 겨울 방학 때 77학번 권용호, 78학번 동기 양천순, 이상찬과 최재우 4명은 달랑 배낭 하나씩만 짊어지고 가산리 마을회관을 다시 찾았다. 온돌로 된 마을회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집어넣고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도리깨 선생님으로부터 가산오광대 탈 제작 방법을 전수받고 재료를 구입하여 탈 전체를 제작하였다. 박바가지와 종이를 기본으로 아교풀 등 자연 재료를 이용하여 내 손으로 직접 만든 탈들은 후배들이 매년 가산오광대 공연에서 사용하며 신명의 기운을 전승하였을 것이다.
그때 제작한 가산오광대 탈을 동아리에서 보관하다가 경북대 탈반 재학생 동아리가 해체되면서 마지막 남은 재학생 후배들이 졸업식을 며칠 앞둔 즈음 그 탈들을 직접 만든 사람들이 누구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에게 가지고 왔다. 20년 넘게 탈판을 지켰던 그 탈들은 이제 어디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까… 2003년 차가운 겨울 어느 날, 후배들과 나는 그냥 하염없이 밤을 새워 술잔을 비우며 까마득하게 정신줄을 놓아 버렸고, 그렇게 경북대 탈반은 사라져 갔다.
나는 지금도 공연을 준비할 때마다 항상 탈과 탈춤을 생각한다. 그 사이 세월은 흐르고 흘러 나에게 처음 탈춤을 가르쳐 주신 인간문화재 선생님들의 나이가 되었고, 나는 어제처럼 오늘도 여전히 탈을 이야기하며 탈춤을 춘다. 어쩌면 방탄소년단의 대표곡 중 하나인 "IDOL" 뮤비에 등장하는 덩더궁 덩구르르 장단에 춤추는 사자탈처럼 우리 시대의 탈춤과는 또다른 신명의 대동세상을 꿈꾸는 누군가의 탈춤을 기대하면서.
최재우 : 연출가
1978학번, 경북대 민속문화연구회 출신,
전 예술마당 솔 대표, 전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전 민족극한마당 집행위원장
현 성주 금수문화예술마을 대표
출연작 : “통일북춤”, “이땅은 니캉내캉” 외 다수
연출작 : 창작탈춤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 창작탈춤 ‘꼬리뽑힌 호랑이’, 창작탈춤‘심청’ 외 다수 연극과 뮤지컬 연출.
행사 연출 : “어디 있느냐 꽃 같은 이”, “세종대왕자 태 봉안 행렬 재현”, “도동서원 사액봉행제 ‘道, 東에서 꽃피다’”, 종가포럼 “불천위(不遷位), 만리를 가는 사람의 향기”, “성주 사드 반대 815 집체 삭발식”, “성주 사드 반대 인간띠잇기”, “파리장서 및 4⋅2 만세운동” 재현 행사 등 다수 대형 퍼포먼스 연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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