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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세상과 나의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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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 세상과 나의 혁신

[탈춤과 나] ⑦ 김사열의 탈춤

이십 세기 전반에 이 땅에 유입된 서구 공연예술은 우리 전통연희의 근본을 뒤흔들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의 강요가 전통연행예술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모든 민족적인 것은 촌스럽고 세련되지 못하여 청산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한 잘못된 인식은 해방 이후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1970년대 초반 부산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등에서 전통탈춤에 관심을 가지는 동아리가 결성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지만 대학의 탈춤운동은 탈춤 속에 나타난 '민중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면서 반독재 투쟁으로 연결되어 박정희 독재 정권과 자연스레 불화 관계를 형성하였다. 소멸해 가던 전통문화를 되살려 당대에 맞도록 계승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독재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는 일은 우리문화운동의 고난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극 양식 속에 자발적으로 담아 표현한 비판정신 때문에, 때로는 탈춤운동이 무조건 반정부 활동이라는 무지스러운 오해 때문에 그러한 고난은 가중되었다. 대구지역 대학에서도 70년대 후반에 탈춤반이 생겼는데, 그러한 전국적 분위기도 지역에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경북대학교 탈춤반'의 탄생

1976년에 대구 YMCA에서 탈춤 강좌가 있었다. 무세중씨가 강사로 왔고, 그의 전통탈춤에 대한 열정이 수강자들을 사로잡았다. 아마도 대구에서 최초의 전수 강좌이었을 <양주별산대놀이>를 수강자들은 주로 배웠다. 수강자 중에는 대학생들이 섞여 있었고, 필자도 거기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 강좌의 영향으로 1978년에 경북대학교에도 '경북대학교 탈춤반'(이하 '경탈'로 적음)이 결성되었다. YMCA 탈춤 강좌에 참여하였던 이균옥과 대학동기인 필자도 자연스레 경탈에 합류하였다.

1978년 봄에 시작된 경탈은 당시 3학년이 1대로서 10명, 2학년이 2대로서 5명, 1학년이 3대로서 12명으로 짜여 출범하였다. 구체적으로 1대는 김사열(필자), 김재석(연극 연출, 경북대 교수), 김진희(캐나다 교민, 대구여성회 초대 회장 역임), 류시대(아주대 국제대학원 행정팀장 역임), 이균옥(국문학박사, 민예총 대구지부장 역임), 이진호(물리학박사, 한국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역임), 임병목(영광여고 교사 역임) 등으로 구성되었다. 2대에는 권영호(국문학박사, 대학강사 역임), 권용호(고인, 교사 역임), 김난숙(전자공학박사, 회사 연구원 역임), 채명순(무용학박사, 한국민족춤협회 대구지회장), 최용규(고인, 한국IBM 임원 역임) 등이 있었다. 3대에는 김대규(교사 역임), 박재욱(고인, 문화기획, 팔공문화원 사무처장 역임), 서은희(교장 역임), 서정희(교사 역임), 양천순, 이상찬, 장재화(교장 역임), 정일준(교사 역임), 최재우(탈춤 연출, 민극협 이사장 역임) 등이 참가하였다.

▲1978.05.24. 경북대탈춤반 창립공연 시작-연희자 전원 의상착용후 도열 대운동장 ⓒ자료제공-경북대기록관
▲1978.08.09. 경북대탈춤반 가산오광대놀이 현지전수 후 기념촬영 경남 사천군 가산리 뒷길 ⓒ김사열
▲1978.10.05. 경북대탈춤반 첫 정기공연 가산오광대놀이 다섯 문둥이 노는 장면. 농구장에서. ⓒ김사열
▲1978.10.05. 경북대탈춤반 첫 정기공연 가산오광대놀이 공연 인사말(오른편 반장 김사열, 왼편 김재석) ⓒ김사열
▲1978.10.05. 경북대탈춤반 첫 정기공연 가산오광대놀이 영노과장(영노 역할-김사열, 최재우, 고 박재욱). 농구장에서. ⓒ김사열

경탈은 1978년 전학기에는 캠퍼스에 유경성 선생님(인간문화재, 현재 작고)의 따님을 강사로 불러 경기도의 <양주별산대놀이>를 전수하여 공연하였고, 후학기에는 하계방학 동안 한윤영 선생님(인간문화재, 현재 작고)의 지도를 받는 현지전수를 거쳐 경남의 <가산오광대놀이>를 공연하였다. 써클 룸이나 실내 연습장이 없이 그냥 대학 교정안의 숲에서 공연 연습이 이루어졌다.

배역을 맡은 이들은 연습 후 마셨던 막걸리 양 만큼 많은 땀을 연습 중에 흘렸다. 그러한 생고생은 공연장을 가득 메웠던 관객들의 열광으로 상쇄되었다. 당시 캠퍼스에는 안주와 술을 사들고 격려를 아끼지 않던 적지 않은 숫자의 후원자들이 있었다. 반면에 학교 당국으로부터는 반정부적 성향으로 간주되어 강제로 '경북대학교 민속문화연구회'로 개명 당하기도 하였고, 지도교수를 아무도 맡아 주지 않으려고 하여 매년 등록 시마다 동아리가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솔직히 필자는 연기가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못하여 1978년의 <가산오광대놀이> 공연에서 '영노'와 '큰양반' 배역을 맡은 것이 연기자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주로 뒷일패 역할을 감당하여 탈을 제작하거나 포스터, 팜플렛 등을 만들었다. 나중에 탈 전문가나 화가들이 그룹에 가세하면서 필자는 전수공연의 채록을 하거나 창작극의 대본을 쓰거나 공연 비평의 영역을 맡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유신정권 반대운동의 불길

1978년 여름방학에 <가산오광대놀이> 현지 전수를 다녀와서 개학이 되자 캠퍼스는 술렁거렸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 분위기가 조심스럽게 형성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11월 2일, 결국 경북대학교에서도 4명의 학생이 반유신정권 성명서를 낭독한 후 경찰에 체포되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 4명중 한명이 경탈의 류시대이었으므로 써클 멤버들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당시 대통령의 친구로서 경북대 총장을 지내고 있던 김영희는 바로 그날 밤에 교수회의를 소집하여 해당 학생들을 빠르게 제적하였다. 그것은 유죄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 학생의 학적을 인정해 주던 당시의 여타 학교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러한 경북대 본부의 반민주적 태도가 학생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11월 2일의 사태 후 이틀 정도 지나면서 제적 학생들을 구제할 필요가 있다는 서명 운동이 학생들 사이에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경탈의 후배들은 선배였던 류시대 때문에 그 움직임에 몹시 적극적이었다. 물론 그것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당시 경탈의 회장이었던 필자에게 11월 7일에 다시 한 차례 데모가 있을 예정이니 동참해서 주도하자는 제안이 왔다.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필자는 그 제안을 큰 고민 없이 거절하였다. 반독재나 서명운동의 뜻에는 동의하였지만, 스스로 혼신을 바쳐 싸워야 할 일인 줄은 그 당시에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11월 7일이 다가왔다. 필자는 평소처럼 수업에 적극 출석하면서도 오전 10시에 데모가 있을 것이라던 시계탑 주변의 상황이 궁금했다. 써클 후배들의 태도가 걱정이 되면서 강의 내용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11시쯤 현장 주변에 접근하였다. 데모를 혼자서 주도했던 김병호(당시 철학과 4년)는 이미 교수들에 의하여 빼돌려져 경찰서로 끌려가고 없었다. 그러나 성명서 낭독 당시 주변에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던 학생들 마음속의 '민주화운동'이라는 불을 끌 수는 없었다. 산발적인 수군거림이 여기저기에서 이뤄지고 있었는데, 마침 교내로 진입한 전투경찰들의 최루탄 발사가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경찰의 물리적 힘과 맞서면서 거센 파도와 같은 대열이 학생들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필자가 현장에 도착하였을 때, 아니나 다를까 경탈의 후배들 다수가 재점화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필자는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그러고 있는 후배들을 만류하였다. 그렇지만 그 불길은 더욱 거세져 교내 진입 경찰 전원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나중에 중앙로를 포함하는 대구시 중심지로 가두시위를 갈 때는 8천여 명이 대열에 참가하였다. 당시 1만 명의 총 학생 수를 고려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한 셈이다. 물론 경찰의 제지는 거의 없었다. 데모 대열은 경북도청 앞 통일로를 따라 가다가 대구역을 거쳐 중앙로를 지나면서 구호를 외치다가 일신학원 앞에서 자진해산하였다. 겁이 많아서 가두시위 참여를 망설이던 필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대열의 꼬리쯤에 합류하였다가 교정으로 되돌아왔다.

예상치 않은 인생 길

그런데, 그 다음 날 새벽 집으로 찾아온 다수의 경찰들에 의하여 체포되어 필자는 대구 북부경찰서로 잡혀갔다. 경탈의 회장으로서 11월 7일의 사태를 주도했다는 혐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실대로 진술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다수의 경탈 후배들이 시위를 주도했다면서 이름을 제시하며 수긍하라고 강요하였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필자는 떨면서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달 보름 정도 구금되어 있다가 구류 최고형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대학으로부터는 '무기정학'이라는 통지가 이미 집으로 와 있었다.

필자는 그때까지 카이스트 대학원에 진학하려던 소박한 꿈을 접어야 했고, 왜 본인이 잘못된 정권으로부터 오히려 어이없이 고통을 선사받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대답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필자로서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인생길이 시작되었다. 한국의 역사와 정치, 사회적 구조에 대하여 탐색하게 되면서 자기 혼자만의 생존이 아닌 힘든 이웃과 분단된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는 세계관으로 관심을 확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는 두루한 학습 중에 이론적 접근을 통하여 전통탈춤이 이 시대의 훌륭한 민족극의 한 양식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1980년 4월, 경북대학교 시계탑 광장에서 사일구혁명을 주제로 한 창작탈춤 <냄새굿놀이>의 대본을 후배들과 함께 완성하여 공연하였다. 그 열기가 야학이나 노동 현장으로 이어지다가 1983년 12월에 '놀이패 탈'을 극단 이름으로 내걸고 공개적인 민족연극운동을 개시하게 되었다(경북도청에 전문극단으로 등록). 주로 계명대 민속문화연구회와 경탈 출신 탈꾼들이 극단의 단원으로 등록하였다. 필자는 창단된 극단의 대표를 맡아 1985년 3월에 경북교육회관 강당에서 <내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이라는 창작탈춤을 단원들과 함께 시민들에게 선보였다.

그 후 1989년까지 놀이패 탈이 공연하였던 창작탈춤 <꼬리뽑힌 호랑이>, 창작탈춤 <엉겅퀴꽃>,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다룬 창작마당극 <이땅은 니캉내캉>, 노동현장사례극 <노동자의 햇새벽>, 창작마당굿 <米國, 美國, 未國> 등에서 필자는 주로 대본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놀이패 탈의 단원들은 대부분의 전통탈춤을 익혔을 뿐 아니라, <밀양백중놀이>와 <대구날뫼북춤>도 익힘으로써 뛰어난 기량으로 전통탈춤인 <자인팔광대놀이>복원 공연과 마당춤판인 <통일의 북춤>, <모둠놀이>, <춤으로 본 세상> 등을 공연하기도 하였다.

▲1980.04.29. 경대신문 1면. 창작탈춤 냄새굿놀이 장면(일구 모친 역할-채명순) ⓒ김사열
▲1978.10.24. 경북대학보 1면 ⓒ김사열

생명과학과 탈춤

1989년 겨울 '제3회 민족극한마당'을 대구에 유치하여 그 공연장으로 '예술마당 솔'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 후, 필자는 '놀이패 탈'을 후배들에게 맡기고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하는 동안 틈틈이 서양의 공연물들을 관람하였는데, 역시 연극은 자기 나라 말로 공연해야 하고 전통탈춤을 우리 시대에도 이 땅의 독특한 극 양식으로 개발해야 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1996년 귀국하여 '극단 함께사는세상'('놀이패 탈'과 '극단진달래'가 발전적 통합한 극단, 현재에도 활동 중)으로부터 대본 작업의 제의를 받아 오에겐자부로의 소설인 『개인적 체험』을 각색하여 보낸 바 있는데, 극단의 여의치 않는 사정으로 여태 공연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다시 한국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가고 있어서, 필자는 가끔 멋진 창작탈춤의 대본이나 드라마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지워지지 않는 역사로부터 받는다. 그 압력은 다름 아닌 1970년대의 경탈로부터 오고 있음을 시인해야 하겠다. 그 아름다운 압력이 오늘 나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생명 현상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교육하는 직업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 그 생명이 발산하는 문화, 특별히 탈춤이나 연극을 포함하는 공연예술 작업을 꿈꾸는 일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즐거움이다. 탈춤과 민주화운동 참여로 인하여 필자에게 한때는 고통으로 박혔던 불똥이 이젠 모닥불로 번져있다. 감히 이 모닥불이 어둔 세상을 밝히고 추운 대기를 덥혀주길 기대해 본다. 비록 탈춤 때문에 삶의 길은 크게 우회되었지만 그 지평이 더욱 넓어져서 신명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시민운동 참여와 지역과 나라 사랑

필자와 가족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대구·경북지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2000년 3월부터 경북대학교 생명과학부에 교수로 취업이 되면서 대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후배와 지인들로부터 다양한 분야의 시민운동 참여를 요청받게 되었다.

학외에서는, '극단함께사는세상'의 정단원 활동을 고리로 하여 대구 동구 팔공문화원, 대구민예총, 새벗도서관 등에서 대표나 임원으로 봉사하면서 문화예술분야의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의 상임대표를 거쳐 대안가정운동본부,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대구·경북지회 등에서도 봉사하였다.학내에서는, 경북대학교 교수회와 민교협, 복현콜로키움 등에서 활동하였다. 대학 봉사의 차원에서 2014년부터 총장후보자로 2차례 출마하여 1순위자가 되었지만,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총장으로 임명되지 못하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상징성으로 인하여 2020년 3월 10일부터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이하 '균형위'로 줄여 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현재까지 국가 단위의 봉사를 하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시군구 단위, 농산어촌 단위 등의 건강하고 균형적인 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정책을 연구하고, 국토 현장에 실제로 적용하는 역할을 책임지고 있는 셈이다.

2020년 초부터 전지구적으로 다가온 코로나바이러스-19라는 팬데믹은, 우리나라에서도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래서 그 격차를 메꾸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균형위에서 최근에는 대대적인 지역균형뉴딜, 초광역협력과제, 농산어촌유토피아 프로젝트 등을 시작하고 있다. 균형위는 '지역이 강한 나라, 균형진 대한민국'이라는 비전을 안고 국민과 함께 뛰고 있다. 돌이켜 보건대, 대학의 교육자로서 학생들과 함께 연구하고 교육하기도 버거운 현실에서, 시민운동 참여와 지역과 나라 사랑의 화두까지 짊어지게 된 것은 다 탈춤으로부터 익히게 된 지식 때문이다. 인류와 겨레의 미래와 역사 앞에서 습득한 앎은 그냥 사치스런 지식이 아니라 거룩한 실행으로 이어지도록 압박받은 셈이다. 이 모두가 청년의 때에 소중한 '탈춤의 세계관'을 만나 가치관이 바뀌고 그러한 압박을 긍정적으로 수용해 온 탓으로 여겨진다.오랜만의 불림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금강산이 좋단 말을 풍편에 넌즉 듣고 … !"

김사열 : 1976학번, 경북대학교 탈춤반, (현)경북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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