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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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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황토,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탈춤과 나] 21. 홍경남의 탈춤

1976년 겨울, 공주사대 극회 ‘황토’는 고성오광대 전수관에 있었다. 남해안의 고성도 영하 4도를 밑돌던 그해는 수십 년 만의 추위로 서울과 중부지방은 영하 15도 가까운 혹한이 얼마 동안 계속되던 해였다. 연극을 하던 황토가 민속극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서클(동아리) 해체에서 재등록까지 수난을 겪어야 했던 연극 ‘성냥’(김지하의 ‘금관의 예수’)과 유치진의 ‘소’ 공연을 거치며 우리 민속극과 우리 몸짓을 알아야 한다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1) 극회 ‘황토’라는 이름

극회 ‘황토’의 본래 이름은 극단 ‘상황’이었다. 1974년 두 차례의 공연을 하고서 삶의 연극에 목말라 있던 ‘상황’에 당시 불어교육과 전채린 교수님이 던져준 황석영의 작품 ‘돼지꿈’ 공연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 후 전채린 교수님은 이화여대에서 비밀리에 수백부를 인쇄하여 뿌린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대본을 내밀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에 저항하던 김지하의 투옥으로 서울의 대학가에서는 ‘금관의 예수’ 공연이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앞서 김지하의 재투옥에 항의하며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학내 동아리 연합 농성이 있었다.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공주에서 농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상황’의 황시백, 한상균, 최교진 등을 비롯한 32명의 학생들은 강의실 하나를 잡아 농성을 시작했다. 그날(74. 11. 22) 마침 미국 대통령 방한이 있어서 서울의 대학연합에서도 잠시 시위를 중단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마도 공주 경찰과 대학 당국에서도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농성을 풀고 귀가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을 귀뜸했고 준비없이 시작한 농성은 풀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법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최교진, 황시백 형은 정학 처분을 받았다. ‘상황’의 선배들은 어설픈 농성을 시작했다는 자책에 괴로워했다. 그러던 중에 만난 ‘금관의 예수’는 마음의 불을 지폈다.

대본을 놓고 고민하던 황시백, 한상균, 최교진 형은 장항선 열차를 타고 보령 최교진 형의 집에서 익산 한상균 형의 집을 오가면서 깊이 이야기 나누고 의지를 다져 ‘금관의 예수’를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가슴은 괴로움과 뜨거움으로 들끓었다.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로는 공연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작가를 이동진으로 바꾸어 1975년 봄, ‘성냥’이라는 제목으로 ‘금관의 예수’를 공연했다. 공연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관객들은 연극이 끝나고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일어나 연극의 주제가 ‘금관의 예수’를 출연자들과 함께 불렀다고 한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함께 부르는 그 장면을 형들은 직접 겪었고 후배들은 전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학내에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돌았다. 당시 대학 내 또 다른 동아리 ‘수요문학회’에는 황시백, 최교진 등 ‘상황’ 단원들도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 ‘수요문학회’에서 고은 시인 초청강연회를 열었는데, 최교진 형이 김지하의 시(‘혀 잘린 시인’)를 낭송하러 나가며 당시 대통령 박정희 사진을 향해 ‘개인숭배자가 아니라서 이 사진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할 수 없다.’ 하고서는 분명히 돌아서서 태극기 쪽을 향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것이었다. 당시 군사독재체제에서는 어디서나 태극기 옆에 대통령 사진을 걸어두었던 것이다. 이후 최교진 형은 구속되었다가 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그때부터 끝없는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는 이 일을 ‘수요문학회 사건’으로 불렀다.

그 일로 극단 ‘상황’과 ‘수요문학회’가 강제 해체되면서 동인들은 절망에 빠졌다.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고, 회장이었던 신현욱 형은 소식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만큼 고민과 충격이 컸다. 그해 가을 천승세의 ‘만선’을 무대에 올리고 나서 방황하던 신현욱 형은 군에 징집되었다. 당시는 교련수업을 두 차례 빠지면 군으로 강제 입영되던 시절이었는데 방황하다 교련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1학기 후 마음이 지옥이었던 황시백 형도 군 입영의 길을 선택하였으나 눈이 너무 나빠 방위로 복무하게 되었고. 시련이 닥친 어두운 시절이었다. 고향인 마산에서 방위로 있으면서 황시백 형은 공부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연극에 관한 책을 모았다고 한다.

내가 처음 연극부에 들어갔을 때 연습이 끝나고 모여든 술자리에서 홍경전 형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모두들 착잡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금관의 예수’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눈물을 흘리며 함께하는 합창이 되어갔고 술자리는 밤새 이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신입회원인 나도 그 절실함에 전염되었다. 자세한 내막은 나중에 가서야 알았지만 술자리가 처음이었던 내게 그 장면은 깊은 감동을 주었다. 술에 취해도 사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상황’은 재등록을 기다리며 75년 가을 천승세 작 ‘만선’을 올리고 나서 다음 해인 76년에도 대학 축전에 맞춘 작품을 준비해야 했다. 76년 유치진 작 ‘소’ 공연 이후 대학 학생과에서 연극부를 보는 시각이 달라져 서클 재등록을 허가했다. 76학번인 나는 ‘소’ 공연을 앞두고 정식 동아리가 아니라 지하활동 중인 연극부를 찾게 되었고 난생 처음 연극 공연을 치렀다. 재등록을 앞두고 예전의 ‘상황’을 대신할 새로운 동아리 이름을 고민하여 나온 이름이 바로 ‘황토’였다. 우리는 연습이 끝나면 늘 학교 앞 철순네나 시목동 어부집 같은 곳에서 술을 마시며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자주 읊던 시가 김지하의 ‘황톳길’이었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국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바로 이 시의 ‘황토’로 하자는 생각에 뜻을 모았던 것이다.

앞서 ‘금관의 예수’에는 ‘문둥이가 마치 자신의 삶을 표현하듯 처절하게 춤을 춘다.’고 기록된 장면이 있다. 거기서 문둥이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던 당시 문둥이 역의 한상균 형은 물어물어 고등학고 무용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춤을 배우기도 했으나 그 몸짓이 그다지 믿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또 76년 공연한 유치진 작 ‘소’에는 왜장녀라는 배역이 등장할 때 왜장녀 춤을 한판 추는 장면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난관에 부딪힌 이영래 형은 여러 책을 뒤지다가 ‘공간 사랑’ 잡지에 실린 김백봉의 ‘봉산탈춤 무보’를 보며 연구하여 춤을 연출해냈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어 어설픈 마음을 벗어내지 못하였다. 이 고민은 연극이 끝나고도 이어졌다.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보던 중 ‘성냥’의 그 문둥이춤이 남도의 민속극 오광대 탈춤에 있다는 것과 ‘소’의 왜장녀 춤이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연극판에서는 거의 번역극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돼지꿈’ 이후 극회 ‘황토’는 우리 창작극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우리 고유의 민속극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우리의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우선 책으로 민속극을 공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에서는 이미 대학의 탈춤부흥운동이 한창이었던 때이지만 공주에서는 그제서야 고민이 시작되었으니. 공주는 당시에 다른 지역과 소통하기에는 너무나 외딴 곳이었다.

▲1975년 ‘성냥’(금관의 예수) 팜플렛 ⓒ홍경남
▲고성오광대 입소식 때 찍은 사진. 둘째줄 왼쪽부터 인간문화재 이금수,허현도,박진학,최규칠,조용배,허종복,이윤순,허판세 선생님과 함께 ⓒ홍경남

2) 고성오광대 전수와 공연

이영래 형과 방위를 마친 황시백 형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두현 저 ‘한국 가면극’, 심우성 저 ‘한국의 민속극’ 등의 책과 조동일 교수의 글을 읽고 함께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봉산탈춤을 배우려고 전수소에 연락을 넣어 먼저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미 서울의 대학생들이 거쳐간 봉산탈춤 전수에는 연수비, 탈 대여비, 의상 대여비 등의 명목으로 22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 사대의 한 학기 학비가 4만7천 원 정도였으니 이 금액은 한 학기 등록금의 너댓 배가 된다. 거기다 먹고 자는 비용은 따로 마련해야 할 테니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양주별산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공주사대에는 사립대의 높은 학비를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다. 집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도 아주 적거나 아예 없어서 공주읍내 고등학생들의 과외로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고민 끝에 황시백, 이영래 형은 남도의 탈춤을 돌아보기로 의기투합했고 졸업하여 교사가 되어 있던 한상균 형은 돈을 보탰다. 하루 온종일을 걸려 도착한 고성오광대 전수관에서 인간문화재 최규칠 선생님을 만났고 전시된 탈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대학생들의 발걸음이 없었던 고성오광대는 전수비가 책정돼 있지 않았다. 허술하지만 작은 숙소가 있어서 우리가 밥을 해먹으며 잘 수 있었고, 그저 선생님들께 하루 소주 몇 병, 담배 몇 갑만 드리면 된다는 말을 듣고서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성에서 통영으로, 통영에서 버스비가 모자라 배를 타고 부산으로 들어가 황시백 형의 친구한테서 겨우 차비를 융통하여 마산 황시백 형의 집에 가서야 그나마 여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수영야류와 동래야류를 돌아보고 나서 최종 결정한 것이 고성오광대였다.

76년 겨울, 우리는 대전역에서 열차를 타고 고성으로 향했다. 이영래 형의 하숙집 아주머니께 부탁하여 15일 동안 먹을 김치를 담아 그 짐을 싣고 열차와 도보로, 버스로 바꾸며 하루를 꼬박 걸려 고성에 도착했다. 전수관 입소식 때는 처음으로 대학생 전수를 한다고 고성군수와 경찰서장까지 나왔다. 연수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선생님들께 큰절을 올렸다. 배우려는 사람으로 최대한 존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선생님들도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많은 시간 우리와 함께 나누고 도와주려 애쓰셨다. 특히 허종복 선생님은 늦게까지 회관에 남아 우리의 춤사위를 바로잡아주시며 애정을 쏟았다.

당시 고성에는 말뚝이 허종복 선생님을 비롯하여 조용배, 최규칠, 허판세, 허현도, 이금수, 이윤순 등의 인간문화재들이 계셨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지만 선생님들의 따뜻한 사랑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15일 동안 전수를 받으며 해를 넘겨 1977년을 그곳에서 맞았다. 세밑에는 많은 선생님들이 우리와 함께 계셨고, 우리는 정성껏 세배를 드렸다. 허종복 선생님의 길잡이로 모의 전통혼례를 하며 즐겼고, 날씨 좋은 날 바닷가로 나가 그동안 배운 춤과 악기를 연습하기도 했다. 그 인연으로 황시백, 김경희 형은 결혼식 주례로 허종복 선생님을 모셨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18년 후에도 고성에 갔다. 허종복 선생님이 그때 위암 투병 중인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터미널에서 허종복 선생님께 작별인사를 드리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밖에 서 있던 선생님이 갑자기 버스에 올라오셔서 우리 얼굴을 한참 지켜보다 내려가셨다. 그때 허종복 선생님 눈빛이 어찌나 절절하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그 이듬해에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우리는 마지막 작별인사마저 드리지 못했다.

76년 전수에는 이영래, 권종만, 박기양, 김택윤, 문말순, 김경희, 장상옥, 임정옥, 이은재, 홍경남 말고도 방위 마치고 돌아온 황시백 형, 2월 졸업을 앞두고 있던 홍경전, 김명길, 졸업생 현직 교사 한상균 형도 참여했고, 서울대학교 탈춤반으로 당시 휴학 중이던 김종수 선배도 함께했다. 전수에 들어갈 때 졸업생 선배들은 재학생인 우리를 더 많이 배울 수 있게 하려고 밥 짓기와 설거지, 불 때는 화부를 자청하여 식사가 끝나면 재학생인 우리를 전수관으로 밀어넣고 뒤처리를 도맡았다. 기껏해야 이십대 중반이었는데 형들은 그렇게 헌신하고 있었다. 살림을 맡은 홍경전 형은 이른 아침 고성 시장을 돌며 빠듯한 비용으로 시장을 봐서 아침을 짓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결국 돈이 떨어져버렸다. 고심 끝에 황시백 형은 전채린 교수님께 전화하여 “돈이 떨어졌어요. 돈좀 갖고 오세요.” 에스오에스를 쳤고, 거짓말처럼 전 교수님은 그 먼 고성으로 달려오셨다. 전수를 마치고 돌아갈 때도 차비가 없어서 몇몇 동인들은 고성 전당포에 시계를 맡기고 차비를 마련해야 했다.

공연이 펼쳐지기까지 이영래 형은 공주의 온 마을을 돌며 20여 개의 바가지를 구해다 탈 제작에 들어갔다. 두 달 동안 수업도 들어가지 않은 채 두문불출하고 작업에 몰두했다. 이영래 형이 조각도 같은 도구로 파고 다듬어 모양을 만들고 미술과 후배들이 색칠을 도와 드디어 탈이 완성되었고, 의상은 가정과 교수님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였다. 배역들은 함께 모여 고성에서 배운 춤을 갈고 닦으며 기량을 발전시키려 애썼다. 고성오광대 춤은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각 배역들은 고성에서의 기억을 끌어내며 저마다 춤사위를 다시 연구하고 노력해야 했다. 드디어 77년 5월11일 공연이 다가왔다. 전국의 대학 중에서 ‘고성오광대’를 공연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었다.

공주사대 앞 매산동 언덕에서부터 길놀이를 시작하여 사대까지 풍물을 치고 나아가니 학생들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관객이 되어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공연에 앞서 홍경전 형은 고성까지 가서 허종복, 허현도 선생님을 공주로 모셔왔다. ‘고성오광대’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미술과 이남규 교수님은 사대 학보에 ‘천상의 율동과 조화’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공연에 대한 감상을 올리기도 하셨다. 하지만 공연자체보다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수많은 것을 배웠다. 가슴속에는 변혁의 꿈을 안고 진정한 광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공연이 끝난 뒤 안면도 누동학원 축전에서 서울대 탈춤반의 봉산탈춤과 우리의 고성오광대를 교환공연으로 펼치기도 했다. 우리와 함께 고성 전수에 함께했던 김종수 선배와 연결되어 이루어진 공연이었다. 또 오태석 씨가 이끄는 동랑레퍼터리 극단이 공주에 와서 ‘춘풍의 처’와 우리의 ‘고성오광대’를 교환 형태로 공연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춘풍의 처’를 마당에서 공연한 것은 처음인데 실험이 성공적이라며 극단에서도 만족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77년 겨울에는 황금성, 계순옥, 한상룡 등 76년 전수에 함께하지 못한 동인들까지 다시 고성 전수를 받고 78년 2차 공연도 했다.

고성오광대를 계기로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던 우리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사각의 무대를 허물고 객석으로 나아가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또 탈춤 본래의 저항의식을 새롭게 발전시킬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이어진 김영수 작 ‘혈맥’, 그 다음해 노경식 작 ‘소작의 땅’을 하면서도 고민이 이어졌다. ‘소작의 땅’ 마지막 장면에 소작하던 농토를 빼앗기고 만주로 떠나는 농민들의 퇴장로를 객석으로 설정하여 무대를 내려와 관객 사이를 걸어 퇴장하는 방식을 택한 것도 그런 고민의 결과였다. 대본에는 없지만 곡성댁이 마름에게 겁탈당하는 장면도 희고 긴 천을 들고 느리고 상징적인 춤으로 연출하였다.

내가 졸업한 80년 봄에 후배들은 ‘구리 이순신’ ‘소리의 내력’ ‘산국’ 등의 작품을 공연하였고, 5월 광주에서 있었던 ‘광대’ 극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함께 광주로 달려가 전국에서 모여든 대학생, 문인들과 만나기도 했다. 5.18 이후 공주사대 교문에도 탱크와 기관총이 들어오고 대학은 휴업령이 내려졌다. 엄혹한 시절을 맞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후배들은 뜻을 모아 ‘남원 국악원’ 강도근 선생님께 판소리를 배우러 달려갔다. 거기서 한 달 동안 하루 8시간씩 소리를 연습했다고 한다. 고성오광대로 우리 몸짓을 익히고 남원에서의 소리 공부를 결합하여 80년 겨울, 계순옥, 정수국, 김행곤, 이광현, 양봉석, 홍훈기 등 후배들은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과 김지하의 ‘육혈포 숭배’를 감동적으로 공연하였고. 81년에는 제주 수눌음 극단 창작의 ‘땅풀이’를 횃불을 들고 진짜 마당극으로 올렸다. 그리고 이미 80년 봄, 공주사대에도 ‘한삼’이라는 탈춤반이 만들어져 극회 황토와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졸업생들은 후배들의 공연이 있을 때면 만사를 뒤로 미루고 공주로 모여들어 함께 보며 울고 웃고 술잔을 나눴다.

▲고성오광대 팜플렛 ⓒ홍경남
▲고성오광대 팜플렛 ⓒ홍경남
▲고성오광대 팜플렛 ⓒ홍경남
▲고성오광대 팜플렛 ⓒ홍경남
▲'고성오광대 놀이를 보고' 공주사대학보에 쓴 이남규 교수님 글 ⓒ홍경남

3) 이후 우리들의 삶

졸업 후 우리는 학교에서 수업이나 특별활동을 통해 아이들과 함께 연극이나 탈춤을 준비하여 공연에 올리기도 하였다. 황시백 형은 첫 발령지 속초에서 아이들과 함께 ‘만선’을 공연했고, 한상균 형과 최교진 형도 ‘토막’을 공연했다. 김경희 형은 역사 수업과정에서 동학을 주제로 마당극을 만들어 연극수업으로 발전시켰다. ‘고성오광대’를 아이들에게 가르쳐 공연한 동인들도 있다. 한편, 비민주적인 교육현장을 바꾸기 위해 교사모임을 진행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교육현장의 고민이 커지자 동인들은 87년 전국교사협의회를 거쳐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에 함께했다. 85년 ‘민중교육’지 운동에 함께한 최교진 형은 먼저 구속 해직되었고.

89년 여름 전교조를 지키려는 명동성당 단식 농성에 ‘황토’ 동인들도 함께 단식을 하며 뜨거운 여름을 지켰다. 그리고 황시백 형을 비롯한 몇몇은 전교조 결성에 관련되어 해직되었다. 사정상 현장에 남은 동인들이나 해직 동인들이나 수없이 고민을 토로하며 소식을 주고받았고 94년 해직교사 복직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진정한 교육의 길을 찾고 공부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려 애썼다. 모든 일들이 다 잘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나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애쓴 것만은 사실이다.

퇴직하여 60대 초․중반에서 70대인 지금까지 ‘황토’ 동인들은 꾸준히 만나며 남은 삶을 어찌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늙어가고 있다. 우리 중에는 잘났거나 뛰어난 사람이 없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보아도 흥겹다’는 신경림의 시처럼 우리는 만나기만 해도 살맛이 난다.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동인들 중에 단 한 번도 무대에 서 보지 못하고 조명을 맡거나 무대 뒤에서 온갖 일들을 해결하며 스탭으로만 일한 사람들도 있다. 황시백 형은 늘 새로운 무대 실험에 도전했으며 연극을 왜 하는지 깊이 생각하고 삶의 방향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실천으로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거나 무대에서 얼굴을 보인 적도 없다. 그런 동인들의 모습은 삶의 거울이 되어 우리를 배우고 성장하게 했다.

대학시절부터 ‘황토’는 폐쇄적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 말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면 제법 긴 시간 동안 함께 모여 연극에 집중해야 가능하고, 그러다 보니 동인들 사이에는 누구보다 긴밀한 관계가 이루어진 대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멀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극복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드는 한편, 우리 깜냥에는 이렇게 작고 따뜻한 모임이 필요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은 저마다 판소리와 장구, 그림이나 춤을 배우고 농사를 지으며 전주, 계룡, 공주, 청양, 세종, 대전, 서천, 인천, 서울, 양양, 임실, 양평 등에서 살고 있다. 현직 선출 교육감으로 아직도 현장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언젠가 상황이 좋아져 만나면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그동안 배운 소리와 장구와 춤을 어설프게나마 내보이며 한마당 흥겹게 펼치겠지.

▲고성오광대 공연. 79년 축제 때 자유공연으로 한 것 같으나 정확하지 않음. ⓒ홍경남
▲1978년 노경식 작 ‘소작의 땅’ 한 장면. 고향을 떠나는 농민들이 무대 밑으로 내려와 객석으로 퇴장하려 하고 있다. ⓒ홍경남
▲마름 사주사의 곡성댁 겁탈 장면. 무대에 흙을 깔고 두 사람이 천을 잡고 느린 춤으로 상징적인 장면을 연출함. ⓒ홍경남

4)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들

어려운 상황에서 공주사대 불어교육과 원어민 교수로 강의하던 퐁세(서봉세 질베르토) 신부님은 ‘황토’의 커다란 그늘이 되어주셨다. 신부님 거처(공소)를 빌려주어 연습할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동인들이 공부하기 위해 구입한 책들을 모아 퐁세 신부님 거처는 극단의 도서관이자 연습실이며 작은 공연장이고 아지트가 되었다. 황시백 형을 비롯하여 ‘상황’부터 ‘황토’까지 동인들은 우리의 모자람을 자각하고 공부하자고 마음을 다졌고, 여기저기서 연극 관련 책들을 모았다. 그 책을 둘 곳이 없었는데 신부님이 공소의 책장 하나를 우리에게 빌려주었던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퐁세 신부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새로운 연극이 공연될 때면 누구보다 따뜻한 비평가가 되어주셨다. ‘상황’ 시절부터 퐁세 신부님은 안면도 누동학원을 세우기 위한 물밑작업을 하셨고, 뒤에 황시백, 최교진, 신현욱 형과 한상룡이 일정 기간 누동학원에서 교사로 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상황’ 시절부터 ‘황토’로 재등록을 한 이후까지 공주교도소 위문 공연으로 수인들을 만나는 경험도 퐁세 신부님 인연으로 이루어졌다. 처음 ‘돼지꿈’을 시작으로 ‘만선’과 ‘고성오광대’ ‘봇물은 터졌어라우’까지 몇 차례 교도소 공연을 했다. 수인들의 반응은 뜨거워 공연이 감동적이었다는 한 분의 편지를 받기도 했고, 수인들이 끓인 라면을 함께 나누어 먹은 적도 있다. ‘만선’의 악덕선주 역을 맡은 권종만 형은 수인들한테 엄청난 욕을 먹었다고 했다.

고인이 된 황시백, 홍경전 형은 지금도 생생하여 눈물 나게 그리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이신 전채린 교수님. 선생님은 결코 장황한 말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 마디 기억하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성냥’ 이후로 우리는 몸소 겪고 전해 들으며 결코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에 괴로웠고 간절했고, 꿈을 놓을 수 없었고, 참으로 행복했다. (2021. 9. 10)

홍경남는 공주사범대학 76학번입니다. 탈춤반이 아닌 공주사대 극회 ‘황토’ 동인으로서 76년부터 78년 사이 ‘고성오광대’ 전수를 받고 공연에 1과장 문둥북춤, 4과장 승무의 제자각시, 5과장 제밀주의 마당쇠로 참여했습니다.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89년 전교조 결성 관련하여 해임당했으며, 1994년 복직되어 다시 교사로 있다가 2013년 2월 명예퇴임하여 현재는 양양에서 살고 있습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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