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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함께 걸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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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함께 걸어오다

[탈춤과 나] 19. 형남수의 탈춤

어릴 적부터 에술쪽 기질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남 앞에 나서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노래부르는 거나 춤출 땐 다른 거 같다. 기억엔 없지만 유아시절 영화관에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몰랐고 외국영화배우 이름도 줄줄 다 알았다는 이야기, 초등학교 때 라디오 동요부르기 출연을 위해 토요일마다 방송국을 방문했었던 거나, 배우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춤을 배워서 춤추는 것을 한 번만 보면 거의 따라 했었으니 약간의 선천적 재능이 있었다고 보면 되고, 초등교사였던 막내 이모가 음악 쪽을 권했지만 그때야 부유한 집안이 아니면 꿈도 못 꾸던 시절이였으니... 대학졸업 하기 전 후배가 “고마 광주로 가입시더. 거기 가서 광대의 길로 가입시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확 갔었으면 평생 후회만 하고 살지는 않았지 싶다. 지금에 와서는.

대학 신입생의 첫 일이 동아리 가입, 당시는 써클 선택이었다. 대학 가면 잘 놀고 여자 만나고 등등 별천지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수만 번 들어온 터, 우선 그 당시 대학 테니스동호회 가입을 했다, 테니스 라켓을 가방에 넣고 똥폼을 잡기도 하고, 대학생으로 특별한 거 찾다가 신입생 환영회 때 탈춤을 본 기억으로 민속문화연구반에 가입했다. 그러나 .평생 탈춤과 인연이 될 줄 어이 알았으랴.

78학번 신입생들이 2,30여 명, 76, 77학번 너댓 명과 기존 회원 20여 명 등등이 대강당을 가득 메우고 2주간 강습회를 열었다. 그 당시 계명대 탈춤반은 고성오광대를 두 번 고성 현지에 가서 연수를 받아왔었다. 76학번 8명(경북대 76년 이균옥 참가)이 국문과 故 최정여선생님과 첫 번째(장단, 춤, 아무 것도 모른 상태), 77년 신입생 모집 후 두 번째 연수를 다녀왔었다.

신입생 강습회가 끝날을 때 8명(권용철, 김인수, 송수영, 오정식, 이영희, 진상길, 황재광, 그리고 나이었는데, 그런데 8명 성씨가 다 다르고 개성들이 독특해서 선배들이 참 별난 놈들이 들어왔지 싶다고 했다. 과연 실제로 그랬으니... 그리고 현재까지 그중 2명이 광대로 탈춤을 추고 있다)이 남았다. 난생 처음 굿거리, 덧배기 장단에 신이 났고, 풍물에 더욱더 흥이 났으니 그 2주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거기다가 2학년 선배(9명)들은 최병국 형을 제외하고는 여자형들이었다. 

▲83년 계명대 민주광장에서, 동래학춤 추는 필자 ⓒ형남수

여담이지만, 그 시대 계명대는 여자대학으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었다. 대구엔 효성여자대학이 있었지만 음악대, 미술대 등 예술학과가 많이 알려지다보니 그런 오해가 많았고, 멋쟁이 여학생들이 많았으니 서울소재 대학생들이 방학 때 대구출신 학생들을 앞세워서 미팅하러 많이들 내려왔었다. 탈춤반도 예외는 아니었다. 75, 76, 77학번 여자형들도 학내에서 대단한 여대생들이었다. 패션과 미모, 그리고 학내활동 등등. 그 때 당시 탈춤반 선배들은 학내에서 대단한 활동들을 하던 때였다. 학보사 편집장, 방송반장, 연극반 회장 등 각종 동아리 회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내에선 탈춤반의 위세가 쎈 펀이어서 써클룸은 연극반과 우리 뿐이었다. 2000년 이전까지는 탈춤반은 학교에서 특별대우(?)를 받았다. 금전적으로나 행정적(요주의 동아리)으로. 처음에는 총장(신일희- 공연을 하면 끝까지 물세례를 받아가며 구경하고, 외부인 초청 학내행사엔 꼭 탈춤공연이 들어갔다.)이 너무 탈춤을 좋아해서, 그 다음은 모든 학내외 시국현장에는 탈춤패들이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깊었다. 탈춤반 내 갈등도 많았지만 탈춤에 사랑은 지금도 똑 같았다. 80년대 들어서서는 탈춤반 출신들이 노래패, 풍물패를 만들고 총학, 각 단대 중요 요직활동으로 많은 역할들을 담당했었다.

하여튼 남은 8명은 탈춤과 그와 관련된 일에 매달렸었다. 그 당시 고성오광대는 기본무라는 게 없어서 자체적으로 만든 기본무를 가지고 기본연습을 하고 각 과장별 연습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춤만으로도 좋았고 강습이 끝나고도 매일 연습, 술자리 그리고 또 술자리. 그 당시 맛을 약간 들인 주제에다, 이 시대에 맞게 계명오광대를 만들자. 문둥이 대신 병신춤, 파계승 대신 목사로 바꾸어서, 그러나 이것은 졸업을 할 때까지 하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다.

나의 탈춤 첫 출연은 봄축전 때 정기공연의 고성오광대 파계승 역으로 계명대 노천강당을 꽉 체운 3천여 명 앞에서 정신없이 올렸다. 1학년 중 유일하게 출연을 했다. 노천강당은 공연하기엔 너무 좋은 놀이판이고 얼쑤소리가 엄청나게 반향이 오는 공연장이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연을, 그것도 수천 명 앞에서 했으니, 지금 생각하니 타고난 광대였나?

여름방학이 왔다. 얼마나 기다리던 고성 연수였던가. 5일간의 연수였다. 첫날 입소식(태극기에 대한 경레 등)과 함께, 허종복선생님의 지도로 시작된 기본춤추기(굿거리, 덧배기 장단의 걷기, 뛰기, 어깨춤, 뒤로 걷기, 팔 앞뒤로 들기 등등) 둘째날부터 개인춤 연수. 마지막 날 전체 마무리 연습까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현재 고성기본무는 80년대 들어오면서 고성말뚝이춤을 바탕으로 허종복선생님이 전수를 위해 만드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뒷산 절 밑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오기를 시작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연습 중간에 보면 저녁에 위로 방문차 들른 졸업생들의 늦은 아침까지의 방콕 수면이 얼마나 부럽던지.

▲86년 서울대학로 통일모듬북춤 ⓒ형남수
▲89년 문경통일장승굿 ⓒ형남수

연수기간 동안 이금수선생님은 늘 아침에 “아가들아 여 있다”하시면서 된장, 고추장 등을 가져 오셨고(이금수선생님은멋쟁이 중의 멋쟁이였었고, 배웅할 때마다 버스까지 따라오셔서 유리창 너머로 사탕봉지를 챙겨주셨다). 최칠규선생님이 소리를 가르쳐주시면 허현도선생님은 슬며시 중간에 가로채서 가르쳐주시고, 허판세선생님은 뒷방에서 태평소를 가르쳐 주시면, 말이 없으신 이윤순선생님은 조용히 장구를 잡아주시고, 선생님들의 자상함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당시 조용배선생님은 광주에서 부채그림에 바쁘셔서 하루정도 다녀가셨다.

나는 박갑준선생님으로부터 파계승 승무를 전수받았는데 커다란 엉덩이춤이 지금도 둥실 눈에 선하다. 그 당시 파계승 춤은 조용배선생님 버전과 박갑준선생님 버전이 있어서 둘 다 배웠다. 우리가 정기공연하면 허종복선생님, 이금수선생님, 박갑준선생님이 탈과 기를 가져오셨는데, 나는 박선생님이 오셨을 때와 안오셨을 때 춤을 달리해서 공연했었다. 조용배선생님 버젼이 흥이 좀 더 났었었다.

78년 여름연수의 기억으로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하나는 마지막 날 저녁 허종복선생님의 지휘 아래 마무리 연습으로 두 시간여의 지칠줄 모르는 춤추기가 끝나고 뒷푸리한 것. 장독 가득한 막걸리를 한 되 반짜리 바가지로 마시기, 그걸 다 마시고 입 떨어지자마자 내뿜기(내 혼자 내뿜기를 안했다. 이금수선생님이 “니 괜찮나?”하시며 엄지 척) 그리고 선생님들의 장단에 허종복선생님과 밤 늦도록 춤추었던 것.

또 하나는 허종복선생님이 선생님댁으로 가자고 하셔서 선생님 댁 앞마당에서 선생님의 춤을 본 기억. 지금도 생생하다. 늘 그 춤을 생각하며 지금도 나도 춤을 춘다. 큰 산 하나가 우리 앞에 우뚝 서서 저멀리 더 먼 산을 쳐다보는 활갯짓춤이라니.

그외 1학년 때의 추억으로는 여름방학, 겨울방학 때마다 장구 하나 울러메고 경북 청도 약수폭포 뒤편 움막에서 야학교사로 학습에 참여한 것. 경남민속예술제 때 진해공설운동장에서 본 김덕명선생님의 한량무, 특히 눈춤사위, 잎춤사위, 그리고 곰방대사위, 부채춤 등의 충격, 덕수궁에서의 무형문화재 탈춤 한마당과 공연뒷풀이. 밀양 표충사 계곡 수중 1박 2일과 계곡탈출사건, 연극한다고 대구 기성연극판 기웃기웃한 것, 등등

79년 여름방학 때는 윤 옥선생님과 최창주선생님을 모시고 봉산탈춤을 전수받았다. 그 무더운 여름날, 그 봉산탈춤, 사상좌춤, 팔목중춤, 사당춤, 노장춤, 사자춤, 미얄할미춤을 배우느라 정말 고생했었다. 버스를 타기는 탔는데 다리가 말을 안들어 내릴 수가 없어서 한두 정거장 더 가서 내린 적도 있지만, 그러다가 장단만 울리면 또 펄쩍펄쩍. 전수가 끝나고 계속된 복습 연습, 그리고 그해 가을 봉산탈춤공연. 그리고 여고 축전 지도(이 때서야 봉산탈춤의 맛을 제대로 느꼈다. 그 춤의 맛도 느끼고 춤의 원리도 깨우치게 됐다고 생각함) 등등.

79년 10월 27일 대구, 전국민속경연대회 마지막 날 전국 계엄령, 그 이후부터 군입대까지는 우왕좌왕, 전역 후에도 진로 고민으로 또 우왕좌왕. 집안 형편 상 취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앞서 언급하였지만 79학번 이내섭이가 “형 고마 광주 쪽으로 가서 광대길로 가자”고 했을 때 참 많이도 갈등했었다. 집안을 책임져야 했기에.

졸업을 앞두고 경북대 이균옥형의 함께 하자는 연락을 받고, “이 시대 이 땅의 놀이를 우리가 하자”, 하며, <놀이패 탈> 창립에 참여를 한 것이 지금까지 광대의 길로 계속 걷게 된 계기가 됐다.

직장생활을 하며 <놀이패 탈>을 하기 위해 몇 번의 이직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변곡이 많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완전 전업적으로 광대의 길로 가지 못한 후회만 남을 뿐이다.

1985년 창립 기념 창작극 ‘내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을 시작으로 하여 ‘골프공화국’, ‘美國, 米國, 尾國’(한겨레신문이 처음으로 한글 이외의 문자로 기사를 낸 것은 이것이 처음임), ‘엉겅퀴꽃’, ‘꼬리 뽑힌 호랭이’, ‘이 땅은 니캉내캉’, ‘선새앰요’, ‘노동자 내 청춘아’, ‘통일모듬북춤, ‘ 모듬북춤’ 등에 출연, 안무, 연출하였고, 대구 날뫼북춤, 밀양오북춤, 동래학춤 등의 전수와 가톨릭문화관과 YWCA에서 탈춤강습회를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창립공연에는 경찰과 공무원들의 비호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도심 내 길놀이를 강행하였고, 영남지역 처음(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제외하고)이지 싶은 사물놀이 앉은반, ‘영남농악’(변영호, 윤상순, 정홍기 그리고 나)을 올렸고, 이옥란과 2인 창작춤을 공연했다. 특히 ‘골프공화국’, ‘선새앰요’, ‘노동자 내 청춘아’ 등은 현장공연이, 대부분으로 경찰과 정보과 형사, 공무원 등의 호위와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여러 가지 돌발상황 속에서 공연한 기억이 지금까지 많이 남는다.

한편으로는 공연기획실 ‘판’을 열어 대구지역 문화활성화와 지역교류를 통한 문화발전, 나아가 예술전용극장을 설립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민족통일대동장승굿을 기획· 제작하였고 국내 최초의 산사음악회, 경주불국사 산사음악회, 2000년 밀레니엄 토함산 해맞이축전, 경주문화엑스포 개막전야제 등 많은 행사를 기획· 제작하였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모여서 민극협, 민예총, 예술마당 ‘솔’의 태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를 하게 되었다. 그사이 '놀이패 탈'은 '극단 진달래', '극단 시인'과 통합, 발전적 해체를 하여 '극단 함께 사는 세상'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공연기획 ‘판’의 어려운 살림살이와 정치판(새정치국민회의 대구시당 홍보담당)의 외도로 현역으로 놀이판에 놀 기회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었다.

그나마, 1987년 경산 자인단오제 ‘자인팔광대놀이’를 발굴, 안무, 연출하여 완전 복원시켰고, 매년 자인팔광대놀이 말뚝이와 장구 악사로 공연에 참가하거나 틈틈히 연극무대에 안무와 배우를 하면서 광대의 신명을 놓지 않았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그 당시 풍문으로 합천 초계오광대가 어느 교장선생님이 주도하여 음악교사, 무용교사와 학생들로 복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한번 가본다는 게 못갔었는데, 훗날 내가 운명처럼 합천 밤마리오광대를 하게 될 줄이야 어찌 알았겠나? 자인팔광대와 비슷한 시기에 복원되었으니 뒤에 내가 밤마리에 갔을 때 완전체인 밤마리를 만날 줄 알았는데, 농촌의 실정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는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2008년 광대 교주이신 부산대 채희완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민족미학연구소 ‘몸짓말사전’ 제작(고성오광대 부문을 위한 작업에 참여하면서, 다시 광대의 불씨를 되살려 광대의 길을 다시 나서게 되었다. 영상작업이 끝나고 대구로 떠나는 이별의 마당- 아쉬움에 몇 차례의 차수변경 –에서 7,80년대 광대들의 모임을 아득한 예전의 민극협 합천 해인사 겨울수련회 때 봉산탈춤(채희완), 고성오광대(나) 춤추기, 그리고 밤샘 뒷풀이의 열기로 이어가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광대들과의 연락 끝에 드디어 '창작탈춤패 지기금지'를 창립- 대구, 광주, 청주, 진주, 목포, 부산, 제주의 광대들-하고 부산, 진주에서의 합숙연습을 거쳐 창작탈춤 ‘도끼누이’를 공연하였다. 

예초부터 참여자들은 연중 몇 번의 연습만으로도 공연이 가능한 광대들로 구성이 되어 창립공연 등 한두 해 공연은 가능했지만, 우려한 바대로 각 지역에서의 역할과 기존소속 단체활동 등등이 걸림돌로 작용하여 계속적인 공연이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구성원들이 바뀌고 공연 체제도 바뀌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창탈 지기금지'의 활동은 계속 진행 중에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영원한 뒤풀이를 위해...

▲2019년 민족춤제전 '아재들의 춤수다' 중 '따오기춤' ⓒ형남수
▲2009년 첫 개인춤판 '공을 밟다' 포스터 ⓒ형남수

2009년 내친 김에 평소 하고 싶었던 개인무대를, 드디어, 첫 번째 개인춤판 ‘공을 밟다’를 올렸다. 봉산탈춤 팔목중춤, 창작북춤 ‘신명북춤’, 창작춤 ‘공을 밟다’를 무대에 올렸다. 혼자 준비하면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시작도 전에 악사들과 결렬, 개인춤판이라는 막연한 어색함, 설렘과 두려움만으로 준비된 공연이라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무대에 올렸다는 것 자체로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세 번째 춤판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무척 아쉽다. 올해는, 올해는 하면서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 자리를 빌어 함께 해준 드러머 석경관과 이상만 작곡가에게 감사드린다. 코로나 19가 끝나는 내년엔 두 번째 춤판 한 번 시도를 해볼 작정이다.

2014년 우여곡절 끝에 대구생활을 접고 경남 창녕으로 그냥 귀촌을 했다. 새로운 나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창녕군에서 따오기를 복원한다고 한창 분위기를 뛰우고 있었다. 내 개인 춤으로 내세울 게 없던 차 ‘우포 따오기춤’을 창무하였고, 지금까지 ‘우포 따오기춤’ 연구와 보급에 나서고 있다. 앞으로 더욱 더 노력을 하여 ‘우포 따오기’춤이 널리 알려지고, 그 춤을 보고 배우기 위해 창녕을 찾는 그 날이 올 때를 꿈꾸어 본다. 또한 미롱의 그 미소를 머금는 날을 위해 오늘도 춤을 춘다.

2015년 본디 탈춤을 추던 광대라, 합천 밤마리오광대가 생각나서 현지에 가보니 위에서 말했다시피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다. 앞서 두어번 책임을 맡았았던 분들이 있었지만 답보상태였다. 함께 어울려 재미있게 놀러 갔다가 운명처럼 합천 밤마리오광대 전 과장 복원에 나서게 되었다. 자인팔광대놀이와 마찬가지로 내게 주어진 숙명처럼 탈춤 복원의 길을 또 시작하게 되었다. 몇 해 전에만 왔더라면 쉽게 정치적으로 합천 밤마리오광대를 복원하고 국가무형문화재 등록도 가능했을 텐데 싶어 무척 아쉬웠다. 대구, 성주, 부산에서 함께 할 광대들을 모으고, 기존 회원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 전 과장을 복원시킬 수 있었고 2017년 부끄럽지만 얼떨결에 그것으로 경남민속예술제 개인연기상을 받았다. 현재까지 2,30여 년간 함께하는 분들의 연세가 거의 7,80대라 생전에 그분들에게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연희자였다는 명패라도 달아드리고 싶었은데, 학자들의 합천 밤마리오광대 도서 기술자료 이외엔 탈이나 의상 등 유형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아직도 문화재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웃지못할 현실을 개탄하지만 어쩔거나, 싶다 학자들과 관료들의 손에 달려 있으니...

017년부터는 세월호 추모와 블랙리스트에 맞선 블랙텐트 참여를 계기로 사)한국민족춤협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2020년부터 사)한국민족춤협회 대구지회는 스트릿 댄스를 하는 젊은 춤꾼들과 함께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2021년 대구형무소 독립운동가 176인의 진혼제 ‘묻힌 순국의 터’를 준비 중에 있다.

현재 대구지역 대학가에는 전국적으로도 비슷하게, 계명대 이외엔 전부 탈춤반의 간판을 내린 형편이다. 1990년대부터 풍물놀이와 노래패가 대세를 이루었고, 취업에 유리한 동아리활동쪽으로 대세가 기울어져 탈춤반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 상황으로 어쩔 수 없는 시대 조류라 안타깝다. 이제는 풍물놀이와 노래패도 그다지 관심을 못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여파로 지역 탈춤, 민극협을 비롯한 민예총 소속 단체들 구성원들의 고령화 등 인력수급에 어려움이 있는 줄 알고 있다. '창탈 지기금지'도 그런 염려에서 출발했는데, 지역 무용학과도 폐지되는 실정이라 어쩌겠는가?

예술인 기본수당제도를 시급히 마련하고, 기업들에게 의무적인 예술단체 지원제도 도입과 지자체의 예술단구성 조례를 제도화해야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 싶다. 농담 삼아 하는 “광대만큼 좋은 직업은 없다. 하고 싶은 활동하고, 전국팔도 유람하며 각종 지역 진미 맛보고 음주가무에 동무들 벗삼아 즐겁게 노니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노? 다만 쩐이 없을 뿐...노후와 병마도 까딱없이...”

그래도 광대세상이 좋다!카이! 광대들의 등 따시고 배부른 세상을 위하여!

형남수, 계명대 민속문화연구반 78학번. 현재 경남 창녕에서 우포늪을 지키며 귀농, 덧배기 ‘따오기춤’을 창무하였고, 2009년 대구에서 개인춤발표회를 가졌다.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사단법인 한국민족춤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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