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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경제적 민주주의로의 첩경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⑭기본소득과 신용의 사회화 (4)

소득과 고용의 분리

'소득은 고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고수하는 한,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은 저주가 될 수밖에 없다. 생산성의 향상은 고용의 감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고대로부터의 뿌리 깊은 생각은 일을 해야만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유지시켜 왔다.

그러나 '단지 국민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국민의 권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미 생산의 문제는 해결됐고, 남은 문제는 생산된 재화와 용역을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생산성의 향상은 축복이 될 수 있다. 즉 현대에 들어와 생산의 문제는 이미 해결됐고, 오늘의 문제는 분배인데, 고용이 아니라 돈을 분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더글라스는 실업과 분배의 문제를 고용이 아니라 기본소득과 금융개혁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에 따르면 끝없는 성장을 추구해야만 하는 부채경제를 해소하는 방책은 국가에 의한 통화 발행, 즉 공공통화를 발행하여 기업이나 그밖의 경제주체에 이자 없이 융자해주는 것, 그리고 고용과 소득을 분리하여 소비자의 구매력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후자가 기본소득인데 더글라스는 이를 '국민배당'으로 불렀다.

'생산기술의 진보'라는 인류 공통의 유산

국민배당의 근거도 제시했다. 생산성의 향상은 온 인류가 물려받은 공통의 문화적 유산이므로 모두가 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현대 산업에서 생산의 90%는 도구와 프로세스에 의존하며, 노동자 개인의 능력은 별 관련이 없다. 생산성의 비약적 향상을 가져온 것은 도구와 프로세스의 개선에 의한 것이고 이는 선대의 발명이므로 후대의 모든 국민은 마땅히 그 유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 토지, 노동이라는 전통적 생산요소의 소유자가 이윤, 지대, 임금이라는 명목으로 배당금을 받듯 모든 인류는 생산기술의 진보라는 '문화적 유산', 즉 제4의 생산요소의 배당금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는 공급과 수요, 생산과 소비의 균형이 이뤄지는 순환경제가 될 것이며, 모든 개인은 물질적 결핍에서 벗어나 예술과 창작 활동에 몰두하는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더글라스는 민주주의라면 국민들에게 "산업 시스템의 목적이 고용을 창출하는 것인가, 아니면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인가"에 대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 경우 국민들의 선택은 당연히 "어떻게 효율적으로 생산해서 이를 공정하게 분배할 것인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신용론에서는 소득 보장을 하지 않으면 공황이 온다는 확실한 이론적 논거가 있다. 사회신용론의 궁극적 목적은 은행과 대기업의 조직된 권력과 영향력으로부터 개인을 지키고 개인의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다.

불황의 원인은 부채 기반의 금융 시스템

더글라스는 불황이 고용의 결여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에 의해 발생했다고 봤다. 경제 붕괴의 책임이 금융에 있다고 봄으로써 그는 당대의, 그리고 현재의 가장 강력한 체제에 위협을 가한 셈이다.

그는 정신이상자, 경제적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나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시스템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지, 인간이 시스템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현대의 금융 시스템은 사람에게 봉사하는 하인이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는 독재자라고 비판했다.

오늘날 금융 시스템에서 대부분의 돈은 부채로서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있으며 이 금융 시스템 위에 모든 경제가 구축돼 있다는 더글라스의 통찰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들 사회신용론자들은 현재의 화폐제도가 사실(경제적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반대파는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1929년에 거의 열병처럼 번영하고 있던 것처럼 보이던 세계가 1930년에 그토록 가난해졌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처럼 순식간에 너무도 근본적으로 변하여 모든 조건이 역전되고 세계가 비참할 만큼 궁핍해진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1929년 10월의 특정일과 그 후 불과 수개월 사이에 세계가 궁핍한 세계로 변했다고 생각하는 게 이치에 맞는 일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다."(더글라스 <현실에의 접근>, <녹색평론> 113호 30쪽)

영국의 독립저술가 마이클 로우보섬은 기본소득이 가져올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본소득은 경제구조와 고용주와의 관계에서 노동자들의 지위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강제된 노동을 줄여줄 것이며 사람들이 고용된 노동자, 즉 생산자가 아닐지라도 소비자로서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리하여 기본소득은, 진보의 결과가 실업자들에게 소득의 상실이라는 재앙을 안겨주는 게 아니라 그 혜택을 나눌 수 있게 하는 하나의 피드백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종래의 임금 의존 방식과 비교할 때 완전히 새로운 힘의 균형, 즉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게 될 것이다. 토지로부터 유리돼 스스로 식량을 기를 기회로부터 단절됨으로써 경제적 독립성을 잃어버린, 오로지 임금에만 의존하여 살 수밖에 없는 생존 조건을 기본소득은 완화, 개선해 준다. 기본소득은 수 세기 동안 광범위한 빈곤을 유발하고 의금의존계급에 대한 착취를 허용해 왔던 사회적 경제적 불균형에 대응하는 방책이며 민주적 경제발전, 임금 노예의 종식, 경제적 독립성의 회복을 가져온다. 이것이야말로 경제적 민주주의이다.(<녹색평론> 113호, '더글라스의 사회신용론')

▲ 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프레시안

억압된 대안

사람들이 국민배당에 반대하는 이유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를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에 대해 더글라스는 기본소득으로만 분배할 수 있는 무엇, 즉 현행 금융 시스템으로는 분배가 불가능한 재화와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게다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를 주는 것"은 신용 창조 외에 '아무런 일도' 한 바 없이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은행가들의 속임수에 비하여 훨씬 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글라스에 따르면 은행가들이 기본소득에 반대하고 금융 시스템의 변화를 거부하는 근본적 이유는 "현행 시스템의 목적은 개인이 언제나 경제적 의존성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금융 시스템의 효과적 정책은 의존과 통제의 철학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중을 개돼지로 남겨놓는 것이다. 금융 시스템을 개혁하지 않음으로써 정부는 의존적 대중에 대한 통제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막강한 정치권력을 누릴 수 있다.

"지금까지 목표가 되어온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리를 꼼짝없이 지키고 앉아있어야 하는 피라미드적인 노예 시스템이다. (중략) 그 정책은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우리들에게 부채를 안겨줌으로써 우리들을 영구적으로 빚쟁이의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다. 돈을 구해 빚을 청산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빚쟁이들은 빚을 갚는 데 필요한 돈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권력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더글라스 <과세에 의한 독재>, <녹색평론> 113호 38~39쪽)

이러한 더글라스의 주장에 대해 대공황 당시에는 영국의 일부 은행가들도 적극 동조했다. 예컨대 전 잉글랜드은행 총재 빈센트 비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행의 화폐제도는 우리의 현대 문명에 적합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해 갈수록 위협이 되고 있다. (중략) 우리의 실업과 불확실성의 근본 원인은 새로운 기계설비를 갖춘 '생산적 기업'이 아니라 낡은 메커니즘으로 움직이고 있는 '금융'에 있다. '금융'은 현대의 필요에 적응하는 데 실패했다."

또 다른 잉글랜드은행 총재 조시아 스탬프 경도 같은 의견이었다.

"현재의 은행 제도는 무에서 돈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은 일찍이 발명된 그 어떤 것보다도 놀라운 천재적인 기술이다. 은행업은 부정직한 마음속에서 구상되었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 은행가들은 지구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에게서 지구를 빼앗고, 그 대신 돈을 만들어내는 힘을 그대로 맡겨놓는다면, 잠깐 사이에 그들은 지구를 도로 차지할 만큼 충분한 돈을 만들어낼 것이다. .. 그들에게서 돈을 만들어낼 권력을 박탈해야 한다. 그러면 훨씬 더 살기 좋고 행복한 세계가 될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노예로 살기를 원한다면 은행가들이 계속해서 돈을 만들어내고, 신용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라."

1930년대 사회신용은 세계 전역에 걸쳐 중요한 정치적 운동이 되었다. 더글라스는 당대에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으며 세계무대에서 활약한 중요 인물이었다. 그는 세계 전역에 추종자를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 수없이 열렸던 공식적 조사회의에 증거를 제출하였다.

20세기의 가장 명석하고 집요한 경제·금융제도 비판자였던 더글라스의 이름이 현대 경제학사 교과서에는 빠져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고 우려할 만한 일이다. 더글라스 자신의 논평을 상기시켜 주는 사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융이 세력을 행사하는 것은…보통의 개인들이 금융의 본질에 대해 무의식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의 독립저술가 세키 히로노는 적자재정이라는 공황 해결책을 제시해 자본주의의 구세주로 추앙받는 케인스의 급진적이고 흥미로운 면, 예컨대 유효수요이론 등은 거의 더글라스의 표절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케인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문명의 미래는 더글라스냐, 마르크스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르크스는 싫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더글라스는 현대의 빈곤은 금융 시스템에 기인하고 있으며 금융 시스템에는 근본적 결함이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의 핵심적 결함은 임금 의존 인구의 피착취적 지위, 그리고 이에 따른 사기업 또는 정부기관을 통한 자본가나 사회주의 엘리트의 지배력이고, 이에 대한 대안은 기본소득과 금융권력의 탈중심화 및 균형임을 통찰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글라스의 사회신용론은 2차 대전 이후 완전히 잊혔고, 이런 면에서 사회신용론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억압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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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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