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춤과 나의 인연은 1972년에 시작되었다. 50여 년이 지났으니 대부분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느 대목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해 가을 김은혜(사회사업과 3학년)가 찾아와 “좋은 후배들이 탈춤동아리를 만들려고 하는데 언니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 했던 순간이 눈에 그리듯 선명하다. 그녀는 ‘새 얼’이라는 동아리의 회장으로 서로 알고 있던 터였다. 1973년 11월28일에는 대강당 채플 후 기습적으로 “8천 이화학우들에게”라는 시국선언서를 낭독하고 당시 총학생회 회장 김선욱 등과 함께 철야기도회를 견인했던 인물이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김선욱은 훗날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다.
그 때 나는 학부를 졸업하고 이대 학보사에서 상임기자로 일하며 대학원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상임기자가 하는 일은 후배 학생기자들을 도와 기획회의에 참여하면서 학생들의 취재와 기사작성을 도와주고 편집, 제작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신경을 쓰고 있었다. 대학원에 가서는 구비문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가면극은 구비문학의 한 갈래여서 공연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낯 선 분야는 아니었다. 오히려 현장을 경험할 좋은 기회였고 기꺼이 응했다. 이미 졸업생 신분이어서 동아리 회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무대에 올라 춤 한번 제대로 추지 못했는데 큰언니가 되어 탈춤과의 기묘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의 탈춤동아리 ‘민속극연구회’의 출발은 문리대학 연극부가 그 계기가 되었다. 문리대 연극부의 공연은 인기가 많았다. 대개 희랍비극이나 서양 고전들을 공연했는데, 천승세의 ‘만선’ 등 남성 주인공의 연극도 올려 호평을 받곤 했다. 공연 때는 장안의 남녀 대학생들이 관객으로 몰려오곤 했었다. 오히려 지금보다 캠퍼스의 문호가 개방적이었고 공연 후의 분위기도 축제 분위기였다. 그 연극부에서 실험적으로 우리 탈춤을 무대에 올린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당시 대학의 처지는 요즘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야만적이었다. 1970년 청계천에서 전태일 열사가 분신해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1971년 10월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박정권은 위수령을 발동했다. 서울 시내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이 진주하고 무기한 휴업령이 내려졌다. 1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는 해산되면서 학교에는 또다시 휴업령이 내려졌다. 유신체제가 본격화되던 시절이었다. 텅 빈 교정에 낙엽은 지천인데 공포스럽고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 반복되었다.
대학에서 전통문화와 민초들의 저항정신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된 것도 이때였다. 사회적 연대의식이 강화되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화대학 안에서는 민중신학을 소개하신 현영학교수님, 여성학 강의를 최초로 개설하신 이효재교수님, 우리말과 글의 정신을 강조하신 이남덕교수님의 영향력도 컸다. 의논의 대상이 되어 주셨고 누구도 나서기 어려운 상황에서 선뜻 동아리의 지도교수를 맡아 학생들을 감싸주셨다. 이런 풍토 속에서 탈춤을 배우던 연극부장 박미해를 비롯해 1년 후배, 박현경, 김은주, 백귀순, 정영숙, 김남수, 김기연, 안경례, 전연숙 등이 중심이 돼 1973년 봉산탈춤을 창립공연으로 올렸다. 홍성원, 강정례, 백미서, 김연숙, 주은숙, 박향숙 등이 뒤를 이었고, 일본에서 유학 온 재일교포 변유리강도 열성이었다. 동아리 이름을 정할 때 후배들과 진지하게 논의했었다. 탈춤을 넣고 싶었지만 인형극도 있고 민속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굿의 연행에도 연극적 요소가 강해 포괄적인 민속극을 택했다.
이후에도 봉산탈춤과 양주별산대놀이는 자주 공연되었는데 이대 탈 반은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를 잘 춘다는 소리를 들었다. 경기지역의 탈춤은 궁중무의 영향이 강하고 형식미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여성적이고 단아한 춤사위가 잘 맞았던 듯하다. 그에 비하면 봉산탈춤은 춤사위가 크고 격렬한 편이다. 봉산 탈춤의 취발이 박현경, 말뚝이 백귀순, 미얄할미 김남수의 열연도 일품이었다. 양주별산대놀이를 공부하려고 양주 유양리에 가서 특별 강습을 받으며 탈의 제작과정을 예능보유자이신 선생님들께 배우기도 했다. 여름방학에 초등학교 빈 교실에서 합숙을 하며 공부했는데 책상을 두드리며 창을 연습하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공연이 임박하면 연습은 주로 이화여대 학관 강의실에서 책상을 뒤로 밀어놓고 장구 장단에 맞춰 했다. 1971년에 서울대 민속가면극 연구회가 설립되었으므로 그들이 당연히 훌륭한 선배이자 안내자가 돼 주었다. 특히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회장 채희완(현 부산대 명예교수)은 우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세심하게 알려 주었다. 서울대와 이대의 인연은 돈독한 편이었다. 게다가 청춘 남녀들이 아닌가! 나중에는 체육관에서 예능 보유자이신 선생님들을 초빙해 밤이 늦도록 배웠다. 강령탈춤의 양소운 선생님은 대 여섯 살부터 어른들을 따라 황해도 일대를 떠돌며 춤과 노래를 익혔다고 하셨다. 설움도 많으셨을 텐데 소박하시면서도 늘 당당하셨고 세월이 좋아져 대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고 무던히 기뻐하셨다. 칼칼한 목소리로 우리들의 어설픈 춤사위를 바로잡아 주시고, 힘 있는 추임새로 자극하셨다. 당시에는 통행금지시간이 있어 늦어도 10시에는 연습을 마치고 버스 막차를 놓칠까 조바심하며 정거장으로 내달리곤 했다. 1945년부터 계속된 야간 통행금지는 1982년 1월에 해제되었다.
학문적으로는 가면극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이두현 선생님, 학회에 등장 자체만으로도 후학들을 긴장시킨 조동일 선생님, 한국 무속과 무가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서대석 선생님의 연구가 지표가 돼 주었다. 특히 방대한 탈춤자료를 사진과 함께 모아 놓으신 이두현 선생님의 <한국가면극>은 누구나 한번은 꼭 봐야 할 필독서였다.
방학을 이용해 무궁화열차를 타고 현장답사에도 나섰다. 안동하회별신굿을 공부하러 하회마을에 가고 부산지역의 수영야류와 고성 오광대를 보러 남녘에도 갔다.
하회마을에서는 고택의 대청마루에 올라, 마을의 가장 윗 어른께 줄지어 큰 절하는 것으로 여름 수련회를 시작했다. 삼복더위에 너무 더워 우물가에 가서 세수하고 발을 씻다가 다 큰 남녀가 어울려 발을 씻는다고 호통을 맞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하회별신굿은 고려 중엽에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나무 탈이 제작설화와 함께 유명한데, 1964년 국보 121호로 지정되어 서울의 국립박물관이 보존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정작 하회마을에는 그 탈이 없었다. 탈들을 하회마을로 되찾아 오기를 소망한다는 것이었다. 지역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회마을 답사는 우물가의 해프닝과 전승 탈의 부재로 아쉬움 속에 막을 내렸지만 마을굿을 지내던 현장의 신성함을 느낀 것으로 충분했다. 마을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줄기와 땡볕의 숲속에 숨어 있듯 오롯한 성황당은 설명하기 힘든 기운을 품고 있었다.
우리의 관심사는 나날이 넓어지고 열정은 솟구쳐 탈춤, 판소리, 민요, 살풀이 등 전통춤과 국악공연 전반에 이르기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무리지어 공연현장으로 달려갔다. 그 사이 연세대와 서강대를 비롯해 많은 대학에 탈춤동아리가 생겨 대학 탈춤 동아리의 외연은 더 넓어졌다. 탈춤을 매개로 젊은 남녀들이 만나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힘이 넘치고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디서든 함께였고 반가웠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어스름 저녁에 시작되는 학교 공연에서는 남학생들이 횃불을 밝혀주고, 뒷일을 서로 도왔다. 공연이 끝나면 주로 이대 앞의 상호도 없는 동태탕 백반 집에서 뒷풀이를 하곤 했는데, 열띤 평가는 당연한 것이었다. 돈이 없으니 “두부 한 모, 콩나물 한 접시 추가요!” 하는 식으로 양을 늘려 먹곤 했다, 그래도 식당 인심은 후했고 언제나 친절하셨다. 잔치 집이 따로 없었다.
이 거리는 나중에 중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옷가게로 변했다. 이대 앞의 숙녀 다방, 미뇽다방, 빅토리아 다방도 잊을 수 없는 공간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우리의 담론이 익어 가던 숙성창고였다. 연습 도중 허기진 배는 이대 후문의 딸기골 분식집에서 해결했는데 요즘 말로 우동이 시그니처 메뉴로 한 그릇에 이백 원이었다. 월급이 있었던 나는 후배들에게 종종 밥값을 내줄 처지가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게 참 좋았다. 그 모든 집은 이제 없어졌다. 고급화된 입맛과 비싸진 임대료 탓도 있겠지만 근래 들어 많은 대학들이 학교 앞의 상권을 죄다 학교 안으로 끌어들여 주변 지역과의 상생은 옛날만 영 못하게 되어 버렸다.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동창들을 편안하게 만날 수 있었던 청춘의 공간들이 싹 증발해버렸다.
빼놓을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가 망원동에서의 현장공연이다. 1970년대 초반의 마포 서강 일대에는 한강을 끼고 채마밭이 많았는데, 해마다 장마 끝에 농지가 침수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1973년 여름으로 기억되는데 그 해에도 수해가 심해 망원동 일대까지 침수되고 주민들의 피해가 컸다. 졸지에 이재민이 된 지역민들과 함께 하자며, 심지어 민중의 예술을 민중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마당극 현장공연을 시도했다. 그러나 막상 길놀이가 시작되고 꽹과리를 아무리 쳐도 마을 사람들의 신명은 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잘 내다보지도 않았는데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기도 했다. 누가 그랬던가? 고통받는 이웃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과 온전히 함께 하는 것이라고... 생존이 절박한 삶의 현장에 찾아온 대학생들은 그 뜻이 아무리 고귀한들 이방인이자 불청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순간이었다. 그 당시에는 혼란스럽고 납득되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 농경문화 속에서 전승된 탈춤의 양식이 도시빈민의 처지에 내몰린 민중들과는 접점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일일이 기억에 없는데 후진국사회연구회 회원들까지 함께 해 현장에서 열띤 토론을 했던 것 같다. 후진국사회연구회는 당시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님의 지도아래 모여 공부했던 학생들의 단체였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유신 반대 시위로 사형선고까지 받는 옥고를 치뤘다(물론 당시에는 이들이 후진국사회연구회 회원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 어수선한 난민촌을 비추던 흐릿한 달빛이 영화 속의 엔딩 장면처럼 뇌리에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민속극회 동아리 회원들은 졸업을 하고 취업과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우리의 선배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하든가 취직을 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는 분위기였다. 이제 더 이상 결혼과 취업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병립의 문제였다. 가장 큰 난관은 육아였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우리는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치열한 토론과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도 결혼과 출산, 일의 병행은 육아의 진실로 귀결된다. 오늘날처럼 결혼도 출산도 개인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흔한 때가 아니었다. 공동 탁아가 대안이라고 결론이 났다.
당시 이대 앞에는 맞춤 양장점이 즐비했는데(기성복의 개념이 도입되기 전이다) 서점은 이화서림 하나뿐이었다. 남학생들은 단 하나의 책방을 빌미삼아 “공부 안하는 이대생들!”이라고 공격하곤 했다. 그런데 다락방이라는 서점이 하나 더 생겨 우리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이 책방은 이혜경 내외가 열었다. 이혜경은 문리대 연극부 출신으로 이대 민속극회 초대 회장 박현경과 절친한 사이이고, 탈춤공연에 출연도 하였다. 그는 후에 여성영화제를 만들어 오래 이끌었다. 신혼 살림집이 다락방 서점 근처에 있었는데 공동탁아를 자신의 집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마루가 넓었다. 우리는 아주 소규모로 실험에 들어갔다. 오늘날 어린이집 같은 개념이었는데 의욕과 달리 실행하자마자 벽에 부딪쳤다. 실제로 거주지가 다 흩어져 있고, 이동수단도 마땅치 않아(당시에는 자가용이나 지하철이 없던 시절이다. 참고로 서울 지하철 2호선은 1982년 겨울에 개통되었다) 탁아의 공간에 가기까지가 아이도 어른도 쉽지 않았다. 이를테면 화곡동에 살고 있는 회원이 갓난아기를 이대 입구 어린이 집에 맡기고 출근은 연신내로 하는 식이었다. 이동 수단은 오로지 버스뿐이었고 아이에게 딸린 짐은 그때나 지금이나 왜 그리 많은지. 퇴근길에 파김치가 되어 아이를 찾아 다음 날 반복하는 건 사실상 무리였다.
우리는 여성의 사회활동을 위해서는 지역공동체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보육이 끝나면 자녀들의 교육이 시작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우리는 지역에서 어린이집을 열기로 했다. 이미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마당’이란 모임을 꾸리고 있었는데 신협 형태의 작은 경제공동체를 겸한 모임이었다. 기저귀 가방을 둘러메고 매월 집집마다 돌아가며 월례모임도 이어가고 있었다. 친목단체 ‘한마당’은 ‘한마당교육문화연구회’로 발전되었고 회지도 격월로 발행했다. 젖먹이 어린아이를 어느 정도 키우고 난 1988년의 일이다. 하나의 마당도 되고 큰 마당도 되는 중의적 의미를 띠는 이 ‘한마당’은 보다 확대되어 이화여대 졸업생이 아니어도 취지에 찬성하는 이들은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목동에 25평형 아파트 1층을 전세 내어 유아원을 겸한 한마당 놀이방을 개설하고 어린이 민속교육을 병행하였다. 그 때 박미해의 부군이 전세 보증금 500만원을 선뜻 빌려 주었다. 그 당시로는 상당히 큰 돈이었는데 뭘 믿고 빌려주셨는지 아무튼 든든한 우군이 있어 감사했다.
우리의 실적이라면 아이들을 업고 안고 이미 어린이 민속학교를 5회째 계속해 왔다는 점이다. 단기적으로는 어린이 풍물교실도 열고 있었다. 목동 아파트는 신축이 끝난 대단지였고 심지어 미분양도 있던 시절이다. 요즘처럼 서울 부동산이 난리인 세상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가 바로 이것일 게다. 어린이 민속학교는 가평, 의정부 등지의 수련원에서 열렸는데 사물놀이를 비롯한 민속놀이, 우리음식 만들기, 인형극 놀이, 등산, 물놀이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어린이들은 연날리기, 강강술래, 문지기 놀이를 좋아하고 풍물에 흥미를 보였다. 회원 가운데는 현역 교사도 있고 유아교육을 전공한 회원도 있기에 가능했다. 연구회 회장은 내가, 민속학교 교장은 연극배우 김정자가 맡았는데 정말 영혼을 갈아 넣어 최선을 다했다. 연령별로 나뉜 소그룹에는 회원들이 당번을 짜서 들어가 진행을 도왔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자원봉사였고, 세월이 흘러가며 회원들의 삶의 터전도 지방으로, 외국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또 각자 더 전문적인 분야로 자신의 일터를 찾아가면서 이 역시 아주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각자의 생계가 절실해진 탓이 컸다. 문화운동과 생활을 일치시키기 어려운 한계상황에 온 것이다. 아쉬움 속에 보증금을 되찾아 기부했던 분에게 이자 한 푼 없이 원금을 되돌려드리고 꿈의 날개를 접었다. 다행히 경제적 손실은 없었고, 지역에서도 진정성을 인정받았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회원들은 더 발전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했다. 아파트 값이 좀 올라 무리해서라도 집을 사보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깔끔히 마무리하는 쪽을 택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고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이후 승용차의 대중화와 개인 컴퓨터의 보급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생활양식이 크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수단의 변화는 우리의 일상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걸을 때 가능한 우연적이고 자연스런 만남이 사라졌다. 새 것에 대한 열망과 편리함의 단맛은 대학가에 더 빨리 퍼졌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점차 꽹과리 소리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캠퍼스에 진동하던 풍물소리가 잦아들면서 민속극연구회도 민요연구회에도 회원이 줄고 있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는 2000년대에 접어들어 더 가속화되었다.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꽤 오래 도전을 거듭했다.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있었는데 전통문화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무분별한 서양문화의 유입을 경계하고 민족적인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무엇보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하려고 했다. 세대와 계층과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세상을 꿈꿨고, 나아가 그런 세상을 미래에 실현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것들이 펼쳐지는 공간을 탈춤마당이라는 큰 마당에서 찾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신명이 나기 때문이었고 그 신명을 맛봤다. 일시적이나마 신분의 벽을 허물고, 남녀가 자유롭고 비록 구경꾼이라 하더라도 짧은 추임새로 춤판에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는 순간을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마당에서는 평등했다. 공격에도 여유와 관용, 웃음이 있었다. 판이 끝나면 떡과 김치, 막걸리 한 잔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마을 전체가 축제로 변하는 마당극의 마법에 홀렸던 것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노년의 한 가운데에 서 있게 되었다. 몇 해 전에는 봉산탈춤의 스승 김기수 선생님의 빈소에서, 최근에는 우리시대의 춤꾼 이애주 형(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다. 사실 내 추억 속의 그녀는 영원히 늙지 않는 미얄할미다)의 빈소에서 말없이 슬픔을 나누는 것으로 인간 인연을 확인했다. 우리에게 음으로 양으로 가르침을 주시던 스승님들도 거의 떠나시고 탈춤 판에서 만났던 벗들도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와병 중에 있다는 소식도 종종 듣는다. 어느 새 이별이 낯설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언젠가 볼 일이 있어 모교인 이화여대에 가니 학생들은 저마다 혼자 앉아 있었다. 우리 때는 수업이 끝나면 화장실도 함께 갔는데 말이다. 나는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서쪽에 살고 있는 나는 시내에 나가려면 보통 연세대 앞을 지나게 되는데 신촌 쪽으로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학생들을 차창 밖으로 만나게 된다.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늘 웃고 있었고, 그 모습이 그렇게 유쾌하고 신선할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그들이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때도 충격을 받았다. 무엇이 청춘들을 변하게 하는지 모른다 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다. 그러니 더 안타깝다. 요즘에는 ‘우리 때는...’ 이라는 관용구 자체가 누구에게나 금기어다. 그 누구도 꼰대라는 낙인을 가장 싫어하는 듯하다. 오죽하면 역꼰대란 말이 생겨났을까?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런 낙인을 스스로 찍고 있는 셈이다.
젊은이들은 열린 공간에서도 각기 혼자 있고, 늙은이들도 저마다 혼자 있는 시절이다. 무엇보다 그것에 익숙해져야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가족들과의 만남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니 더욱 그렇다. 난리와 역병 속에서도 잃어버린 영감을 찾아 방방곡곡, 가랑잎 새새 가족을 찾아 나서고 마침내 엉덩이를 마주하며 흥겹게 춤추는 골계와 해학의 춤판이 그리워진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풍물소리에 팔도에서 몰려오는 목중들처럼 걸지게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젊은 날의 패기와 좌절로 점철된 이런 이야기를 왜 하고 있을까 망설였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50년 우정 채희완의 청을 마다하지 못한 이유가 가장 크다. 우리는 농 삼아 그를 ‘교주’라고 부르곤 했는데, 정말 “한결같다”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 번도 탈춤 판을 떠나지 않았던 그와, 그런 그를 긴 세월 뒷바라지 해온 동반자이자 여장부인 후배 홍성원, 그리고 이화여대 민속극연구회의 후배들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결국 ‘사람이 남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곱씹는다.
김순진 :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전 한마당 교육문화 연구회 대표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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