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농촌 행을 결심하고 이곳 전라북도 순창에 내려온 것이 1983년 6월이었으니 같은 주소지에서 38년의 세월을 산 셈이다. 최근 5~6년 사이 급격히 늘고 있는 귀농, 귀촌의 범주가 아니고, ‘이촌향도’ 시절의 역주행이니 그냥 ‘이도향촌’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농촌에 내려올 결심을 하게 만든 계기는 대학 1,2학년 시절 여름과 겨울, 네 차례에 걸친 우리 탈반의 농촌활동이었다. 40년여 전의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고 주관적인 파편의 기억으로만 기록될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1978년, 왜 탈반이 농촌활동을 가는 건지 별 고민도 없이, 그저 들뜬 마음으로 선배들 뒤를 따라나섰던 1학년 여름의 농촌활동은 나의 이후 운명을 송두리째 결정지은 일대 사건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수동면 내방리, 그때 ‘물골안’이라 불렀던 마을, 지금은 여름휴가철이면 북새를 이루는 서울 근교의 유원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8년도 그때는 경기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이었다. 20여 호 되는 마을엔 경운기가 한 대밖에 없었고 논과 밭들이 좁은 골짜기에 드문드문 이어져 있던 소박한 농촌마을이었다.
당시 농활의 분반활동 내용은 이러했다. 청장년반에서는 저곡가문제, 도농 간의 격차, 농산물 유통 문제, 을류 농지세의 문제점 등 농업, 농촌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학습과 토론을 하였다. 부녀반에서는 진주난봉가를 배우고 그 가사를 주제로 촌극을 꾸미기도 했으며, 겨울엔 한글, 산수, 한문 등 야학을 열기도 했다. 아이들 교육문제, 과중한 노동 혹은 산후조리 부족으로 인한 농촌여성의 건강문제 등 부녀반 프로그램에 대한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것은, 내가 2학년 때 부녀반을 맡았었기도 하고 이후 농촌에 살며 여성농민운동 단체 활동을 오랫동안 했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또 한 갈래의 활동은 마을의 상쇠할아버지가 마을 젊은이들에게 풍물을 가르치도록 지원하는 일이었다. 우리도 그 가락을 채록하여 함께 연습했는데 그것은 나름대로 성과가 있어서 새마을운동 때 팔아치웠던 풍물을 다시 구입하고, 농기도 만들고, 마을 사람들로 풍물패를 꾸려 대동놀이도 했다. 여름, 겨울 방학 기간 중의 농활뿐만 아니라 정월대보름 때도 내려가 마을 농민들과 대동굿을 함께 기획하고, 음식 장만도 하며, 굿도 치고 탈춤공연도 했다. 당시 그렇게 규모 있는 내용의 활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고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 탈반에서 세웠던 농활의 의미는 단순한 계몽이나 봉사가 아닌 사라져가는 농촌의 전통문화, 공동체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토록 지원하는 것과 문화행위를 통해 농민들 스스로 주인의식을 일깨워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었다.
모름지기 탈반의 존재 이유란 문화운동의 일꾼으로서 현실모순을 혁파하고 사회의 바람직한 변화,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한 대의를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 탈반의 농촌활동이었다. 지금 내가 우리 마을에 살면서 십 수 년 간 농촌활동 학생들을 받아보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준비한 농활이 학생농활 사상 또 있을까 싶다.
3회 차 여름농활 때는 머슴농활(한 사람이 한 농가에 들어가 숙식을 함께 하며 그 집의 농사일을 돕는 방식)로, 4회 차 겨울에는 한 달을 상주하며 아이들과 주민 대상 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농활로 꾸려졌다. 1979년 말, 학생농활에 대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과 금지조치가 내려질 때까지 우리 탈반은 여름, 겨울 방학을 온통 농활을 위해 바치다시피 하였다.
이런 농활 과정 중에 자연스레 사회모순에 대한 의식변화가 뒤따랐겠지만 그때 나의 삶의 방향을 결정케 한,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그 동네 최00이라는 한 청년과의 대화였다. 대화라기보다는 우리를 향한 질책이나 다름없었다. “너희의 농활은 결국 대학시절 추억거리에 불과하며, 너희가 진정 농촌과 농민을 걱정한다면 너희 중 단 한 명이라도 농촌에 내려와 살 수 있겠는가? 아니 농촌학교 선생으로 와서 봉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한 말이었으나 그때는 오로지 나만을 향한 준엄한 꾸짖음처럼 들렸었다.
다른 하나는 마을 근처 유아원의 선생으로 있던 한 처녀와의 만남이었다. 전주가 고향이며 농촌에 뜻이 있어서 이곳에 왔다고 했다. 많은 얘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내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무척 어른스러워 보이던 그녀 앞에서 편안한 미래가 보장될 수도 있는 나는 왠지 부끄럽기만 했었다.
이 두 가지 계기 외에 내가 농촌에 살 결심을 굳힐 수 있게 한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또 다른 데에도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매우 심란하고 부담스러운 책임감으로 수행한 농활기간일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나는 농업노동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동료들과 조금 다른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 달 상주하던 겨울농활 때, 숙소이던 구들 얇은 소죽방은 새벽 2시만 되면 어김없이 냉골이 되었다. 등짝이 어찌나 시려운지 더 이상 누워있을 수조차 없을 만큼 이 갈리게 춥던 기억만 제외하면, 불 때서 밥해먹고 싸리로 엮은 엉성한 잿간에서 선선한 밤공기를 맞으며 별빛 아래 볼일 보는 일이 얼마나 신기하고 편안하던지! 하여간 체질적으로 농촌 생활이 그리 많이 불편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농촌에 겁 없이 내려와 빨리 적응하고 뿌리 내리게 만들었다고도 생각된다.
나는 이곳 순창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전국 여성농민운동단체 임원 역할을 하면서 빈번한 출장과 회의로 일주일에 절반 이상 집을 비우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농사를 쉬어본 적 없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탈반에서 배웠던 어설픈 솜씨로 여성농민 풍물강습을 하기도 하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농민들만으로 구성된 민간풍물패 ‘한소리’가 만들어졌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고 양순용 선생(당시 좌도풍물 인간문화재)이 조성한 전수관에서 일주일씩 숙식을 하며 선생에게 직접 풍물을 익히기도 했다. 경연대회 위주로 날로 화려해지는 가락들 속에서 우리 한소리패의 전통가락 계승에 대한 고집과 열정을 보면서 불현듯 궁금해지곤 했었다. ‘물골안’ 마을엔 우리가 농활 갔을 때 마련했던 농기와 풍물이 지금도 남아 덩기 덩기 울리고 있을까?
또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내가 졸업 무렵 농촌 행을 얘기했을 때 주변의 동료들은 모두들 걱정했었다. 왜 하필 농민운동이냐? 어차피 농업은 사양산업이고 농촌인구는 줄어들 것인데, 사회변혁의 중요한 동력은 노동자가 아니냐고.
그러나 난 농촌 행에 대해 그렇게 논리적이고 멋진 근거를 들이대지 못했었다. 단지 농활을 통해 내가 직접 겪은 농촌은 너무 가난했고, 내가 만난 농민은 너무도 부지런하게 힘든 노동을 감내함에도 불구하고 저곡가정책에 의해 늘 먼저 희생당하고 소외당하는 존재였다. 우리가 먹을 쌀과 먹거리가 땅에서 나오는 한은 농촌과 농업은 계속 지켜져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진실 앞에 나는 압도되었고 그래서 농촌에 젊은 인력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게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서울만이, 노동현장만이 능사가 아니라 도시를 둘러싼 광범위한 지역(농촌)들도 중요한 실천의 장임을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확인한 바도 있었다.
그냥 나는 햇빛 따라 모가지를 쑥 빼고 솟는 미나리 순처럼 농촌 행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었고 평생을 몸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과의 엄청난 갈등을 ‘무단가출 농촌 행’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종지부를 찍고, 거의 빈손이다시피 이도향촌을 강행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귀농 귀촌이란 말은 없었으며 연고도 없는 농촌에 내려온 자는 간첩이거나 도망자거나 김대중 끄나풀 중 하나로 의심받아 경찰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후로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는 지금에도 그때의 그 생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딛고 사는 농촌의 현실은, 세계화, 정보화시대에 눈이 팽팽 돌아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지만 농산물 개방과 농업축소정책의 그늘에서 노동의 대가를 아직도 보장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희생양으로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춤이든 공연이든 농활이든, 머리 따로 몸 따로가 아닌 온몸으로 함께 부대꼈던 대학 4년 탈반에서의 인연은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어졌고, 어렵고 지칠 법한 농사꾼으로서의 삶을 억척스럽고 느긋하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든든한 응원군의 역할을 맡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내가 생산한 농산물을 적절한 가격에 직거래로 구매해주는 애정 어린 소비자로서 물리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지칠 때마다 내게 용기와 생기를 불어넣어준 존재들이 바로 탈반의 선배, 동료들이었다. 탈반 성원들의 어떤 에너지가 그런 힘을 만들어낸 것일까? 그냥 ‘탈반정신’ 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15년 전쯤, 작곡을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전북의 여성농민들로 구성된 노래패 ‘청보리사랑’에게 노래를 몇 곡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음반 제작을 맡아준 박문옥 님(‘직녀에게’의 작곡가, 내가 탈반 활동했던 걸 알 턱 없는)이 그런 말을 했다. “박찬숙씨 만든 노래는 투쟁가요에도 민요풍이 배어있네요” 그때 가슴이 콩콩콩 뛰었다. 정말 그런가? 또 언젠가 임실 필봉마을에서 보았던 고성오광대 공연은 그야말로 수 십 년만에 접한 탈춤마당이었는데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3년 전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도 일어났다. 동문회 30주년 행사에서 친구와 내가 촌극을 꾸며 양주별산대 먹중 기본 춤을 춘 적이 있었다. 내 생에 다시는 기회가 없을 줄 알았는데 환갑 나이에 그것도 고장난 다리로 35년 만에 탈춤을 출 수 있게 되다니! 또 가슴이 터질 듯 했다. 그뿐 아니다. 나는 남원농악을 전수하고 있는 우리 면의 풍물패에서 막쇠를 담당하고 있는데, 상쇠의 수신호와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긴장을 놓고 있다 보면 어느새 스무 살 소싯적 탈반에서 배웠던 정읍농악의 가락으로, 나도 모르게 슬며시 돌아가 버리는 해괴한 짓을 저지르곤 한다.
아마 탈반의 기억은 나의 삶에 있어서 깊고도 질긴 뿌리인 동시에 가슴 터지는 첫사랑인가 보다.
글쓴이 박찬숙: 이화여자대학교 민속극연구회 78학번, 전북 순창에서 1983년부터 현재까지 농민운동을 하며 논, 밭농사와 돼지를 자연농업 방식으로 키우고 있다.
[탈춤과 나] 원고 청탁서
새로운 언론문화를 주도해가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http://pressian.com)이 <사)민족미학연구소>와 <창작탈춤패 지기금지>와 함께 탈춤에 관한 “이야기마당”(칼럼 연재)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탈춤이 좋아서, 쏟은 열정이 오롯이 담긴 회고담이거나 증언, 활동일지여도 좋고 아니면 현금 문화현상에 대한 어기찬 비판과 제언 형식의 글이어도 좋습니다.
과거 탈춤반 출신의 세대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신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글 내용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한 때나마 문화패로서 탈꾼으로서 개성넘치는 숨결을 담아내면 참 좋겠지요.
글 말미에는 대학탈춤패 출신임을 밝혀주십시오(대학, 학번, 탈춤반 이름 및 현직)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사진(1-5매)이나 시청각 자료도 곁들여 캡션을 달아 보내주시면, 지난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줄 것입니다.
알뜰살뜰한 글과 사진제공에 대한 원고사례비는 제공되지 않고, 다만 원고가 묶여져 책으로 발간될 때 책 두 권 발송으로 사례를 대신합니다.
제 목 : [탈춤과 나] (부제로 각자 글 나름의 자의적인 제목을 달아도 좋음)
원고 매수 : 200자 원고지 15-30매(A4 3-5장)
원고 마감 : 2021년 9월 30일
(사진 등 시청각 관련 자료 캡션 달아 첨부하면 더욱 좋음)
보낼 곳 :
(사) 민족미학연구소 (namihak@hanmail.net) 채 희 완 (bullim20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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