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신청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는 지난달 21일 기준 3636건, 7443명의 신청 사건이 접수됐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과거사와 관련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과거사는 지난 일이 아닌 현재의 아픔이다.
한국사회에는 2000년대 초반 두 번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과 2009년 제1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있었다. 2기 진실화해위의 활동 개시에 맞춰 1기 진실화해위의 조사 사례를 살폈다. 이를 통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치유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그런 가운데에도 과거사 조사가 수행되며 남긴 성과를 들여다보려 했다. 그 속에서 한국사회가 과거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진상 규명을 지속하는 한편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프레시안>에서는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기획을 통해 진실화해위 활동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셋째 편에서는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사 결과'와 1기 진실화해위의 '인민혁명당 사건 조사보고서' 등을 바탕으로 두 번에 걸친 박정희 정권의 인민혁명당 조작 사건과 이후 진상 규명 과정을 다뤘다.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① 동굴서 양팔 묶인 시신으로 발견된 아들, 진상 밝히려 애쓴 35년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② 47년 만에 밝혀진, 31살에 사형된 언론사 사장의 진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인민혁명당(인혁당)을 재건하려는 지하 비밀조직을 만들어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였다. 당일 재판은 이일규 전 대법관의 반대 의견 개진과 10분여의 판결문 낭독으로 끝났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피고인의 가족은 오열했다.
판결 하루만인 다음날 9일 새벽 김용원 등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사형 후 시체 두 구는 가족의 동의도 없이 화장됐다. 고문 흔적 때문이라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 판단이었다. 변호사의 재심 청구서는 휴짓조각이 됐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2차 인혁당 사건(혹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후일 1기 의문사위, 1기 진실화해위 등에 의해 '박정희 정권에 의한 조작극'으로 판명 났다.
증거 부족 이유로 검사들이 사표 내며 기소 거부...'1차 인혁당 사건'
사건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2차 인혁당 사건에는 뿌리가 되는 사건이 있다. 역시 과거사 진실 규명의 대상이 됐던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이다. 8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1차 인혁당 사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 취임 뒤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여기에 식민 지배의 대가로 일본에서 차관을 받는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될 것이라는 점이 알려지며 '굴욕적 외교'라는 반대 여론이 일었다.
1964년 3월 23일 당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이 도쿄에서 오히라 외상을 만나 한일회담 일정에 합의한 사실이 알려졌다. 직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김종필의 즉시 귀국을 요구하며 수천여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해 6월 23일,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한 달여 만에 1120여 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이어 1964년 8월 14일,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1차 인혁당 사건'의 시발점이 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으로 국가 변란을 획책한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했다"는 내용이었다.
1차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은 3일 뒤인 17일 검찰에 송치됐다. 당시 수사를 맡은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검사 4명은 "증거 상으로는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사건 담당 검사 중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등 3명은 사표까지 냈다.
이에 김형욱은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를 만나 다시 한 번 기소 압력을 가했다. 결국 피의자들은 검찰 기소에 의해 구속됐다.
이후 '피고인들이 중정에 의해 물 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했다'는 한국인권옹호협회장 박한상의 폭로가 있었다. 이에 검찰은 피고인 14명에 대한 소를 취하하고 나머지 인원에 대해 공소장 죄목을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북괴를 고무, 찬양했다'는 반공법 위반으로 변경했다.
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은 검찰이 기소한 25명 중 도예종에게 징역 3년, 양훈우 등 6명에게 징역 1년, 김금수 등 6명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 박현채 등 4명에게 징역 1년을 확정했다.
대법원 판결 하루만에 8명 사형 집행...'2차 인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은 10여년 만인 1974년 재현됐다. 같은 소재를 두고 일으킨 공안 사건인 만큼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에는 공통점이 많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높은 반대 여론, 이를 뒤집으려는 정권과 중앙정보부 차원의 공작 등이다. 단, 비극의 강도는 더 셌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조치를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12월 27일 영구집권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 폐지, 연임 제한 철폐 등을 담아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1년여가 흐른 1973년 10월 서울대 문리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후 유신 반대운동이 본격화됐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은 유신반대운동의 배후로 유신반대 유인물 명의 단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지목하며 민청학련과 관련한 모든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이어 4월 25일,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고 이제 중앙정보부장이 된 신직수가 '인혁당 재건 및 민청학련 사건', 즉 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했다. 사건 개요는 1차 인혁당 사건의 판박이였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정부 전복과 이른바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인혁당 관련자 22명, 민청학련 관련자 27명이 긴급조치 4호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에비음모, 내란 선동 등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됐다.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2호에 의해 설치된 긴급조치 위반을 다루는 사법기관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974년 7월 김용원 등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나머지 기소 인원 중 8명에게는 무기징역, 4명에게는 징역 20년, 3명에게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고 이들의 형을 확정했다. 다음날 김용원 등 8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수사와 재판은 물론 유언까지...전방위적으로 조작된 '2차 인혁당 사건'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조사는 1999년 12월 출범한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이뤄졌다. 의문사위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조사결과'에 따른 사건 경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의문사위는 인혁당 재건위는 물론 당시 중정이 인혁당 재건위가 배후조종했다고 주장한 민청학련이라는 조직부터 실체가 없다고 봤다. 근거로는 '민청학련은 유신반대 유인물에 붙일 명의를 논하다가 채택된 이름에 불과하다'는 관련자들의 진술과 '이 조직의 강령, 규약, 조직체계표 등 일체의 증거물이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수사 과정에는 강제 자백을 목적으로 한 고문이 있었다. 전창일 등 생존 피해자들은 당시 중정의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등을 증언했다. 고문 과정에서 수 차례 실신을 경험하거나 실명 등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이도 있었다. 사형된 하재완이 탈장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고, 온 몸에 멍 자국이 있었다는 진술도 나왔다.
피고인들이 끝까지 혐의 내용을 부인하면, 당시 수사팀장 윤모 씨의 지시에 따라 조서가 조작됐다. 동네 어디를 잘 가고 동네 누구와 자주 만났다는 증언이 해당 장소에서 해당인들에게 유신을 비방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으로 둔갑하는 식이었다. 조사 장소와 일시가 허위로 기재된 경우도 했다.
재판 과정도 폭력적이었다. 무죄 입증을 위한 변호인들의 증인 신청은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재완이 고문당한 사실을 진술하자 문모 검사가 "이 자식 아직 덜 맞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피고인 임구호가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한 뒤 밖으로 끌려나가 집단구타를 당한 일도 있었다.
사형장 최후진술 형태로 이뤄진 유언마저 조작됐다. 당시 사형집행명령부에는 도예종이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했다고 기록됐다. 교도관 김모 씨는 도예종이 "적화통일"이란 표현을 한 일 없고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2차 인혁당 사건에 대한 법원 재심은 2006년 3월 시작됐다. 사건 32년만인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사건으로 사형 선고된 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2007년 8월 서울지법은 인혁당 재건위 유족과 생존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245억 원의 배상액과 30년의 이자를 합쳐 총 600억 원의 배상액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유족과 생존 피해자는 2008년 정부로부터 490억 원의 배상금을 가지급받고 이 중 일부로 4·9 통일평화재단을 설립했다.
이후 2010년 1기 진실화해위는 1차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수사과정에서 불법구금, 가혹행위, 사건조작이 있었다는 조사결과를 냈다. 여기에는 피고인들이 당시 법정에서 '정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서클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인혁당을 창당하려 한 적은 없다'고 진술한 내용이 담겼다. 2015년 5월 대법원은 1차 인민혁명당 피해자들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빨갱이 낙인', '빚 고문'...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의 여전한 고통
국가기관과 법원에 의해 진실이 밝혀졌지만 32년이라는 세월 동안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영화 <1987> 속 교도관 한병용의 실제 모델 중 한 명인 전병용 전 서울구치고 교도관은 2002년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바로가기 : "인혁당 사형수 8인의 진실")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의문사위의 조사결과에도 이와 관련해 생존 피해자의 고문 후유증 및 취업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가장의 구속 이후 생계에 어려움을 겪은 가족들의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다.
인혁당 사건의 망령은 여전히 피해자를 괴롭히고 있다. 2011년 대법원은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판결을 뒤집어 이자 발생 시점을 형 확정일인 1975년 4월 9일이 아니라 손해배상 소송의 변론 종결일인 2009년 11월 13일로 바꿨다. 34년분의 이자가 깎인 것이다. 이로 인해 유족과 생존자는 배상액 중 211억 원을 도로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직후인 2013년 7월 국가정보원은 다시 한 번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해자를 상대로 16건의 부당이득 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 법원은 매번 국정원의 손을 들어줬다. 패소한 피해자들에게는 연 20%의 높은 연체 이자율이 적용되고 있다. 이 때문에 재산을 압류당했거나 배상금을 넘는 반환금을 내야 할 처지에 놓인 피해자도 있다.
법원의 2차 인혁당 사건 피해자 배상금 반환 판결에 대해 박지원 국정원장은 인사청문회 당시 "굉장히 잘못된 판결"이라고 했지만, 국정원은 배임죄 적용 소지를 이유로 부당이득 반환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국가기관의 어정쩡한 입장 탓에 2차 인혁당 사건의 피해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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