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신청 사건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2기 진실화해위에는 지난달 21일 기준 3636건, 7443명의 신청 사건이 접수됐다. 그만큼 한국사회에 과거사와 관련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과거사는 지난 일이 아닌 현재의 아픔이다.
한국사회에는 2000년대 초반 두 번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과 2009년 제1기 진실화해위 활동이 있었다. 2기 진실화해위의 활동 개시에 맞춰 1기 진실화해위의 조사 사례를 살폈다. 이를 통해 사건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치유되지 않은 피해자들의 고통과 그런 가운데에도 과거사 조사가 수행되며 남긴 성과를 들여다보려 했다. 그속에서 한국사회가 과거사를 잊어버리지 않고 진상 규명을 지속하는 한편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
<프레시안>에서는 '과거사 정리, 그 아픔과 성과' 기획을 통해 진실화해위 활동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현재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첫 편은 35년 전, 경찰에 끌려간 뒤 동굴에서 발견된 아들 신호수 씨의 시신을 마주한 뒤 진상규명을 위해 싸운 아버지 신정학 씨의 이야기다.
1986년 6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 대미산에 산딸기를 따러 올라간 방위병 셋이 동굴에서 시신을 발견했다. 목이 매달린 채였지만 자살했다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양팔은 몸에 붙은 채 허리띠로 묶여있었다. 복장은 하얀 팬티와 양말뿐이었는데 양말이 새빨갛게 피로 물들어있었다. 발목에는 원형의 상처가 있었다. 주변에 놓인 소지품은 불에 타 있었지만 라이터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신의 신원은 발견 8일 전 당시 서부경찰서 대공계 형사 차모 씨 등 세 명에 의해 연행된 스물세 살 가스배달원 신호수 씨로 밝혀졌다. 신 씨는 '전두환 타도' 등이 적힌 삐라 수십 장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신호수 씨와 같이 살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삐라는 신호수 씨가 포상휴가를 받기 위해 모은 것을 버리지 않고 둔 것이었다.
방위병의 시신 발견 신고 뒤 여수경찰서는 동네 의사를 불러 시신을 살펴본 뒤 신호수 씨가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결론짓고 매장했다. 그리고 발견일로부터 8일이 지난 6월 27일 유족에게 이를 알렸다. 유족은 매장 사실에 항의했고, 경찰은 그해 7월 8일 공동묘지에서 신호수 시신의 약식부검을 실시했다. 그래도 자살이라는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신호수 의문사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아버지 신정학 씨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아들의 한을 풀어주겠다. 저승에 가서 아들을 볼 때 떳떳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아들 죽음의 진상 규명을 위해 싸웠다.
지난 10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신정학 씨의 자택에서 그를 만나 긴 싸움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정학 씨의 삶에는 지난했던 과거사 진상 규명의 역사가 녹아있다. 오랜 시간 지연된 정의가 주는 고통도 배어있다.
아들의 억울한 죽음 진상 밝히려했지만 변호사도 구할 수 없었던 아버지
신호수 씨가 '장흥공작'이라는 명칭의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의 조사가 있은 뒤다. 서부경찰서 대공계는 앞서 언급한 삐라를 바탕으로 1985년 10월부터 신호수 씨를 내사했고 다음해 6월 신호수 씨를 연행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났을 때 신정학 씨가 이 같은 사정을 알리는 없었다.
아들의 사망 당시 신정학 씨는 어시장에서 고기를 사다 말려서 파는 일을 하며 여수에 살았다. 신호수 씨는 서울에서 가스배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신정학 씨는 1986년 6월 22일 서울에 사는 조카의 전화를 받고 아들의 실종 소식을 처음 알았다. '일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연락이 없고 오빠가 잡혀갔다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길로 서울에 가 아들이 살던 곳 근처 파출소, 서울경찰청, 아들의 회사 등을 돌아다녔지만 아들은 찾을 수 없었다. 신정학 씨는 청와대, 국회, 검찰 할 것 없이 진정서를 냈다. 얼마 뒤 여수경찰서가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려왔다.
이후 신정학 씨가 '아들이 경찰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아 사망다'는 취지로 낸 진정에 기초해 광주지방검찰청 순청지청이 사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신정학 씨는 아들을 연행한 이들이 서부경찰서 대공계 형사 세 명이라는 사실을 이때 알게 됐다.
당시 순천지청은 '조사 3시간 만에 신호수를 훈방했다'는 연행 형사 차 씨의 진술을 기초로 '신호수가 사고 당일 회사 숙소에 들렀다 다음날 나온 것으로 보인다'며 1986년 7월 2일 자살 사건으로 내사를 종결했다. 연행 이후 신호수 씨를 목격한 증인이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신정학 씨는 "결과를 듣고 검사와 싸우기도 했다"며 "'당신은 내 자식이 먼지만도 못할지 몰라도 나에게는 천금 같은 자식이다. 어째서 자살했단 거냐'고 따져물었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엄혹한 권위주의 통치시절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법정에서 사실을 다퉈보려 해도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간첩'으로 잡혀갔다는 신호수 씨의 사건을 맡겠다고 나서는 변호사는 없었다.
신정학 씨는 "돈은 얼마라도 줄 테니 사건을 맡아달라고 변호사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아무도 변론을 안 해주려 했다"며 "'당신이 아무리 다녀 봐도 소용없으니까 집에 가서 농사짓고 사셔라. 나라가 민주화되면 언젠가는 밝혀질 거다'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신정학 씨의 유가협 활동과 1999년 의문사진상규명법의 제정
그러던 신정학 씨가 변호사 사무실 중 한 곳에서 젊어 보이는 여성을 만났다. '변호사에게서 사정을 들었다'며 인사를 건넨 그는 신정학 씨에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소개했다. 알고 보니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전 의원이었다.
인 씨의 소개로 이소선 여사를 만난 신정학 씨는 그 자리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여덟 번째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러면서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군에서 의문사한 고 최우혁 씨의 아버지 최봉규 씨, 불심 검문 과정에서 경찰의 권위적 태도에 항의했다 목숨을 잃은 고 김상원 씨의 동생 김상모 씨 등이었다.
이후 신정학 씨는 의문사 진상 규명 싸움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1988년 10월 시작돼 해를 넘겨가며 135일간 진행된 종로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 앞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촉구 농성을 함께했다. 머리띠를 매고 아들의 영정을 든 채 서울 시내를 돌며 선전 활동도 했다. 유가협 안에 의문사지회를 설립되던 때의 주요 구성원이기도 했다.
신호수 사건을 포함 의문사 사건에 대한 공적 차원의 진상규명 활동이 시작된 데에도 유가협의 영향이 컸다.
1998년 11월 4일 유가협은 국회 앞에 농성장을 차리고 의문사법 제정을 촉구했다. 신정학 씨는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고 422일간 지속된 농성 현장을 지켰다. 긴 싸움 끝에 결실이 있었다. 1999년 12월 28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과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신정학 씨는 이와 같은 유가협 활동을 회상하며 인터뷰 중 몇 번이고 "그만치 싸웠으니 완전하지는 않아도, 일부라도 아들 죽음의 진실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문사위의 '신호수 사건' 결정, "진상 규명 불능"
2000년 10월 17일, 대통령 직속으로 의문사위가 출범했다. 이후 의문사위는 2000년 10월부터 2002년 10월까지를 1기, 2003년 7월부터 2004년 6월까지를 2기로 해 군사독재 시절에 일어난 의문사를 조사했다.
신정학 씨도 1기 의문사위, 2기 의문사위에 아들 사건에 대한 진정을 넣었다. 의문사위가 작성한 두 조사보고서에는 모두 '신호수의 사망에 공권력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조사결과는 증거 부족을 이유로 한 '진상 규명 불능'이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를 보면, 의문사위가 신호수 씨의 사망에 공권력 개입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사고 현장이 스스로 목을 매 죽기에 부자연스러운 구조로 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사건 직후 여수경찰서는 신호수 씨가 2.5m 높이의 바위틈에 끈을 고정한 뒤 목을 매 자살했다고 했다. 의문사위는 이에 대해 "신장 165cm의 신호수가 동굴바닥에 선 채로는 그 틈을 확인할 수 없고 동굴 내부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만 확인할 수 있어 변사자가 자살할 끈을 묶는 장소로 선택했다고 보기에는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고 적었다.
<보고서> 내용과는 별개로 신호수 씨가 목을 맨 장면을 찍은 사진은 없다. 신정학 씨도 그런 사진은 보지 못했다. 남은 사진은 당시 경찰이 신호수 씨를 동굴 밖으로 끌어낸 뒤 찍은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한 의문도 제기되어 있다. 불온유인물 은닉만으로도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성립되던 시절이었다. 서부경찰서 대공계는 연행 전 열 달에 걸쳐 '장흥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신호수 씨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도 신호수 씨를 훈방 조치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라는 것이다.
수사기록과 관련한 문제도 나와 있다. 차 씨는 의문사위에서 신호수 씨를 연행한지 3시간 30분 만에 훈방했고 수사기록을 작성해 당일 결재까지 받았다고 진술했다. 신호수 사건의 수사기록은 자필진술서 3장, 진술조서 12장, 각서 1장, 보고서 7장에 달한다. 다른 대공과 형사들은 조사 3시간여 만에 이 정도 분량의 수사기록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23년 만에..."신호수 사망은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 때문"
이와 비슷한 억울함을 품고 있는 건 신정학 씨만이 아니었다. 1, 2기 의문사위에서 다루지 못한 사건도 많았다. 2005년 5월 다시 한 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됐다. 같은 해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가 출범했다.
신호수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진실화해위는 서부경찰서 대공계에서 근무했던 형사들로부터 차 씨의 '3시간 조사 뒤 훈방' 진술과 상반되는 새로운 진술을 확보했다. '신호수 씨가 3일 가량 조사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훈방된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진실화해위는 이 같은 증언을 토대로 2009년 11월 "신호수 씨를 간첩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가혹행위 등으로 인해 신호수 씨가 사망에 이르자 이를 자살로 위장했던 것"이라고 판단하고 신호수 사건에 대해 "불법적인 강압수사 과정에서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의한 사망"으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사건 발생 23년 만에 국가가 신호수 사건에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가 얽혀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었다.
진실화해위 결정이 신정학 씨의 눈물을 완전히 닦아준 것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부당한 행위를 했는지 밝혀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23년이라는 시간은 사건의 구체적 진상을 밝히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진실화해위 결정 직후 신호수 씨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1심 재판부는 '차 씨 등 경찰이 가혹행위를 한 뒤 이를 은폐했다'는 유족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 영장 없이 진행된 불법수사 사실과 이후 국가의 진상규명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 인정돼 유족 5명에게 위자료와 지연손해금 8900만 원을 지급하라고 2010년 10월 판결했다. 2심 재판부도 2011년 8월 같은 판결을 내렸다.
사람의 '목숨 값'으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가 책정됐다는 점, 끝내 법원이 차 씨 등의 가혹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신정학 씨의 가슴을 또 한 번 후벼 팠지만, 당시 신정학 씨는 가족과 논의해 더 이상 법정 싸움을 하지 않기로 했다.
"힘없는 이들의 억울함 제대로 풀어주는 과거사 진상규명해야"
한국에는 아직도 신정학 씨와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많다. 지난 달 27일 조사를 개시한 2기 진실화해위에 지난해 12월 기준 3636건의 사건이 접수됐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형제복지원 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 과정의 용의자 인권침해 사건 등이 포함됐다.
시간이 오래돼 진상 규명이 어렵다고 한들 이를 미룰 수는 없다. 미루면 미룰수록 진상규명이 필요한 사건은 쌓여만 갈 것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피해자들의 상처도 깊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사 진상규명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은 신정학 씨가 바라는 것도 어렵다는 이유로 이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과거사 조사를 하는 것이다. 신정학 씨는 과거사 진상 규명과 관련해 특히 힘없는 사람, 그간 조명 받지 못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푸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정학 씨는 "제 아들처럼 힘없는 노동자들이 당한 의문사 중에는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사건이 많다"며 "2기 진실화해위가 이들을 최대한 많이 찾아내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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