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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인간' 김종철 1주기…그에 대한 '기록하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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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인간' 김종철 1주기…그에 대한 '기록하기'를 시작합니다

[녹색평론 김종철 약전] ① 김종철 연보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의 별세 1주년(6월 25일)을 맞아 '김종철 약전(略傳)'을 연재한다. <프레시안>은 지난해 김종철 선생이 돌아신 후 박승옥의 추모 글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글 9편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김종철 약전'을 연재하는 이유는 그의 삶과 사상이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지구적 위기 상황 속에 '지속가능한 인간적 삶을 위한 문명 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중한 출발점이라는 판단에서다.

일찍이 김종철은 스승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무위당 선생님의 삶과 사상은 갈수록 우리에게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살고자 할 때는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 하면, 귀감이 되는 선례, 즉 선인의 발자취입니다. 물론 그 발자취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지는 각자의 능력과 판단에 달려 있겠지만, 우선은 그러한 선각자를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게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무위당, 제일 잘 놀다가 가신 자유인', 장일순 선생 20주기 기념 좌담, <녹색평론> 136호 2014년 5/6월호, 6쪽)

그래서 무모한 시도인 줄 알면서도 그의 삶의 발자취를 간략한 연보로 만들고, 사상의 고갱이를 정리해 보았다. 물론 이는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지극히 주관적인 서술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약전(略傳)이라 이름 붙인 이유다. 그가 29년간 기획, 편집한 173권의 <녹색평론>(1991~2020년)과 <시와 역사적 상상력>(1978년)에서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2019년)에 이르기까지 9권의 저서, 그리고 무수한 강연 속에 담긴 그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전모를 드러내는 것은 엄청난 내공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뿌린 사상의 씨앗이 우리의 삶의 현실을 바꿔내는 밀알이 되기 위해서는, 즉 김종철 사상의 창조적 계승과 구체적 실천을 위해서는 후인들의 솔직한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외람되지만 그 마중물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김종철 약전'을 준비했다.

오는 11월이면 <녹색평론> 30주년을 맞는다. 오는 10월 말까지 김종철 선생 및 <녹색평론>과 인연이 있는 필자, 독자 등께서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김종철 선생과의 개인적 사연, <녹색평론>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 김종철 사상의 실천을 위한 현실적 방안 등 진솔한 느낌의 글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그가 생전에 희망했던 '느낌의 공동체' '우정의 공동체' '사상의 공동체'가 형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 1991년 11월 격월간 <녹색평론>이 창간됐다.(왼쪽) 2001년 11월에는 창간 10주년 기념호(통권 61호)가, 2011년 11월에는 창간 20주년 기념호(통권 121호)가 발행됐다. ⓒ녹색평론사

'신념의 인간' 김종철

김종철 선생이 돌아가신 후 나온 여러 추모의 글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몇 구절이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김종철 선생님은 내게 '한국 사람' '한국 사회'에 대한 행복한 경험을 선사하셨다. 최근 내가 접한 가장 윤리적인 분이셨다."(정희진의 낯선 사이, '무의미의 '승리', 김종철 선생님께', <경향신문> 2020. 7. 1)

선생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한국 지성인들은 큰 그림을 그릴 줄 몰라요. 쓸데없는 욕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버릴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큰 그림을 갖고 굵직하게 써야 해요. 지금 르포가 가장 필요한 문학 형태라고 봐요. 잡문이 중요해요. 세상은 잡풀이 주인이거든. 곧 시스템이 붕괴됩니다. 정권을 잡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생명이냐? 죽음이냐? 전환이냐? 자멸이냐? 그걸 걱정해야 할 시기입니다."(김응교 숙명여대 교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을 추모하며', <서울신문> 2020. 6. 27)

"많은 이들은 김종철 형을 근본주의적인 녹색사상가나 생태주의 이론가라고 부른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형은 사상가나 이론가라기보다는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녹색평론>은 단순한 문필활동의 공간이 아니라 녹색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매체로 처음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녹색평론>은 그가 가진 모든 지적 자산과 영적 재능을 요구하였고 그는 기꺼이 그 요구에 응했다."(정지창 전 영남대 교수, '존경하는 벗 김종철 형을 보내며', <창작과 비평> 189호 2020 가을호, 331쪽)

"'전환이냐 자멸이냐'라는 김종철의 질문 역시 우리의 안이함을 일깨우는 단호한 도전이다. 그리고 <녹색평론> 30년의 활약을 통해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많아졌다. 생태적 농업과 농촌의 중요성, 기본소득, 재생에너지 개발, 제비뽑기를 포함한 숙의민주주의 등 수많은 의제가 꽤나 익숙한 현안이 되었고 일부는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김종철 단독의 공헌은 아니지만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그런 변화를 가져오는 데 김종철만큼 이바지한 경우도 드물다. 이제 그 공로를 딛고 자멸을 꾀할 전환을 '어떻게' 실현할지를 연마할 때가 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백낙청, '고 김종철과 나', <녹색평론> 174호 2020년 9/10월호, 106쪽)

그런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일찍이 "<녹색평론>의 창립은 현실 창조의 행위이면서도, 완전한 신념의 행위로 생각된다"면서 김종철을 '신념의 인간'으로 평가한 바 있다. 우선 "<녹색평론>이 대표하고 있는 현실은 물론 오늘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어야 할 현실"이며 "이 현실에 형태를 주고 초점을 제공한 것은 <녹색평론>"이라는 점에서 "이 중요한 현실은 김종철 교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현실'이란 생태사상을 통해 본 지구와 인류의 현재 모습 및 미래상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즉 우리가 당연하다고 습관적으로 믿어온 자본주의 근대 산업문명이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특히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기 자신과 내면의 조화를 파괴하고야 만다는 엄중한 현실 말이다.

또한 문학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인 김종철이 느닷없이, 순전히 혼자 힘으로 생태사상 잡지를 창간한 데 대해서는 "이미 존재하는 잡지를 맡고 들어간 것도 아니고, 비슷한 잡지가 있어서 또 하나의 비슷한 잡지를 모방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며, "이러한 잡지를 만들어야 할 직업적인 필요를 가졌던 것도 아니고, 또 그가 이러한 잡지를 만들 수 있는 재정적 토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나아가 잡지를 통해 정치적 힘이나 대중적 영향력을 추구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녹색평론> 창간은 '완전한 신념의 행위'였다는 것이다.(김우창, '시적 인간과 자연의 정치', <오늘의 문예비평> 1997년 봄호(24호)에 실렸던 것으로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에 재수록. 407~408쪽)

그렇다면 김종철로 하여금 혼자 힘으로 <녹색평론>을 창간하고 이를 30년 가까이 이끌고 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일까. 간략한 연보와 함께 그 발자취를 살펴본다.

<녹색평론> 김종철 연보

1947년 1월 10일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진주의 남강 변에서 자라던 유년시절에 6.25전란을 겪음.

1953년 전쟁 이후 마산에서 초.중.고교를 다님.

1965년 서울대학교 영문과 합격했으나 1년 휴학 뒤 입학.

1967년 서울대 영문과에서 백낙청 선생의 지도 받음.

1970년 대학원 진학, 영문과 조교.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역사관과 상상력'으로 당선, 문단에 데뷔.

1974년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군 복무.

1974년 석사논문 <예언자적 지성의 한계-블레이크의 시적 노력>의 축약본을 <창작과비평> 봄호(통권 31호)에 싣다. 이전까지 <문학과 지성> 동인이었던 그는 이후 창비 1974년 가을호부터 창비의 중심 필진 중 하나로 1980년대 말까지 활동.

1978년 첫 저서이자 문학평론집인 <시와 역사적 상상력> 발간(문학과 지성사)

1980년 숭전대, 성심여대 거쳐 영남대 교수.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 암흑기 속에서 백낙청 선생의 제안으로 서양 고전소설을 읽는 독서모임을 갖다. 한 달에 한 번 백낙청 선생의 서울대 연구실에서 염무웅(독문학), 반성완(독문학), 최원식(국문학), 서정미(불문학) 등과 함께. 이 모임의 결과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서구 리얼리즘 소설연구>라는 책을 펴냄(<대지의 상상력> 17쪽).

1983년 가을-1984년 여름 뉴욕주립대학(버펄로)에서 동독 출신의 평화운동가 루돌프 바로의 <적색에서 녹색으로>(1984년) 등 에콜로지 관련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생태사상에 빠짐.

1990년 4월 대구 한살림 참여.

1991년 7월 대구에서 발행되는 교양지 <문예비평> 주최의 '문학의 밤' 행사에서 '시의 마음과 생명공동체' 강연을 하다. '인간 공동체나 사회 공동체를 넘어 생명 공동체의 개념이 절실'하고 "만물이 하나이고 형제라는 생각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 생각보다는 감수성으로 이를 받아들여야" 하며 이것이 곧 시의 마음'이라는 이 강연은 이후 11월 창간된 <녹색평론>의 출사표라 할 수 있으며 <녹색평론> 창간호에 실림.

1991년 11월 격월간 <녹색평론> 창간. 150쪽 3000부, 제작비 90만 원. 당시 영남대학교 출판부, 또는 창작과비평사에서 출판하는 방안도 거론됐으나 본인의 사재를 털어 독자 출판키로 함. 이후 2020년 7/8월호까지 총 173호의 발행 겸 편집인을 맡음.

1992년 1월 창간 두 달여만에 정기구독자 1000여 명 돌파.

1992년 가을 원주 봉산동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 처음 만남. 이 만남은 '한살림운동과 공생의 논리-장일순 선생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창간 1주년 기념호(7호)에 실렸다.

1992년 11월 창간 1주년 1992년 11/12월호 통권 7호 발간. 발행 부수 3000부에서 5000부로. 책값 인상. 표지 디자인 바꿈.

1993년 3월 <녹색평론> 첫 1년간(창간호-6호) 실렸던 글 중 23편을 골라 <녹색평론선집 1>을 펴냄(김종철 엮음, 녹색평론 최초의 단행본).

1994년 5월 22일 장일순 선생의 별세에 즈음하여 선생의 강연 녹음 정리한 글과 두 편의 추모의 글을 <녹색평론> 17호(1994년 7/8월호)에 실림.

1994년 11/12월호(19호) <녹색평론> 세돌 맞아 '독자들의 메시지' 책 머리에 실림.

1996년 3월 <녹색평론> 3/4월호(27호)에 대구경북지역 독자모임 광고(최초의 독자모임 광고). 이후 1998년 9/10월호(42호)에 전북 독자모임, 1999년 3/4월호(45호)에 부산독자모임 광고가 나갔으며 그 다음 호(46호)부터 현재와 같은 각 지역 독자모임 광고가 이어짐. 지역 독자 모임은 국내는 물론 미국, 유럽 등 최대 50여 개에 이름(<녹색평론> 20주년 기념호 121호, 15쪽).

1996년 3/4월호 <녹색평론>에 지역화폐 소개.

1996년 여름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 부인 김태언과 함께 공동번역, 발간(<녹색평론> 최초의 번역서).

1996년 12월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발간(2008년 5월 개정증보판).

1997년 5/6월호(34호) 머리 글로 권정생 선생의 '죽을 먹어도 함께 먹고 살자'(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 호소).

1997년 5월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펴냄(개정판 2009년 6월, 개정증보판 2016년 12월).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 발생.

1998년 <녹색평론> 42호(9/10월호)에서 수돗물 불소화에(1994년부터 다루기 시작) 대해 정면으로 문제제기. 이후 2005년까지 반대운동 펼침. 2018년 강원도 영월군 정수장을 마지막으로 수돗물 불소화 완전 중단.

1999년 7월 김종철 비평집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인간.흙.상상력에 관한 에세이> 발간(삼인). 이 책으로 제7회 대산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12월 개정증보판 발간('제3세계 문학과 리얼리즘' 추가).

1999년 7월 <간디의 물레-에콜로지와 문화에 관한 에세이> 발간(녹색평론사). 이후 김종철의 저서는 모두 '녹색평론사'에서 발간.

2000년 1월 <녹색평론> 통권 50호(2000년 1/2월호) 발간.

2000년 5월 25일 <녹색평론>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단재상의 학술부문 수상(한길사 제정.운영). 단재상 운영위원회(학술상 심사위원 : 리영희, 김진균, 이만열)는 단재학술상으로 잡지가 지목된 것은 이례적이라면서 한국의 지성계에 생태학적 인식을 드높이는 데 기여한 <녹색평론>의 공로가 인정된 것이라고 밝힘.

2001년 9월 11일 9.11테러 발생.

2001년 11월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이 제정.운영하는 교보환경문화상의 제4회 대상 수상자로 <녹색평론>이 선정됨.

2001년 11월 <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호(통권 61호 발간).

2001년 12월 8일 독자들의 요청으로 뒤늦게 대구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녹색평론> 독자 2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녹색평론 창간 10주년 기념 모임'을 가짐.

2002년 12월 오키나와에서 활동 중인 미국인 정치학자이자 평화운동가 C. 더글라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최성현과 공동번역으로 출간(2011년 4월 개정판).

2002~2003년 겨울 일본 작가 오다 마코토 자택 방문. 이전 오다 선생이 발간하는 잡지 <식견교류>에 글을 기고한 것이 인연. 이후 2004년 3월 오다 마코토의 <전쟁인가 평화인가-'9월 11일' 이후의 세계를 생각한다> 번역 출판.

2003년 5월 9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즈음하여 '미국과 세계평화' 포럼 영남대학교에서 개최. 김종철의 제안으로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소장 이승렬)가 주최한 이 모임에는 염무웅, 정현백, 오다 마코토, 더글라스 러미스 등이 참여.

2003년 9월 녹색평론사와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공동 주최로 '21세기 사상강좌' 시작. 1회 연사는 일본의 환경사회학자인 토다 키요시, 2회 연사는 독일 그린피스 의장을 역임한 볼프강 작스. 당초 10회 예정이었으나 행사 비용 문제로 영남대 측에서 자금 지원을 중단하면서 3회(12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부터는 <녹색평론> 독자,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4회(2004년 4월 인도 출신의 생태운동가 사티쉬 쿠마르)까지 진행됨.

2004년 영남대 교수 사직.

2004년 4월부터 10여년간 '일리치 읽기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시민자주강좌 개설, 진행.

2004년 5월 무위당 장일순의 10주기를 맞아 추모문집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엮음) 펴냄.

2006년 9월 9일 '한미 FTA를 우려하는 <녹색평론> 전국 독자모임 준비위원회'(이화여대).

2007년 11월 이반 일리치의 절친 리 호이나키의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번역 출간.

2007년부터 '김밥모임'(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밥을 먹는 모임), 2020년까지 지속.

2008년 5월 <녹색평론> 통권 100호(5/6월호) 발행부수 1만 부(정기구독자 5000부)

<김종철 평론집 땅의 옹호-共生共樂의 삶을 위하여>, <녹색평론 서문집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녹색평론선집 2>(김종철 엮음, 통권 7호 1992년 11/12월호에서 26호 1996년 1/2월호까지)를 펴냄.

2008년 5월 21일부터 6월 11일까지 대구, 원주, 군포, 부산, 제주, 대전, 광주 등 7개 지역에서 '<녹색평론> 통권 100호 기념 전국 순회 강연회'가 각 지역 독자모임 주최로 열렸다. 5월 30일에는 서울에서 '시국강연회'가 전국독자모임 주최로 열림(강연자 : 김종철).

2008년 6월 13일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촉발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범시민적 촛불항쟁의 과정에서, 편파·왜곡 보도를 일삼는 수구언론에 맞서 <녹색평론> 독자들의 이름으로 <경향신문>에 의견광고를 냄('아직은 촛불을 끌 때가 아닙니다').

2008년 9월 미국 발 세계 금융위기.

2008년 11월 녹색평론 사무실을 대구에서 서울로 이전.

2009년 2월 <녹색평론선집 3> (김종철 엮음, 통권 27호 1996년 3/4월-통권 46호 1999년 5/6월호) 발간.

2009년 6월 3일~7월 8일 6주간 제1차 녹색사상강좌 (강사 : 김종철 발행인 교재 : <녹색평론선집 1,2,3)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매주 수요일 저녁 7~9시 녹색평론사 세미나실(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2009년 <녹색평론> 9/10월호(통권 108호)에 세키 히로노의 '왜 기본소득 보장과 신용의 사회화가 필요한가'의 소개를 시작으로 이후 자본주의 금융의 공공성 문제를 제기하고 기본소득 시행을 주창.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 사고를 계기로 한국 최초의 녹색당 창립을 위한 활동에 참여.

2011년 10월 9일 <녹색평론> 20주년 기념 독자 좌담 '공생공락을 꿈꾸는 사람들'(통권 121호 2011년 11/12월호 수록).

2011년 11월 12일 이화여대 대학원관에서 <녹색평론> 20주년 기념 강연. 송기호 변호사 : 한미FTA에 대하여 하승수 변호사 : 탤핵운동과 녹색당.

2012년 3월 녹색당 창당.

2013년 <녹색평론> 7/8월호(131호) '기본소득, 왜 필요한가' 좌담(강남훈 곽노완 김종철).

2013년 7월 10일 녹색전환연구소 창립기념식(이사장 : 김종철).

2013년 8월 일본으로 귀화한 미국인 사업가 빌 토튼의 <100% 돈이 세상을 살린다> 번역 출간.

2014년 11월 22일~2015년 4월 25일 6개월간 매월 둘째 넷째 토요일 오후 3~6시 녹색평론 세미나실 <녹색평론 자유시민대학> 개설(진행자 :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2015년 5월 C. 더글라스 러미스의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 번역 출간.

2016년 1월 2008년 5월부터 2015년 말까지 <한겨레> <경향신문> <시사IN> 등에 발표했던 칼럼들을 모아 <김종철 칼럼집 발언 1,2>를 펴냄.

2016년 10월~2017년 3월 촛불 시위.

2019년 4월 <녹색평론> 창간 이전 젊은 시절에 썼던 외국문학에 관한 에세이들을 모은 <김종철 문학론집 大地의 상상력: 삶-생명의 옹호자들에 관한 에세이> 펴냄.

2019년 6월 주로 지난 10년간의 대중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한 <김종철 생태사상론집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에세이> 펴냄/

2019년 <녹색평론> 7/8월호(167호)에 '한반도의 비핵화와 녹색화'(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한 달 후인 3월 29일 사단법인 '평화의 길' 주최 강연회에서 했던 이야기로 '한반도와 세계의 녹색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할 것'을 제안).

2020년 6월 25일 별세.

* 이 연보는 <녹색평론>과 김종철 선생의 저서 등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으로 착오나 누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정 및 추가 사항에 대해서는 메일 inkyu@pressian.com로 연락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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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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