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는 체계적인(systemic) 문제고 체제(system)의 문제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다. 단지 증기기관이라는 기술의 발명이 화석에너지의 남용을 낳고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를 급격히 증가시켜서 기후위기까지 초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축적하고 확장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경제 체제에서 증기기관과 내연기관, 그리고 핵발전이 그런 생산과 소비의 동력을 제공했다. 즉 자본주의적 관계 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경제와 기술이 결합한 결과다. 하지만 그것으로 상황이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위기의 원인에 대해 우리의 눈을 닫게 하거나 위기의 해결을 체계적으로 가로막는 속성을 갖는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무엇보다 기업의 이윤이 우선시되는 자유시장과 물상화, 그리고 계급권력 관계 등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독특한 방식으로 경제와 정치를 결합하고, 지금과 같은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것이 좌파들이 기후위기를 해석하고 입장을 갖는 기본 스토리다. 그래서 좌파들은 기후변화의 원인을 개인의 행동으로 돌리고 해결도 개인의 행동 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설파하는 주장을 경계한다. '탄소발자국'은 유용한 개념이기는 하되, 자칫 개인의 탄소 배출에만 관심을 갖게끔 한다면 대기업의 온실가스 다배출을 묵인 방조하게 하고, 결국 유의미한 감축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다. 따라서 개인 텀블러와 에코백 이용을 장려하는 이런 개인의 작은 실천 캠페인 대신, 좌파들은 '국가의 큰 행동'과 체제 변화,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2009년 코펜하겐 유엔기후변화총회 즈음부터 국제 기후운동에서는 "기후의 변화가 아니라 체제의 변화(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는 구호가 전면화되었고, 나오미 클라인은 "자본주의 대 기후"라는 대립구도를 분명히 했다. 유엔 기후체제가 공식 대안으로 포함하는 배출권거래제 등 유연성 체제는 문제의 원인인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불가능한 해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기업의 이윤 욕구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부문별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많은 논자들이 이를 지적했고 공감을 얻었다.
2019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한국의 기후정의 운동에도 이런 인식이 강력히 확산되었다. 탄소만이 문제가 아니라 결국 체제가 문제이고,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기후위기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국내의 기후정의 운동 조직들 일각에서, 단체와 개인의 구호 속에 "문제는 자본주의"라는 문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적절한 일이고 반가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머무르고 말면 그것도 문제다. 오히려 역편향과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자본주의 탓이라는 폭로와 선전의 목적과 현실적 결과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다.
과학자 집단에서도 공인된 개념인 '인류세', 즉 인류가 만든 지질시대라는 규정에 대해서 이론가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있다. 인류 일반에게 특히 기후위기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자본주의와 계급 지배 관계를 도외시한다는 문제 제기다. 온실가스 배출을 엄청나게 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수혜를 입고 권력을 갖는 대기업이, 즉 인류의 문명 자체가 아니라 산업자본주의 문명이 환경 파괴를 초래한 것이니, 그냥 인류세가 아니라 차라리 '자본세', 즉 자본주의의 지질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본세 규정에 좌파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류세를 주장하는 과학자들, 특히 층서학자들의 지질시대 규정은 그대로 중요하다. 지구상 생물종의 큰 변화와 이를 좌우하는 대기 환경의 변화는 과학적으로 중요한 기준이며, 인류세를 말하는 과학자들이 인류 일반에 책임을 돌린다는 것도 일면적인 비판이다. 다음으로, 자본세는 기후변화에 의해 인류를 포함한 생물종이 맞이하는 위기의 심각성과 차별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면, 수백 년 전 인클로저 운동이나 식민지 정복 때나 2차 대전 이후의 '대가속' 그리고 현재의 온실가스 농도와 기후위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자본주의가 설명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적 효과에 있어서도 자본세는 긍정성과 함정을 모두 갖는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선동이 가능해지지만, 수백 년 전부터 언제나 자본가는 나빴고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었기 때문에 지금 피지배계급이 특별히 더 분개하거나 못 견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것은 일종의 붕괴론이나 파국론으로 연결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언제나 존재하는 위기는 사람들을 언제나와 같은 행동이 아닌 비상한 행동으로 이끌기 어렵다.
따라서 자본주의 탓이라는 반복적 언급 앞에서, "그래서?"라는 물음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자본주의가 기후위기의 주범이라는 신앙 고백이 필요한가, 아니면 자본주의를 극복할 무엇인가를 하자는 말인가? 폭로와 선동이 중요하다면 기후위기 시대에 자본주의의 특별한 구체적인 해악과 그것을 지속하는 작동방식을 풍부하게 설명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주의를 극복해서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면 어떻게 극복할지를 기획하고 제안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구호의 반복은 기후위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마저 식상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을 결여한 구호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들, 또는 사회주의(자)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마저 낳을 수 있다. 이렇게 기후위기가 위중한데 사회주의(자)들의 고답적이고 단순한 인식과 역량으로는 지구를 못 구할 것 같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굳이 사회주의(자)와 가까이 할 이유가 있겠는가?
물론 자본주의가 문제임을 주장하는 좌파들이 대안을 얘기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국유화와 노동계급 조직화다. 그러나 이것도 어떤 상상을 수반하는 감흥을 불러오지는 않는 것 같다. 감흥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현실적 가능성의 논리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산업과 부문을 국유화해서 어떻게 기후위기를 막고 체제를 전환할 것인가? 과거의 국가 기간산업들을 국유화하면 되는가? 화석에너지 산업과 항공 산업이 국유화된다면 이 기업들이 지켜야할 노동자들의 고용과 온실가스 감축 사이의 딜레마는 자동적으로 해결되는가? 또는, 정말 이 산업들의 소유권이 국가에게 없어서 우리가 필요한 조치들을 할 수 없는 것인가? 다른 한편, 어떤 노동자들을 어떻게 조직하면 되는가? 과거와 같거나 다른 대상과 방식인가? 그리고 그런 조직화와 정치 사업은 탄소예산 고갈이 예상되는 2030년 전후까지 완료되는가? 아니면, 탄소배출의 목표연도로 언급되는 2050년까지 얼마나 진척될 것인가? 이런 숫자로 대표되는 목표들을 거론하는 것은 좌파의 이론과 정치에서는 의미가 없거나 불경한 접근인가?
기후위기가 좌파 정치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 기회를 잡고 책임지는 게 현실 좌파다. 2050년이 올 때까지 "문제는 자본주의다"라고 자족적 선동만 하고 있을 텐가? 차라리, 아니 진지하게 2050년까지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을 만들자고 하자. 물론 이 목표연도를 더 앞당기자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좋다.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면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고,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면 티핑포인트를 넘어서더라도 장기 비상사태 속에서 인민의 삶을 챙기고 보호할 수 없다고 제안하자. 그리고 이 공화국은 그냥 구호가 아니라 지금의 정치 및 경제 체제와 제도 모두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하자.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나아가는 5개년 계획을 여섯 번 거치면서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점진주의이고 개량주의라면, 필요한 것을 더 하자.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에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되는 세력을 폭로하고 맞서 싸우는 대중 운동을 건설하자.
대안 체제는 허공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실의 장치와 현실의 운동에서 단초를 찾아야 한다. 이런 단초들을 묶어서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의 법과 제도를 짜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국유화 보다는 '계획 경제'의 역할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실 온실가스 감축이든 이상기후 적응이든, 결국 계획과 민주주의 그리고 연대를 통해 해결하고 소화해야 할 일이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확실한 계획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해야 하며, 이를 인민의 집합적 의지와 토론으로 결정하고 담보해야 하며, 수많은 불확실성에 대해 버퍼를 마련하고 연대로 대처해야 한다. 이를 위한 수많은 대안과 시도들이 있고, 지금 제안할 수 있는 많은 장치와 운동들이 있다. 너무도 단순한 이런 이야기가, 지금 정부의 전략 뿐 아니라 좌파의 구호에도 빠져있다.
따라서 좌파들은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이 기후위기에 근본적인 답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탈성장과 정의로운 전환을 자본주의가 어떻게 가로막고 있는지를 폭로하고, 예컨대 생태사회주의 공화국을 통해 무분별한 성장을 관리하고 정의로운 산업 전환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를 말해야 마땅하다. 아니면, 다른 어떤 반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 대안으로 기후위기를 완화하고 인민의 삶을 지킬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게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좌파라면, 기후위기가 자본주의의 탓이라는 선전에 만족하는 좌파라면, 사실상 대기주의적 태도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지구와 사회운동 모두 그런 좌파를 기다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