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세훈 서울시장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위력 성폭력 사건에 대해 사과하며 피해자의 안정적인 업무 복귀,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지자체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기자회견 브리핑 형식을 통해 발표했다는 점이 '진정성 있었다'는 평가를 받은 반면,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며 방명록에 메시지를 남긴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의 사과는 이른바 뭇매를 맞았다. 사과의 대상, 장소, 방식 모든 면에서 부적절했다는 이유다. 유력 정치인들의 사과가 다시금 '진정성'을 판가름하는 기회로만 다루어지고 있는 현실은 성평등 이슈가 사라지고 거대 양당 사이의 싸움이 된 지난 보궐선거와 무엇이 달라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문제로 지목하고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쟁과 책임은 여전히 실종된 채다.
'성적 언동'에 대한 처벌만이 과제인가
2018년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의 미투를 통해 드러난 안희정 전 도지사의 성폭력 사건, 2020년 오거돈 부산시장의 직원 성추행, 그리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서 성추행 사건에 이르기까지, 주요 지자체장들이 중심에 선 사건들은 한국사회에서 위력 성폭력, 성추행 및 강제추행, 성희롱이라는 이름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이 그렇듯 가해 행위의 수위와 피해의 심각성이 재단되며 어김없이 '그렇게까지 할 문제냐',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에 놓였다. 그럼에도 안희정 전 도지사는 형을 선고받은 후 수감 중이고, 오거돈 전 서울시장은 자진사퇴한 후에 재판을 받고 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은 법적인 처벌 가능성을 닫아버렸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으로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성폭력·성희롱 사건의 처리 과정을 언급하며 이제 한국사회에 남은 과제는 마치 가해자에 대한 적정 수준의 처벌과 고위공직자의 성비위를 막을 대책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은 왜 김지은씨가 '다시 평범한 노동자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지, 오거돈 사건의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지, 박원순 사건의 피해자가 '일터로 돌아가려던 그 길'에 멈춰서야 했는지다.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로 온전히 정의에 도달할 수 있다면, 피해자들의 지속적인 피해와 고통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성단체들이 국가인권위원회에 박원순 사건의 직권조사를 요구하며 외쳤던 구호, "서울시에 인권을, 여성노동자에게 평등을"에 담긴 의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서울시는 여성이 놓인 차별적 노동조건을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 여성노동자가 경험하는 성적 괴롭힘(sexual harassment)이 왜 '차별'이 아니라 '정상적인 업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있었는지, 성별화된 노동구조 속에서 어떻게 특정한 지위의 여성들을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는지를 묻지 않고 '평등'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이제는 사회적 논의가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충격에서 피해자가 배제되었던 성차별적인 일터의 조건으로 그 관심을 이동시켜야 한다.
심기보좌는 비서의 당연한 업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심기보좌' 혹은 '기쁨조' 역할을 해야 했다는 피해자의 업무 내용은 인사권자의 '기분'이 비서 업무의 핵심이었다는 김지은 씨의 이야기와 찍어낸 듯 닮아 있다. 아메리카노에 각설탕 1개나 5가지 이상의 과일과 같은 세세한 음식 기호를 외우고 그에 맞추어서 준비하는 것, 아침에 먼저 모닝콜로 깨우거나 낮잠을 직접 깨우는 것, 편하게 신을 수 있는 구두의 위치와 각도를 조절하거나 샤워할 때 속옷을 대기하고 치우는 것 등 두 사람의 수발노동은 모두 인사권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보좌 업무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비서 업무가 성별화된 노동이었다는 고발이 이루어지자마자 심기보좌 같은 감정/돌봄노동은 보좌관이나 비서라면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하는 업무라는 반박이 따라붙었다. 고위공직자의 '갑질'처럼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인식된다고 할지라도 그 요인은 직장 내 수직적 권력관계, 권위주의적 조직문화, 군대식 소통구조 등에 기인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수직적 조직체계에서는 누구나 상사의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추거나 직장 내 분위기를 좋게 만드는 역할을 강요받는다는 것이다. 심기보좌를 '성별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피력이다.
흔히 '직장갑질'이라고 부르는 '직장 내 괴롭힘'은 여성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 적대적, 위협적, 모욕적 또는 굴욕적인 환경을 조성한다는 의미에서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위계적 조직구조가 성차별을 발생시키는 주요 요인이라는 관점은 노동환경인 '조직'이 젠더와 섹슈얼리티로부터 애초에 중립적인 공간인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 오히려 '조직구조/문화'는 성별화 과정(gendering process) 그 자체에 가깝다. 애초에 서울시에 비서 직군을 채용·배치단계부터 '젊은 여성'으로 차출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서울시장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6층 사람들'로 불린 정무라인과 비서실 직원들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여성비서에게 시장의 기분을 좋게 하는 역할을 기대하고 강요하고 때로는 묵인·방조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게다가 여성비서에게 강요된 성적 역할은 '시장의 총애'로 둔갑하며 노동권을 침해받은 노동자의 경험이 아니라 여성노동자의 특권처럼 다루어졌다. 무엇이 정상적인 비서 업무인지를 가리키는 노동 규범과 비서라면 무릇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성노동자 정체성은 성별화된 노동구조 속에서 형성되고, 이는 다시 조직구성원들이 자신의 위치와 역할, 행동과 감정을 상호작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박원순 사건의 피해경험이 '성추행' 행위에 갇혀 '성차별'로 인식되지 못한 배경에는 상사의 심기보좌, 감정수발을 해야 하는 여성노동자의 업무를 조직 내에서 정상으로, 심지어 특권으로 만드는 성별화 과정이 있다.
여성노동자가 경험하는 '성별화된 조직'
"ㅋㅋ, ㅎㅎ, 말 줄임표 등은 친근감의 표시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약자들의 비명입니다."
이 말은 모든 '갑질'의 영향력 하에 있는 노동자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발언자인 권수정 서울시의원이 지목하고 싶었던 현실은 성별화된 노동구조·조직문화 속에 놓인 여성노동자들의 생존전략이 상사에 대한 '자발적인' 지지와 응원으로 손쉽게 해석된다는 점이다. 김지은씨의 "넹"이라는 대답은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애교 혹은 연애감정의 표현으로, 다양한 비서의 수행업무는 성관계를 동의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박원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장의 생일을 축하하는 피해자의 자필편지, 후임 비서를 위해 작성한 업무 인수인계서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당부는 성추행을 부정하는 근거로 동원되었다. 반면에 박원순 전 시장의 '비서실 직원에 대한 반성과 행동' 10가지 자필 메모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 비서를 평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피해자가 노동자로서 감수했던 업무와 대응에는 '시장이 사랑하고 총애한다'는 말로 '성'(姓)의 모욕을 덧씌우고, 성적으로 침해당한 폭력과 차별을 고발하면 바로 그 '성'(姓)의 작동을 부정하는 방식이 바로 성차별적 노동구조이자 조직문화다. 바로 그 조건 속에서 사건 발생부터 보궐선거까지 2차 피해가 확대재생산 되어 왔다.
우리사회가 성찰해야 하는 점은 박원순 위력 성폭력 사건을 바라볼 때 안희정 위력 성폭력 사건으로부터 무엇을 과제로 남길 것인지 배우는 데 실패했다는 것에 있다. "인수인계 사항들은 모두 지사님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한 것"이고 "'지사님의 기분'에 별표를 두 개"를 치라고 했던 적극적인 업무인계/교육 과정이 차별로 인정되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박원순 사건에서 비서의 자필편지나 인수인계서는 성차별 구조를 '부정'하는 근거가 아니라, 심기보좌 노동이 여성노동자의 행위와 감정을 통제하고 성차별에 대한 불공정한 인식을 강화한다는 사회적 인식을 얻는 계기가 되었어야 했다.
'자신들만의 정의' 대신
노동구조와 조직문화 자체가 성별화 과정이라는 인식이 없을 때, 노동의 성별화의 과정을 어떻게 해소해나갈 것인가, 성차별적 조직문화를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가라는 대안은 제시되기 어렵다. 대신 이미 존재하지만 적용되지 않았던 '원스트라이크 아웃' 같은 대책이 재선언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만 강화할 뿐 재발 방지와 노동구조의 변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대책만 반복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차별의 구조를 해소하기보다 기존의 조직 구성에 '여성'이라는 특정 성별의 참여나 참여 확대가 대안으로 제시되기 쉽다. 이 또한 여성 서울시장의 등장이 정의의 방향이라는 말처럼 공허할 뿐이다.
위력 성폭력 사건이 부정의와 차별을 바로잡을 수 있는 방향으로서 '일터'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보다, 거대 양당이 서로를 비판하는 '상징'으로서 등장하는 현실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그 누구보다 성평등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박원순조차도 어떻게 위력 성폭력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는가'를 집요하게 질문해야 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박원순 사건에 대한 사회적인 규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1년을 지나왔다.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는 입장은 진영논리에 근거해 지지자들에게 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사인' 역할을 했음에도, 2차 피해의 확산을 멈추기 위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박원순 사건에도 불구하고 계속 서울시정에서 성평등 정책을 계승하고 펼쳐나가겠다는 관점 없이 '박원순 계승'이 입에 오르내렸고, 비판을 받으면 자신들의 '진정성'을 모른다며 되려 역정을 냈다. 당헌·당규를 개정하면서까지 서울시장 후보를 냈지만,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인사들을 선거캠프에 영입했다가 결국 사퇴하는 풍경도 벌어졌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보궐선거를 앞두고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도 모른 채 정치적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방식으로 반복됐다. 이러한 패턴 속에서 '피해자의 일상회복'을 기원한다는 말은 책임에 침묵하고 상황을 면피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평등 정책의 취지와 성과를 후퇴시키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건 바로 더불어민주당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과와 약속은 누구든,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노동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정책과 실질적인 추진은 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 역시 뚜렷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이 변명으로 일관하는 상황은 이런 한계적인 입장에도 의미를 부여한다. 스스로 책임을 지워온 더불어민주당의 행보가 '여성'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사과를 사회적으로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책임이 정의를 향하려면
이제 '박원순이 그렇게까지 몹쓸 사람이었나'를 묻는 척 어떤 법을 누가 어떻게 어느 정도로 위반했는가, 어떤 처벌이 정당한가를 둘러싸고 반복되는 추태를 멈추게 해야 한다. 위력 성폭력의 해결과 재발 방지를 섣부르게 자임하지 말고, 여성노동자들이 놓인 구조적 차별과 폭력이 무엇인지부터 인지해야 한다. 그 정치적 책임은 피해자의 요구는 무엇인가, 그 요구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누가 그 피해회복과 변화에 관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박원순 사건의 피해자를 비롯한 수많은 여성들이 일터로 돌아가려던 그 길에서 묻는 책임을 피할 길은 없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프레시안>과 <비마이너>에 공동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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