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축출 국가
세기의 만남이었다.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이었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첫 악수를 나누는 3초간 전 세계의 이목이 싱가포르로 집중되었다. 세기의 회담에는 세계적인 무대가 요청되는 법이다. 양자 간의 회의를 준비한 장소는 카펠라 호텔이었다. 센토사라는 섬에 자리한다. 싱가포르에 있는 세계적인 리조트다. 자그마한 도시국가에서 세기적이며 세계적인 행사가 열린 것이다.
비단 2018년 6월만이 아니었다. 3년 전, 2015년에는 양안 사이 국/공회담도 열렸다. 대만의 국민당 당수 마잉지우와 대륙의 공산당 주석 시진핑이 1949년 분단이래 최초로 회동한 곳도 싱가포르였다. 영토도 작고 인구도 적은 이 소국이 획기적인 역사적 이벤트를 거듭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회담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굵직굵직한 글로벌 회의가 열리는 장소고, 글로벌 의제를 선도해가는 브레인 국가다. 종종 출장차 싱가포르를 방문하노라면 참관하고 싶은 국제 컨퍼런스가 숱하게 열리고 있음을 매번 목도하게 된다. 세계적인 지식공동체의 허브인 것이다.
객관적 지표상으로도 세계적인 국가임에 틀림없다. 세계은행은 지난 10년 동안 기업하기 가장 좋은 나라로 싱가포르를 꼽았다. 실제로 유럽과 미국의 주요 다국적기업 아시아 본부가 싱가포르에 자리한다. 7000개가 넘는 다국적기업이 이 비좁은 도시국가에 터하고 있으며, 11만 명이 넘는 외국계 인재들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세계경제포럼 역시도 기업 환경이 가장 좋은 나라로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꼽았다. 정부 정책 입안과 결정 과정이 매우 투명하고, 공공성에 대한 신뢰 또한 가장 높은 것으로 꼽힌다. 다보스포럼이 발표하는 <글로벌 경쟁력 보고서>에서 싱가포르는 늘 1, 2, 3위를 다투는 수위 국가이다.
비즈니스맨들에게만 매력적인 것도 아니다. 여행, 관광 경쟁력 지수에서도 세계 10위권을 오르내린다. 인도와 중국,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유럽과 아랍, 아메리카와 아시아가 혼종된 '토착적 글로벌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살아가기에도 여행하기에도 쾌적한 도시다. 오염 문제가 거의 없다. 공장이 드물뿐더러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 또한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 해풍으로 사라진다. 도시의 녹화도 무척이나 잘 되어 있다. 인구밀도가 워낙 높아 대부분이 고층 아파트에서 살아가지만, 녹화 사업에 만전을 기해서 도처에 공원과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가든 시티이자 파크 시티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도 삶의 질이 가장 높은 국가로 손꼽히며, 아시아에서는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곳으로 평가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친기업적이면서도 가장 친환경적인 도시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기적이었다.
출발은 엄혹했다. 1945년 이후 가장 늦게 등장한 신생독립국가의 하나였다. 1965년 8월 9일 독립했다. 독립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독립을 '당했다'.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로 탈퇴당한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국가도 아니요, 양안의 분열국가도 아닌, 축출국가로 시작한 것이다. 아니 '국가'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세계지도에서 보자면 그저 한 점에 불과한 땅을 얻었을 뿐이다. 싱가포르 전체 면적이라고 해봐야 서울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다. 천연자원마저 한 움큼도 없었다. 자원이 없으니 고정 수입원도 없었다. 생존에 필수적인 식수조차도 말레이시아에서 사 먹어야만 할 형편이었다. 다만 식민모국이었던 영국의 해군기지에 기생하고 있었다. 당시 싱가포르 인구 200만 가운데 10%가 군사기지와 관련된 사업에 고용되어 있었다. 전체 국민소득의 23%가 기지 경제, 기생경제로부터 나왔다. 헌데 설상가상으로 그 기지마저 6년 후에는 완전 철수할 예정이었다. 약 4만 명이 실직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안 그래도 12% 남짓했던 독립 당시의 실업률이 더 가파르게 오를 것 같았다.
외부 환경은 더더욱 나빴다. 위로는 연방을 탈퇴시킨 말레이시아가 자리했다. 선명한 색깔의 이슬람 정책을 표방하며 화교가 주민의 다수를 이루는 싱가포르와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로는 세계 최대의 이슬람대국 인도네시아가 위치했다. 해양 이슬람문명 사이에 외딴 섬처럼 자리한 도시국가가 싱가포르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1965년 당시에는 양국 사이의 지역 패권 다툼이 치열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영토분쟁이 싱가포르의 존속에까지 파장을 미쳤다. 내륙아시아는 해양아시아보다 상황이 더욱 안 좋았다. 베트남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무렵이다. 북베트남의 남진과 연동하여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말할 것도 없고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도 공산당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어느 누구도 싱가포르의 장래를 장담할 수 없던 시절이다. 허덕허덕 생존에 급급한 신생국가였을 뿐이다. 1948년 중동의 한복판에 생겨난 이스라엘보다도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불행 중 다행으로 시몬 페레스에 못지않은 또 다른 거물이, 아시아의 걸물이 있었다.
2. 대부(代父, Godfather)
거인이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정치의 장인이자 행정의 달인이었다. 타고난 리더십에 탁월한 안목까지 겸비했다. 국부라는 흔한 말로는 어쩐지 모자람이 느껴질 정도이다. 갓파더, 대부가 더 어울린다. 오늘의 싱가포르를 일구어낸 장본인, 국가 경영의 거장 리콴유 이야기이다.
40대 기수였다. 1965년 독립 당시 42세로 초대 총리를 맡았다. 신생국가 신출내기 신성이 아니었다. 1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 인민행동당(The People's Action Party)이 만들어진 1954년부터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31세부터 정당인이자 정치가로서 커리어를 닦아온 것이다. 당명부터가 상징적이다. 인민에 방점이 찍혔으되 공산당과는 달랐다. 이념을 추종하기보다는 실질적인 행동을 강조했다. 실용적이고 실리적이며 실무적인 실학 정당을 지향했다. 이데올로그의 당파싸움으로 바람 잘 날이 없던 숱한 좌파정당들과는 체질을 달리했던 것이다.
실학정당 인민행동당이 이끌어가는 싱가포르 또한 철저한 실학국가를 지향했다. 초대 총리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최대 목표가 생존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국제적으로 싱가포르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UN에 가입했으며, 영토를 보위하기 위한 군대부터 창설해야 했다. 국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경제발전 또한 당면과제였다. 특히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 다종교 사회를 통합하여 국가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간단치 않은 숙제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 철두철미 실력에 기초하고 실적에 기반한 체제를 만들어갔다. 싱가포르에는 아스라이 되돌아볼 황금시대의 역사와 전통 자체가 부재했다. 오롯이 미래만 있을 뿐이었다. 진보와 진화만이 생존의 방법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평등과 공정을 강조했다. 출신과 성분은 전혀 중요치가 않았다. 인맥이나 정실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오로지 능력과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만큼이나 법과 제도, 원칙이 강조되었다. 지도부라고, 집권층이라고 특권과 혜택을 누릴 수가 없었다. 그래야 국민을 통합할 수 있고, 조화로운 사회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를 배타했지만 서구의 민주주의를 추앙하지도 않았다. 이 또한 이념적 판단이라기보다는 철저한 실리적 계산의 소산이었다. 싱가포르식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했다. 개인의 사유재산은 인정하지만 토지 공개념을 포함한 사회주의적 요소 또한 매우 강했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늘 공공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이 우선되었다.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한 수많은 수단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을 뿐이다.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지고의 가치, 목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싱가포르 내각은 철저하게 리콴유가 기획하고 설계된 인재들로 채워져 갔다. 정당 출신의 직업 정치인들로만 구성하지 않았다. 기업가, 변호사, 과학자 등 다방면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모두에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국제관례에 정통하고 세계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여 글로벌 리더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것을 독려했다. 정부는 나라를 다스리는 행정기구인 동시에 평생 교육기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자문단부터 국제적으로 꾸렸다. 네덜란드 출신의 경제전문가 앨버트 원세미우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4년까지 20년 가까이 싱가포르와 리콴유를 자문했다. 매년 두 차례 방문하여 3주씩 머물며 싱가포르 관료들과 토론하고 정책을 함께 만들어갔다. 경제발전국이나 외환거래센터도 그렇게 설립됐다.
돌아보면 1970-80년대는 '종속이론'이 풍미했던 시절이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관계를 신제국주의, 신식민주의로 설명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세계체제론 역시도 자본주의가 중심-반주변-주변의 위계로 작동한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리콴유는 좌파 지식인들의 이론일랑 귓등으로 흘렸다. 커녕 미국과 유럽 등 최선진국과의 직접적인 교역과 교류에 전력을 기울였다. 세계에서 가장 기업 친화적인 제도를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싱가포르에서 살아가게 만들었다. 매일 아침 공식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는 세계 주식시장의 변동을 검토하며 1년 후, 5년 후, 10년 후의 변화에 입각하여 정책을 조정하고자 분투했다.
1980년대 싱가포르가 투자공사(GIC)를 설립할 무렵에도 로스차일드 상사의 부자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미국와 영국의 최선진 투자 시스템을 직수입하고 최고의 투자 매니저들을 고용했다. 이때 투자전략 고문으로 영입했던 제임스 울펀슨은 훗날 세계은행 총재가 되어 두고두고 싱가포르의 우군이 되어주었다. 1997년 IMF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휩쓸 때에는 JP 모건의 요한 올즈를 싱가포르 발전은행의 총재로 영입하여 금융개혁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사례는 다양하지만 원칙은 동일하다. 나라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에게라도 거리낌 없이 기꺼이 배워야 한다는 실용주의 정신이다. 주체와 자주를 내세워 옹졸 맞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 최정상의 지식과 정보와 기술과 접속함으로써 당당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높여갔던 것이다. 그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1965년 독립 당시 5백 달러에 불과했던 GDP는 2015년 5만 6천 달러를 넘어섰다. 미국과 일본보다도 높은 수치다. 불과 반세기, 딱 50년 만에 100배가 넘도록 성장한 것이다. 2015년 통계만 따지자면 국가경쟁력 세계 2위, 외환시장 거래규모 세계 4위, 국가청렴도 세계 5위의 글로벌-그린-클린 국가를 이룩해낸 것이다.
나는 역사가 영웅 일인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빼어난 지도자가 역사의 향방에 어마어마하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 또한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리콴유 없이는 오늘의 싱가포르를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말 그대로 위대한 영도자 동지, '수령'(首領)에 값했다. 국가 경영의 비전을 세우는 전략가이자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이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입안하기 위하여 거듭 리콴유에게서 지혜를 구했다. 헨리 키신저는 미국의 세계 경영을 위하여 평생토록 리콴유에게 자문을 청했다. 미-중을 막론하고, 동-서를 넘나들며, 좌-우에 개의치 않고 세계의 리더들이 리콴유를 따르고 모셨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싱가포르를 방문한 2015년이 리콴유 없는 싱가포르의 첫 번째 해이기도 했다. 2015년 3월에 눈을 감았다. 무에서 유를 창출한, 제3세계에서 제1세계를 도출한 거인의 임종이었다. 세기와 더불어 살았고, 세계와 더불어 갔다.
3. 위대한 유산
나무가 너무 크고 높으면 주변에 풀이 잘 자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늘이 넓어서 볕이 잘 들지 않기 때문이다. 거목이 쓰러지면 한동안 땅도 휑한 법이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포스트-리콴유 시대에도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다. 한때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가장 먼저 치고 달려 나가 세계 최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 헌팅턴은 리콴유가 만든 제도는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로지 서구형 체제만이 제1세계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예단한 것이다. 보기 좋게 빗나간 허언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지난 30년 싱가포르는 더욱더 세계에 개방적인 도시국가가 되어갔으며, 정부의 투명성과 청렴성 또한 더더욱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만큼이나 후계 구도, 후계자 수업도 철저했던 것이다.
리콴유는 '준비된 후계자'를 원했다. 대중에 영합하여 일시적인 인기를 얻는 정치꾼들이 지도자가 되어서는 천만만만 아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각에서 오랜 훈련을 쌓아야 했다. 기성세대와는 생각이 다른 젊은 세대 가운데 빼어난 인재를 잘 선발하여 현재의 장차관들과 팀을 만들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몇 달 짜리 정권 인수위가 날림으로 새 정부의 정책을 입안하고, 여당과 야당이 바뀌면 전임 정부의 정책을 통째로 부정하는 이른바 민주주의 국가의 병폐와 적폐를 답습하지 않는 시스템을 고안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마담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국가정책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중시했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강조했다. 그래야만이 민간도 혁신을 거듭할 수 있는 지속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이 조성된다.
그리하여 선발된 두 번째 총리가 고촉통이다. 리콴유 아래서 무려 13년 동안이나 정치수업을 받고 정당과 정부의 주요 부서에서 실무경험을 두루 쌓았다. 본디는 국영해운회사의 사장을 역임하며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CEO 출신이었다. 전공 분야라 할 수 있는 재무부와 통상산업부는 물론이요, 국방부와 보건부 장관까지 경험하며 부총리까지 올랐다. 1991년부터 2004년까지 14년 동안 총리직을 수행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가운데 싱가포르가 가장 글로벌한 국가로 진일보하는 그 시기를 책임졌던 것이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아세안의 실질적인 브레인 역할을 싱가포르가 도맡았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아셈 또한 싱가포르의 세계전략 소산으로 성사된 것이다.
고촉통을 이은 이가 현직 총리인 리센룽이다. 리콴유의 아들이지만 덕을 본 것은 거의 없다. 막후에서 리콴유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도리어 총리까지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철저하게 실력으로 검증받은 인물이다. 1971년 싱가포르 군에 입대한 후 국비 장학생으로 1974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수학 및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으며 1980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과와 문과를 망라한 학문을 연마한 끝에 다시 군대로 들어간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군부의 작전과 기획을 담당하는 주요 보직을 경험했다. 고촉통이 국방부장관이었을 때 국방부장관 정무비서를 지낸 이가 바로 리센룽이다. 1988년에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91년, 1997년, 2001년에 거듭 재선되었다. 이후 중앙은행 이사회 의장과 재무부장관 등을 경험하고 부총리 수업까지 마친 후에 2004년 8월에 총리에 발탁됐다. 고로 고촉통과 리센룽 모두 캡틴 리콴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리콴유 키드'라고 말할 수 있겠다. 보고 배운 리센룽은 이미 차기 지도자 그룹을 꾸려서 포스트-리센룽 시대를 준비하고 있음을 공식화한 적도 있다. 2015년 8월 독립 50주년을 자축하는 싱가포르를 견문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또한 서점에 깔려있는 다음 50년의 설계 <싱가포르 2065>가 벌써 출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리콴유가 인민행동당의 사무총장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할 때의 나이가 31세였다. 리센룽이 공부를 마치고 군부에서부터 정치 경력을 쌓기 시작한 나이는 29세였다. 경영과 경세를 한 세대, 30년 넘게 경험하면서 이씨 부자 모두 경륜가로 대성한 것이다. 5년, 8년짜리 대통령은 무엇을 이루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며, 무언가를 망가뜨리기에는 한없이 충분한 시간임을 여러 나라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한 세대는 바뀌어야 새로운 나라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백두혈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최고지도자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27세였다. 47세, 57세가 되었을 때 어떠한 수준의 인물이 되어있을지 단언하거나 장담하기 어려운 것이다.
관건은 주변에 보좌하는 인물을 최정예로 꾸리는 것이다. 눈과 귀가 되어주고, 손발이 되어주고, 무엇보다 브레인이 되어줄 코어가 있어야 한다. 비선 실세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당을 유능한 집단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조선노동당을 세계적인 수준의 스마트 정당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개인플레이가 아니라 팀워크가 중요하다. 시스템과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한다. 당이 체제개혁과 체질개선을 솔선수범해야 한다. 나는 레닌이 설파했던 전위당에 가장 어울리는 정당 또한 싱가포르의 인민행동당이라고 생각한다. 장기 집권하기로는 중국공산당도 있고, 일본의 자민당도 못지않다. 그러나 두 정당은 20세기형 전위정당이라기보다는, 각 나라 전통의 현대화에 가깝다. 중국공산당도 '공산당'이라기보다는 '중국당'이다. 누천년 중국의 학자관료 체제가 중국공산당의 외피를 두르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자민당 또한 에도 시대 봉건형 막부제의 현대화에 근접한다. 반면에 인민행동당이야말로 전위정당이다. 가장 앞에서 나라를 이끌고, 가장 앞장서서 인민도 이끈다. 조선노동당이 참조해야 할 최상의 모델이라고 여긴다. 글로벌 스마트 파티, 인민행동당을 샅샅들이 살펴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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