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문화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 사항'
'독서문화진흥법' 제1조
"이 법은 독서 문화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 사항을 규정하여 국민의 지적 능력을 향상하고 건전한 정서를 함양하며 평생 교육의 바탕을 마련함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국민의 균등한 독서 활동 기회를 보장하며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법률의 첫 번째 조항은 보통 그 입법의 목적이 선언되는 경우가 많다. 그 선언이 현실에서 실제 어느 정도 달성될 것인지는 조문의 장황함과 비장함과는 어떤 관계도 없지만. 가끔 어떤 법률이 내세운 제정 목적이란 마치 파산 기업의 분식회계와 같은 게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는데, 독서문화진흥법이 그렇다.
국가의 "독서 문화의 진흥"이 왜 필요한지, 과연 독서가 "국민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인지, "건전한 정서"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독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와 같은 질문들은, '망해가는' 한국의 출판 시장과 환경 앞에서 너무 한가하게 들린다.
작년에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도서정가제(출판문화산업진흥법) 문제를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책은 교육, 학술, 문화 발전에 필수적인 공공재로서, 국가경쟁력과 직결되는 문화콘텐츠이기 때문에 시장가격이 아닌 공공재적 가격제도가 필요하다'는 선언 역시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바로 가기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Q&A] 개정 도서정가제, 알기쉽게 풀어드립니다')
도대체 책을 왜 읽나
이제 유튜브 독재가 만개한 한국에서, 책이라는 고루한 매체와 독서를 화제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고루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이게 뭐라고>(장강명 지음, 아르테 펴냄)는 '말하고/듣기'가 점령한 시대에, 소멸하고 있는 '읽고/쓰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읽는다는 것이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거나 국민 개개인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기' 위한 어떤 질문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임을 나지막이 얘기한다. 이를테면, '좋은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와 같은 주제를 놓고 맨 정신으로 친구와 토론할 때, 책은 가장 긴요하고 정확한 매체로써 기능할 수 있다.(<책, 이게 뭐냐고> 2장 '책을 잃는 일, 책에 대해 말하는 일' 중 '예비 장인이 예비 사위에게 하는 질문과 맨정신 토론')
작가 장강명은, 한 출판사가 진행하는 동명의 책 소개 프로그램 <책 이게 뭐라고>를 가수 요조와 함께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작가는 흥미로운 제작 뒷이야기와 더불어 자신의 독서 경험과 생각, 프로그램에서 만난 작가들과 (상상의) 독서 공동체에 대해 얘기한다. 특히, 제작팀은 그 자체로 훌륭한 독서 클럽이 되어 프로그램을 열정적으로 만들어 나가는데, 스프레드 시트를 통해 치열하게 사전 독서토론을 하던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다. 제작팀과 작가의 팀워크가 실제로 괜찮았던 만큼, 팀의 유쾌하고도 진지한 기운이 저자의 덤덤하지만 유머러스한 문체로 녹여져 <책, 이게 뭐라고>를 단숨에 읽히게끔 만든다.
책 전반을 통해 작가가 독자와 독서 생태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은, 말하고 듣기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을 애써 지키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에 더해 신문기자로 월급을 받고 살다가, 덜컥 전업 작가가 되어 인세로 생활하게 된 저자 자신의 생존 조건 역시, 읽는 것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이해관계를 떠나, 이 시대에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정보들은 책보다 비용 효율적으로 구글을 통해 얻을 수 있는데, 어떤 재미들은 유튜브를 통하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빠른데, 왜 굳이 책인가. 여러 답들이 있겠지만 이 무한 가속도의 시대에, 한가함을 품고 있는 책의 속성이야말로 독보적인 재미와 의미의 원천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책이야말로 가장 느린 매체이고, 그 느림은 어떤 다른 매체도 결코 이길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어서, 책을 통하지 않고선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 느림은 틀림없이 우리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사고(思考, 생각하고 궁리하는 것, 심상이나 지식을 사용하는 마음의 작용, 개념·구성·판단·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표준국어대사전))로 이끌 수밖에 없고, 끝내 책은 우리를 '가축화'로부터 방어하는 데 가장 정확한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장강명은 다른 에세이에서 '애완인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인간이란 자기 인생을 걸고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된다. (중략)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영원히 애완동물”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애완 인간이란, 학벌도 좋고 영어도 잘하지만 스스로 사표 낼 용기가 없어서 아버지가 대신 사직서를 내준 젊은 엘리트의 모습으로 대변된다.(<5년 만에 신혼여행>(장강명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중 'D-약 60일: 보라! 울트라 괴기 시리즈와 모험을 벌여야 할 때') 거칠게 말하자면, 읽지 않는 자 모두가 애완인간이 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책을 읽으면서도 애완인간이 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SNS의 댓글은 명예훼손죄로 처벌이 가능
이 유쾌하고 진지한 책에서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최근 병력을 솔직하게 공개하는 장면이었다. 그가 병증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다. 담담하게 고백하긴 했지만, SNS를 통해 작가로서 견디기 어려운 악담을 들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수 있겠다.(그 '악플러'들에 대한 분노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한 가지 조언으로, DM은 처벌하기 어렵지만 공개된 댓글은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다.) 내게는 그의 발병이, 읽고 쓰는 인간이었던 저자의 원래 모습과, 어느 정도는 강요되었던 말하고 듣는 겉모습 사이의 틈이 초래한 비극으로 느껴졌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 한 편의 매력적인 에세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온몸으로 구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읽고 쓰는 사람은 결국 읽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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