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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이스라엘을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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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이스라엘을 배워라

[단번도약, 북조선] 텔아비브 : 월드 와이드 웨이브

1. 봄의 언덕

오아시스 같은 도시이다. 푸른 바다로 가라앉는 붉은 일몰이 일품이다. 하얀 모래사막을 지나면 파란 지중해가 펼쳐진다. 지중해성 기후, 겨울도 포근한 도시였다. 총천연색 수영복을 입고 서핑을 즐기는 노인도 여럿이었다. 평온한 안식처 같은 장소이다. 본디부터 늘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부서진 배를 탄 66가구의 유대인 가족이 이곳에 당도한 날이 1909년 4월 11일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히브리 도시를 건설하자는 다짐으로 농가 운동을 발족시켰다. 텔아비브가 출발한 것이다. '텔'(tel)은 언덕을 뜻한다. 아비브(avia)는 봄이라는 뜻이다. 텔아비브는 유대인이 소망하는 '봄의 언덕'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도 30년 전 ‘봄의 언덕’에서 시작된 것이다. 보금자리가 생기자 유럽에서 박해받은 유대인들의 이주가 줄을 이었다. 홀로코스트를 피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지중해의 새로운 고향, 텔아비브를 찾았다. 그들이 가진 재능과 기술, 지혜도 결집되었다. 공동의 선을 위하여 세계 최고의 도시를 만들자는 뜻으로 한마음 한 몸이 되었다.

그 가운데는 바우하우스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처음 설립된 이후 데사우, 베를린까지 세 도시에 거쳐 14년간 이어진 디자인 교육기관이 바우하우스이다. 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솟아난 예술과 기술의 통합운동, 소셜 디자인 운동이기도 했다.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에서 바우하우스의 비전은 만개하지 못했다. 대신에일군의 유대인 건축가과 공학자들이 1930년대 집단적으로 텔아비브로 이주하여, 전통의 중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실험해볼 수 있는 백사장, 백지를 얻은 것이다. 모래 언덕 위에 4000여개의 바우하우스 건물을 지으면서 '화이트 시티'가 탄생하였다. 둥근 발코니, 작고 깊은 창문, 그리고 하얀 벽면 등 독특한 건축양식이 도시 자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게 하였다. 독일에서 뿌린 씨앗이 바다를 건너 이스라엘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핏빛 역사의 아픔을 백색 미학으로 승화시켰다.

▲ 바우하우스 박물관. ⓒ이병한

집을 지은 다음에는 일터를 꾸렸다. 디아스포라의 비감은 비장한 동료애로 진화하였다. 온마음 온몸으로 한 살림 운동에 앞장선다. 집단농장을 만들어 공동소유와 공동육아, 공동식사를 실험하는 터전이 바로 키부츠였다. 키부츠란 '무리, 모임'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기원한다. 국유도 아니요 사유도 아닌 공동체 정신의 구현이었다. 유럽의 박해를 피해 새 보금자리를 구했으되, 그 땅 또한 사방팔방이 이슬람 문명으로 둘러싸인 외딴 곳이었다. 물도 자원도 없는 척박한 모래땅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든 함께 해결하고, 공평하게 나누는 삶의 방식이 필요했다. 상부상조와 유무상자에 기초한 공동체 의식은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

공유 오피스 문화를 촉발시킨 '위워크'(we work)가 이스라엘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위워크가 구현한 '서로 돕고 나누면 모두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공유 정신의 뿌리에 키부츠의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 세계로 확산된 위워크는 단순한 공간 제공에 그치지 않는다. 커뮤니티 형성과 파트너십 구축에 공을 들인다. 시멘트 벽면 대신에 유리창으로 내부를 조성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개방적 인테리어를 연출하는 까닭이다.

키부츠에서 발원된 혁신산업은 공유경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척박한 땅에서 식량을 생산하기 위해 지혜를 짜냈던 농업 기술이 현재의 바이오메디컬, 대체에너지, 화장품 산업 등으로 진 화했다. 그래서 야채와 과일 등 농산물이 매우 신선하다. 유라시아 곳곳을 여행했지만 탈아비브의 카페와 레스토랑은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 혁신적인 관개시설 덕분에 사막국가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과일과 채소를 직접 재배하는 나라가 되었다. 1년 내내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도 야훼의 축복이 되었다. 이웃한 알라의 석유 국가들과는 식생활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양고기와 유제품에 의존하는 유목민의 식문화와는 판이하다. 텔아비브에만 400개가 넘는 채식 식당이 성업을 이루고 있다. 40만이 넘는 시민들 가운데 채식 지향을 밝힌 숫자가 10만에 이른다. 꼭 비건 전문 레스토랑이 아니더라도 일반 식당이나 베이커리, 카페에서도 채식 선택권은 늘 보장되어 있다. 해마다 비건 페스티벌도 열린다. 세계 최대 규모의 비건 축제로 5만 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려들어 100가지가 넘는 다양한 채식 음식을 음미한다. 이스라엘 관광청이 자국을 ‘세계 최대의 채식주의 국가’라고 자랑스레 소개하고 있는 까닭이다.

처음부터 텔아비브는 다양한 민족이 모여 형성된 디아스포라 도시였다. 뿌리는 유대교였으되, 국적은 다종다양했다. 유럽, 러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구사하는 언어도 독일어, 아랍어, 루마니아어, 모로코어 등 다채로웠다. 그래서 눈이 맞고 살을 맞대어 한 가정을 이루어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경우가 허다했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가 뒤섞이는 해방촌과 해방구가 건설되자 성소수자 커뮤니티도 활발하게 형성되었다. 텔아비브 시민의 1/4이 성소수자인 것으로 추산된다. 매년 6월이 되면 수만 명의 군중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화려한 퍼레이드를 펼치는 세계 최대 규모의 LGBT 축제가 벌어진다. 주거지와 상점은 물론이요 시청을 비롯한 정부기관까지 온통 무지개 깃발이 펄럭거린다.

▲ 바이츠만 연구소. ⓒ이병한

이 특유의 공유문화와 개방문화는 과학연구가 만개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바우하우스 건축물이 속속 들어서던 1934년에 바이츠만 연구소도 만들어진다. 바이츠만은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학문의 기초부터 다지고 나라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래서 기초공사가 부실한 모래성이 아니 될 수 있었다. 그간 바이츠만 연구소는 3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면서 명실상부 세계 5대 기초과학 연구소로 손꼽히고 있다. 현재 교수와 학생 등 2600명가량이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장기적인 안목으로 기초과학 연구에 집중한다. 연구소가 가장 공을 들이는 것은 인재의 발굴이다. 탁월한 사람은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노력하는 내적 열정으로 활활 타오른다. 그리하여 연거푸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본인의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내적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을 앞서 찾아내 무한대의 자유를 허여해 주는 것이다. 특정 연구 주제를 제시하거나 성과를 재촉하지 않는다. 자유로워야 창의성이 최적화된다. 한가해야 창조력이 극대화된다. 오로지 비범한 인재가 인류 전체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놀이터, 플랫폼을 장만해 주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잠재된 가능성에 투자하는 것이다.

그 무한대의 상상력을 보장해주는 기초연구가 원체 탄탄하기에 텔아비브가 혁신도시, 기업도시로 진화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1인당 스타트업 수가 가장 많은 국가이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등 최첨단 영역에서 7000개가 넘는 스타트업이 들불처럼 들풀처럼 솟아나고 있다. 그 기업들의 대부분이 텔아비브에서 창업한다. GDP 대비 R&B 투자 세계 1위 국가가 이스라엘이고, 혁신지수는 세계 10위 행복지수는 세계 11위인 까닭도 세계에서 가장 창업하기 좋은 도시 5위의 텔아비브 때문이다. 신기술과 엔지니어링 등 혁신 분야에 대한 지원과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할 수 있는 완벽한 인프라를 제공한다. 유능한 인재와 세계를 바꿀 혁신 기술을 찾는 전 세계의 투자자들이 밴구리온 공항을 분주하게 오고가는 까닭이다. 고로 텔아비브는 이웃한 예루살렘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제공한다. 종교인들의 성지 순례가 끊이질 않는 오래된 신의 도시가 아니다. 비즈니스맨들이 시장을 순례하는 글로벌 혁신도시이다. 창조주의 나라가 창업가의 나라로 진화한 것이다. 21세기 이스라엘을 알고자 한다면 필히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아비브를 방문해야 하는 까닭이다.

▲ 더 라이브러리 사무실. ⓒ이병한

2. World Wide Wave

아무리 개방적 공유문화가 뿌리깊다한들, 또 아무리 기초과학연구가 튼튼하다 한들, 문화와 학문이 곧바로 산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을 시장과 접목시키는 촉매이자 이음매, 커넥터가 바로 금융이다. 바우하우스부터 바우츠만까지 텔아비브가 축적한 저력을 세계 최고의 창조경제 미래도시로 승화시키는 데도 혁신 금융이 혁혁한 역할을 하였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행하는 단번도약의 발판에 창조 금융, 요즈마 펀드가 있었다.

3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변화이다. 한 세대 만에 완전히 딴 나라가 되었다. 1980년대 이스라엘은 디플레이션을 비롯하여 경제위기의 깊은 수렁에 빠져있었다. 1985년 타개책으로 강구한 것이 수석 과학실(Office of Chief Scientist) 신설이다. 장관급에 해당하는 수석 과학관(Chief Scientist) 직책을 만들어 전권을 주었다. 경제 발전의 근간은 과학과 기술이다. R&D 법안을 만들어 미래 산업의 트랜드를 미리 파악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와 개발을 추동하는 발판이 되었다. 공무원 특유의 위험 회피 성향과 행정부의 과도한 관료주의에 휘둘리지 않는 독자적인 별동대를 꾸려서 정부 주도형 혁신에 발동을 건 것이다. 단기적인 수익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장기적인 변화를, 파괴적인 혁신을 꾀하기에도 적합했다. 실용적이고 실무적이며 실리적인 실학국가로 진화한 것이다.

겨우 반등을 꾀하는 내부 제도를 정비했더니 이번에는 외부에서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소련이 붕괴한 것이다. 적색 제국이 해체되었다. 냉전이 일방적으로 종식되었다. 파장은 전 세계로 미쳤다. 캘리포니아발 world wide web을 능가하는 시베리아발 world wide wave의 충격파였다. 구소련에는 유대계도 수백만 명을 헤아렸다. 100만 명 이상의 유대계 러시아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기를 희망했다. 일백만이 넘는 탈소자의 고난의 행군은 당시 오백만 소국 이스라엘에 충격파가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높은 실업률에 허덕이고 있던 나라에 이민자 내지는 난민들이 몰려드는 꼴이었다. 나라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또 기회이기도 했다. 고급 인력이 많았다. 소련의 국책 연구기관과 대학에서 근무하던 이공계 박사들과 교수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이다. 지혜롭게 활용하면 축복이 될 수도 있었다. 따뜻하게 맞이하고 각별하게 모시어서 주택과 일자리와 필수품을 제공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과학 지식과 기술 역량을 극대화하여 발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별동대가 절실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이스라엘 전역에 걸친 24개의 기술 인큐베이터이다. 구소련의 과학자들이야말로 미국과 자웅을 겨누는 학문적 성취를 거두었음에도 그것을 현장에서 구현하는 노하우를 익힐 수가 없었다. 시장이 부재했던 고로 '산학협력'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국가를 위해서, 국익을 위해서 일하는데 익숙한 연구자들이었던지라 실용성과 수익성을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고로 기술 인큐베이터는 과학지식을 제품과 상품으로 전환시키는 변환 장치였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과학자들을 시장의 혁신가, 기업가로 진화시키는 재교육장이기도 했다. 연구자들은 이제 시장의 니즈를 고려하고, 예산을 설계하고,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마케팅 계획서를 작성하고, 효과적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럼에도 체제 전환과 라이프스타일 전환, 자본주의에 적응하는 일은 녹록한 과업이 아니었다. 역시나 이 방면으로도 이스라엘 정부는 멀리 보고 통 크게 접근했다. 기술 인큐베이터에 투자하는 예산을 수업료라고 생각했다. 그 우수한 과학자와 연구진들이 새 보금자리 이스라엘에 적응하도록 돕고, 세계에 개방된 서구식 비즈니스 환경에 익숙해지도록 여유 시간을 확보해주는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원천 과학기술 확보에도, 시장에서의 경쟁력 제고에도 기술 인큐베이터는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수석 과학실 신설과 기술 인큐베이터 설립으로 이스라엘은 1990년대의 세계 신질서에 적응해갈 수 있었다. 내우외환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단번도약'이라고 평가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구석이 있었다. 기술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된 신생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을 해서 유니콘으로 성장하는 데는 또 다른, 더 많은 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제 시장과 튼튼하게 연결된 혁신 금융이 필요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 것이 요즈마 펀드이다. 요즈마는 뜻부터 히브리어로 혁신을 의미한다. 탈소련 이주민을 수습한 1993년에 공식 출범하였다. 세계적으로도 매우 이례적인 조직이었다. 벤처 캐피탈이라고는 하는데 순수 민간 자본이 아니었다. 오히려 국영 기업에 근접했다. 민과 관이 협력했다. 관이 4, 민이 6의 황금비율로 짜여졌다. 공영기업, 공기업이라 함이 더 합당할지 모르겠다.

▲ 요즈마 그룹 로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 본질은 벤처 캐피털이었다. 자본의 모험, 벤처 금융은 미국 특유의 문화였다. 이스라엘로서는 모험이고 실험이었던 것이다. 지구 반대편 실리콘밸리가 이스라엘 변화의 롤모델이 되었다. 요즈마 펀드는 실리콘밸리를 벤치마킹하여 벤처 기업이 비즈니스 전략을 수립하고, 전략적인 파트너에게 해당 기업을 매칭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과감한 자본 투자로 스무 개가 넘는 이스라엘 벤츠 기업들이 나스닥에 상장되었다. 역으로 이제는 전 세계 벤처 자금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었다. 현재 이스라엘 스타트업 투자액의 9할 가까이가 해외 펀드이다. 세계 투자자들이 가장 주시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민-관 협력의 상징은 요즈마 펀드의 성공에는 민-군 협동을 대표하는 탈피오트의 기여 또한 다대했다. 10년 가까운 군 생활을 통하여 거대한 혁신을 추구하는 체질을 습관으로 익힌 이들이었다. 창업과 창조가 일상의 연속이었다. 때를 맞춤하여 벤처 펀드가 출범하면서 '체크포인트', 'ICQ', '에코랩' 같은 탈피오트 출신 CEO들이 창업한 혁신 기업들이 혜성처럼 속속 등장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이스라엘이 경험한 탈냉전이 참으로 공교롭다. 소련에서 탈출한 고급 두뇌에 미국의 벤처 문화를 결합시켜 혁신적인 창업국가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구대륙과 신대륙을 아울러 다른 문화와 지식에서 경험을 쌓고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글로벌 국가도 될 수가 있었다. 냉전의 지정학을 훌쩍 뛰어넘어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화의 첨병 국가로 진화한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한 세대를 걸쳐 축적된 이스라엘의 스타트업 문화가 집약된 장소가 더 라이브러리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고층 빌딩이라고 하는 샬롬 타워 3층에 자리한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본래 공공 도서관이었던 곳을 혁신파크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국가가 주도하여 요즈마 펀드를 성공시켰다면, 더 라이브러리는 텔아비브 시가 주도한 공간이다. 비영리 공간이기에 위워크 같은 공유 사무실보다도 임대료가 훨씬 더 싸다. 중앙정부만큼이나 지방정부 역시 당장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칸막이 없는 넓은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여 있고, 언제든 함께 이야기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우연히도 한국 청년도 마주칠 수 있었다. 더 라이브러리에는 해외 창업자와 개발자들을 초빙하여 일정 기간 머물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전 세계 창업자들이 상시적으로 교류하면서 비즈니스를 펼쳐나갈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몸통은 여전히 지중해, 중동에 뿌리박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정신과 영혼만은 5대양 6대주를 가리지 않고 전 지구적 파동을(world wide wave)을 일으키고 있었다.

3. 다이아스포라 다이내믹(diaspora dynamic)

물론 천운도 따랐다. 천시가 도왔다. 천신만고 끝의 천재일우가 열렸다. 1990년대 천지인이 딱딱딱 들어맞았다. 미소냉전이 끝나며 중동에도 해빙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오슬로 평화협정 등으로 이스라엘 디스카운트 요소가 덜하게 되었다. 소련과 상대적으로 가깝다는 지리 또한 이점이었다. 구소련의 유대인들 상당수가 대양 건너 미국이 아니라 소양(지중해) 넘어 이스라엘을 택했다. 천군만마 고급 인재가 대거 투입된 것이다.

그럼에도 미끄러져나갈 수도 있는 운을 부여잡고 기회로 만드는 일이 바로 사람의 몫이다. 이스라엘에서는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수석 과학실도 기술 인큐베이터도 요즈마 펀드도 죄다 국가 프로젝트였다. 정부가 솔선수범하여 가장 담대하고 도전적인 일감을 만들어내고 실현시켜 나갔다. 이스라엘판 흑묘백묘, 정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정부의 혁신적인 참여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창조경제를 일구게 된 것이다. 모험이 모범적인 모델을 만들었다. 탐험이 탈냉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융합시킨 독특한 창업국가로 진화시켰다. 지식기반 경제와 금융자본주의 등 1990년대 이후 30년, 한 세대의 물결이 모두 이스라엘의 변화에 안성 맞춤한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2021년부터 앞으로 30년, 다음 세대는 전혀 다른 세계사의 물결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그 분기점이 될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독주하던 시절이 저물었다. 미국에 못지않은 혁신의 거점이 중국이 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합한 숫자보다 더 많은 스타트업이 중국에서 명멸하고 있다. 나스닥 등 미국 주식 시장만 바라볼 이유도 사라졌다. 상하이와 베이징, 홍콩을 필두로 싱가포르와 대만까지 범중화권 및 전 세계 화교의 금융 네트워크 역량도 버금갈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지난 150년 세계사의 대반전이 완수된다. 미국에서 중국으로, 서방에서 동방으로,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힘의 전이가 완결된다. 바로 그 시대에 북조선은 새로운 길, 단번도약을 시도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이상으로 과감하고 도전적이고 모험적이어야 한다. 개발독재국가, 발전국가 모델을 답습할 것도 없이 곧바로 곧장 혁신국가, 창업국가, 미래국가로 도약해야 한다. 천시도 일조할 것 같다. 미중간 국력의 격차가 좁혀질수록 북조선의 지정학적 가치는 G2 양국에 모두 올라간다. 중국에 너무 가까워지지도 말고 미국과는 너무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 절묘한 균형 속에서 남북 평화의 촉진자 및 동북아의 균형자 노릇도 할 수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위치와 위상이 국가의 운명을 만들기도 한다.

일단 들려오는 말은 조짐이 나쁘지 않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했던 선대의 원론에서 한층 진일보했다. '과학기술강국 도약'을 목표로 삼고 있다. '과학기술을 자기 집안일처럼 챙기라'고 독려도 하고 있다. 그래서 조성된 것이 대동강 쑥섬에 자리 잡은 과학기술전당(Sci-Tech Complex)이다. 다만 과학과 공학만으로는 시장과의 접점이 열리지 않음이 이스라엘의 과거가 명료하게 보여주는 바이다. 경영과 금융이 반드시 결합되어야 한다. 기왕이면 처음부터 세계적인 경영과 세계 최고의 금융과 접목되어야 한다. 주체와 세계의 가교를 놓아야 한다. 그때 주목해야 할 대상이 바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이다. 북쪽의 고려인과 조선족, 남쪽의 자이니치와 코리안 아메리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북조선을 등졌던 탈북자 1세대의 자녀들이 이제 30대로 진입하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서 신조선인, 신세계인으로 성장한 첫 세대이다. 누구도 가지지 못한 경험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열망과 의지를 품고 있기도 하다. 이들과 북조선의 접점을 반드시 만들어내어야 한다. 행정부 기관으로 디아스포라부나 디아스포라청을 신설해 봄직하다.

▲ 평양 대동강 쑥섬에 있는 과학기술전당. ⓒ연합뉴스

혼자만의 공연한 공상이 아닌 것은 2018년 가을, 뉴욕에서 만난 탈북자 자녀 1세대 엘리트의 고심어린 토로에서 비롯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UN 총회가 열리는 시점을 맞춤하여 컬럼비아 대학에서 글로벌 학술회의 <뉴욕평화포럼>이 열렸다. 북조선 및 한반도 평화에 관심이 깊은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결집했다. 한참 남북 및 북미 간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시점인지라, 새로 부임한 김성 대사가 몸소 만찬장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 참여한 홍익표, 이재정 의원과도 눈인사를 나누고 말을 섞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여한 하버드대학의 젊은 의사가 바로 탈북자 1세대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가슴 속 깊이 북조선을 돕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청년이었다. 이미 다양한 국적을 가진 그들만의 글로벌 네트워크도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적지 않은 숫자에다 작지 않은 역량을 갖추었다. 부모님이 나고 자란 북조선을 번듯한 나라로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고 싶어 했다.

이들은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와도 결을 달리한다. 섣부른 남북통일도 아니요, 어설픈 체제전복을 꾀하지도 않는다. 체제의 진화, 거버넌스의 혁신을 추동한다. 이들은 김정은이나 김여정과도 연배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 동년배 동세대이다. 하기에 외국을 상대하는 외교부도 적절하지 않고, 내정을 담당하는 기왕의 부처도 어울리지 않는다. 디아스포라청 같은 제3의 기구를 만들어 접점을 늘릴 것을 제안하는 까닭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에 화인/화교가 지대한 공헌을 하고, 이스라엘의 체제혁신에 유대인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처럼, 북조선의 단번도약에도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의 역량을 총결집시킬 수 있는 새로운 허브가 필요한 것이다. '다이아스포라 다이내믹 이니셔티브'이다.

조금 더 혁신적으로 상상해보자면, 김정은 위원장의 정책 자문단부터 국제적으로 구성해 봄직하다. 진즉에 동/서양 권력 전이를 예상하고 싱가포르로 거점을 옮긴 세계적인 투자자가 짐 로저스이다. 전 재산을 북조선에 투자하고 싶다는 희망을 오래전부터 피력해 왔었다. 정기적으로 조언을 청하는 인사로 삼아도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경청할 정보가 수두룩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세계적인 미래사학자 유발 하라리를 모실 수도 있다. 그 또한 과거와 전혀 판을 달리하는 미래문명의 실험장으로 북조선을 종종 언급하고 있다. 자문을 구해서 해로울 일이 전혀 없다. 백악관에서 물러난 도널드 트럼프와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회할 수도 있다. 미국의 대통령 자격으로 추진하는 북미 간 화해는 지난한 과업이었지만, 비즈니스맨으로 다시 조우한다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지 모른다. 가까운 이웃나라 중국의 마윈이나 일본의 손정의에게도 자문을 청할 수도 있다.

더더욱 파격적인 차세대 지도자라면 남조선, 한국의 기업가들과도 통 크게 폭넓게 교류해야 한다. 임기 5년제 대통령, 실제로 일하는 기간은 3년 남짓에 불과하다. 왔다가 금방 또 물러나는지라 남한의 정책은 조석변개, 불확실성으로 불투명하다. 선경후정(先經後政)이 첩경이다. 최근 5조 재산으로 재단을 만든다는 김범수 카카오 의장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재계를 이끌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과도 핫라인을 개통하면 좋을 것이다. 고향이 북쪽인 기업가 집안을 전략적으로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성상인의 후예인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회장은 어떠할까. 한방 화장품이야말로 북조선의 고려의학과 의기투합해 볼 수 있는 최적의 비즈니스이다. 오산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을 방문해 본적이 있다. 오가산(五佳山) 원시림 일대에 더 큰 규모로 더 아름다운 식물원도 조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가산은 한반도와 유라시아의 식생물이 만나는 곳이라는 상징성도 내포한다. 20세기 후반 한국의 발전을 이끌었던 태평양(pacific) 연결망을 북조선과의 협력으로 21세기 유라시아까지 더더욱(amore) 확산시키는 world wide wave를 촉발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기후재난이 야기하는 전염병도 일시적인 현상이 아닐 것인바, 센트리온 같은 바이오기업과의 협력 또한 적극적으로 도모해 볼만하다.

디아스포라 부처 창설부터 한국의 기업가를 포함하는 국제자문단 구성까지 창조적 파괴를 거듭 추진하려면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이 확고히 구축되어야 한다. 특히나 백두혈통으로 권력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북에서는 리더의 자질과 안목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른 나이에 집권했기에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학습 기간도 꽤나 확보가 된 셈이다. 실패를 해보지 않으면 실력도 쌓이지 않는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는 법, 집권 초기의 시행착오는 집권 중기와 후기의 밀알이 되고 밑천이 되어줄 수 있다. 여기서도 참조해 봄직한 인물이 이스라엘에 있다. 20대에 총리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90대에 대통령까지 역임하며 70년을 국가 경영에 참여했던 정치 10단, 시몬 페레스이다. 중국의 덩샤오핑이나 싱가포르의 리콴유보다 배울 점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 주에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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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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