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시행됐다.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한 사업 또는 사업장에 복수노조가 있을 시 일차적으로 과반수노조에 교섭권을 부여하고 소수노조와의 교섭 여부는 회사가 정하게 하는 제도다.
제도가 이와 같다면, 회사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노조를 과반수노조로 만들려는 생각을 갖기 마련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조가 소수노조가 되면 '소수노조와 교섭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의사 표시로 해당 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 속 가정이 아니다.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시행 10년을 돌아보면, 삼성, 유성기업 등에서 실제로 위와 같은 일이 발생해왔다. 소수·미조직 노동자의 대표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복수노조 제도가 소수노조의 교섭권을 제약하는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와 결합해 왜곡된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5월 회사 입맛에 따라 소수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할 수 있게 한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9월부터는 헌법재판소 앞 1인 시위도 매일 진행 중이다.
<프레시안>은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일터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민주노조'를 어떻게 억압하는지, 왜 폐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민주노총의 법률적 검토 및 주장, 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싣는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어느새 탐스러운 꽃과 열매를 맺는 우람한 나무로 자라기까지 무수한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포근한 흙이 겨울추위를 막아 감싸주고, 하늘은 햇살과 비로 양분이 되어 돕는다. 싹을 틔우면 농부는 잡초를 뽑아가며 돕지만, 새로이 돋기 시작한 어린 잎사귀를 보며 함부로 가지치기 해버리는 미련한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저 몰아치는 비바람이나 뜨거운 햇살이 위태로울 때 혹은 해충이 창궐하면 이를 막아줄 방법을 고민할 뿐, 제 마음에 드는 가지만 남겨 원하는 형태로만 키워 열매 맺지 못하는 관상목처럼 만들어버리는 어리석은 짓은 나무를 키우는 농부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이렇게 만물의 보살핌으로 자라난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라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자신을 키운 자들에게 보답하며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농부와 자연의 마음으로 노동조합이라는 나무를 키우고 있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귀한 가치라 명명한 노동자들의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3권이라는 씨앗이 자라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켜주는 제도를 잘 구비 및 운영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10년의 폐해를 살펴보면 교섭창구단일화제도는 보호가 필요한 갓 올라온 민주노조의 어린 꽃대를 알이 굵은 하나만 남기고는 모조리 가지치기해버리는 우매한 손길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노조 만들자 사측 도움 하에 갑작스레 설립된 복수노조
어느 날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몇 달 전 설립총회를 개최하고는 신나게 조합원을 모집하면서 회사와 교섭을 막 시작했던 노조로부터였다. 회사가 갑작스러운 기업노조의 탄생과 교섭요구를 이유로 그동안 진행되던 교섭절차를 전면 중단했고, 조합원 모집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는 갖은 행위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부당노동행위이기 때문에 교섭을 강제할 방법을 문의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지난 10년간 비일비재했던 흔한 사례였고, 현행 제도하에서는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사례였다. 부서별로 관리자 주도하에 갑작스러운 회식이 연일 조직되고 직원들을 격려한다는 명목으로 대폭 인상된 회식비를 쓰는 자리에서는 금속노조에 대한 비방과 기업노조 가입권고가 대놓고 행해졌다. 타당한 이유없이 인사평가 시기가 예년보다 몇 달이나 앞당겨진다는 공고와 회사 게시판에 노조간 편을 가르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기업노조가 낫다는 글들이 도배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들의 SNS에는 관리자들로부터 전송된 금속노조에 적대적인 기사가 링크가 수시로 왔지만 조합 선택시 이런 점도 참고하라는 개인의견이라는 문구도 함께였다. 기업노조에 가입하면 부서장 전결로 연장근로를 달아 조합비를 보전해준다는 등의 조합비 대납 사례도 있었지만 증거로 확보된 것은 극히 일부였다. 급기야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기업노조에 가입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은밀하지만 직원 모두에게 회사의 의중은 분명히 전달되었고, 결국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가 개시되어 교섭요구노조가 확정되는 10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기업노조의 조합원은 수십배 폭증하여 과반 이상이 되었다.
부당노동행위로 고소장이 접수되었으나, 개시된 창구단일화 절차는 속행되고, 수개월이 걸리는 고소 사건의 첫 조사도 개시되기 전에 창구단일화 절차는 마무리되고 기업노조가 다수노조가 되었다. 노동위원회에의 이의신청 등이 진행되었고 여러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의혹과 증거가 제출되었으나 사건처리기간이 고작 10일(혹은 20일)에 불과한 시정신청단계에서 사용자의 은근한 회유와 압박행위가 기업노조 조합원의 가입에 미친 인과관계를 인정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중노위 재심과 무관하게 사용자는 기업노조와 교섭을 속전속결로 진행하고 단체협약을 마무리하였다. 허탈하게도 체결된 단체협약에는 대거 가입하여 기업노조가 다수노조가 되는 과정에서 영향을 준 외국인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내용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이후 기업노조 위원장은 회장과의 식사와 골프회동에 종종 등장했다고 한다. 회사에서 산재로 노동자가 여럿 사망해도 기업노조가 나서 회사는 최선을 다했다고 방어하는 볼썽사나운 꼴이 연출되기도 하였다. 문의한 간부는 소수노조가 되자 조합원들이 직간접적 불이익이 심하고 작업장 분위기가 흉흉하다며 차라리 복수노조 허용 이전이 나았다고 울먹이기도 했다.
부당노동행위 소극적 처벌 토양 위에 확산되는 복수노조 활용 노조파괴
사실 이런 일들, 혹은 더 심한 일들이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과정에서 발생한다.
노조의 입장에서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가 명백하였지만, 이를 사용자 내심의 의사와 결과간의 인과관계로 입증하는 법적 과정은 쉽지 않다. "회사가 개입하여 기업노조를 설립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가? 노동부로부터 노조설립취소통보부터 받아와라", "회사 관리자도 기업노조의 조합원이 될 수 있으므로 회사의 행위가 아니라 관리자 개인이 기업노조 조합원으로서 기업노조 가입을 회유한 행위로도 볼 수 있다",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더라도 기업노조 가입은 조합원이 개인의 자유의사로 한 것이 아닌가"등으로 쟁점이 결론나곤 했다. 어느 결론에도 창구단일화 절차시에 행해진 부당노동행위의 파급력을 민감하게 본 경우가 없었고, 그저 부당노동행위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처리할 문제이고, 교섭창구단일화 절차에서는 숫자로 누가 다수인지만 확인하면 되는 것으로 대부분 치부되었다. 그동안 회사가 어용노조를 조직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드러나 노조 무효를 인정받은 극히 일부의 한두 케이스만 제외하면,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이고 만연한 창구단일화시의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이유로 교섭대표노조 확정 절차에서 제동을 건 판정이나 판결은 찾을 수 없다.
이 사업장도 이후 수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부당노동행위 고소사건 결과가 나왔지만 그 결과는 허탈할 수 밖에 없었다. 대대적인 압수수색과 포렌식이 진행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건이 발생한 후부터 상당기간 지나서 진행되기에 숨겨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회사가 주장하는 관리자 개인의 일탈이라는 꼬리자르기가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물론 일부 회사의 부당노동행위가 인정되긴 하였지만 회사의 명백한 어용노조 만들기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섭창구단일화의 결과인 교섭대표노조의 당락에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일부 부당노동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기업노조에 가입한 조합원의 의사가 그 부당노동행위의 위력에 지배당한 결과라고 선언하는데 소극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배타적 단체교섭권 확보과정에서의 사용자의 개입에 무방비로 노출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이러한 결론이 진정 타당한 것인가?
더 큰 문제는 위와 같은 소극적 사례들이 10년간 누적되면서 이제는 창구단일화 과정에서의 사용자의 부당한 개입행위가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죄의식도 없이 되풀이되고, 그 이유가 단지 나쁜 사용자이기 때문만이 아닌, 허술한 현재의 부당노동행위제도로는 위험 대비 이익이 막대하다는 점이다. 제도가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를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유인을 제거하여야 지난 10년의 창구단일화로 사용자 지배가 공고해진 왜곡된 노사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
부당노동행위 강력한 처벌 없이 건전한 복수노조 제도 불가능
교섭창구단일화 제도가 현실에서 건전한 노조 간의 경쟁이 가져올 선한 이익으로 기능하기 위하여는 노조의 설립과 조직에 사용자의 어떠한 개입도 배제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창구단일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당노동행위를 유형화하고 금지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고 이를 철저하고 신속하게 집행하는 것이다. 우선, 복수노조 창구단일화 절차에서 벌어지는 사용자의 은밀하고도 사소해 보이는 개입도 그것이 가져오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부당노동행위로 인식하도록 창구단일화 과정과 연계된 부당노동행위 유형을 분류하고 추정의 법칙을 강력하게 부과하는 등의 제도 재정비와 이에 걸맞는 제도 해석이 수반되어야 한다. 동시에 제도의 실질적 작동을 위하여 사용자의 노사관계 개입 정황이 보이면 신속하고 철저하게 수사권이 집행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위하여 노동형사전담기관의 정비 등 발빠른 대처를 위한 제도개선이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부당노동행위의 결과는 창구단일화 제도에 반영되어지도록 제도가 보완되어야 한다. 다수노조 확보에 사용자의 개입이 영향을 주었다고 추정된다면 과감하게 다수노조의 지위나 교대노조의 지위 확정 절차가 새로이 개시될 수 있는 장치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렇게 부당노동행위 제도의 강력하고 두터운 보호의 토대가 있을때에만 교섭창구단일화 제도가 사용자의 개입에서 자유롭고, 위헌성을 제거한 건전하고 발전적인 노노경쟁으로 작동될 수 있다.
부당노동행위 제도는 노동3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다수노조를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조의 단결권 등을 사용자의 지배와 개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노동3권의 가장 두터운 외피이다. 반면 교섭창구단일화제도는 복수노조 시대에 교섭권이 효율적․집약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고안된 것에 불과하나 그 결과로서 교섭대표노조는 배타적인 단체교섭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창구단일화를 통한 교섭대표노조의 지위는 부당노동행위 제도에 의해 철저히 감시 및 귀속 되어지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
민주노조라는 씨앗을 나무로 키워 맺은 열매는 단순히 노조 조합원들에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느리게 보이지만 비정규직에게도,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하청업체에도 모두 분배되고 있다.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는 노동자들의 노동은 회사를 발전시키고, 노조는 건전한 감시자로서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지고 역할할 수 있도록 기능한다. 우리 사회에 공정과 민주와 평등의 가치를 확장시키고 후대에 비정규직과 위험의 외주화를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싸우는 가장 중요한 조직이 노조이다. 민주노조의 열매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자양분이 될 것이기에, 민주노조라는 씨앗이 자라날 토양인 부당노동행위 제도의 강력한 개선과 철저한 집행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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