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악과 분노에 휩싸이게 한 비인도적 사건
9월 21일 정오경 연평도 해상에서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근무자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해경에 접수되었다. 우리 군경은 2시간 만에 20여 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부근 해상에 대한 수색에 나섰지만 실종자는 다음날 22일 오후 3시 반경 NLL 북측 수역에서 북한 수산사업소 선박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현장에 합류한 북한해군 단속정의 총격을 받아 그날 밤 10시 무렵 실종자가 사망하고 불태워지는 상황이 우리 군 감시망에 포착되었다.
우리 정부는 23일 새벽 1시 청와대 안보실장 주재 관계부처장관 긴급회의를 열고 언론에 실종사건을 공개하고 북측에는 사실 확인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오후 4시 35분 유엔사 군정위를 통해 북측에 사실관계 파악을 요청하는 통신문을 보냈다.
북한의 답변이 없자 다음 날인 24일 11시 국방부는 해상 실종되었던 우리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수역에서 북한군에게 총격을 받고 불태워져 시신이 훼손된 정황을 시간대별로 밝혔다. 이로 인해 온 국민은 경악과 분노에 휩싸였다.
실종신고 이후 26시간 이상(실종자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시점부터는 38시간) 부유물을 붙잡고 파도에 떠다니면서 저항이나 도망갈 힘도 없었을 비무장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하고 불로 그 시신을 훼손한 행동은 야만 그 자체였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각별한 정성을 기울이는 문재인 대통령까지도 이번 사건은 충격적이고 유감스러운 것으로 어떤 이유로든 용납될 수 없다면서 북한 당국에게 책임 있는 답변과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문 대통령의 언급 바로 다음 날(25일)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는 청와대 앞으로 통지문을 보내왔다. 북한은 이 통지문에서 "귀측이 보도한 바와 같이 (중략) 정체불명 인원 1명이 (중략) 사살(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시인하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면서 "귀측에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고 사과했으며, "이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중략) 체계를 세우라고 지시했다"며 재발 방지 약속을 시사했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고 덧붙이며 상황 악화를 막고자 하는 이례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은 "정체불명 대상이 단속에 불응하고 도주할 듯한 상황이 조성되어 (중략) 해상경계 근무규정에 따라 사격했다"고 마치 불가피했다는 듯 언급하고, 시신을 태운 것이 아니라 "침입자가 타고 있던 부유물을 국가비상방역규정에 따라 해상현지에서 소각했다"고 하면서 부유물에 시신은 없었고 혈흔만 발견되었다고 함으로써 우리 정보당국이 여러 가지 수단으로 파악한 정황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시신 수색 작전에 대한 북한의 경고와 우리의 남북공동조사 제의
북한이 시신을 태운 것이 아니라 망실했다고 함에 따라 우리 군경은 24일 일시 중지했던 해상수색을 하루 만인 25일 오후 재개했다. 이번의 수색은 연평도 부근 해역만이 아니라 NLL 남쪽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다.
그러자 북한은 27일 '남조선 당국에 경고한다'는 제목의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를 통해 "남측이 25일부터 숱한 함정을 수색 작전에 동원하면서 우리 수역을 침범하고 있다"면서 "무단침범행위를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북한이 NLL 남쪽에 자신들의 경계선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점에서 이와 같은 반응은 예견된 일이다.
그러나 NLL 남쪽 수역은 북한군의 수차례에 걸친 무력도발에도 불구하고 우리 군이 실효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인 데다 이번 작전은 시신 수색이라는 비적대적 성격인 만큼 북한이 함부로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지역의 군사적 민감성을 고려할 때 방심하기 어려운 상황임은 분명하다.
북한의 보도 직후 정부는 대통령 주재 긴급 안보 관계 장관회의를 개최하고 북한의 신속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평가하면서 남북이 각각 파악하고 있는 사건 경위와 사실관계에 차이가 있는 만큼 진상규명을 위한 남북 공동조사를 공식 제안했다.
아울러 시신과 유류품 수습은 사실규명을 위해서나 유족들에 대한 인도적 차원에서도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우선 각기 수색노력을 해나가는 가운데 남북 간 군통신선을 복구하고 상호 협의해 나가면서 공동수색도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앞서 북한은 대남경고 보도에 "최고지도부의 뜻을 받들어 북남 사이의 신뢰와 존중의 관계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훼손되는 일이 추가발생하지 않도록 그 대책을 보강하기로 했다"라고 부연했다.
이례적인 대남 사과의 배경과 남북 공동조사 제의의 의미
북한이 이례적이고 신속하게 대남 사과를 한 것을 두고 현 정부의 남북신뢰구축 노력의 성과로 보거나 북한의 전임 지도자들에 비해 김정은 위원장이 보여 온 비교적 과감하고 솔직한 통치스타일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한반도 정세흐름의 미묘한 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
하노이 노딜(2019.2)이후 북·미대화가 접점을 찾지 못하고 남북 사이에도 개성 남북연락사무소 폭파(2020.6)이후 모든 대화통로가 단절된 답답한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UN연설을 통해 다소 뜬금없어 보일 수도 있는 종전선언을 언급했다. 혹자는 민간인 피살사건이 발생했는데 무슨 종전선언이냐고 시비를 걸지만, 종전선언을 담은 UN연설(9.15 녹화, 9.18 전달)이 별개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대통령 연설 전후로 청와대와 외교부의 주요 대미 라인들이 연달아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의 대북 라인들과 협의를 진행했다. 특히 대북정책 고위책임자의 회동에 대해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정책특별대표는 한·미간 북한의 대화복귀를 위한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논의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고,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최근 대화 중 최고"라고 자평했다.(9.28)
10월 초에는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상호 신뢰를 확인하는 친서를 최근에 주고받은 사실은 그동안 일시 단절되었던 남북관계나 북·미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물밑에서 새로 진행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북한이 상황악화를 우려하여 신속하게 대남 사과에 나선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은 이번에도 과거의 도발사건처럼 자신들의 개입을 부인하거나 남측에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었다. 특히 지난 6월 이후 북한이 대남관계를 대적관계로 전환한다고 밝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이번에도 과거와 같이 행동했다면 상당기간 상황 악화가 불가피하고 물밑에서 전개되고 있던 상황타개 흐름에도 차질을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남쪽에 사과한 것은 분명 이례적이고 사실상 처음이다. 천안함 폭침사건(2010.3) 때에는 개입사실 자체를 부인했으며,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2008.7)과 목함지뢰 폭발사건(2015.8) 때는 유감이라고만 표현했다.
유감(regret)은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반면 사과(apology)는 귀책사유가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시인하는 것이다. 귀책사유를 인정했으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따라주어야 재발방지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남북이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각각 파악하고 있는 사건경위와 사실관계에 나타난 차이점이 해소되어야 진상이 규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 단계의 남북관계 상황에서 특히나 민감한 군사정보가 상대에게 노출될 가능성을 감수하고 북한이 남북공동조사에 선뜻 호응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선 남북 군당국간 통신선 복원 등 대화통로를 열어 놓고 소통해 나가면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된다면 비록 현장보존이 안되어 있고 시신마저 유실되어 사실관계를 완벽하게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그 공동의 노력 자체에 가치가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시신과 유류품의 수습을 위한 해상수색을 남북이 각기 자기 수역에서 따로 진행한다고 해도 남북이 자기 관할로 주장하는 수역이 중첩되기 때문에 서로 상대방이 도발한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상대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해당수역을 제외하고 수색을 진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공동수색은 불가피하고 시급한 상황이다. 현 시점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사실규명 측면에서나 유족에 대한 도리의 측면에서나 최우선 과업이며 시기를 놓치지 않고 조기에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남북이 서로 경계선 주장에 구애받지 않고 광범한 지역에서 함께 수색작전에 나서야 한다.
공동수색이 이루어지면 당면한 한반도 상황개선 흐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며, 장기적으로는 서해상의 남북한 분쟁소지를 제거하는 사례를 축적시켜 남북공동어로 등 서해의 평화적 활용을 위한 근본적 해결의 길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남북관계에서 발생했던 또 하나의 사고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비무장 민간인의 죽음을 정치적 쟁점으로 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남북관계가 정상화되고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가 재가동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고인과 그 유족을 진정으로 위로하고 국민의 분개에서 희망의 동력을 찾는 올바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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