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휴일, 해고 등에 대한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못한다.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용자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지만 개인사업자 신분이기 때문에 노동 관련법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이들의 수는 도합 80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사회 임금 노동자 10명 중 4명은 노동 관련법의 보호를 온전히 받지 못하는 셈이다.
이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선하기도 녹록치 않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노조를 만들다 잘려도 법적으로 부당해고를 다투기 어렵다. 특수고용노동자가 노조를 만들려면 일단 고용노동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노동자로 인정부터 받아야 한다. 특수고용노동자인 대리운전기사가 노조 설립을 신고하고 승인받는데 걸린 시간은 1054일이었다.
예술가들이 이들의 권리 강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 등 취약계층 노동자의 권리찾기 유니온 '권유하다' 후원 전시회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에 24명의 작가가 작품을 출품한 것이다.
권유하다, 문화연대, 시민자치문화센터가 공동으로 주관한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전시회는 서울 종로 인디프레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기간은 지난 21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다. 작품 판매수익은 취약계층 노동자의 권리찾기를 위한 활동에 쓰인다.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 중에는 민중미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법한 작가가 많다.
<한국 근대사> 연작으로 유명한 신학철 작가는 김재규에 대해 마음속에 갖고 있던 이미지를 서울을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늑대로 형상화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를 출품했다.
2016년 광화문 광장 촛불집회를 흙으로 담아낸 <광장에서>를 그렸던 임옥상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 첩첩이 놓인 산을 흙과 먹으로 그려낸 <산 넘어 산>을 냈다.
주재환 작가가 출품한 <나의 애송시>에는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기대지 말고>가 등장한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야합하는 사상, 야합하는 종교, 야합하는 학문에 기대고 싶지 않다'는 시의 내용에도 눈길이 간다.
이 밖에도 김정헌, 민정기, 이종구 등의 작가가 유화, 목탄화, 판화 등 다양한 미술작품을 출품했다.
많은 작가가 전시회에 기꺼이 자신의 작품을 보낸 것은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대표로 있는 '권유하다'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마음 때문이다.
'권유하다'는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특수고용노동자와 같이 노동 관련법을 온전히 적용받지 못하는 권리 없는 노동자, 노조에 가입하기 어려운 노동자가 모여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일을 이야기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다. 작년 9월 출범 이후 4대 보험과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기 위해 사업장을 쪼개거나 직원을 누락해 신고하는 '가짜 5인 미만 사업장' 고발 운동 등을 벌여왔다.
결국 '아름다운 삶을 권유하다' 전시회는 취약계층 노동자의 권익 강화를 위한 예술가들의 연대이고 실천인 셈이다.
이와 같은 작가들의 마음을 모아내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교수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
임금노동자 절반에게 노동3권 없는 현실 바꾸고자 마음 모은 작가들
프레시안 : 어떻게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나?
심광현 : 한 전 위원장이 만나자고 제안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가 대략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노동자가 노동3권이나 노동 관련법에서 소외돼있었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580만 명, 특수고용노동자 220만 명에 간접고용노동자 400만 명을 합치면 1200만 명이다. 2000만 명의 임금 노동자 중 1000만 명 이상이 그런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광범위한 사회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당장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알고 지내는 예술가와 함께 후원전시를 만들어가면서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 전시리플렛에 적은 글에서는 최근 코로나19와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 전반의 위기를 적기도 했다.
심광현 : 2020년 이후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2016년경부터는 4차 산업혁명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되면 지금은 노동3권으로 보호 받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 심지어는 공기업이나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상당수도 일자리 위협을 받을 거다.
이 문제에 대해 민주노총도 알고만 있을 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시민사회는 또 다른 문제가 많으니 이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룰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권유하다' 같은 단체가 노동운동을 넘어 사회운동 차원에서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도 노동과 예술의 협력이 가능할 거다.
프레시안 : 실제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어땠나?
심광현 : 전시회를 제대로 하려면 좀 더 큰 규모로 해야겠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작가들과) 서로 만나기도 힘들고, 일정 잡기도 어려웠다. 또 큰 규모로 전시회를 진행하면 비용도 많이 들고 부담도 커지는 면도 있다. 그래서 일단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최소 규모로 전시회를 준비했다.
작은 규모로 화랑을 대관했고 빨리 연락이 될 수 있는 작가 20여 명과 연락을 했다. 제가 80, 90년대에 미술 운동에 참여해 평론가로 활동하며 연을 만든 선후배 작가 중 가장 활동적인 작가 5, 6명과 3, 40대 젊은 작가들에게 작품을 부탁했다.
프레시안 : 작가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
심광현 : 임금노동자 절반에게 노동3권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니 대부분 깜짝 놀랐다. '사회가 아무리 힘들고 양극화가 심해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더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겠다'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문제제기를 해서 널리 알려야 한다'고 말하는 분도 있었다. '현실에 대해 잘 몰랐다는 데 대해 성찰해야겠다'고 말하는 작가도 있었다. 다들 적극적이었고, 쉽게 협력해줬다.
"일회성 후원 전시회 넘어서 노동과 예술의 지속적 협력 네트워크 만들 것"
프레시안 : 예술과 노동의 협력 네트워크를 만들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 어떤 구상인가?
심광현 : 일회적인 후원 전시회로 끝나는 게 아니라 노동과 예술의 지속적인 협력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다.
일차적으로는 권유하다 홈페이지에 온라인 상설전시관을 만들려고 한다. 후원전시회에 나온 작품을 온라인에 올려 노동자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하려 한다. 또, 노동자들이 댓글로 감상을 남기면 온라인에서 노동자와 작가가 소통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전시장에서 관객은 작가와 만날 기회가 없다. 둘은 남남으로 남는다. 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조차 없다. 현재 제도적인 미술의 창작과 수용은 굉장히 폐쇄적이다.
온라인이기는 하지만 소통의 창구를 만들면 작가와 노동자가 서로 대화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이나 노동과정에서 겪은 즐거움, 노하우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 작가들이 이를 자극으로 삼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 수도 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노동과 예술이 내용적으로 서로 살찌울 수 있는 긴밀한 소통의 창구를 만들려 한다.
프레시안 : 그 같은 활동을 오프라인으로 넓혀갈 계획도 있나?
심광현 : 앞서 말한 활동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노동 예술학교 프로그램을 만들 생각도 있다. 노동자들이 작가에게서 예술과 창작을 배우고 결과물로 전시회도 열고, 온라인에도 올리고 하는 프로그램을 생각 중이다.
이런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 자유시간과 취미의 확장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다. 작가들도 추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현실과 밀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재미있는 게 만들어지면 다른 장르에 자극을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새로운 문화운동이 퍼져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노동자도 새로운 삶이나 사회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보다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바뀔 수 있을 거다.
프레시안 : 전시회를 찾을 관람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심광현 : 작품을 눈 여겨 보신 뒤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고 여력이 되신다면 작은 작품을 구매하셔도 좋을 것 같다. 아니어도 홈페이지에 조만간 온라인 상설 전시관이 만들어질테니 이를 통해 작품을 보시고 관람 후기나 소감을 올려주시면 좋을 것 같다. 그게 상호작용의 시작이니까.
프레시안 :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심광현 : 나만 잘 산다고 민주주의가 잘 되는 건 아니다. 누구나 민주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헌법상의 권리를 보장받고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받아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
부자나 중산층이 '나만 잘 산면 된다, 내가 획득한 부를 마음껏 누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살면 사회적 신뢰도, 윤리적인 가치관의 공유도 없는 처참한 사회가 된다. 그런 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그런 처참한 사회가 되지 않으려면 옆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볼 줄도 알고 작은 위로라도 건넬 줄 알고, 또 그들의 권리회복을 지지하는 시민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민들이 '누구나 민주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최소한의 삶의 질을 보장받도록 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자기 삶의 질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좋겠다. '권유하다'가 하고 있는 권리찾기 운동도 넓게 보면 이런 차원의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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