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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회 동메달' 고3 준서 학생의 죽음을 추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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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대회 동메달' 고3 준서 학생의 죽음을 추적하다

[기능대회 잔혹사] ① 기능대회 준비 중 숨진 고 이준서 군 아버지 이진섭 씨 인터뷰

지난 4월 8일 밤 11시 30분께, 신라공고 기능영재반(기능반) 3학년 학생 이준서 군이 자신의 기숙사 방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준서 군은 지난해 전국기능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할 정도로 장래가 촉망받던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프레시안>에서는 준서 군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 그리고 그가 속해 있던 기능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준서는 항상 불이익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를 걱정했어요. 학교에서 요구하는 기능대회를 나가지 않을 경우, 나중에 취업할 때 회사에 추천서를 안 써주면 어쩌나 등. 학교 선생님들에게 찍히면 자기가 취업을 못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죠. 결국, 그런 압박이 아이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몬 게 아닌가 싶어요."

경북 경주시에 위치한 신라공고. 이곳 기숙사에서 지난 4월 8일 밤 11시30분께 19살 이준서 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는 없었다. 준서 군은 전국기능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로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당일 날에도 저녁 9시 30분까지 기능대회를 준비 중이었다. 그런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준서 군 아버지 이진섭 씨는 "아들을 기능대회에 참여하도록 지속해서 학교 측이 과도하게 압박하고 회유했다"며 책임자로 학교를 지목했다.

전국기능대회에서 동메달 획득하기도

중학교 3학년 때, 준서 군은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하교 후 다니던 공부방 교사가 준서 군에게 직업계고 기능반을 추천했다. 준서 군이 신라공고에 입학한 이유다. 준서 군이 다니던 이 학교는 기능반에 들어갈지 말지를 입학할 때부터 결정하도록 했다. 기능반이란 1년이 각각 한 번 열리는 지역기능대회와 전국기능대회를 준비하는, 일종의 특별반이다. 준서 군 학교에는 1학년~3학년을 합해 20~25명 정도가 이 반에 속해 있었다.

이곳에서 준서 군은 입학하기 전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기능대회를 준비했다. 물론 곧바로 기능기술을 배우진 못했다. 1학년 때는 2,3학년 선배들 '수발' 역할을 주로 했다. 일명 '상급생 보조'였다. 선배들이 만든 실습작품을 분해하고 정리‧정돈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보통 다른 학교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기능반에 들어가지만 준서 군 학교는 이보다 매우 빠른 셈이다.

아버지 이진섭 씨는 "아들이 다른 학교는 학과가 정해진 뒤 기능훈련을 하지만, 자기네는 그 전부터 하기에 기술 습득이 빠르다고 했다"며 "지나고 생각해보니 아무 룰이 없었던 학교였던 듯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1학년을 보낸 뒤 2학년 4월, 3학년 선배와 팀을 이뤄 지역기능대회에 출전했다. 결과도 좋았다. 3위인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세를 몰아 그해 10월 전국대회에 출전했고, 마찬가지로 동메달을 땄다.

전국대회 출전 자격은 지역대회에서 메달 딴 학생들에게 주어진다. 7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지역대회에 출전하고, 거기에서 메달을 딴 약 17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전국대회에 출전한다. 이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땄다는 건, 기능능력이 매우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이준서 군(왼쪽 끝). ⓒ이진섭

기능반 나오려 했으나, 번번이 막혀

이상한 점은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딴 뒤부터 준서 군은 기능반에서 나오고 싶어 했다는 점이다. 학교에 여러 차례 그만두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2년 가까이 기능반 생활을 하면서 심신이 지쳤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기능반에 속한 준서 군은 학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집에는 2~3주에 한 번, 그것도 주말에 왔다. 24시간 내내 학교에서 생활하는 식이었다.

"학교 안에는 선후배 관계가 다였어요. 평일 낮에는 교사가 있지만 밤까지 있지는 않아요. 퇴근하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기숙사에 잠을 자요. 군대와 비슷했던 거죠. 기능대회를 준비한다는 게 결국 반복훈련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선배들이 후배를 때리는 것도 반복훈련을 시키는 일종의 수단으로 작용했어요. 엎드려뻗쳐는 기본이고 뺨을 때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더라고요."

더구나 준서 군은 작년 10월 전국대회를 마친 뒤, 파트너가 바뀌었다. 문제는 바뀐 파트너가 기술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아버지 이진섭 씨는 "새 파트너는 기능반에 있었지만, 대회 준비를 하지 않았던 친구였다"며 "기술 연습 대신 학과 공부만 했기에 기술이 부족했다. 준서는 이 친구와 파트너를 하면 기능대회에서 메달 따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파트너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달라고 했으나 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다. 힘든 기능반 생활을 한다 해도 메달 따는 게 불투명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 진섭 씨도 아들 상황을 이해하고 기능반에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기능반을 그만두는 게 쉽지는 않았다. 준서 군은 기숙사에서 나왔다가도 번번이 학교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학교에서 준서 군에게 돌아오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준서 군의 '미래'를 생각해서 기능반에 계속 있어 줄 것을 '부탁'했으나, 준서 군으로서는 이것을 무언의 '압박'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아버지 생각이다. 행여나 학교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기능반을 나갈 경우, 학교에서 불이익을 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 차례 기숙사를 나와 집에 왔다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학교를 찾아온 준서 군의 파트너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고는 기능반을 그만두기로 최종 결정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 못하겠습니다."

준서 군은 학교 기능지도 교사에게 그만둔다는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도 준서 군의 파트너 아버지에게 기능반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이 기능반을 그만두는 것으로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준서 군은 또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아버지는 학교 측에서 또다시 준서 군에게 연락해 돌아오라고 회유했다고 생각했다.

준비했던 마지막 수단도 막혀

주목할 점은 학교에 복귀한 이후 준서 군의 행동이다. 복귀한 바로 그날 밤, 기능반 후배 A군을 불러내 술을 나눠 마시며 흡연을 권유했다. 그리고는 후배 A군의 흡연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준서 군은 이 촬영본을 '미끼'로 A군에게 자기 부탁을 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준서 군 파트너인 B군의 교칙 위반사항을 적은 문자를 자기 대신 기능지도교사와 담임교사, B군 어머니에게 보내고 그 결과를 자신에게 문자로 보내라고 했다. 만약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학교에 촬영본을 제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준서 군 의도대로 일은 흘러가지 않았다. A군은 이러한 준서 군 요구에 겁을 먹고는 기능지도 교사에게 자신이 음주와 흡연 사실을 고백한 뒤, 기능반을 그만뒀다. 여기서 의문은 준서 군은 왜 자기 파트너의 잘못된 점을 학교에 알리려고 했느냐는 점이다.

"준서가 기능반을 그렇게 하기 싫어했는데, 복귀했던 것은 파트너 B군의 죄를 학교에 알려내면서, 팀 해체를 생각했던 듯해요. B군이 체벌을 받고 기능대회 출전이 불가능해지면, 자연히 자기도 기능대회를 나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해요. 스스로 그만둬도, 이내 학교에서 오라고 하니 안 갈 재간이 없었어요. 자기가 생각한 기능반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듯해요."

아버지 말에 따르면, 학교 회유로 어쩔 수 없이 복귀했으나, 스스로 기능반을 빠져나갈 방법을 미리 준비했던 셈이다. 그러나 자신이 마지막으로 준비한 '카드'가 후배의 기능반 탈퇴로 막혀버릴 줄은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이다. 준서 군은 학교를 복귀한 날부터 총 60차례나 후배 A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준서 군이 다닌 신라공고. ⓒ프레시안(허환주)

다른 곳에 죽음의 이유가 있다는 학교

사고 당일 날인 8일에도 마찬가지였다. 준서 군은 파트너 B군, 그리고 기능지도교사와 면담을 진행했다. 다시 한 번 잘해보자면서 면담은 마무리됐으나 준서 군은 이후 후배 A군에게 또다시 전화를 했다.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었던 셈이다.

마지막 계획이 무너진 이후 준서 군의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저녁 9시 30분께 준서 군은 기능 연습을 마친 뒤 기숙사방으로 복귀했지만, 이후 밤 11시 30분께 스스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아버지는 아직 준서 군의 죽음의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준서 군과 자신이 나눈 대화, 학교 측에서 건넨 자료와 준서 군 친구들의 진술로만 유추할 뿐이다. 아버지 이 씨는 "아들은 기능반을 나오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면서 좌절감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학교 측에서는 준서 군 죽음의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이 씨는 그런 학교 태도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준서 장례식장에 학교 측 관계자들이 왔거든요. 와서는 우리 아들이 가정불화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중 한 명은 준서가 '아버지는 자기를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한다'고 했다고 제게 말하더라고요. 더구나 준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자살을 하셨거든요. 그것을 두고도 가족력이라고 하더라고요. 설사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그런 말은 장례식장에서 할 말이 아니잖아요. '기술연습 등 배려해줄 건 다 해줬다. 준서가 죽은 건 가정사 때문이다' 이런 식이었어요."

아버지는 평소 준서 군과 함께 한 시간이 많이 없었던 게 아쉽다. 준서 군이 어렸을 때는 직업상 해외에 몇 년씩 있어야 하기도 했다. 준서 군은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그래도 주말에 준서 군이 집에 오면 PC방도 가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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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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