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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시작하자 사라진 집도의, 환자의 인권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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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시작하자 사라진 집도의, 환자의 인권은 어디에?

[휴먼 라이츠 브리핑] 자본이 신체를 장악할 때, 의료와 인권

故권대희 군은 2016년 안면윤곽 수술을 받은 후 뇌사 상태로 49일을 버티다 사망했다. 대희 군이 수술을 의뢰했던 집도의는 수술 시작 동시에 대희군의 뼈만 잘라낸 후 수술실을 떠났다. 이후 봉합, 지혈 수술을 대신하던 신입의사도 옆 방의 다른 환자들을 동시에 수술하느라 수술실을 비웠다. 그럴 때면 간호조무사가 단독으로 지혈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대희 군은 성인 남성의 평균 혈액보유량 5000cc 중 3500cc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러한 수술대 위의 사망이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전 대한성형외과 의사회 김선웅 법제이사는 이러한 '유령수술(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은 의사가 수술을 집도하는 범죄 행위)'이 계획된 의료 범죄라고 말한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팬데믹으로 전 인류가 전례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한국 정부의 대응이 'K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귀감이 되고 있다는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일선에서 간호인력의 부족을 지적하며 간호사에 대한 실질적 보호와 지원방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메디시티' 대구의 아성을 거스르는 공공의료원의 적은 병상 수도 문제가 되었다. 대구가 코로나19 초기 상황에서 심각한 시스템 실패 상황에 마주했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영남대병원 이경수 교수는 감염환자를 일목해 관리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미비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현장위기대응 및 감시 체계 구축을 역설한다.

위의 사례에서 의료인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은 '시스템'이다. 당장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장기화 될 수 있고, 심각한 인권침해가 유발될 수 있다는 비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권과 건강권을 위협하는 이러한 연쇄적 의료 붕괴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심각한 인권 위기를 초래하는 이러한 문제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인권사회학적 관점이 필요하다.

인권사회학은 국제 사회에서 정립되어 온 인권 개념을 경제·정치·문화·환경 등 여러 사회구조적 조건들과 연관하여 분석하는 접근방식이다. 미시시피 대학 마크 프레초 교수는 인권의 총체적 모습을 '권리 순환'의 과정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리 순환은 세 가지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만이 표출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문화적 토대가 형성된 상태. 이를 '권리조건'이라고 한다. 둘, 인권을 침해당한 사람들 또는 그들과 연대하는 지역 시민단체, 사회운동 기구들이 권리 침해에 대한 보호를 정책결정 기관에 요구하는 과정, 이는 '권리주장'이다. 셋, 권리주장을 통해 법제가 마련되었을 때 발생하는 정치적, 사회적 결과. '권리효과'라고 한다. 이 때, 사람들이 권리를 보장받게 되어 인권이 보다 진전될 수도 있고, 정책결정에서 미비한 부분이 생겨 인권이 오히려 후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순환 과정을 통해 인권은 진화한다.

의료는 인권과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 인권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혹여 보건의료정책이나 의료서비스가 인권과 멀어져 있을 경우, 막대한 인권침해가 유발될 수 있다. 의료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다루기 때문이다. 건강도 인권으로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모든 권리는 건강하지 못하면 제대로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할 수 있는 환경 조성도 매우 중요한 인권 중 하나다.

국가의 '건강에 대한 책무'는 국제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지 오래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25조), 1966년 경제적·사회적 권리규약(12조)과 같은 인권정전은 건강권 실현을 국가의 의무로 규정해두었다. 2000년 유엔사회권위원회에서도 건강권을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에 대한 권리'로 정의하고 국가에 의료서비스를 제공 받을 권리, 건강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권리를 모두 만족시킬 것을 권고했다. 한국도 헌법에 건강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해두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가. 근대식 의학 교육이 1890년대 말 도입된 이후, 일제의 개입으로 한국에는 독일의 군대식 의학이 주입되었다. 해방 후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의 억압 속에서 위계적 의료체계가 지속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의료계에 비인권적인 행위가 발생해도 내부적 문제제기가 어려운 이유다.

민주화 이후에는 의료계의 상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민간의료기관들은 병상 수를 늘리고 고가의 첨단장비를 사들여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에 따라 환자의 의료비 자부담률이 높아지고, 환자와 의료인 간 신뢰가 악화되었다.

의료 교육 체계 내에서 건강권 측면의 인권도 잘 다루어지지 않았다. 의료인들이 인간 고통의 사회적 원인들, 또는 인간 권리 확장을 위한 의료를 고민하기보다 질병의 진단과 치료, 예방에 집중하게 되면서 의료행위의 의미가 협소해졌다. 의료가 전문화되면서 다양한 문제가 생겨도 대중의 관심을 얻기 어려워졌다. 환자에 대한 편견도 존재한다. 특히 성형수술의 경우 자신의 결정이므로 부작용도 자신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료인들이 인권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최근 의료사고 피해자, 환자단체들이 모여 수술실CCTV 법제화(일명 권대희 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2007년부터 대폭 허용된 의료광고,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항목으로 생겨난 의료 사각지대 등의 개선을 요구한다. 정책적 인권 보장의 필요성을 인권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코로나19 재난 상황에서 발생한 심각한 위기에 대해 성찰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던 의료진들도 권리 개선 방안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가 정말 인권을 향상시킬까? 권리효과를 찾아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2012년, 갖은 노력 끝에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전국 거점지역에 권역외상센터가 설립되었다.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국가적 지원 방안이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심각한 외상을 입은 사람이 구조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인권은 한 번에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받듯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는 법률 통과 이후에도 권역외상센터에 대한 적합한 지원, 수가 인상, 의사 수 증대 등의 복합적 여건이 적절하게 고려되지 않았음을 지속적으로 비판했다. 실질적인 환경 개선 없는 시스템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이렇듯 인권은 정태적이기보다 점진적이고 복합적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흔히 나의 신체, 재산 등의 소유를 주장할 목적으로 인권을 언급하곤 하지만, 인권은 자유권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사회적·정치적 의미 또한 가지고 있는 개념이다. 다시말해 인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해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가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권리를 달성할 환경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국가는 불법적으로 생명을 박탈하는 행위들을 방조하면 안되고, 모든 사람의 생명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앞의 논의에 따른다면 국가가 의료 상품화를 부추기거나 의료환경 개선 방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유엔이 보장하는 사회권 규약을 거스르는 국가의 건강권 책무 위반이라고 할 수 있다.

정책과 행정이 인권에 기초하지 않을 때, 자본은 신체를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권리의 붕괴를 알리는 연쇄적 인권침해 현상이 발생한다. 국제적 인권문헌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인권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사회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의료 시스템 개선에 인권 사회학적 관점이 요구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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