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권에 기본소득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어느 나라에서도 실시된 적이 없지만 짧게는 60년, 길게는 170년이나 된 오래된 담론이다. 최근 일부 옹호자들은 사람들의 뇌리에 기본소득을 각인시키기 위해 코로나19 사태라는 위기 상황의 타개를 위해 지급된 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이라고 명명했다. 진실의 왜곡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유령은 곧 닥쳐올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일자리 불안 등을 과장하며 마치 자신이 유능한 해법이나 되는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한다. 복지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사회보장의 실질적 보편주의 달성을 위해 전력 질주를 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부 정치권과 언론들은 이 실체 없는 유령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재명, 김세연, 김종인, 안철수 그리고 민주당의 태도
기본소득이라는 정치적 유령을 여의도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사람은 이재명 경기지사다. 지난 2017년 대선 직전부터 당시 성남 시장이던 이재명 지사는 기본소득을 자신의 정치적 의제로 삼았다. 당시에는 당내 대선 경선에 나섰음에도 기본소득을 정치적으로 크게 확산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이 지사는 경기도 행정 권력을 기반으로 기본소득을 정치적으로 확산해 나갔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자 재난을 기회 삼아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기본소득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성공했다. 재난 위기와 4차 산업혁명시대라는 미래의 불확실성 담론을 틈타 이 실체 없는 유령이 여의도에 상륙한 것이다.
보수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미래통합당 김세연 전 의원은 지난 달 <경향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의 보수가 집중해야 할 과제로 기본소득을 꼽았다. 그는 "장차 4차 산업혁명으로 줄어들 일자리와 소득을 기본소득으로 채울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전 의원은 "정부의 규모와 기능이 줄어들 것이므로 정부 지출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하고 노동과 복지 시스템의 큰 틀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노동·복지 등 정부 재정의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기본소득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6월 3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대위원장은 초선 의원 강연에서 "실질적인 자유를 이 당이 어떻게 구현해내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실질적 자유'를 두고, 여야 정치권은 기본소득 논의를 사실상 공식화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실질적 자유'가 기본소득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같은 당 조해진 의원과 성일종 의원 등도 기본소득을 연구하거나 입법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5월 29일 열린 미래통합당 당선인 총회에서도 "기본소득 도입을 논의하자"는 요구가 나왔다. 또 3040 조직위원장들의 모임인 '젊은미래당'은 기본소득 논의를 경제·노동·복지 정책의 리모델링 기회로 삼자는 성명서를 내기도 했다.
6월 4일, 김종인 위원장은 비대위 회의에서 마침내 "기본소득 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이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한국형 기본소득(K-기본소득) 도입 방안을 집중적으로 검토해나갈 것을 제안했다. '엔(n)분의 1' 논리에서 탈피해 전 생애주기의 한국형 복지모형을 설계하자는 주장이다. 같은 날, 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김종인 대표의 실질적·물질적 자유 언급을 기본소득 도입의 공식화로 간주하면서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여·야·정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증세 논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 의원은 통합당 대표가 기본소득을 들고 나왔으므로 본격적 논쟁이 일 것으로 전망했던 것이다. 한편, 민주당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기본소득 도입을 언급하진 않고 있다. 일부 의원을 제외한 대다수 의원들이나 당 차원의 공식적인 움직임은 유보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오후, 김종인 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보편적 기본소득 지급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오전에 비해 말의 기조가 크게 바뀐 것이다. 여기서 그는 "기본소득 지급은 한시적으로 할 수는 없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면서 "이 때문에 적자 재정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건 환상일 뿐 상당히 요원한 얘기"라고 말했다. 심지어 김 위원장은 간담회 도중에 돌연 "자신이 언제 기본소득을 주장했느냐. 기본소득을 주장한 적 없다"고 말하는 등 다소 모호한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최근 여의도에 상륙한 기본소득은 그야말로 실체 없는 유령처럼 종잡을 수 없다. 김종인 위원장이 이렇게 말을 바꾼 것은 기본소득 언급을 통해 정치적 관심을 끌고 난 후에는 오히려 이 의제를 호주머니에 넣어 두는 게 정치적으로 더 이롭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파 기본소득' 자체의 정당성 논리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 논의가 본격화했을 때 미래통합당 내부의 갈등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부 재정을 구조조정 한다고 해도 일부 증세는 불가피할 것이고, 막상 논의가 시작되면 기존 복지의 축소와 증세에 따른 반발을 보수정당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6월 5일, 이재명 지사는 확산이 주춤하던 이 유령을 더 강력하게 호출하기 시작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증세나 재정건전성 훼손 없이 기본소득 도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공개토론을 제안했다. 첫해에 연 20만 원으로 시작해 매년 조금씩 증액하여 수년 내에 연 50만 원까지 만들면 연간 재정 부담은 10~25조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일반회계예산 조정으로 이 재원을 만들 수 있으므로 증세 없이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럴 경우 5200만 국민에게 매달 나눠줄 현금이 푼돈이라는 게 문제다. 그에 따르면 첫해엔 월 1만6000원씩 나눠줄 수 있고, 수년이 지나서도 지급액은 월 4만 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후에는 증세를 하자는 것이므로 '증세 없는 기본소득'은 여기까지로 국한된다.
'실질적 자유'를 위한 기본소득 제도의 핵심 내용
지난 수개월 동안 정명(正名)이 아닌 '재난기본소득'이란 용어가 정치적 목적으로 버젓이 확산됐고,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빈번하게 언급됐다. 이재명 지사 등이 '재난기본소득'이란 왜곡된 용어의 확산을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는 상당부분 관철됐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우호적인 이미지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귀에 익숙해진 기본소득이란 말은 '기본적으로 복지에 더해 서민의 생계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득까지 보장해주는' 좋은 어떤 것으로 간주될 개연성이 크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이런 식의 일반명사가 아니다. 기본소득은 특정한 실질에 상응하는 고유한 명칭이고, '실질적 자유의 세계'를 구현하겠다는 철학과 비전을 가진 오래된 담론이다.
그렇다면, 고유한 담론의 명칭인 기본소득 제도는 어떤 실질을 포함하고 있을까.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보편성이다. 자산조사 없이 소득과 재산이 많든 적든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한다. 둘째, 무조건성이다. 근로 등의 조건이나 심사 없이 모두에게 지급한다. 셋째, 개별성이다. 가구 단위가 아니라 각 개인에게 지급한다. 넷째, 정기성이다. 매달 지속적으로 지급한다. 다섯째, 충분성이다.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현금을 지급한다. 이런 특성들을 모두 갖출 때라야 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이 허락된다. 기본소득 제도의 주창자들에 의하면, 여기서 하나라도 빠질 경우 기본소득이 아니다.
이들 요건 중에서 둘째와 다섯째를 주목해보자. 둘째 요건인 '무조건성'은 생산연령인구 모두에게 소득수준·고용상태·근로의사 등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동일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연령인구의 일부 그룹(청년, 농민 등)에만 현금을 지급하는 것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다섯째 요건인 충분성은 '완전기본소득'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다. 완전기본소득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의 25%를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줘야 한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을 2000조 원으로 간주하면, 이것의 25%는 500조 원이다. 이것을 5200만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월 80만 원이 된다. 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의 현금 급여인 1인 가구의 생계급여(52.7만 원)와 주거급여(서울 26.6만 원, 광역시 17.9만 원)를 합한 금액과 비슷하다.
기본소득의 충분성 요건을 갖추려면,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모두에게 매달 80만 원(1인당 GDP의 25%)씩 지급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중앙정부 재정 규모가 연간 512조 원임을 감안할 때, GDP의 25%인 500조 원을 추가로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재원 마련의 어려움을 감안해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완전기본소득으로 가기 위한 중간 전략으로 1인당 GDP의 10~15%를 지급하는 부분기본소득을 제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민 모두에게 매달 32~48만 원을 지급하면 부분기본소득이 성립된다. 월 32만 원을 지급하려면 GDP의 10%인 200조 원이, 월 48만 원을 지급하려면 GDP의 15%인 300조 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부분기본소득 제도를 실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정부 재정 200조 원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우선은 증세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현재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은 GDP의 20%이다. 그리고 OECD의 평균 조세부담률은 25%이다. 우리나라가 장차 OECD 평균 수준의 조세부담률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나라의 가능한 증세 여력은 GDP의 5%포인트인 100조 원인 셈이다. 월 32만 원짜리 부분기본소득을 실시할 경우, 최종적으로 100조 원의 증세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추가적으로 100조 원이 더 필요하다. 만약, 증세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월 32만 원짜리 부분기본소득 재원 200조 원 모두를 기존 정부 재정의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인가?
많은 분들이 기본소득을 보편적 복지라고 오해한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한 기본소득의 핵심 요건 5가지 중의 첫 번째가 '보편성'인데, 이것으로 인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 같다. 기본소득의 보편성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한다는 의미일 뿐이고, 기본소득은 성격상 보편적 복지(사회보장)와 무관하다. 그렇다면 보편적 복지는 무엇인가? 보편적 복지는 자산조사로 가난한 국민을 선별해 복지를 제공하는 선별적 복지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국민 모두에게 일생에 걸쳐 소득과 사회서비스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즉, 보편적 복지는 일생에 걸친 소득 보장과 사회서비스 보장을 의미한다. 보편적 복지의 '소득 보장'에는 사회보험과 사회수당이라는 제도적 장치가 존재한다.
첫째, 사회보험이다. 사람은 일생 동안 돈이 필요하고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완전고용을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기업이나 산업의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되거나 기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소득이 단절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위험에 대처하는 제도적 장치가 사회보험이다. 산업재해로 인한 소득 단절에 대해서는 산재보험이 작동한다. 해고와 실업의 경우에는 고용보험이, 질병으로 인한 소득 단절에는 질병보험이, 노령과 은퇴로 인한 소득 단절엔 국민연금이 작동한다. 이것이 공적 소득보장 제도인 4대 사회보험이다. 여기서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이 중요하다. 즉 모든 대상자를 포괄하는 보편적 가입과 적정 수준의 급여 보장성(소득대체율)을 핵심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복지국가들은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여기에 모든 국민을 포괄하고 적정 소득대체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둘째, 사회수당이다. 보편적 복지의 소득 보장 장치에 속하는 사회수당이 사회보험과 다른 점은 평소에 보험료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달 보험료를 강제로 내야 하는 사회보험과 달리 사회수당은 일정한 특성을 공유한 자격이 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정부가 매달 일정 금액을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다. 사회수당 지급에 필요한 재원은 공적 보험료에 기반을 두지 않고 일반 조세에 기반을 둔 국가 재정으로부터 조달한다는 특징이 있다. 주로 인구학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집단을 대상으로 삼는데, 복지국가의 공통적인 사회수당 프로그램에는 아동수당, 장애인수당, 학생수당, 노인수당 등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소득 보장 제도는 몇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첫째, 4대 사회보험은 보편주의가 원칙임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이를 위반하고 있다. ①우리나라는 질병보험이 아예 없다. 질병으로 입원할 경우 치료비는 국민건강보험으로 63% 정도를 충당하지만 소득 단절로 인한 생계의 위협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국민 대다수는 이런 위험에 대비해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한다. ②고용보험은 노동자의 절반 정도만을 보호한다. 비정규직·특수고용직이나 저임금 노동자의 대부분은 가입하지 않고, 자영업 종사자는 그저 임의 가입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급여 보장성(소득대체율)도 낮은 편이다. ③국민연금의 넒은 사각지대와 낮은 보장성 때문에 노후보장이 취약하다. 산재보험도 일부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둘째, 우리나라의 사회수당 제도는 여전히 부실하다. 문재인 정부에서 아동수당이 도입됐지만 7세 미만에게 월 10만 원만 지급하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우리 모두의 아이’라는 공적 의식에 근거해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처럼 15세 또는 18세까지 지급 대상을 확대하고 금액도 월 15만 원 정도로 확충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장애인 수당은 보편주의가 아니라 소득조사를 통해 선별하고 있고, 학생수당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노인수당은 기초연금 형식으로 소득 하위 70% 노인들에게만 지급되고 있다. 기초연금은 지급 연령의 상향조정과 함께 지급 대상과 금액을 더 확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다음으로, 보편적 복지의 사회서비스 보장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보육, 교육, 의료, 요양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들 역시 부실한 편이다. 의료는 전 국민을 포괄(보편적 가입)하고 있지만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이 63%에 머물고 있다. 보육도 외형적 보편주의는 달성했으나 예산의 제약으로 여전히 질이 낮은 편이다. 교육은 공교육의 위기 상황으로 인해 입시 교육 중심의 사교육 의존이 심각하다. 그래서 교육비 부담은 사교육비까지 포함해 세계 1위 수준이다. 대학생들의 학업 비용 부담도 여전히 큰 편이다. 장기요양보험은 서비스의 질뿐만 아니라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제도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고 있다. 결국, 사회서비스도 실질적 보편주의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 정부의 재정 지원 부족 탓이다.
결국 보편적 복지의 부실로 인해 사람들이 필요한 복지의 큰 부분을 시장에서 취득한다. 이렇게 탈상품화 수준이 낮은 것이 외환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양극화와 불평등의 확대 추세와 맞물려 민생 불안을 심화했다. 그러므로 이제 보편적 복지의 확충은 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보편적 복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물적 조건을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제공해 주고, 기회의 실질적 평등을 보장해 주며, 경제사회적 격차를 해소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우리 경제의 역동적 발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보편적 복지는 '연대의 제도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공통의 정서를 공유하는 것이므로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의 확충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 복지(사회보장)다. 소득 보장의 경우는 소득이 상실될 각종 사회적 위험에 처했을 때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통해 충분한 수준의 실질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아동 등의 취약한 인구집단에겐 조세 기반의 보편적 사회수당이 매달 현금으로 지급된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아동이나 노인·장애인 등의 취약한 인구집단이나 사회적 위험에 처한 생산연령인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산연령인구를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동일한 현금을 매달 지급하자고 한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은 각종 사회적 위험에 처했거나 복지 필요가 발생했을 경우 소득조사를 통한 선별 없이 누구라도 실질적 보편주의 원칙에 따라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보편적 복지(사회보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우파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
우파 기본소득의 뿌리는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는 1962년 마이너스 소득세(음의 소득세) 제안을 대중화했다. 그는 만약 빈곤을 경감하고 싶다면 가장 추천할만한 제도가 바로 마이너스 소득세라고 말했다. 밀턴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 산실인 시카고학파의 거두로 1980년 '레이거노믹스' 시대를 연 주역이다. 그는 1960~70년대를 전후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함께 복지국가 체제의 해체를 위해 노력했는데, 덩치가 커진 복지국가의 각종 복지 프로그램들을 마이너스 소득세(기본소득)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70년을 전후로 마이너스 소득세 아이디어는 유럽에 전파됐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성향의 우파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당시 유럽 사회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
우파 기본소득의 핵심은 복지국가를 대체하는 신자유주의 시장국가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자유 시장에서 초래되는 소득의 불평등은 그 자체로 빈곤 문제를 야기하고, 이로 인해 총수요 부족을 초래할 텐데, 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써 빈곤에 대처하고 시장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높임과 동시에 국가 복지의 해체를 통해 효율성 높은 작은 정부를 달성하자는 것이다. 우파 부분기본소득 입장인 김세연 전 미래통합당 의원이나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증세 없이' 기존의 정부 재정 512조 원 중에서 지출 구조조정으로 필요 재원 200조 원 모두를 마련하자는 쪽에 가깝다. 김종인 위원장이 갑자기 기본소득 논의에서 한 발을 빼는 것이나 김부겸 전 의원이 "국가 복지를 축소해 지급한 기본소득으로 사회보장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토록 하자는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모두 우파 기본소득이 가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성격 때문이다.
지난 30년 넘게 전 세계를 강타했던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도 기존의 복지국가가 기본소득으로 대체된 경우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실제로 그동안의 신자유주의가 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성장했던 복지국가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내부경쟁 등의 방안을 강구하거나 심할 경우 일부 프로그램의 민영화를 추진하긴 했어도, 국가복지 프로그램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할 생각은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보수 정치권에서 이런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렇게 될 경우 국가는 주로 국민 개개인의 계좌로 기본소득을 송금하는 일을 하게 되고, 재정의 한계로 인해 국방·치안이나 기본적인 교육·의료 등만 담당하게 될 것이다. 장차 4차 산업혁명시대를 신자유주의 시장국가 방식으로 맞을 수는 없는 일이다.
좌파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
좌파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역사가 길다. '공산당 선언'이 발표됐던 1848년 조제프 샤를리에는 <사회문제의 해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여기서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석 달에 한 번씩 획일적인 영토배당금(기본소득)을 지불하는데, 재원은 건물의 유무를 불문하고 모든 토지를 임대하여 거기서 나오는 지대로 충당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진보적 기본소득 주장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국가상여금 혹은 국민배당금이라는 이름으로,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전후 베버리지 보고서의 사회보장 원리가 복지국가의 전략으로 채택됨으로써 기본소득 주장은 영국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한편,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좌파(진보적) 기본소득 논의가 일었다. 제임스 토빈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이 논의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197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에 출마한 조지 맥거번의 선거 캠프에 합류해 기본소득을 공약에 포함시켰다. 당시 모든 미국인 개인에게 1년에 1000달러를 한 번 지급하자는 것이었는데, 이 금액은 당시 1인당 GDP의 약 16%였다. 1972년 7월 맥거번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지만 8월 말 논란이 컸던 기본소득 공약을 스스로 철회하고 말았다. 이후 미국에서 진보적 기본소득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986년 기본소득유럽네트워크가 창립됐고, 2004년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가 성립됐다.
우파와 달리 좌파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이 주장한 좌파 기본소득은 당대의 국가복지를 폐지하는 것 없이, 추가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지금 우리나라의 기본소득 논의에 대입해보면, 좌파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월 32만 원짜리 부분기본소득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재원 200조 원 중에서 100조 원은 증세를 통해 얻고, 나머지 100조 원은 정부 재정의 지출 구조조정으로 마련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완전이든 부분이든, 지금까지 기본소득은 어떤 나라에서도 도입된 전례가 없다. 이 담론의 긴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소득은 지금까지 제도 정치권의 좌·우파 모두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본소득은 좌우를 불문하고 실체 없는 유령일 뿐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알래스카를 기본소득 실시 사례로 드는 경우가 있다. 알래스카 배당금(기본소득) 제도는 1982년 처음 시행됐는데, 1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누구든 동일 액수의 연간 배당금을 받을 자격을 갖는다. 알래스카의 천연자원에 근거한 '알래스카 영구 펀드'의 투자 수익을 배당하는 것이므로 경제 상황에 따라 지급액이 달라진다. 지급액은 처음엔 연간 400달러 수준이었지만 2015년엔 2072달러로 높아져 당시 알래스카 1인당 GDP의 3%에 근접했다. 이는 부분기본소득인 GDP의 10~15%에 비하면 적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조차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래스카가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그리고 알래스카는 하나의 지역이지 국가 단위가 아니다.
2016년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최초의 국가가 탄생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성사되진 않았다. 정명(正名)으로서의 기본소득 제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가 스위스의 국민투표였다. 스위스에서 충분성의 원칙까지 모두 갖춘 기본소득 제도의 원형에 해당하는 모델이 시민운동단체에 의해 제기됐고, 스위스의 참여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2016년 6월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매달 18세 이상 모든 성인에게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 원), 어린이·청소년에게 650스위스프랑(약 78만 원)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국민투표 결과, 유권자의 76.7%가 반대해 부결됐다. 특히 정치인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복지국가의 주요 정치 세력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기본소득을 거부한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따져보자.
첫째,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에 비해 복지 효과가 현저하게 작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사회보장) 원리를 거부하고 생산연령인구 모두에게 무조건적으로 동일하게 현금을 나눠준다. 보편적 복지(사회보장)는 소득과 재산이 많든 적든 누구라도 실업·질병·산재·은퇴·출산·육아 등의 사회적 위험(또는 필요)에 처했을 때 사회안전망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는 것이다. 가령, 실업의 경우 보편적 고용보험의 실업급여가 충분히 지급된다. 우리나라도 월 180만~198만 원을 지급한다. 선진국들은 실업급여의 소득대체율이 훨씬 높다. 그런데 GDP의 10%짜리 부분기본소득의 경우, 100조 원 증세에도 불구하고(100조 원의 재정 구조조정 추가) 지급액이 1인당 월 32만 원에 불과하다. 이 돈으론 필요 충족에 크게 부족하다. 월 180만~198만 원을 받는 고용보험의 올해 연간 재정 규모는 약 10조 원이다. 그런데 연간 재정 규모 200조 원의 기본소득은 지급액이 1인당 월 32만 원에 그친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위험에 처하거나 추가적 필요가 발생한 사람뿐만 아니라 고소득자를 포함한 생산연령인구 모두에게 소액의 현금을 똑같이 지급되므로 필요 충족의 복지 효과가 작다.
둘째,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에 비해 경제 효과가 현저하게 작다. 보편적 복지(사회보장)는 각종 사회적 위험에 처할 때라야 급여체계가 작동해 충분한 지원이 이뤄지는 반면에, 기본소득은 언제나 모두에게 똑같이 지급된다. 즉, 보편적 사회보장은 경기 침체(하강) 때 한계소비성향이 큰 실업자와 경제적 약자들이 충분히 소비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강화하는 데 비해, 기본소득은 경기 순환과 무관하게 언제나 생산연령인구를 포함한 모두에게 같은 금액을 지급한다. 가령, 경기 침체로 인해 실업률이 오르고 빈자가 많아지면 정부의 고용보험과 공공부조 등이 작동해 정부 측에서 가계(시장)로 재원이 이전돼서 경기 활성화를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게 된다. 반대로 경기가 활성화됐을 때는 실업률이 낮아지고 빈곤의 크기가 작아지므로 고용보험과 공공부조의 지출은 줄고 정부의 세금 수입은 늘어나므로 인플레이션 압박이 줄어든다. 이것이 바로 사회보장의 경기조절 기능이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경기의 침체나 활성화와 무관하게 언제나 같은 금액을 생산연령인구 모두에게 나눠주므로 소비 진작 효과가 작고 경기조절 기능은 아예 없다.
셋째,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에 비해 소득재분배 효과가 작다. 기본소득 도입으로 소득재분배가 개선된다는 주장이 있다. 얼핏 보면, 누진적으로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어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소득재분배 효과가 더 커질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누진적 증세를 추진해야 한다. 이는 기본소득이나 보편적 사회보장이나 동일하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세금 징수로 인한 소득재분배 효과가 1이라면 사회보장의 복지 급여를 통한 소득재분배 효과는 최대 3.12라고 한다. 게다가 부분기본소득 지급에 사용될 연간 200조 원 중에서 100조 원은 기존의 복지 구조조정을 통해 마련한 것인데, 사회적 위험(실업이나 빈곤 등)에 처한 경제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받던 100조 원의 공공복지를 회수해 부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똑같이 배분하는 것이므로 기본소득은 역진적 재분배를 초래한다. 결과적으로 어렵게 마련한 200조 원의 재정을 월 32만 원짜리 부분기본소득으로 나눠주는 것보다 증세로 마련된 재정을 보편적 사회보장에 투입하는 것이 소득재분배에 훨씬 유리하다. 이는 사회적 위험과 복지 필요에 처할 확률이 경제사회적 약자에게서 더 높고, 이들에게 주로 보장과 지원이 집중되는 보편적 복지(사회보장) 효과 때문이다.
가짜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
우리 사회에서 기본소득 담론에 어긋나는 가짜가 매우 많다. 편의상 이들을 통칭해 '가짜 기본소득'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재명 지사가 대표적이다. 그는 경기도 청년기본소득을 시행했다. 청년기본소득 조례(2018년 11월)에 근거해 경기도에 거주하는 만 24세 청년 모두에게 지역화폐로 분기마다 25만 원씩, 연간 총 10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또 지난 4월에는 재난기본소득 조례(2020년 4월)를 통해 도민 모두에게 1인당 10만 원씩 지급했다. 최근에는 경기도에 거주하는 농민 모두에게 1인당 일정 금액(가령, 월 5만 원)의 지역화폐를 지급하는 농민기본소득을 도입키로 결정하고, 관련 용역을 공고했다고 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것들 모두가 가짜 기본소득이다. 경기도의 청년기본소득은 월 8만3000원짜리인데, 만 24세 청년에게만 지급한다. 이는 충분성의 원칙에도 어긋나지만, 일반적으로 청년이 18세부터 34세까지라고 한다면 24세 때만 지급하는 현금을 청년기본소득이라고 부르면 곤란하다. 더 중요한 것은 생산연령인구를 연령별로 차별하는 것은 기본소득의 보편성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청년에게 기본소득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형용 모순이다. 아동의 경우처럼 일정한 조건의 청년이 인구학적으로 경제사회적 약자라면 보편적 사회수당을 지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선진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학생수당을 지급하거나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과도기의 청년들을 인구학적 약자로 간주해 취업 준비기의 청년수당 프로그램을 도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지국가의 사회수당 프로그램이며, 기본소득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결국, 이재명 지사 등의 청년기본소득은 가짜 기본소득이다.
이재명 지사는 경기도민 모두에게 10만 원의 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이 돈이 그의 주장대로 기본소득인지 따져보자. 경기도가 지급한 10만 원은 기본소득의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의 원칙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정기성과 충분성의 원칙에는 어긋난다. 재난 대응을 위한 일시적 현금 지급은 매달 지속적으로 지급된다는 정기성의 원칙에 위배된다. 또 10만 원을 12개월로 나눈 월 8300원은 기초생계가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금액(부분기본소득 월 32만 원, 완전기본소득 월 80만 원)이 지급돼야 한다는 충분성의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지사의 ‘재난기본소득’은 정명이 아니다. 가짜 기본소득이다.
이재명 지사가 조만간 도입하겠다는 농민기본소득도 마찬가지로 정명으로서의 기본소득이 아니다. 거론되는 금액(월 5만 원)이 부분기본소득에 견줘보더라도 지나치게 적고, 무엇보다 생산연령인구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는 기본소득의 보편성 원칙에 어긋난다. 농민기본소득도 결국 가짜 기본소득이다. 취업을 앞둔 일부 청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정 지역의 농민이라는 인구집단 전체를 경제사회적 약자로 간주한다면 이들에게 보편적 사회수당을 지급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농민에게 지급되는 월정 금액은 농민기본소득이 아니라 복지국가의 소득 보장 제도에 속하는 사회수당 프로그램의 하나인 농민수당으로 명명되는 게 옳다. 결국, 이재명 지사가 추진하려는 농민기본소득도 가짜 기본소득이다.
이재명 지사가 페이스북으로 제안한 "증세나 재정건전성 훼손 없는 기본소득"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해 연 20만 원으로 시작해 매년 조금씩 증액하여 수년 내에 연 50만 원까지 만들면 연간 재정 부담은 10~25조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반회계예산 조정으로 이 재원을 만들 수 있으므로 증세 없이 기본소득을 도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럴 경우, 5200만 국민에게 매달 나눠줄 현금이 푼돈이라는 게 문제다. 그에 따르면, 첫해의 지급액은 월 1만6000원씩이고 수년이 지나도 월 4만 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후에는 증세를 하자는 것이므로 '증세 없는 기본소득'은 여기까지다. 월 1만6000원은 부분기본소득인 월 32만 원의 5%에 불과하고, 수년 후 받게 될 월 4만 원은 부분기본소득인 월 32만 원의 12.5%에 그친다. 도수 20% 알코올을 소주라고 부른다면 1% 알코올은 가짜 소주임에 틀림이 없다. 결과적으로 이재명 지사가 제안한 '증세 없는 푼돈 기본소득'도 가짜 기본소득이다.
최근 기본소득을 둘러싼 미래통합당 내 혼선이 일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미래통합당이 부담스러운 우파 기본소득 대신에 청년기본소득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국민의당과 민주당을 포함한 여야 정당들이 대선을 앞두고 청년 표를 얻을 전략으로 앞 다투어 청년기본소득을 거론할 가능성 크다. 실제로 일정 연령대의 청년들에게 현금을 지급한다면, 이것 역시 기본소득의 보편성 요건을 위배한 것이므로 가짜 기본소득이 된다. 그러므로 청년기본소득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선 안 된다. 다만, 선진국들의 경우처럼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 취업 패키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청년수당을 도입하는 것이라면, 이는 기본소득과 무관한 복지국가의 사회수당 프로그램의 하나가 된다.
'전 국민 대상'의 2차 재난지원금 지급을 반대하는 이유
지난 2일, 이재명 지사는 전 국민에게 20만 원씩 2차 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 위해 3차 추경 예산에 약 10조 원을 추가 편성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는데,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왜곡된 명칭이 이들 기사에 여러 번 등장했다. 재난을 틈타 기본소득을 확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주요 언론들을 통해 그대로 관철되고 있고, 이로 인해 국가 정책이 왜곡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위기감이 존재한다. 재난지원금은 말 그대로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지원이 가도록 해야 하고, 당연히 옳은 적극적 재정 정책이다. 재난지원금은 전 국민이 아니라 재난으로 실직이나 유의미한 소득감소 등의 어려움을 겪거나 빈곤의 위험에 처한 분들에게 더 두텁게 지원과 보장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소득 상위 20~30%에게는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정부의 1차 재난지원금이 상위 소득자의 자발적 기부를 통한 환수를 전제 조건으로 모든 가구에게 지원됐는데, 이미 98% 이상에게 지급됐다. 재난으로 곤경에 처한 경우가 아님에도 상당수가 재난지원금을 받아갔던 것이다. 1차 재난지원금 정책은 지난 4월 총선을 열흘 정도 앞두고 여야 정당들의 공약 경쟁 때문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우리 사회가 치른 정치 비용으로 간주하더라도 향후에는 달라야 한다. 이후 재난지원금 정책을 다시 사용할 경우 전체 국민이 아니라 소득 상위 20~30%는 배제하고, 소득 하위 50%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계층에게 더 두텁게 지원하는 게 옳다. 이때 확장 재정 정책의 기조 하에 재정적 보수주의를 극복하도록 해야 한다.
재난으로 인해 실직과 소득감소 등의 피해를 입은 분들(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지원과 보장이 가도록 하고, 또 경기 진작을 위해 추가로 소득 하위 계층에게 현금 지원이 더 가도록 하는 것이 복지 효과와 경제 효과가 크고, 이것이 보편적 사회보장의 원리에 더 잘 부합한다. 소득 상위 계층은 당장 복지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게 가는 지원금은 복지 효과가 없다. 또 소득 상위 계층은 한계소비성향이 낮기 때문에 추가적 소비를 통한 경기 진작 효과인 경제 효과도 낮다. 반대로 소득 하위 계층에게 가는 재난지원금은 복지 효과와 경제 효과가 매우 크다. 그러므로 나는 이재명 지사의 전 국민 대상 재난지원금 제안을 반대한다.
사각지대와 빈곤 해소, 기본소득이 해법인가?
모든 국민에게 월 32만 원씩 부분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각지대와 빈곤이 해소돼 송파 세 모녀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될까?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사람 중의 일부는 이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진실은 전혀 다르다. 1인당 월 32만 원은 국민기초생활보장의 1인 가구 현금 지원액 70~80만 원에 비하면 절반도 안 된다. 그러므로 GDP의 10%인 연간 200조 원을 쓰는 부분기본소득을 실시한다고 해도 선별적 복지인 공공부조(국민기초생활보장)는 여전히 작동할 수밖에 없다. 다만, GDP의 25%인 연간 500조 원을 쓰는 완전기본소득을 실시한다면 선별적 복지인 공공부조는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공공부조를 없애자고 정부 재정이 512조 원인 나라에서 추가로 500조 원을 기본소득으로 나눠줄 순 없는 일이다.
사각지대와 빈곤을 걱정하는 분들은 송파 세 모녀의 경우처럼 소득 하위 계층이 빈곤층으로 추락하는 시점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기존의 복지국가로는 막아내지 못했으므로 기본소득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월 32만 원짜리 기본소득은 이 경우의 해법으로는 부족하다.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당시 송파 세 모녀는 근로를 통한 자립적 경제생활을 이어가는 데 실패했고, 빈곤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공공부조 수급자도 아니었다. 송파 세 모녀는 복지 사각지대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들은 소위 '비수급 빈곤층'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대빈곤자들 중 상당수는 절대빈곤에 가깝지만 공공부조의 제도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각지대가 넓은 것이다.
상대빈곤층, 그중에서도 특히 비수급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논리적 방안으로 크게 두 갈래의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공공부조인 국민기초생활보장의 포괄 범위를 크게 확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로를 통한 자립적 경제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경제와 복지 제도를 유기적·통합적으로 잘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자는 선별적 복지인 공공부조를 통해 빈자들을 더 넓게 보호하자는 것이고, 후자는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 체제를 확립해서 보장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동시에 경제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을 최소화함으로써 빈자의 비중 자체를 줄이자는 전략이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이미 후자의 길을 제도화했다. 우리도 이 길을 향해 지난 10여 년간 달려왔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보편적 사회보장의 길을 포기하고 연간 재정 200조 원으로 월 32만 원씩의 기본소득을 모두에게 나눠주자고 주장한다.
보편적 사회보장의 중요성을 송파 세 모녀 사례로 설명해보자. 어머니 박 씨의 남편은 12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녀는 당뇨와 고혈압에 시달렸고, 만화가를 꿈꾸었던 차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두 딸은 신용불량자여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고, 이들 가족의 생계는 식당 일을 하던 엄마 박 씨가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박 씨가 자살 한 달 전에 넘어져 오른쪽 팔을 다치면서 식당 일을 못하게 됐다. 그때부터 이 집의 소득은 단절됐다. 두 딸은 소득이 없었으므로 엄마 박 씨가 식당 일을 해서 벌던 월 150만 원 남짓이 이 가구의 총 수입이었다. 이 정도의 소득이면 절대빈곤선을 넘나드는 상대빈곤 가구에 속한다.
만약 송파 세 모녀가 보편적 사회보장이 제대로 작동하는 복지국가의 국민이었다면 어땠을까? 빈곤으로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대 사회보험이 작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 박 씨가 일하던 식당이 산재보험에 가입했을 것이고, 산재보험 급여로 평소 받던 임금의 약 80% 정도를 수령했을 것이다.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었더라도 당시 월 150만 원 정도는 실업급여로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식당들 대부분이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녀는 보편적 국민건강보장 제도를 통해 당뇨와 고혈압에 대한 치료와 건강관리를 제대로 받았어야 했다. 차녀는 만화가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당연히 월정 수당을 받으면서 교육과 직업훈련의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는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 대상을 획기적으로 확대해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고용보험의 적용 대상을 특수 형태 근로종사자 및 프리랜서 예술인으로 확대하고, 보험료 지원 등을 통해 자영업자의 가입을 활성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런데 현재까지 여전히 전체 취업자의 절반 정도만 고용보험에 가입해 있다. 미가입자들은 주로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 그리고 저임금 근로자들이다. 임의가입 대상인 영세 자영업자의 대부분도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은 경제사회적 약자들이다. 1차 실업 안전망인 고용보험의 사각지대 문제가 심각하다. 고용보험 미가입자를 위한 2차 실업 안전망인 한국형 실업부조(국민취업지원제도)가 내년 1월 1일부터 실시되지만 지원 대상이 협소하고 금액도 작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정부 재정의 한계로 인해 대상과 지원액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고용 지원과 실업의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구조적 빈곤에 대응하는 데는 올해 고용보험 재정 규모인 연간 10조 원에 더해 20조 원이 추가로 투입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부분기본소득 옹호자들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10배나 되는 연간 200조 원을 고소득자를 포함한 국민 모두에게 월 32만 원씩 나눠주자고 주장한다.
복지 강화와 함께 가는 기본소득 도입은 가능한가?
앞서 살펴봤듯이 기본소득은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에 비해 어느 것 하나 장점이 없다. 그러자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기본소득의 도입이 기존의 사회보장제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차원에서 추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인들도 기존 제도의 대체가 아닌 보완과 추가 차원의 기본소득에는 별 저항감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우호적인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파 기본소득에는 강력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만, 가짜 기본소득이나 좌파 부분기본소득에는 별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는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다. 기존 복지(사회보장)의 강화와 기본소득은 함께 갈 수 없다. 사실상 언제나 대체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연간 10~25조 원의 재정으로 가짜 기본소득을 도입한다면, 5200만 국민 모두에게 매달 1만6000~4만 원씩을 나눠줄 수 있게 된다. 연간 10~25조 원을 증세 없이 일반회계예산의 구조조정으로 마련한다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하게 될까? 합리적 결정을 내린다면 당연히 모두에게 푼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 고용안전망의 확충 등에 이 소중한 돈을 쓰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공공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11%로 OECD 평균(20%)의 55% 수준이다. 선진 복지국가의 25~30%에 비하면 거의 3분의 1 수준이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국제적 기준에 이렇게 미달하는 부분은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제도가 실질적 보편주의를 이루지 못한 탓이다. 즉 거대한 사각지대와 낮은 보장성 때문인데, 이는 사실상 정부 재정의 부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지출 구조조정이든 증세든 간에 연간 10~25조 원의 재정이 추가로 생기면 당연히 사회보장의 실질적 보편주의 실현을 위해 투입해야 한다. OECD 평균 수준의 조세부담률에 이르도록 단계적인 증세를 통해 최대 연간 100조 원까지 마련한다면, 이 재원은 부분기본소득이 아니라 보편적 사회보장과 사람에 대한 적극적 투자를 통해 포용적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투입해야 한다. 결국, 보편적 복지의 확충과 적극적 복지 투자는 기본소득 도입과 함께 갈 수 없으며, 기본소득 도입은 보편적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일자리 감소, 기본소득이 대안인가?
4차 산업혁명은 초지능과 초연결을 특징으로 하는 디지털 경제 혁명을 말한다. 이것이 현실화할 경우 기존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일자리 수의 전체적인 감소가 일어날 개연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기존의 세 차례 산업혁명에서는 일자리 수가 꾸준히 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미래에도 일자리 수가 크게 감소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로봇 등의 밀집도가 높다고 해서 실업률이 무조건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기업과 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면 관련 분야의 일자리가 더 많이 파생되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래에는 일자리의 구성이 바뀔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간 숙련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대신에 고임금·고숙련의 일자리와 서비스 쪽의 저임금·저숙련 일자리가 늘어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미래의 상황에서 기본소득 도입이 올바른 해법일까? 부분기본소득이든 완전기본소득이든 기본소득을 도입할 경우, 국가의 역할은 경제적 토대의 변화에 따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포함해 국민 모두에게 매달 기본소득을 송금하는 일에 주로 국한될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기본소득 지급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 능력이 크게 제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사람에 대한 투자를 포함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등의 적극적 복지를 펼 여력을 가지기 어렵게 되고, 사회 정책적 대응력을 상실하게 된다.
미래에는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제하고 기본소득이나 나눠줄 것이 아니라 한국판 뉴딜 등을 통해 기업이 더 높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제대로 된 교육과 직업훈련을 통해 국민이 변화하는 노동시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중심으로 자동화된 생산 체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 또 고임금·고숙련 쪽의 노동 수요에 사람들을 적응시키는 데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이게 바로 사람에 대한 투자이며, 사회구성원의 물고기 잡는 능력을 키워주고 노동시장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복지국가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발생하는 각종 사회적 위험(실업, 전직, 재해)에는 복지국가의 보편적 사회보장 원리에 따라 소득을 보장하면 된다. 이런 경로는 기본소득과 완전히 다르다.
장차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복지국가의 적극적인 사회 정책적 대응은 일자리 정책과 관련해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래에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는 서비스 분야의 저임금·저숙련 일자리를 재정 능력을 가진 복지국가가 개입해 적정 일자리로 조정해줘야 한다. 즉, 사람의 능력을 키워주는 사회서비스 분야와 직업훈련 등에 정부의 지출을 크게 늘려야 한다. 이것이 기본소득을 모두에게 나눠주는 것보다 경제 효과가 압도적으로 크고,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는 방식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정부는 더 나은 일자리 창출과 고용보장에 최선을 다하는 포용적 복지국가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부 역할의 제약을 초래할 기본소득은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이럴 경우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 속에 대다수가 수동적이고 불행한 처지로 내몰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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