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안타깝다. 이상이 교수가 최근에 다시 한 번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국제신문>에 게재하였는데(☞바로 보기), 약 3년 전에 <프레시안>에 게재했던 칼럼과 제목과 내용이 대동소이하다(☞관련기사 : 기본소득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 교수가 기본소득의 개념에 대해 오해하고 있으며, 몇 가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관련기사 : 이재명의 기본소득이 가짜라니요?).
그런 마당에 이 교수는 여전히 그러한 오해와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같은 비판을 반복해야 하는 필자의 심정이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것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기본소득 논의가 발전적으로 전개되기 어려울 것 같기에, 무슨 스토커라도 되는 듯한 민망함을 무릅쓸까 한다.
먼저 이 교수가 여전히 오해하고 있는 기본소득의 개념부터 보자. 이 교수는 기본소득의 내용을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 정기성, 그리고 충분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를 비롯한 거의 모든 논자들은 기본소득의 다섯 가지 특징으로 앞의 네 가지에 더하여 '현금성'을 든다. 충분성을 거론하는 사람이 극소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 교수가 이런 국제적인 합의를 도외시하고 충분성을 포함한 의도는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일단 '기본소득은 나쁜 놈'이라는 전제부터 깔고, '모두에게 충분하게 주는 것은 힘들 테니 충분성을 개념에 포함한다', 그리고 나서 '거 봐라, 기본소득은 턱도 없는 거야'라며 두들겨 팬다. 이 교수는 자기만의 잣대로 남들을 비판하지는 마시라.
기본소득의 개념에 대해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많은 경우 위의 다섯 가지 특징을 갖추면 다 같은 기본소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기본소득은 결코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빵이라고 해서 다 같은 빵이 아니듯이, 기본소득도 현실적인 모습은 여러 가지 모델로 나타난다. 지급대상의 범위(연령대별 구분), 기존 사회보장의 대체 여부, 재원의 성격, 그리고 금액의 수준 등에 따라 여러 모델이 구성될 수 있으며, 좌파적으로도 우파적으로도 구성될 수 있다(자세한 것은 지난번 비판 참조). 이때 금액의 수준, 즉 충분성이 모델의 유형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즉, 금액이 충분할 경우 '완전기본소득', 불충분할 경우 '부분기본소득'으로 모델의 유형이 구분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 교수가 "충분성은 '완전기본소득'의 핵심 요건"이라고 규정한 것은 옳다. 그렇지만, 빵과 붕어빵이 다르듯이, 기본소득과 완전기본소득은 같은 것이 아닌 만큼, 충분성이 기본소득의 핵심 요건은 아니다.
정말 어안이 벙벙한 것은 충분성, 즉 완전기본소득을 위해서는 "국내총생산(GDP)의 25%를 똑같이 나눠" 주어야 한다는 이 교수의 주장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이런 규정은 정말 금시초문이다. 제발 그 근거 좀 밝혀주기 바란다.
개념의 오해에 대해서는 이 정도 설명으로 마무리하자. 사실 더 안타까운 것은,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학자로서 왜 이렇게 기본적인 사실을 왜곡할까 하는 점이다.
첫째, 이 교수는 "완전이든 부분이든,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기본소득은 도입된 전례가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이미 1982년부터 40년 가까이 석유수입에 근거하여 '영구기금배당(permanent fund dividend)'이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무조건적, 개별적, 정기적 현금이 지급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의미의 기본소득이 아닌가? 부분기본소득이기는 하지만.
둘째, 이 교수는 "2016년 스위스에서 완전기본소득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아니다. 국민투표에 부쳐진 것은 단지 '정부는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고 공적 삶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재원조달 방안은 법률로 정한다'는 3개 조항을 헌법에 넣을 것인지 여부뿐이었다. 이 교수가 완전기본소득이라고 제시한 성인 대상 월 2500프랑(약 300만 원)은 스위스의 기본소득네트워크인 Basic Income Earth Network(BIEN) – Switzerland가 제시한 하나의 모델일 뿐이었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은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에 관해 부연하자면, 이 교수는 이 국민투표가 76.7%의 반대로 부결된 것을 절대적 근거로 삼아 나름의 반대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사회의 변화·발전을 도외시한 과거에 고정된 시각이다. 2019년 6월 갤럽 조사에 의하면, 영국 국민의 77%, 캐나다 국민의 76%, 미국 국민의 43%가 기본소득을 지지했으며(<그림 1>), 불과 몇 주 전인 5월 초 옥스퍼드대학교의 애쉬(Timothy Garton Ash) 교수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유럽인의 71%가 기본소득 도입을 지지했다(<그림 2>). 상황이 이렇게 발전했으면, 이제 이 교수는 찬성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셋째, 기본소득보다 다른 사회안전망이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교수는 "실업의 경우 실업급여가 충분히 보장된다. 우리나라도 월 180만 원이 넘는다"고 쓰고 있다. 올해 3인 가구 최저생계비 232만 원에 비추어볼 때 180만 원이 결코 많은 것도 아니지만, 그마저도 제도상 구직급여의 상한액(1일 6만6000원 × 30일 = 198만 원)일 뿐이다. 실제 지난 3월 1인당 구직급여 평균액은 월 148만 원에 불과한데(고용행정 통계로 본 '20.3월 노동시장 동향), 과연 충분히 보장되고 있는가?
사실 왜곡에 대한 교정도 이 정도로 하자. 이 밖에 기본소득이 복지효과, 경제효과, 재분배효과 측면에서 복지국가의 사회보장보다 못하다는 것이 이 교수의 주된 기본소득 반대 이유인데, 그에 대해 반박할 논거들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긴 학술적 논의가 필요하기에 지면 관계상 생략하고, 다른 토론의 장을 기대한다. 대신 이 교수가 '기본소득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교수는 근본적으로 기본소득을 복지정책으로 간주하면서 기존의 사회보장과 비교하여 효과가 작다고 (부당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기본소득은 원리적으로 복지정책도 경제정책도 아닌 '인간으로서의 권리'이다. 즉, 기본소득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을 가질 권리, 또 개인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주어진 공유자산(토지, 환경 등)에 대한 정당한 몫으로서 모두가 갖는 천부적 권리인 것이다. 물론 복지정책적, 경제정책적 효과는 당연히 수반되지만, 효과의 크기를 논하기 전에 권리의 보장이 우선이다. 마치 모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듯이, 기본소득은 당연히 도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본소득이 권리이기 때문에 그 재원에 대해서도 무작정 100조, 200조 증세를 논할 것이 아니라 기본소득의 원리에 맞는 세원을 발굴하는 것이 우선이다. 예컨대 토지(와 기타 천연자원) 자체는 누군가의 노동을 통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소유자가 개간/개발에 투여한 자신 노동의 대가 이상으로 그 수익을 전유하고 있다. 따라서 토지 수익으로부터 투여된 노동의 대가를 공제하고 나머지는 인간 모두의 몫으로 징수하여 모두에게 분배하는 것이 정의롭다. 이것이 바로 이재명 지사의 기본소득형 국토보유세인데, 이 교수는 "국토보유세에 근거한 월 3만 원 지급 구상도 기본소득과 무관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이 교수가 기본소득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밖에 환경 또한 인류 공동의 자산이므로 그 파괴에 대한 징벌로서 환경세(생태세)를 징수하여 재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인류가 공동으로 만드는 빅데이터로부터의 수익을 독점하는 거대 IT 기업들에 대한 과세(데이터세, 인공지능세)도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이 교수가 '기본소득은 권리'라는 근본 원리부터 수용한다면, 좀 더 생산적인 논쟁이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본소득은 가짜"라느니, "이재명 경기 지사의 구상은 최악"이라느니 하는 감정적 언사를 지양하고, 반대를 하더라도 왜 이 권리가 부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차분하게 논지를 전개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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