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선거판의 '아싸'
선거는 국민의 대표를 뽑는 일이다. 그런데 대선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거에서 국민은 무엇보다 지역민으로 체현된다. 그래서일까. 16년 차 유권자임에도 같은 선거구에서 두 번 이상 투표해본 기억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선거철마다 쉽게 시큰둥해진다. 공보물에 적힌 각종 지역 개발 공약과 지원 약속들을 보면 분명 좋은 이야기는 맞는 것 같은데 사실 아니면 또 어떤가 싶다. 당선된 후보가 공약을 잘 지켰는지를 따져보고 심판할 다음 선거일까지 계속 이 집에 살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런데 이게 단지 나만의 개인적인 사정일까? 어쩌면 진학과 취업, 더 저렴한 월세를 찾아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하는 청년층이 마주한 일반적인 상황은 아닐까?
아무렇게나 훌쩍 삶의 터전을 옮길 수 있다는 게 자유로운 청춘의 특권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결국 청년은 어디서도 '뜨내기'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선거철에는 그 괴리감을 더욱 크게 맛본다. 마치 떠들썩한 명절에 혼자 자취방에 남은 기분이랄까. 청년은 지역으로 분할된 선거제도 하에서 '찐아싸'다. ○○부녀회, ○○상인연합회, ○○노인회, ○○재개발추진위원회 등등에 몸담은 지역의 '핵인싸'들이 도열한 후보들의 손을 맞잡는 동안 어떤 청년들은 대학 기숙사와 청년주택이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착공조차 하지 못하는 현실에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번 총선에 처음 도입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의 대표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할 수 없었던 청년을 비롯한 정치적 소수자들이 감내해야 했던 무기력을 조금이나마 씻어 내줄 '단비'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이후의 경과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도둑맞은 청년'?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다시 '청년 정치'의 바람이 불고 있으니 염치없는 일이다. 이번엔 보수 세력 발(發)이다. 청년은 한국 정치에서 정치적 대표성은 거의 없으나 정략적 효용성은 기이할 정도로 비대한 존재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그 정략적 행태가 반복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보수야당이 참패하자마자 보수언론에서는 청년을 중심으로 한 보수의 체질 개선을 들고 나왔다. 그들은 '젊은 보수'가 비전과 패기로 당의 활로를 열어야 한다거나(<조선일보> 4월 22일 자 사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앙마르슈'를 소개하며 '젊은 피'의 수혈을 주장했다(<조선일보> 4월 23일 자 칼럼).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한 김종인은 거기에 보조를 맞추듯 다음 대선에선 '70년대생 경제통'을 후보로 옹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년'을 그 핵심에 놓은 건 이례적이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청년에 대해 값을 높이 쳐주었으니 마냥 고맙다고 해야 할까? 그러기엔 뭔가 마뜩잖은 뒷맛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대학가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을 패러디한 '도둑맞은 아싸'가 화제가 되고 있다. 박완서의 그 소설에는 방학 동안 '위장 취업'한 어느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당시의 '의식 있는' 학생들처럼 노동운동을 위해 투신한 건 아니었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에게 세상의 쓴맛을 가르치려는 부모에 의해 '가난 체험'을 하러 내려온 것이었다. 그와 동거하던 여성 노동자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난 후 이렇게 말한다.
'아싸'는 원래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주변화하여 낮춰 부르는 말인데 언젠가부터 '인싸'들이 '아싸' 흉내를 내면서 자신들 고유의 정체성을 한낱 유희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인식과 그에 대한 분노가 '도둑맞은 아싸' 논란의 핵심이다. 그런데 보수 야당과 언론의 음험한 합작 앞에서 '청년' 역시 그처럼 도둑맞을 위기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진정한 '청년 정치'를 위하여
하지만 당면한 정치적 확장성의 위기를 청년이라는 손쉬운 알리바이로 돌파하려는 보수 세력의 안일한 셈법이 촛불 이후 높아진 국민들의 눈을 현혹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른바 '젊은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의 인식과 품격이 여전히 저열하고 경직되어 있음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이쯤에서 우리는 정략을 떠나 '청년 정치'를 요청하는 목소리의 존재 근거를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젊음이 곧 개혁을 보증해주는 건 아니라거나 세대론엔 실체가 없다는 말은 차라리 속 편한 일반론에 가깝다. 그런 일반론에 기대 '청년 정치'를 가뿐하게 기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모순을 밝히고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청년 정치'라는 '할당된 몫'이 어떤 긍정적인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타진하는 일이다.
관련해서 청년 여성후보를 비례명부 앞 순번에 배치한 이번 정의당의 선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그 청년 여성후보들 때문에 정의당이 총선에서 참패했다고 말하지만 정의당은 거대 양당의 구심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했던 이번 선거에서 10%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게임업계 해고노동자 출신 20대 국회의원과 대학을 중퇴한 30대 페미니스트 영화감독 국회의원을 얻게 되었다. 물론 류호정은 단병호가 아니며, 장혜영은 봉준호가 아니다. 그러나 류호정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마주하는 불안정한 노동 현실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장혜영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돌봄을 둘러싼 정치적 쟁점을 의제화하는 데 그 어떤 국회의원보다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와 판검사 출신이 차고 넘치는 국회에서 이 두 청년 의원은 어쩌면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보잘것없음'을 통해 우리 사회는 이제껏 정치의 무대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존재들을 더욱 '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시각장애인 출신 김예지 당선자의 안내견 '조이'를 통해 이제껏 국회가 시각장애인 국회의원들이 안내견을 데리고 회의에 들어오는 걸 관행적으로 막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청년 정치'는 돈도 빽도 없는 약자들의 정치적 증명을 위해 우리 사회가 마련한 하나의 사다리일 뿐 모든 걸 누려온 보수 세력이 자신들의 간판을 개비하기 위해 소모하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청년 정치'를 준별하는 우리의 기준 역시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재현되지 못하고 대표되지 못하는 삶의 문제를 끊임없이 가시화하고 의제화하는가 아니면 젊음을 내세워 제 영토의 획득에 골몰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더 많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대의/재현하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 어떻게 나설 것인지 여부도 진정한 '청년 정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 중 하나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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